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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천고을 동헌관아터

경기도의 일원이었던 금천고을(금천현)은 호암산 그늘인 금천구 시흥동을 중심으로 금천
구와 관악구, 구로구 지역, 경기도 광명시와 시흥시,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를 관리하던
너른 고을이었다. 시흥5동 은행나무교차로 일대가 금천고을의 중심지로 관아(동헌)와 향
교, 객사 등이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시흥고을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정조 임금이 사도세자의 묘역인 현륭원으로 참배를 갈 때, 이곳을 거쳐갔다.

 

고약했던 왜정 시절, 금천고을의 관청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금천향교(시흥향교)는
과천향교에 강제 통합되어 사라졌다. 그래도 시흥고을(시흥군)의 중심지 역할은 유지했으

나 시흥동을 비롯한 현재 금천구 지역이 서울에 편입되면서 서울 영등포구 땅이 된다. 하
여 시흥군의 중심지는 여기서 멀리 떨어진 소래읍이 맡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시흥이 없는
시흥군이 되고 만다. (경북 칠곡군도 그 중심지인 칠곡읍이 대구에 편입되면서 칠곡이 없
는 칠곡군이 되어버림, 현재 왜관읍이 칠곡군의 중심지)

시흥동과 독산동, 가산동 지역은 구로구의 일원으로 살았으나 금천구로 분리되었으며 그
로 인해 한때 잃어버렸던 이곳의 옛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또한 시흥동은 금천고을 시절
과 마찬가지로 금천구의 중심지로 바쁘게 살아간다.

시흥5동 은행나무교차로 주변에는 늙은 은행나무와 비석군 등 옛 금천고을의 흔적이 남
아 있으나 그것 뿐이며,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금천관아와 시흥향교는 그들이 있던 자
리에 안내문을 세워놓아 그들을 추억하게 한다.

 

금천고을 동헌은 800년 묵은 은행나무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정조 임금이 수원 현륭
원(사도세자의 묘역)으로 참배를 갈 때 이곳을 거쳐가는 관계로 임시 행궁으로 쓰기도 했
다. 그 시절 정조의 현륭원 참배 코스는 '서울 출발 → 한강에서 배다리 이용 → 용양봉저
정에서 휴식 → 금천고을 중심지(시흥동) → 안양 → 의왕(행궁이 있었음) → 지지대고개 
→ 수원부(수원 화성) → 현륭원' 순이었다.

2. 시흥동 은행나무 (서울시 보호수 18-2호)

옛 금천고을의 흔적 중 가장 늙은 자연물로 추정 나이는 약 880~890년이다. (1968년 보호
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830년) 금천고을 및 시흥동 지역의 오랜 명물로 높이 14
m, 나무둘레 8.6m에 노거수로 이곳에 있던 금천관아의 조경수로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허나 왜정 때 관아가 사라지고 개발의 칼질이 은행나무 주변을 요란하게 거쳐가면서 바로
옆에 신작로가 닦이고 건물들이 바짝 들어섰다. 그러다보니 그의 공간은 크게 쪼그라들어
형편없이 좁은 공간에서 큰 덩치를 유지하고 있어 생육환경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즉
개발의 칼질은 이곳의 터줏대감인 은행나무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주변 건물을 밀고 도로를 손질해 그를 배려해주면 좋겠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못해 그냥 저러고 사는 실정이다.

 

그래도 은행나무는 아직은 정정한 모습으로 봄이 되면 푸른 은행잎을 피우고, 여름에는 일
품 그늘을 드리우며, 가을에는 황금색 은행잎을 흩날리며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3. 남쪽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서울시 보호수 18-2호)

자신보다 큰 키다리 건물과 차량들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금하로) 사이에 끼어있어 참으로
딱한 모습이 되었다. 지역의 오랜 명물을 바보나 반병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의 씁쓸한 현장...

4. 시흥동 비석거리 (금천고을 선정비들)

은행나무교차로 교통섬에 800년 묵은 키 작은 은행나무가 있고, 그 그늘에 선정비 4기가
자리해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차량의 매연과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비석거리가 불렸는데, 그만큼 많은 비석들이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
과 수해로 거진 사라지고 지금은 겨우 4기만 남아 비석거리의 이름값을 겨우 유지한다.
게다가 어쩌다보니 길 사이에 갇혀 있어 접근도 어려운데, 늙은 비석들을 저렇게 교차로
교통섬에 가둔 곳은 천하에서 아마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보기가 참 딱해 보인다.
이곳에는 1878년경에 세운 김병이 현령의 선정비, 1879년경에 세운 이장혁 현령 선정비,
1884년경에 세운 조용구 현령 선정비, 1892년경에 세운 방천용 현령 선정비가 자리해 있
는데, 저들이 정말 선정을 펼쳐서 비석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세금 뜯기용이나 치적 내세
우기용으로 어거지로 세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시절 시대상 후자가 맞을 것이
다.

4. 시흥동 은행나무 (서울시 보호수 18-1호)

비석기리 비석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은행나무로 추정 나이는 앞서 은행나무와 비슷한 
880~890년(1968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830년)이다.
나무의 높이는 8.5m, 나무둘레 6.1m로 앞서 은행나무는 비록 공간은 좁아도 도로 옆에 있
기라도 하지 이 나무는 비석 형제들과 함께 도로 한복판 교통섬에 갇혀있어 환경이 더 우
울하다.
앞서 은행나무 북쪽에서 비슷한 나이의 늙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서울에서 800년 이상 묵
은 나무들이 무려 3그루가 몰려있는 유일한 이색 현장으로 옛 금천고을의 오래된 자연유
산이라 국가 천연기념물이나 서울 지방기념물의 자격이 충분해 보이나 아직까지 서울시
보호수란 말단 등급에 머물러 있다.

5. 시흥향교터 표석

금천고을의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시흥향교가 있던 곳이다.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성
전(대성전) 6칸과 명륜당 6칸을 지니고 있었으며,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동재, 서재 등도
두었을 것이다. 

왜정 말기까지 이 자리를 지켰으나 왜정이 1944년 과천향교에 강제 통폐합시키면서 없애
버렸다. 그로 인해 향교의 흔적과 역사는 산산히 사라졌으며, 근래 향교터에 표석과 안내
문을 세워 무심히 사라진 그들을 추억한다.

또한 금하로란 도로가 시흥향교터와 금천고을 관아터, 은행나무를 지나가는데, 왜정이 금
천고을의 관아 건물을 싹 없애버리고 그 흔적과 은행나무를 모욕하고자 관아터 한복판으
로 도로를 깐 것으로 보인다. 왜정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족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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