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은사 선불당, 대웅전
▲ 봉은사 선불당(選佛堂)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64호 |
법왕루 옆구리 길로 가면 선불당이란 큰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
는 건물로 예전에는 비슷한 성격을 지닌 심검당(尋劍堂)이 있었는데, 1939년 대화재로 무너졌
다. 하여 1941년에 다시 지었는데 봉은사에서 승과를 실시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따라 승려
를 뽑는다는 뜻의 '선불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집으로 북쪽과 서쪽, 남쪽에는 쪽마루가 길게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건물 내부 구조는 정면 5칸으로 동서로 4칸, 남북
3칸 규
모의 큰방을 중심으로 3면이 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에 파란색 문을 두었는데, 그
좌우
로 나무장작이 두둑히 쌓여있어 마치 겨울을 나는 산사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 내부 천장과 뒷편이 조금 변형이 되었고, 이제 80여 년 묵은 건물이나 서울에서
이런 형
태의 목조건물이 매우 드물어 봉은사의 문화유산 중 제일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 연등 구름으로 지붕이 지워진 선불당
선불당 쪽마루에는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들이 많다.
▲ 하얀 연등이 으시시 하늘을 훔친 지장전(地藏殿) |
선불당 북쪽에는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39년 대화
재 때 소실된 것을 1941년에 중건했다. 허나 2002년 6월에 화마(火魔)의 장난으로 또 무너진
것을 2003년 겨울에 기존 12평에서 40평으로 크게 늘려 중창했다.
다른 곳은 보기만 해도 기분을 즐겁게 하는 오색 연등 일색이지만 이곳은 기분이 급히 우울해
질 정도로 하얀 연등 일색이다. 이는 이곳이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공간으로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그들에게 부탁하고자 망자를 상징하는 하얀 연등을 달
아서 그렇다. |
▲ 연등이 새로 하늘을 연 대웅전 뜨락과 3층석탑 |
봉은사의 중심인 대웅전, 그 뜨락의 허공을 오색 연등이 장악해 새로운 하늘을 만들었다.
그
러다 보니 이곳의 유일한 석탑인 3층석탑의 머리가 가려져 버렸다. 마치 자욱한 안개에 산 윗
부분이 가려진 것처럼 보이며, 하늘이 탑의 머리만큼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흔히 태초(太初)
의 세계는 하늘과 땅이 바짝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자욱하게 깔린 연등 구름에 머리장식이 가려진 3층석탑은 197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석
가여래의 사리 1과가 들어있다.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
로 마무리를 지은 탑으로 신라 탑의 상징인 불국사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그를 모
델로 하여 만들었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맵시를 자랑하며, 기단석 밑층에는
중생들이 갖다놓은 화분 꽃이 가득하다. 또한 탑 앞에는 중생이 피워놓은 향이 넘쳐나 주변
50m까지 향 냄새가 진동을 한다. |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대웅전(大雄殿) |
자욱한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가려진 대웅전은 봉은사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집이다. 1982년에 중창된 것으로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지방
문화재인 삼세불도와 신중도, 감로도, 삼장보살도(이것은 친견하지 못했음), 홍무25년 장흥사
명
동종 등의 문화유산이 들어있으니 여로(旅路)를 살찌울 겸, 꼭 살펴보기 바란다. 봉은사의
문화유산은 대웅전과 판전, 영산전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어 이들은 이곳의 불교박물관이자 보
물 창고와 다름이 없다. |
▲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봄바람에 펄럭이는 연등 구름
▲ 홍무25년 장흥사명 동종(洪武25年 長興寺銘 銅鐘)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76호 |
대웅전에 발을 들여
동남쪽 구석(뜨락 방향)을 살펴보면 검은 피부의 조그만 종이 눈빛을 보
낼 것이다. 대웅전 내에 그에 대한 안내문도 없고 피부가 탱탱하여 현대 종으로 여기고 지나
칠 수 있으나
그가 바로 봉은사에서 2번째로 늙은 문화유산인 장흥사명 동종이다. (동종의 위
치는 변경될
수 있음)
이 동종은 1392년에 조성된 것으로 종 이름 앞에 붙은 홍무(洪武)는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
장(朱元璋)의 연호이다. 원래 장흥사에 있었으나 어찌어찌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종
을 매다는 용뉴는 사라졌으나 몸통은 잘 남아있다. 종 밑에 연화대(蓮花臺)를 두고 구름을 탄
보살과 당좌가 각각 1개씩 새겨져 있으며, 600년이 넘은 늙은 동종임에도 건강은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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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29호 |
대웅전 같은 법당에는
법당 지킴이인 신중도(신중탱)가 꼭 들어있기 마련이다. 이곳 신중도는
1844년 7월에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세로 200.5cm, 가로 245cm의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 땅의 신중도 중 가장 큰 편으로 화면 위쪽에 구곡병(九曲屛)을 두르고, 향 우측에는 위태
천(韋太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의 신장(神將)을, 향 좌측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
天)을 비롯한 천부중을 빼곡히 배치하여 안그래도 침침한 두 눈을 더 어지럽게 만든다.
