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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방학동 구역(전형필가옥, 귀록계산,와운폭 바위글씨, 방학동사지)


~~~~~  우리 동네 1바퀴, 도봉산 방학동 구역 ~~~~~

방학동 전형필가옥

▲  방학동 전형필가옥

전명기, 간송 전형필 묘역 방학동사지 마애불

▲  전명기, 간송 전형필 묘역

▲  방학동사지 마애불

 


♠  도봉구의 새로운 꿀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방학동 전형필(全鎣弼) 가옥
- 국가 등록문화유산 521호

▲  산뜻하게 정비된 전형필 가옥

서울 북쪽 끝에 자리한 도봉구(道峰區)의 한복판 방학동(放鶴洞) 산골에는 간송 전형필 가옥
이 숨겨진 듯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속세에 개방되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조금씩 존재감
을 드러내고 있지만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들도 이곳이 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
던 곳이었다. 서울을 거의 꿰고 있고 이곳과 매우 가까운 곳에 사는 나 역시 그의 존재를 몰
랐으니 말이다.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 자리로 유명한 성북동(城北洞)에 간송미술관과 집을 짓
고 살았던 간송이 왜 이런 변두리에 기와집을 남겼던 것일까? 사연은 대략 이렇다.
이 가옥은 간송의 종숙부(從叔父) 겸 양부(養父)가 되는 전명기(全命基, 1870~1919)가 부근에
자리한 농장과 경기 북부, 황해도 전답에서 나오는 소출을 관리, 보관하고자 1890~1900년대에
지었다. 그는 자식이 없어서 사촌형의 막내 아들인 간송을 양자(養子)로 들였는데, 그가 죽자
그의 재산은 간송에게 상속되었다.
간송은 그가 30세가 되기 전에 조부모, 친부모, 양부모(종숙부), 친형제, 사촌이 모두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겪었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했을 때 양부인 전명기가 죽어서 상복을 입고 졸
업 사진을 찍었고,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친아버지가 별세하여 또 상복을 입고 졸업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집안 자손은 간송 홀로 남게 되었고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모두 물
려받게 되었다.

그는 양부의 무덤을 가옥 북쪽에 마련하고 이 가옥을 그에게 제를 올리고 제기(祭器)를 관리
하는 재실(齋室)로 활용했다. 양부 기일(忌日)이나 기타 제삿날에 찾아와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냈고, 비가 오는 경우 가옥 대청마루에서 지내기도 했다. 제사 외에도 방학동과 양주군 농
장을 방문하거나 머리를 식히러 종종 찾아와 며칠을 머물렀다.

6.25 전쟁이 터지자 무심한 총탄 몇몇이 이 집을 찾아오면서 대문과 건물, 담장 일부가 파손
되었다. 또한 그의 종로4가 본가와 성북동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 또한 전쟁으로 적지
않게 피해를 입으면서 그것을 우선 복구하느라 방학동 가옥은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2년 종로4가 본가가 강제 재개발로 인해 매각되고 개발의 칼질로 사라지면서 거기서 나온
자재를 활용하여 1963년까지 부분적인 수리를 했는데, 너무 수리에 급급한 나머지 대문과 담
장 일부는 원형을 많이 잃었다.

간송이 1962년 별세하여 양부의 무덤 곁에 묻히자, 그들 부자의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계속
쓰였다. 허나 관리 부족으로 가옥이 퇴락되어 볼품이 떨어진 것을 2011년 가을, 이동진 도봉
구청장이 주민들과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을 걷던 중에 발견했다. 당시 가옥은 극도로 우울한
상태로 특히 지붕의 파손과 부식이 심해 파란 천막으로 이를 가리고 있었다. 귀신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은 한옥이었으나 왠지 심상치가 않아 보여 확인해 보니 글쎄 간
송의 가옥이 아니던가?

