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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 강감찬축제의 현장,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공원)
![](https://t1.daumcdn.net/cfile/blog/99823F375AF24D6516)
▲ 강감찬축제 공연이 열리고 있는 낙성대공원 |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향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로 가는
길목
에 자리한 이곳은 1974년 6월에 조성된 것으로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공원에는 관악구의 대표 축제 '관악 강감찬축제'가 떠들썩하게 열
리고 있었다. 축제를 보고 즐기려는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 음악 공연과 다
양한 문화/전통 체험, 강감찬을 주제로 한 역사포럼, 장터(먹거리 장터 포함) 등이 주류를 이
룬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화/전통 체험이 풍성해 아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장
소로 딱 그만이다.
관악 강감찬축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자 벌이는 축제로 안국사에 제를 지내는 '낙성대 인
헌제'에서 비롯되었다. 1988년 추석(9월 20일)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관악구의
예전 대표 축제
인 '관악산 철쭉제'와 통합되어 '관악 강감찬축제'로 크게 몸집이 커졌다. (관악산 철쭉제는
사실상 없어짐)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안국사와 낙성대공원 일대에서 강감찬을 주제로 한 출병식, 전승
행렬 거리 퍼레이드, 역사포험 등의 이벤트, 고려민속촌과 벽란도21, 주민화합 한마당, 다채
로운 문화/전통 체험행사, 음악회, 전시회 등이 열린다. 나는 혼자 간 터라 간단히 1바퀴 둘
러보고 안국사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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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994DBD345AF24D593B)
▲ 안국사로 인도하는 싱그러운 숲길
저 숲길의 끝에 안국사와 강감찬전시관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91DC495AF12FA316)
▲ 강감찬전시관 |
안국사 앞에는 근래 닦여진 강감찬전시관이 놓여져 있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의 생애와
3차례
에 걸쳐 이루어진 고려와 거란(요)과의 전쟁, 그 전쟁을 최종 마무리 지은 귀주대첩(龜州大捷
)을 다루고 있는데, 전시 유물은 모두 모조품이며 해설과 디오라마 중심으로 짜여져 그 시절
의 이해를 최대한 돕고 있다. (전시관 내부는 사진 촬영 가능)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EA00345AF24D540F)
▲ 강감찬이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양식의 시(왼쪽)와
강감찬의 일대기를 다룬 강감찬전(姜邯贊傳) |
강감찬의 한시는 오세창(吳世昌)이 고려부터 20세기 초까지 옛 사람들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
휘(槿域書彙)에 수록되어 있다. 그 부분을 복사해서 이곳에 전시한 것으로 여기서 근역은 조
선을 뜻한다. (즉 무궁화 나라)
옆구리에 놓인 강감찬전은 우기선(禹基善)이 1908년에 지은 것으로 일한주식회사에서 단행본
으로 간행했다. (그 역시 모조품)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BB2495AF12FA513)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
윤기가 철철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지닌 안국문은 안국사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이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약간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
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
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되며, 계단 남쪽에
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표석이 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727375AF24D6A13)
▲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낙성대 표석 |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표석은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성대
3글자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월 11일, 상량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월 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공사비는 4.5억원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내
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낙성대 표석 밑도리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딱딱하게 쓰여있어 독재시대
의
우울했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허나 어찌하랴 이 역시 이곳을 거쳐간 엄연한 역사인 것을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짓게 한 이를 너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6DA7345AF24D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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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內三門)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
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
진 원효로 남이(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E674A5AF12F9A0E)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DA1C4A5AF12F9D09) |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호 |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
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리는 존재로
13세
기에 지역
사람들과 후손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웠다. 공덕을
기린다
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
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주(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
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로 묶인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이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의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 말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 스타일이라 다른 절의 탑을 가져와 이곳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길
수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는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운 탑이
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원나라)와
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보기 좋게 참
교육시켜 나라를 구해주길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基壇
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 글씨가 새겨져 있
어 이
탑의 정체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
년 이상 묵은 늙은 탑이나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왔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는 갈
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1A84A5AF12FA20C)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6자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E304F5AF12FAE1C)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
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
소 거북함을 들게 한다. 허나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
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거나 내용을 좀 순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표석과 나무를 뽑아버리자는 것은 절대로 아님>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D185345AF24D4B10)
▲ 안국사 본전(本殿) |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
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푸른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본떠서 지었는데 그 무량수전의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 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http://1.bp.blogspot.com/-UxM8FvRJpUQ/Uatp7RdV6-I/AAAAAAAADyg/w3ncoepsq1k/s1600/DSCN7017.JPG)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리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듯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이 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
습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
휘하여 대충 때려 맞춘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면서 본전에 이렇게 걸리게 되
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겼던
김은호(金殷鎬)의 제자라 그의 화풍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년 1월 11일에서 12일
사이에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악구
청은
이를 신고하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의
나이
를 이유로 거절 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줄 것
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넸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
