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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서다 (후원입구에서 부용정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창덕궁은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시대 서울 5대 궁궐의 일
원이다. 1405년 태종이 경복궁의 이궁(별궁)으로 세운 것으로 경복궁 다음급의 궁궐이
었으며, 경복궁 부재 시절(1592~1868)에는 조선의 중심 궁궐(법궁)로 바쁘게 살았다.

1405년 인정전과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후원 등이 지어졌고, 1412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세워졌다. 창덕궁 뒷쪽에는 62,000평의 후원을 달달하게 두었는데, 1463년 그
후원을 15만여 평으로 크게 늘려 창덕궁 영역을 상당히 불렸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47년에 광해군이 세웠던 인경궁 건물을 가져와 복구했으며,
1917년 큰 화재로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자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그 목재로 창덕궁 복구에 사용했다. 그로 인해 경복궁은 더욱 초
췌해졌으니 이는 모두 왜정의 고약한 간계에 인한 것이다.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도 뒷쪽에 후원을 두었으나 창덕궁에 비하면 매
우 작다. 하지만 창덕궁은 15만 평이 넘는 너른 후원을 두어 오랜 세월을 두고 애지중지
가꾸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궁궐 후원을 뛰어넘는 아주 휼륭한 궁궐 후원 유적으로 격
하게 추앙을 받는다. (후원의 면적은 창덕궁 궁역의 거의 3/4 수준임)

 

창덕궁 후원은 300년이 넘는 늙은 나무를 비롯해 온갖 나무와 화초가 무성하여 거대한 밀
림을 이루며, 북악산(백악산)의 동쪽 봉우리인 응봉(와룡산)에서 내려온 계곡을 이용해 연
못과 돌다리를 닦고, 숲과 골짜기가 굽이치는 경치 좋은 곳에는 정자와 건물을 지었다. 이
렇듯 자연과 완전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곳으로 건축사 및 조경사적 측면에서도 특급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을 두고 한때 비원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비밀의 정원이란 뜻이다. 그 이름은 대
한제국 시절에 처음 등장하는데, 왜정 때 이곳 이름이 비원으로 고정되어 1990년대까지
쓰였다. 후원 외에 금원, 북원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현재 공식 명칭은 창덕궁 후원이
다.

2. 봄이 푸르게 깃든 부용정 방향 고갯길

창덕궁 후원은 창덕궁과 한몸이나 입장료는 별도이다. 즉 창덕궁 따로, 후원 따로 적용한다.
창덕궁만 볼 경우 성인 기준 입장료는 3,000원이며, 후원은 5,000원을 더 내야된다. (후원만
볼 수는 없음, 후원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창덕궁 중심부를 거쳐가야 됨)

 

창덕궁은 간만에 인연으로 자주 찾았던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경운궁)에 비해 인연 횟수
는 매우 적다. 게다가 후원 방문도 정말 오랜만이다.

후원의 영역은 남쪽으로 대조전, 인정전 구역 북쪽까지, 동쪽은 창경궁과 돌담을 사이에 두
고 있으며, 북쪽은 성균관대에서 북촌으로 넘어가는 응봉 남쪽 고개(후원 뒷길)까지, 서쪽
은 가회동, 계동 지역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다. 남북 길이는 최대 800여m, 동서 길이는 최
대 600여m로 숲길이 여러 갈래로 이어져 있으며, 중간중간에 정자와 건물, 조촐한 명소들
이 숨겨져 있어 그들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때 후원 상당수가 금지 구역으로 묶이기도 했으나 점차 해방되어 상당수 구역을 둘러볼
수 있다. 허나 신선원전 구역과 후원 한복판 숲 등 적지 않은 곳이 문화유산 보호 등으로 금
지 구역으로 묶여있다. 또한 날씨와 여러 상황에 따라 금지 공간은 늘어날 수 있다.

3.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부용지 구역 (정면에 보이는 집은 영화당)

4. 영화당 앞에 푸르게 솟은 늙은 느티나무

부용지 동쪽에 자리한 영화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 팔작지붕 건물이다. 광해군
시절에 지어졌으나 현재 건물은 1692년에 재건된 것으로 특이하게 툇마루를 지니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갈 수 있다. (툇마루에 앉는 것은 가능하나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는 것은 절대로 안됨)

정조 이전까지는 제왕이 왕족,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거나 활쏘기로 몸을 풀던 곳이었으며,
그 이후로는 문과와 무과 등 과거시험 장소로 자주 활용되었다. 영화당 동쪽에는 너른 공
간이 펼쳐져 있는데, 이 공간을 춘당대라 불렀다. 춘당대는 원래 창경궁 춘당지 앞까지 이
르러 지금보다 더 넓었으나 지금은 돌담이 둘러져 창경궁 구역은 별도의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과거가 열릴 때는 제왕이 친히 나와 살폈다고 하며, 여기서 치루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라 불렀다.