그 인연으로 도봉구는 간송 후손들에게 집을 잘 가꿔보자며 제안을 했다. 하여 문화재청에 문
화유산 지정을 신청했고, 2012년 12월 14일 등록문화재(등록문화유산)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서 2013년부터 2년 동안 간송미술문화재단과 함께 가옥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데 주안점을 두고 크게 보수를 벌여 2015년 9월 11일 간송 부자의 묘역과 함께 천하에
그 문을 열었다.

도봉구의 손길을 받아 다시 태어난 전형필 가옥은 1890~190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팔작지붕
을 지닌 본채(93㎡)와 협문(11㎡), 담장, 화장실(5㎡, 뒷간과 창고로 쓰인 건물)로 쓰이는 부
속 건물로 이루어졌다. 거주 목적이 아닌 소출을 보관,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 거기에
약간의 별장 역할까지 겸하는 곳이라 규모는 작으며, 복원된 이후에는 많이 깔끔해지긴 했으
나 고색의 때를 너무 빡빡 밀어버린 탓에 마치 근래 지어진 한옥처럼 너무 젊어진 점이 너무
아쉽다.

가옥 뒷쪽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여 운치를 그려내고 있으며, 가옥 서쪽에는 나무 그늘에 감싸
인 쉼터가 있고, 북쪽에는 간송 부부와 전명기의 무덤이 있는데, 큰 봉분만 덩그러니 있다.
묘역 밑에는 간송이 수습했던 장명등과 양석이 각각 1쌍씩 놓여져 무덤을 지키고 있고, 그 서
쪽 그늘에는 상석(床石) 여러 기가 무리 지어 몰려있다.

▲  활짝 열린 전형필 가옥 대문

▲  굳게 닫힌 서쪽 협문과 돌담

방학동 전형필 가옥은 김수영(金洙暎)문학관, 함석헌(咸錫憲)기념관, 둘리뮤지엄과 더불어 도
봉구에서 격하게 띄워주는 문화 명소이다. 이중 전형필 가옥은 등록문화유산의 지위도 누리고
있는데, 도봉산 방학동계곡과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인도하는 입구에 자리해 있다.


▲  가옥 뜨락에 놓인 석물
네모난 탁자식 상석과 의자로 쓰이는 올망졸망한 조그만 돌이
모여 조그만 쉼터를 이루고 있다.

▲  모든 문이 활짝 열린 본채
'ㄱ' 모습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의 처마선이 꽤 시원스러워 보인다.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자신을 헌신한 간송 전형필의 간단한 생애
간송은 1906년 7월 29일 서울 종로구에서 정선전씨 집안인 전영기(全泳基)와 밀양박씨 부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전영기는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낸 무관 출신으로 배오개에서
미곡상(米穀商)을 운영하던 부호(富豪)였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
교 법학부를 졸업했는데,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왜열도 원숭이들에게 무시를 은근히 당하며
나라 잃은 한을 제대로 느끼자 그는 번민에 빠져 괴로워했다. 하여 휘문고보 시절 미술 선생
이던 고희동(高羲東)을 찾아가 인생 상담을 요청했다.
고희동은 대책 없이 방치되고 있는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킬 것을 권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이
며,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런 제자를 위해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고,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서화와 도기, 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미술과 골동품
식견을 쌓아갔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문학과 미술, 인문학에 능했던 탓에 그 많은 지식들을
금세 소화했고, 당시 이름난 미술가와 문학인들과도 자주 교류하며 식견을 늘렸다.