단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
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상상으로 근래에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었다면 정
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크게 털렸을 것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0206B04751ACB4D004)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https://t1.daumcdn.net/cfile/blog/037B864751ACB4D208)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https://t1.daumcdn.net/cfile/blog/998692345AF24D5113)
▲ 늦가을에 잠긴 본전 뒷쪽 풍경
관악산에 접해있는 본전 뒤쪽 풍경도 제법 경치가 있으니 앞모습만
살피지 말고
뒷모습도 둘러보기 바란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80D345AF24D5F09)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E500345AF24D5E02) |
▲ 태극마크가 걸린 안국사 홍살문 |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낙성대공원 분수대 |
![](https://t1.daumcdn.net/cfile/blog/9902EF375AF24D6336)
▲ 강감찬 장군 동상 |
낙성대공원 서쪽에는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다. 1997년 10월 청
동(靑銅)으로 지은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
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지원으로 기존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했다.
★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의 아들이다. 금천강씨는 진
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에 자리를 닦았으
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이란 큰 감투를 받았다.
강감찬은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
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민중을 통해 신화처럼 미화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
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
인을 만나 그를 통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
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순진하게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仁憲)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가 부지기수이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
악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30대까지 금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그의 30대 중반 이전 기록이 너무 빈약함)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 개경으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 갑과(甲科)로
급
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그를 장군이라 부르다보니
자연히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인 윤관(
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발
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
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난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①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그대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시오?' 호통을 치니 관속들
은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
게 맞지 않는다.
②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
리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
구리의 입을 막게 했으나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
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③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
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
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치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④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
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을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요동반도 일대의 강동6주(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재미를 보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
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해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
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년)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온
전란이 있었
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했다' 적혀있
어 그의 공이 엄청났음을 알려준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옛 조선과 고
구려, 발해의 그늘에서 오랫동안 살아갔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
나라는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하여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만 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벌써 칠순이었다.
거란군이 압록강<鴨綠江, 현재 요하(遼河)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님>을 넘어 고려의 영역에 들
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기병
1만2천을
뽑아 압
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기병을 매복시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주(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
신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털었고, 거란군이 요동반도 어딘가
로 여겨지는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
고 소배압의
거란군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본 소배압
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벌였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털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린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
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
란에게는 개망신의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이와 같
이 심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을 했을 정도이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싹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들고 개경으로 개선했다. 현종은 너
무 기뻐서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나와 연회를 베풀었으며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친히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冊封)했다.
1030년에는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
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오히려
3일에
1번씩 입궐토록 명했다. 그랬던
현종이 그해 붕어(崩御)하고 덕종(德宗)이 제왕이 되자 1031년 6월 사직이 수용되었다.
허나
바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왕은
3일 동안 조회
를 멈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
國侯)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配享)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해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
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숙한 태
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
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했던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려를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대첩
에서 완전히 털린 거란도 이제는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
朝)
를 요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고려의 반격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쟁에 지친 상태라 딱히 거란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강동6주를 완
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내원'과 '포주' 등 극히 일부 지역은 거란이 점거했다. 이들 지
역은 요서(遼西)나 요하 주변 지역으로 고려가 여러 번 공격했으나 거란이 굳게 수비하여 점
령하지 못했으며,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시절에 비로소 회복했다. 그리고 12세기 초까
지 압록강(요하) 가교 사건
등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
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
었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됐을지 알 수가 없다'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적이 얼마나
장대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
용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
안 무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지석(誌石)을
발견해 무덤을 복원했다.
* 낙성대 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