5. 부용정
부용정은 부용지 구역의 중심 존재이다. 마치 연꽃이 활짝 핀 모양과 같은 상큼한 모습으
로 정면 5칸, 측면 4
칸, 배면 3칸의 '十'자형 건물인데, 연못에 접한 배면 1칸 기둥은 연못
에 다리를 담구고 있어 수중누각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1707년에 '택수재'란 이름으로 등장을 하는 것으로 보아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
며, 1792년에 정자를
개축해 부용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1795년 정조가 그의 모후인 혜
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아 왕족들과
신하들을 불러 여기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신하들과
종종 낚시, 뱃놀이, 시짓기 놀이를 즐겼다.
정자 내부는 발을 들일 수 없으며, 그 서쪽 또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6. 부용지 부근에 놓인 잘생긴 수석

상석 비슷한 견고한 돌덩어리 위에 자연석이 마치 단단한 남근석 같은 모습처럼 서 있다.
이들은 부용지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들이다.

7. 부용정에서 바라본 시원스런 모습의 영화당

8. 주합루와 어수문

부용지 북쪽 언덕에 높이 자리한 주합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짜리 팔작지붕 집이
다. 조선 궁궐에서 2
층(중층)건물은 궁궐의 중심 건물(법전) 외에는 흔치 않은 편인데, 숙
종 시절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나 현
재 건물은 1776년에 정조가 세웠다.

주합루는 1층과 2층의 명칭이 다른데, 1층은 어제각, 2층은 주합루라 불렀으며, 역대 제
왕들의 글과 어필, 서
적을 보관하던 왕실도서관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이름이 갈렸다. 정
조가 무척 애지중지하던 곳으로 많은 인
재들이 거쳐가던 학문의 요람이었으나 왜정 때는
연회장으로 쓰이는 수난을 겪었다.
주합루 주위로 담장과 같은 취병을 길게 둘러 바깥과 주합루의 경계를 그었으며, 그 밑에
팔작지붕 문인 어
수문을 두었고 그 서쪽에 주합루를 보조하는 서향각과 희우정을 두었다.

서향각은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주합루에 보관된 서적과 어진, 어필을 말
리던 포쇄소이다.
포쇄란 서적과 어필이 습기와 곰팡이 등으로 망가지는 것을 막고자 햇별
에 말리는 것을 뜻한다. 1911년 왜정
에 의해 양잠소로 변질되어 한동안 누에를 치는 곳으
로 살아가기도 했다.
서향각 뒷쪽에 자리한 희우정은 2칸짜리 팔작지붕 집으로 제왕이 독서를 하던 곳이다.
1645년 초당으로 지
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취향정이었으나 1690년 가뭄이 심하여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얼마 안가서 많은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자 이를 크게 기리는 뜻에서
건물 지붕을 기와로 크게 바꾸고 비에 기뻐했다는 뜻의
희우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그 동쪽이자 주합루 동북쪽 언덕에는 'ㄱ' 모습의 천석정이 있는데, 이곳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공부를 하던 곳으로 제월광풍관 현판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어수문을 넘어 주합루, 서향각, 희우정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요즘은 어수문 안
쪽은 금지 구역으
로 묶여 주합루와 서향각, 희우정, 천석정은 접근이 어렵다.

9. 봄의 향연이 한참인 부용지

부용지는 후원의 1번째 정원으로 후원입구에서 고개를 지나면 바로 나온다. 연못 크기는
300평(약 1000㎡)으로 연못 주위로 주합루, 서향각, 영화당, 부용정 등을 주렁주렁 두었으
며, 삼삼히 우거진 나무와 화초들이 연못을 거울로 삼아 자신들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
들이 없다.

10. 부용지 서쪽에 있는 사정기비각
부용지 서쪽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건물이 작은 문을 거느리며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다.
그는 금지구역이라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그에 대한 안내문도 없어서 지나치기가 쉬운
데, 그는 사정기비를 조용히 품고 있는
사정기비각이다.

1460년 세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조카인 오산군<임영대군의 아들>과 영순군
<광평대군의 아들>
을 시켜 부용지 일대에서 샘물을 찾게 했다. 그래서 4개의 샘을 발견
했는데, 그들을 우물로 손질하고 각각
'옥정','마니','유리','파려'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우물 2개가 사라졌고, 남은 2개도 크게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서 숙종은 1690
년 이들 우물을 수리하고 이곳에 있던 우물의 내력을 적은 비석을 세
워 4개의 비석을 기록했다는 뜻의 사정
기비라 하였다. 그리고 그 비석을 보호하고자 비
각을 씌웠다.

비각 북쪽에는 용머리조각이 있어 북악산이 베푼 물을 부용지로 쏟아내고 있다. 용머리
양쪽으로 네모난 돌
이 있으며,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져 있어 순종 시
절에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11. 부용지 우물
부용지에 수분을 보태고 부용지 주변 건물에 머무는 사람들의 식수를 책임지던 우물이다.
세조 때 발견된 우
물의 하나로 1690년에 현재 모습으로 크게 정비되었는데, 지금은 현역
에서 물러나 주둥이가 단단히 봉해진
채, 조용히 묻혀있다.

12.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
어수문이란 이름은 정조가 붙인 것으로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처럼 통치
자는 늘 백성을 생
각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앞에는 3개의 계단이 있는데, 고품격
이 느껴지는 가운데 계단은 제왕 전용,
계단만 덩그러니 있는 좌우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
람들의 계단이다. 문 좌우로는 취병이라 불리는 대나무로
엮은 담장이 있는데, 이들은 오
래전에 사라진 것을 근래 복원했다.

 

13. 주합루 동쪽 꽃계단과 담장

자연 경사를 이용해 돌로 꽃계단(화계)을 닦고 온갖 화초를 심어 화사하게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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