위창은 골동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시켜주어 그의 사업을 돕게 했고, 1930년
이순황과 함께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수많은 문화유산
을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백자 등의 온갖 자기류, 혜원풍속
도(蕙園風俗圖), 심사정의 촉석도(矗石圖) 등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과 금동삼존불감 등
의 불상을 보이는데로 사들였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등의 석물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이나 문화유산을 거래하는 곳을 수시
로 찾아가 많은 것을 구입했으며, 왜인들이 꽤나 군침을 흘리던 유물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들이니 자연히 골동품상들이 그에게 앞다투어 몰려들면서 꽤나 값어치
나가는 것들은 그에게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자기 나라로 귀국하
면서 소유하던 고려청자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를 직접 만나 그것을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에 멈추지 않고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
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했고, 동성학원을 설립
하면서 교육 분야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
원은 학교 매입금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무리한
가격을 요구했으나 간송은 쓴소리 하나 없이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원 재단설립에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팔았다.
해방이 되자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으니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다.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미술동
인회를 세워 문화유산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며 문화유산 수호와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
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는 배때기에 기름칠하며 지독하게 오래 사는 이 땅의 더
러운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혔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
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
지조각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
을 잃었고 방학동 집과 성북동 보화각, 북단장, 종로4가 본집이 크게 파손되었다.
그런 상황에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다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
며, 1959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바쁘게 뛰던 중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
염(腎盂炎)으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뜬 이후, 나라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으며, 2014
년 10월에는 금관문화춘장이 추가로 추서되어 그의 업적을 기렸다. 또한 고고미술 동인회 회
원과 간송의 제자, 아들,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해 그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
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  서쪽에서 바라본 본채
고색의 기운을 죄다 밀어버려 완전 새 집이 되어 버렸다. 100년 이상 묵은
한옥이 맞는지 고개가 격하게 갸우뚱할 정도로 말이다.

▲  본채 뒷문 (문 안쪽이 장마루)

▲  동쪽에서 바라본 본채

본채는 안방과 대청, 건너방, 누마루, 장마루, 탕비실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까지 모두 개방(
탕비실 제외)되어 있어 발을 꽁꽁 감싸던 거추
장스러운 신발을 섬돌에 벗어두고 준비된 실내
화로 갈아타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
한 마루로 들어서면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방에는 간송의 때가 서린 유
물은 하나도 없고 그가 수집한 옛 그림과 청자
, 병풍의 모조품,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지은
미술사 관련 서적들, 방석과 조촐한 가구들이
놓여져 있다. 게다가 건너방을 제외하면 모두
문 밖에서 그림의 떡처럼 입맛을 다시며 바라
봐야 된다.
(안방과 대청, 누마루는 이곳에서 열리는 문화
프로그램이나 강의 때 들어갈 수 있음)

              ◀  본채 마루


▲  주인 없는 방석이 덩그러니 놓인 본채 안방
간송이 수집한 그림과 병풍의 모조품들이 내부를 수식한다.

▲  건너방에 걸린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美人圖) <모조품>

안방과 건너방, 마루에는 간송이 가지고 있는 옛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이 비싼 그림들이 왜
이곳에 있지? 여기서 특별전을 하나?'
싶었으나 이들은 모두 모조품이다. 진품을 이곳에 두는
것은 자칫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도난/납치의 우려가 높다.
하지만 이곳도 엄연히 간송이 소유하던 집이었고 그렇다고 내부를 텅 비워둘 수는 없으니 진
짜처럼 생긴 모조품이라도 일단 깔아놓아 관람객들에게 약소하게나마 시각적 보상을 해주고
있다. 도봉구는 이곳을 간송기념관으로 삼아 관련 유물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아직까
지는 진전이 없다.


▲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그린 송파진(松坡津) <모조품>

▲  고양이와 나비가 서로를 희롱하고 있는 김홍도(金弘道)의
묘접도(猫蝶圖) <진짜 같은 모조품>

▲  도봉산의 시원한 바람이 머물고 있는 누마루
대나무가 운치 있게 깃든 돗자리와 은근히 탐이 나는 황금색 방석,
식탁, 찻잔 등의 다기(茶器)가 놓여져 있다.

▲  확대해서 바라본 누마루 내부와 대나무 돗다리. 황금색 방석

▲  본채 뒷쪽에 심어진 품격이 돋보이는 굴뚝
궁궐 굴뚝을 살짝 옮겨놓은 듯 하다.

