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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 후원 부용지

창덕궁 중심 구역에서 후원입구를 거쳐 후원 구역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부용지를 중심
으로 한 부용지 구역이 마중을 한다.

부용지 구역은 네모난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 서향
각, 희우정 등이 달달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연못 한복판에는 작고 동그란 섬을 운치있게
띄워놓아 이른바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을 상징하고 있다.

부용지 한복판 섬에는 소나무와 여러 수풀이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며 그들만의 푸른 세상
을 일구고 있으며, 못 서쪽에는 샘터를 두어 연못의 수분을 계속 채워준다. 부용정과 영화
당은 접근이 가능하고 영화당 툇마루는 걸터앉을 수 있으나 주합루와 서향각, 희우정, 천
석정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부용지 서쪽 부분과 서쪽 숲 또한 금지된 곳으로 묶여있
어 조금은 아쉬운 감을 준다.

 

2. 영화당에서 바라본 주합루와 서향각

부용지 북쪽 언덕에 높이 자리한 주합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궁궐에서 2층(중층)건물은 궁궐의 중심 건물(법전) 외에는 흔치 않은 편인데, 숙종 시
절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현재 건물은 1776년에 정조가 세웠다.

주합루는 1층과 2층의 명칭이 서로 다른데, 1층은 어제각, 2층은 주합루라 불렀으며, 역대
제왕들의 글과 어필, 서적을 보관하던 왕실도서관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이름이 갈렸다. 정
조가 무척 애지중지하던 곳으로 많은 인재들이 이곳을 거쳐가던 학문의 요람이었으나 왜
정 때는 연회장으로 쓰이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주합루 주위로 담장과 같은 취병을 길게 둘러 바깥과 주합루의 경계를 그었으며, 그 밑에
팔작지붕 문인 어수문을 두었고 그 서쪽에 주합루를 보조하는 서향각과 희우정 등을 두었
다.

 

서향각은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주합루에 보관된 서적과 어진, 어필을 말
리던 포쇄소이다. 포쇄란 서적과 어필이 습기와 곰팡이 등으로 망가지는 것을 막고자 햇별
에말리는 것을 뜻한다. 1911년 왜정에 의해 양잠소로 변질되어 한동안 누에를 치는 곳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서향각 뒷쪽에 자리한 희우정은 팔작지붕 2칸 집으로 제왕이 독서를 하던 곳이다. 1645년
에 초당으로 지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취향정이었으나 1690년 가뭄이 심하여 여기서 기우
제를 지냈는데, 얼마 안가서 많은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자 이를 크게 기리는 뜻에서 건
물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희우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그 동쪽이자 주합루 동북쪽 언덕에는 'ㄱ' 모습의 천석정이 있는데, 이곳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공부를 하던 곳으로 제월광풍관 현판이 걸려있다.

 

 

3. 부용지에 발을 담군 부용정

부용정은 부용지 구역의 중심 존재이다. 마치 연꽃이 활짝 핀 모양과 같은 상큼한 모습으
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十'자형 건물인데, 연못에 접한 배면 1칸 기둥은 연못
에 다리를 담구고 있어 수중누각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1707년에 '택수재'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을 하며, 1792년에 정자를 개축하여 부용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1795년에는 정조가 그의 모후인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아 왕족
들과 신하들을 불러 여기서 연회와 낚시,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제왕들이 낚시와 망중
한을 즐기던 곳으로 정자 내부는 발을 들일 수 없으며, 그 서쪽 또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4. 영화당

부용지 동쪽에 자리한 영화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 팔작지붕 건물이다. 광해군
시절에 지어졌으나 현재 건물은 1692년에 재건된 것으로 특이하게 툇마루를 지니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갈 수 있다. (툇마루에 앉는 것은 가능하나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절대로 안됨)

정조 이전까지는 제왕이 왕족,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거나 활쏘기로 몸을 풀던 곳이었으며,
그 이후로는 문과와 무과 등 과거시험 장소로 자주 활용되었다. 영화당 동쪽에는 너른 공
간이 펼쳐져 있는데, 이 공간을 춘당대라 불렀다. 춘당대는 원래 창경궁 춘당지 앞까지 이
르던 지금보다 더 넓은 곳이었으나 지금은 돌담이 둘러져 창경궁 구역은 별도의 공간이 되
었다. 이곳에서 과거가 열릴 때는 제왕이 친히 나와 살폈다고 하며, 여기서 치루는 과거시
험을 춘당대시라 하였다.

 

 

5. 속살을 거침없이 드러낸 영화당 내부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연못이 있는 서쪽과 춘당대라 불리던 동쪽 공간
을 바라보고 있다.

 

 

6. 애련정 구역 불로문 앞

부용지 구역에서 북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애련정 구역이다. 동쪽에는 창경궁과 이어지는
영춘문이 있으나 굳게 닫혀 있으며, 서쪽으로 애련정 중심 구역으로 인도하는 불로문과 기
와문이 있는데, 애련정 구역 또한 부용지 구역 못지 않은 달달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애련정 구역은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가 꾸민 것으로 그는 총명하고 인품
이 높아 18세부터 순조를 대리해서 국정을 살폈다. 그는 1827년부터 이곳에 의두합, 애련
정, 운경거 등 여러 건물을 짓고 새로운 정원을 닦아 학문을 공부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7. 창덕궁 뽕나무

애련정 구역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를 가르는 담장 앞으로 키가
큰 뽕나무가 마중을 한다. 창덕궁에는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늙은 나무가 3그루(다래
나무, 향나무, 뽕나무) 전하고 있는데, 바로 그중의 하나로 높이 12m, 가슴높이 줄기둘레
228cm, 나이 400년 정도로 여겨진다.

조선 때는 창덕궁 후원 곳곳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보이는
친잠례를 하였는데, 이 나무는 궁궐에 남아있는 뽕나무 증 가장 크고 늙은 나무이다. (천하
에 널린 뽕나무 중 가장 크고 늙은 측에 속함)

 

 

8. 창경궁 구역을 바라보는 뽕나무

뽕나무 옆 담장 너머가 바로 창경궁 구역으로 저 안쪽에 구한말에 지어진 대온실이 자리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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