♠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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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축사 대웅전과 만장봉(萬丈峯) |
천축사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
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여래상,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
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원
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인데,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인다.
청동불/보살군상에서 1굽이를 돌면 북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
내 뒷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
(後光)이 되어준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아담한 석조(石槽)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란 물
을 담아두는 돌통으로 높은 산중이라 물을 아끼기 위해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시려
면 졸고 있는 수도꼭지를 반드시 움직여야 된다. (가뭄과 수질 문제로 물 섭취가 어려울 수도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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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불/보살군상의 위엄 |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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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 |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로 자욱한 승탑(부도)이 옥개석(屋蓋石) 등 일부만 남은 채 측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땅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으로 연꽃잎을 비롯하여 사
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는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며, 그 옆에는 오래된 승탑의 옥개석이 덩그러니 놓여져 동병상
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천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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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뚜껑(옥개석)만 남은 승탑
그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 연등으로 머리를 가린 독성각(獨聖閣)
2002년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
만장봉 동쪽 자락에 안긴 천축사는 도봉산 서울 구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이다.
이 절은 의
상대사(義湘大師)가 673년에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도를 닦다
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하여 제자를 시켜 물이 나오는 곳에 암자를 짓게 하니 맑은
샘물이 나
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했다고 하며,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의상은 문무왕(文武王)의 허가를 받아 부석
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서라벌 왕경(王京)에 머물면서 화엄종(華嚴宗) 보급에
힘
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
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 조선
태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뚜껑이 열려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
에게 던져주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라 직접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했는데, 고려 후기
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
王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을 하였고,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다.
1862년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
량을 희사했으며,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
년에 화주
성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과 신중탱,
지장탱을 조성했으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했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
泰)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바
로
그 시절에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이 지어졌다. 1959년에는 주
지 용태가 불사를 벌였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
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의 주요 비구니 사찰이자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수행공간
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도가 아주
최상급이
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 및 복장유물,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293호), 목조석가삼존불, 마애사리탑 등 지방문화재 4점과 늙은 승탑, 천축사 편액 등
이 전한다. 또한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이
있는데, 지금은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가있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닦았으며, 주어진 공
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경내 확장도 여의치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치고는 그
런데로 넓은 편이다.
일요일에는 산꾼들에게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평소에는 대웅전 1층 앞 쉼터에서 따뜻한 차와
티백차, 물을 제공한다. (차와 티백차는 알아서 마시면 됨) 그리고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에는 아침~점심 공양밥 외에 떡과 염주 등도 제공하여 석가탄신일 인심도 넉넉하다.
* 천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도봉산길 92-2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348514B582B0BD327)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1979년에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2499F4B582B0BD625)
▲ 원통전(圓通殿)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관세음보살과 198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음탱(千手天眼觀音幀)이 봉안되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2793450582C56AD14)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높은 벼랑이 있는데, 그 밑도리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석
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이 여기서 용솟음치고 있으
나 불공 공양 용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이곳은
자연산 석굴로 승려들이 오랫동안 수행을 했던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하며, 근래에 내부를 손질하여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해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다. 그리고 좌우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을 두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260E550582C56AE2E) |
![](https://t1.daumcdn.net/cfile/blog/2466BF4F582C56B12F) |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
천축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이곳의 상징인 무문관이다. 오로지 수행
을
위한 공간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새로 지었다.
건물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4년 또는 6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
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
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 규범이 매
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거의 없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우 4
명만 통과했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거의 없어 시민선원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
어서 결국 문을 닫았으며,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불교의 세속화와 어려운 것을 꺼려하는 성향 때문인지 도전자가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
을
그냥 두기도 그래서 시민선방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천축사 편액을 머금고 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308D250582C56AC07)
▲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부시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로 쓰이고,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들이 있으니 꼭 눈에
넣어가지
고 가자.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미륵
보살과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삼존불로 여겼으나 근래 석가여래 뱃속에서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
원문(發願文)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를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
~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
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으며, 1730
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삼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의 불
상
양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
고
형식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늙은 불상이나 보살상, 불화 중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
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
다. (발원문 하나에 국가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https://t1.daumcdn.net/cfile/blog/25778A50582C56A615)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
대웅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비로자나삼신불도가 걸려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 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탱화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
오른쪽에는 석가여래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목리문(木理紋, 나
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으며,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
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
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
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각자의 연장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나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慧
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했다.
경선당은 이곳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
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 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 等○○奉爲 王妃殿下 辛亥生閔氏
玉體恒安 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
(명성황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알려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단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
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37C174F582C56B518)
▲ 천축사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5호 |
천축사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면서 주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2016년 2월에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마애사리탑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말고도 비로자나삼신괘불도도 있으나 괘불(掛
佛)은 석가탄신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에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
하다.
경내 주변 바위를 살펴보았지만 마애사리탑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인근 불암산(佛巖山)
의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절 밑에 있을 듯 싶어서 절을 나와 동쪽으로 내
려가면서 주변에 널린 바위들을 계속 살펴보던 중, 일주문 직전의 북쪽 바위 높은 곳에 수상
한 것이 눈에 아른거린다. 바로 마애사리탑이다. 천축사를 여러 번 찾았지만 마애사리탑은 이
번에 처음 인연을 짓는다.
견고한 바위 피부에 살짝 깃든 마애사리탑은 모두 2기이다. 아쉽게도 나는 1기만 확인을 했는
데, 바위 남쪽에 있는 사리탑은 사리를 넣었던 감실(龕室) 위에 '청신녀정월 영주봉안탑 정축
사월일(淸信女淨月 靈珠奉安塔 丁丑四月日)'이라 새겨져 있어 정월(淨月)의 것으로 정축년(
1817년 또는 1877년) 4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탑은 '신녀○영
영주탑 임오팔월(信女○英靈珠塔 壬午八月)'이라 쓰여 있어 임오년(1822년 또는 1882년) 8월
에
조성된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중 내가 만난 것은 남쪽 탑이다.
마애사리탑은 19~20세기에 잠시 등장하는 아주 간편한 사리탑 양식으로 부도탑을 세우기 어려
운 산사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바위에 감실을 파서 사리함을 봉안하고 주변에 관련
글씨를 새기는데, 학도암 마애사리탑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곳 천축사와
안양 염불사(念佛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있고,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국사봉 사자암(
상도동)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1059F4E582C56BA0F)
▲ 최근에 지어진 천축사 일주문(一柱門) |
마애사리탑을 만나기가
무섭게 천축사 일주문이 뒷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없던 존재로 그
새 새로 장만하여 이곳에 심어두었다. 문의 위치가 경사진 산길에 자리해 있는데 문 정면에는
'도봉산 천축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하얗게 쓰인 글씨는 마치 날라갈 것
같은 기세라 명필임이 분명해 보였다.
일주문을 벗어나니 시간은 17시 반, 여기서부터 열심히 내려가다가 금강암(金剛庵) 부근 계곡
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신발에 오랫동안 갇힌 꼬질꼬질한 두 발을 해방시켜 계곡에 담구었다.
계곡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에 발을 넣으니 그동안의 피로감이 싹 가시는 듯
하다. 그리고 동시에 발에
깃든 냄새도 다소 가셨다.
그렇게 발을 정화시키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18시 반, 도봉산 종점에 이르렀다. 12시에 시작
된
도봉산 산행은 무수골과 원통사, 우이암(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를 거쳐 도봉산
종점까지 거의 6시간 반 동안 파란만장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정상은 가지 못해 아쉽지
만 우리에게는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때를 기약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