▲  본채 동쪽 협문과 기와 담장
가옥 주변을 돌담으로 빙 두르고 본채 동쪽에도 별도의 돌담과 협문을 두었다.

▲  서쪽에서 바라본 전형필 가옥

▲  전명기, 간송 전형필 묘역

전형필 가옥 뒷쪽 언덕에는 전명기(1870~1919)와 간송 전형필의 묘역이 있다. 간송의 유택(幽
宅)이 우리집에서 가까운 방학동에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 한편으로는 소중한 자산처럼 든
든하기도 한데, 방학동 가옥의 존재는 2013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곳이 개방되기 이전에는
그 뒤에 그의 무덤까지 있을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1919년에 전명기가 죽자 간송은 양부가 머물던 가옥 뒷쪽에 자리를 닦아 그의 묘를 만들었다. 아마도 여기가 풍수지리적으로 괜찮은 자리였던 모양이다. 이후 가옥은 제사를 지내는 재실의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간송마저 무심히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양부 무덤 옆에 묻
혔다. 그리고 1987년 간송의 부인인 김점순 여사(1905~1987)가 세상을 뜨자 남편 무덤에 합장
되었다.

이곳 무덤들이 서로 너무 닮아서 숙부와 조카 겸 양부와 양아들이 죽어서도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 같으며, 밑도리에 호석(護石)을 두룬 큰 봉분(封墳)만 있을 뿐, 그 흔한 묘비(묘표)도
없다.
묘역 밑에는 간송이 수습한 장명등(長明燈)과 양석(羊石)이 1쌍씩 배치되어 있으니 이것이 묘
역 석물의 전부로 그마저도 그가 수집한 문화유산을 활용했다. 천하 제일의 부자로 살았던 그
들이지만 봉분만 좀 클 뿐, 그야말로 소박하고 조촐한 모습이라 참으로 정감을 들게 한다. 무
덤만 쓸데없이 호화로운 졸부들, 고위 위정자 잡것들, 친일매국노 개쓰레기들과 너무 크게 대
비된다.


▲  쌍둥이꼴로 너무 닮은 전명기(왼쪽)와 간송 부부(오른쪽)의 무덤

▲  묘역으로 인도하는 언덕길
수풀이 수북히 자라나면서 완전한 녹색
도화지가 되었다.

▲  묘역 밑에 자리한 늙은 장명등
간송의 구원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며
구원자의 묘역을 지킨다.


▲  간송 묘역에서 바라본 전형필 가옥과 그 주변

▲  묘역 밑에 옹기종기 모인 상석(床石) 등의 석물, 그리고 대자연이
간송을 흠모하며 깔아놓은 자연산 푸른 융단과 들꽃들


* 전형필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431 (시루봉로 149-18, ☎ 02-954-5757)
* 전형필 가옥(간송 옛집)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방학동계곡에서 만난 한줄기 바위글씨와 옛 절터

▲  도봉산 방학동계곡 산길

도봉구의 새로운 샛별, 전형필 가옥을 간만에 복습하고 햇님의 퇴근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
어 방학동계곡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 오래된 바위글씨와 절터를 오
래간만에 보고자 함이다. 이들도 우리집에서 무지하게 가까운 곳은 분명하나 1년에 1~2번 찾
을 정도로 인연이 잘 닿지를 않는다. 아니 너무 가까운데 있어서 인연을 일부러 거절했는지도
모른다.

방학동계곡 산길은 시루봉과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방학동 주민의 소
중한 산책지로 산길 또한 잘 닦여있는데, 길과 가깝게 거리를 두고 방학동계곡이 졸졸졸~♪
교향곡을 선사하며 흘러간다.


▲  숲에 묻힌 방학동계곡

방학동계곡은 도봉산 최남단에 자리한 조그만 계곡으로 방학천과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숲이 짙은 계곡 중류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싹둑 다듬은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즐비
해 경관이 나름 일품이다. 서울 시내와 가까운 이런 계곡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풍류 흔적이
나 낙서가 꼭 있기 마련인데, 그 예상대로 이곳에도 그들이 남긴 숙성된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었다.
허나 그들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기에 계곡을 더듬으며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여야 된다.
다행히도 숨바꼭질 난이도는 낮으며 계곡을 따라 한문이 새겨진 바위만 찾으면 술래는 끝이다.


▲  귀록계산 바위글씨 윗쪽 방학동계곡
대자연이 칼로 싹둑 다듬은 것일까? 유난히 각이 지고 반듯한 암반이 많다.
비록 골짜기는 작아도 이 정도의 경치면 충분히 옛사람들이 반할만하다.


바위글씨와 숨바꼭질을 벌이며 계곡을 더듬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산길에서 조금 떨어
져 있음) 사실 폭포라 하기에도 좀 민망한 수준인데, 그래도 계곡물이 완만하게 누운 바위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지니 엄연한 폭포이다. 바로 이 폭포 주변에 바위글씨 2개가 서려있다.


▲  바위에 의연하게 깃든 귀록계산(歸鹿溪山) 바위글씨

폭포 옆에 90도로 각을 진 바위 피부에는 귀록계산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들어있다. 바위에 네
모나게 홈을 파고 행서체(行書體)로 글씨를 새겼는데, 그 홈 크기는 77x28cm이다. 그 4자를
단순히 풀이해보면 사슴이 산과 계곡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귀록(歸鹿)은 그 뜻이
아니라 방학동과 인연이 깊은 귀록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호이다. 그러니까 조현명의
산과 계곡, 즉 그의 조그만 세상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현명은 누구일까?

조현명은 풍양조씨로 조인수(趙仁壽)의 아들이다. 자는 치회(稚晦), 호는 녹옹(鹿翁), 귀록(
歸鹿)으로 모두 '사슴록(鹿)'자가 들어가는데, 이중 귀록은 1731년 이후 2번이나 파직과 복직
을 당하면서 사용했다고 한다.
1713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
에 진출했다. 1721년 경종(景宗)이 숙종(肅宗)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내세워 소론(小論)의 공격으
로 힘들어하던 왕세제를 지켰다. 그 연잉군이 바로 영조(英祖)이다.

1728년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
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반란이 진압되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
(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
가 되어 영남 남인(南人)을 다독거리며 백성을 보살폈다.
1731년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마도(對馬島)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대마도주 종씨가 급
히 지원을 애걸했다. 그래서 조정에서 쌀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를 반대하자 파직을 당했으며,
1733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면서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御
營大將)을 지냈다. 허나 1736년 예조판서 시절에 형정(刑政)의 불공평을 상소했다가 또 파직
을 당하고 만다.
다행히 1738년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740년
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1746년 우의정(右議政)
이 되면서 문란해진 양역(良役)을 손질하고자 군액(軍額)과 군역부담자 파악에 착수, 1748년
에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여 왕에게 올렸다.
1749년 청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갔다오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균역법의 제정
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지지하며 양역의 개혁과 온갖 세금의 개선책을 제시
했다. 그리고 당시 많은 문인과 교류했는데, 그중에서도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와
친분이 깊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
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아직도 뚜렷한 귀록계산 바위글씨의 위엄

▲  바위에 비스듬히 누운 와운폭(臥雲瀑) 바위글씨
(25x94cm 크기로 행서체)


조현명이 방학동계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처음 파직을 당한 1731년 이후로 여겨진다. 벼슬에
서 떨려나자 아버지가 묻힌 방학동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는데, 그 묘역이 바로 전형필가옥 동
쪽 언덕에 있다. (시루봉로 길가 북쪽 언덕) 그때 묘역과 가까운 이 계곡에 홀딱 반하여 별서
(別墅)를 짓고 '귀록계산'과 '와운폭'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글씨를 굳이 조현명과 연관 짓는 것은 그가 시루봉 주변에 별서를 지은 적이 있고, 귀록
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의 '귀록집'과 귀록집 권3에 실린 '와운폭우증가련(臥雲瀑又贈可憐)'
, '와운폭'이란 시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글씨로 100%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으며, 그
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별서 위치도 정확하지 않음)

계곡에 있었다는 그의 별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지만 1744년 별서 후
원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소기영회(小耆英會) 벗들을 불러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
며 놀았으며, 등산을 좋아하여 종종 도봉산과 우이암(관음봉) 부근 원통사(圓通寺)에 올라가
몸을 풀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와운폭'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와운폭을 두고 당시 함경도 함흥
(咸興)의 유명한 늙은 기생과 시를 몇 수 주고 받았다. 그때 기생에게 보낸 시 1수를 보면 다
음과 같다. 정리하면 즉 인생무상... 인간의 인생은 결국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功名文武前身事 - 문무의 공명은 모두 전생의 일만 같고
歌舞繁華一夢間 - 번화한 가무는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大笑相看頭似雪 - 크게 웃는다 서로 쳐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것을
空山斜日水流閑 - 공산에는 해 기우는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 귀록계산, 와운폭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0-1


▲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많은 방학동계곡

방학동계곡에 깃든 2개의 바위글씨를 둘러보고 방학동사지를 찾고자 도봉산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북한산둘레길19구간 방학동길과 만나는 곳에서 둘레길에 미련을 두지 말고 계속 직진
하면 얼마 가지 않아서 너른 밭두렁이 나타난다. 이곳은 장수주말농장으로 도봉동과 방학동에
흔한 주말농장의 하나이다.


▲  방학동사지 2단과 3단 석축

장수주말농장에서 잘 닦여진 산길을 따라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자리한 체육시설이 나
온다. 이곳은 방학동 주민들이 결성한 장수산악회가 닦아놓은 것으로 단순히 보면 도시 뒷산
에 널리고 널린 운동시설로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문제는 그 운동시설이 자리한 곳에 돌로 쌓
은 심상치 않은 석축(石築)이 요란하게 널려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석축을 이루고 있는 돌도
꽤 늙어 보여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귀띔해준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곳은 오래된 절터이
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절의 이름이나 창건 시기,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내용
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인데, 절터에 남아있는 석축과 맷돌은 마지막 날의 충격이 참 대단했던
지 여전히 입을 굳게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근 계곡에 별서를 지었던 조현명의
기록에도 절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절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덮여있기 때문에 지역 이름
을 따서 편의상 '방학동사지'라 부른다.

이 미지의 절터에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석축 3단이 남아있다. 가장 위에 있는 1단 평탄
지는 길이 60m, 너비 17m로 20~12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5단 정도로 쌓아서 구축했다. 터
가 가장 넓어서 법당(法堂) 같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단 밑에는 2단을 두
었는데, 평탄지 길이 15m, 너비 5m이며, 석축 길이는 10m, 높이 1.5m로 15~95cm 크기의 석재
를 6단 정도로 쌓았다. 그리고 3단 석축 평탄지는 길이 14m, 너비 6m이다. 석축 앞에는 완만
하게 내리막 경사가 펼쳐져 있고, 바위와 온갖 돌들이 널려 있다.

3단의 석축 외에 맷돌과 우물이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2003년에 1,100㎡를 조사하면서 어
골문(魚骨文)과 종선문(縱線文), 사선문, '官'이 새겨진 기와, 청자 양각 접시, 청자와 백자,
기와, 토기 파편 등을 수습했다. 이들 유물을 통해 최소 고려 중/후기에 세워졌다가 조선 중/
후기 홀연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절터가 아주 쥐꼬리만한 것도 아닌 그런데로 면적을 갖추고 있다. 서울 주변에서 이 정
도 규모의 절이 조선 중/후기까지 있었다면 이름 두 자는 충분히 남기고도 남았을텐데, 그 이
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아틀란티스나 무우대륙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으니 그저 충격과 공
포일 따름이다. 마치 옆집이 없어지거나 죽은 것도 모르고 지내는 요즘의 인간 사막처럼 말이
다.


▲  방학동사지 2단 석축 (석축 서편에는 시멘트와 현대 벽돌이
섞여 있음)


절이 망한 이유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경영 악화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 도선사(道詵寺)나 천
축사(天竺寺) 등 쟁쟁한 절도 많았으며, 계곡을 낀 숲속이라 자연재해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충분히 상상과 추측은 가능하다.
절이 사라진 이후, 터만 황량하게 방치되어 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장수산악회에서 이곳에 체
육시설을 닦으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아직까지도 문화유산으로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해 관리
의 손길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그래도 절터 석축과 맷돌이 간신히 남아있으니 눈썰미가 있다
면 이곳이 절터였음을 그런데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맷돌과 마애불이 있는 절터 서쪽 구역

방학동사지는 서울에 몇 없는 제대로 된 절터 유적으로 그 희소성이 크다. 현재 서울에 전하
고 있는 절터 유적으로는 이곳과 일원동(逸院洞) 절터, 북한산 향림사(香林寺)터 등이 있으며
, 그 외에는 이름만 남았다. (종로 탑골공원에 있던 경천사지는 10층석탑과 비석만 있지 절터
의 흔적은 싹 사라짐)


▲  형태만 남은 절터 맷돌
맷돌 손잡이가 바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저 맷돌을 통해 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공양을 했었다.

▲  절터 1단 석축 평탄지에 조성된 무심한 체육시설들

터가 너른 1단 석축 위에는 법당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있었을 법당과 주변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법당 좌우에는 명부전(冥府殿)이나 선방(禪房)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건물 크기도 다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 돌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옛 절
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터를 무심히 짓누르고 있는 체육시설과 의자들을 싹 밀어버리고 이곳 일대를 뒤집어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벌였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이곳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날지도. 지금까지는
그저 간보는 수준의 조사만 벌였기 때문에 토기나 도기, 자기 파편 정도만 수습된 것이다.


▲  마애불(磨崖佛)과 불상복원비

절터 서쪽 바위에는 늠름한 체격에 잘생긴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 석불은 옛 방학동사지
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동네 주민들이 장수산악회를 조직하면서 그 기념으로 1973년 5
월에 조성한 것이다. 절도 아니고 산악회에서 마애불을 만들어 봉안한 점이 이채로운데, 그들
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마애불은 이곳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으나 기독교 애들이 불상에 해코지를 하며 훼
손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여 산악회 회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1993년 음력 4월에 불
상을 복원하고 불상복원비를 세웠다.


▲  가까이서 대한 마애불의 위엄

마애불을 살펴보면 윗쪽에 비를 막아줄 보개(寶蓋) 같은 것이 두툼히 씌워져 있다. 머리와 몸
통에는 각각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텁게 달려있어 그를 윤기나게 빛내주고 있으며, 머
리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정상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다물
어진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피어나 있다. 볼살은 풍만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들의 소리만큼은 정말 잘 들을 것 같다.

마애불의 체격은 매우 당당해 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훤히 드러냈다. 손에는 보주(寶珠) 같은
것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었으며, 연꽃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 명상에 임한다. 그리고 대좌 밑에는 법륜(法輪) 2글자가 굵직하게 쓰여 있다.

이렇게 방학동절터를 둘러보니 어느새 19시가 되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이 코앞에 이르러 동
네 마실은 이 정도로 흔쾌히 마무리 짓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기서 집까지는 지척이라
30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방학동 구역 동네 1바퀴는 마무리를 고한다.
 
* 방학동사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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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6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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