신중도의 주인공인 범천과 제석천은 네모난 신광(身光)을 두르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왼쪽
에는 이마에 제3의 눈이 표현된 범천이 큰 보관을 쓰고 합장을 하고 있고, 맞은편에 황금 보(
補)가 달린 옷을 입은 제석천이 옷 속에 두 손을 넣고 서 있다.
범천은 녹색, 제석천은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옷에는 아름다운 문양과 화려한 금니(金泥)가
채색되어 있다. 얼굴과 손 등에는 호분을 칠했으며,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가 단정하면서
도 원만한 모습이다.
범천 밑에는 문관 복장과 원유관(遠遊冠)과 경전을 얹은 관을 쓴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
천자(月宮天子)가 나란히 있는데, 금색의 화려한 각대(角帶)와 금으로 장식된 보관이 천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들 오른쪽에는 비파와 생황, 대금, 피리 등을 연주하는 주악천녀(
奏樂天女)와 향로를 들고 있는 천녀, 당번(幢幡)을 들고 있는 천녀와 동자가 있다.
그림 하단에 피리와 대금을 부는 인물들은 서로 조용히 마주보고 있으며, 위태천을 비롯한 천
룡팔부는 칼과 창을 들고 오른쪽을 향해 주악천녀의 음악을 듣는 듯하다. 위태천은 새 날개깃
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투구를 쓰고 금색의 삼지창을 들고 있으며, 그 아래로 백익선(白翼扇)
을 든 산신(山神)과 주조신(主竈神), 용왕(龍王), 주정신(主井神), 무기를 든 신장들이 서 있
다. 천부중들과 달리 얼굴은 짙은 갈색이며, 부릅뜬 눈과 무성한 턱수염을 갖추고 있어 호법
신으로서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채색은 적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녹색과 흰색, 갈색, 금색 등을 함께 사용했는데, 특히 권속들
의 보관과 옷, 무기, 지물 등에 금색을 많이 사용하고 권속들의 얼굴에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환한 느낌을 준다. 음영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호법신들의 수염과 천부중의 머리 등을
세필(細筆)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탱화 화기(畵記)에는 상궁들의 시주로 송암당 대원(松巖堂 大園)과 월하당 세원(月霞堂 世元)
등 여러 승려들이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시주한 상궁들의 이름은 거의 훼손되어 확인
이 어렵다. 이곳 신중도는 한쪽에 범천과 제석천을, 다른 한쪽에 위태천을 배치한 구도로 19
~20세기에 서울과 경기 지역 신중도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
▲ 봉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36호 |
영가(죽은 사람)
천도를 목적으로 하는 감로도는 신중도보다 등장인물이 무진장 많고 몇 배로
더 복잡한 탱화이다. (신중도는 그에 비하면 아주 양반임)
1892년에 후불탱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민두호(閔公斗)와 상궁의 시주로 금어(金魚) 한봉창엽
(漢峰瑲曄)과 혜산축연(蕙山竺衍), 홍범(弘範), 허곡긍순(虛谷亘㥧), 慧寬(혜관), 戒雄(계웅)
이 그렸으며, 그림의 크기는 세로 200cm, 가로 316.5cm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그림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하며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과 왕후장
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先后), 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칠여래 밑에는 제단 좌우로 높은 기둥이 서 있고 '남무백억화신불(
南無百億化身佛, 석가여래),'남무청정법신불(南無淸淨法身佛, 비로자나)','남무원만보신불(南
無圓滿報身佛, 노사나)의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온갖 꽃과 공양물을 가득 설치했
다.
제단에 이르는 돌계단 밑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 안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
있어 당시(1892년) 제단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으며, 제단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승려들이
나란히 모여 앉아 독경하는 모습과 작법승(作法僧)들이 큰북과 바라 등을 두드리며 의식을
행
하는 모습, 승무(僧舞)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거나 들고서 제단을 향해
가
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그림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1쌍의 아귀(餓鬼)가 크게 묘사되었다. 화염이 뿜
어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으나 얼굴 표정 등에
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을 입은 남녀가 춤을 추거나 싸우는 장면, 대
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거꾸로 서는 묘기를 부리고 초랭이가 부
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를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속세의 다양한 장
면들이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터의 모
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 장면은 주로 장례나 영가 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그림 우측에는 뇌신을 표현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등 '법
화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농사짓는 모
습, 공부하는 모습,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갖고 무리를 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을 벌하는 모습, 전쟁 장면 등을 표현
하였다. 채색은 전체적으로 적색과 황색, 흰색, 청록색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감로도는 수국사(守國寺) 감로도(1832년)를 비롯해 수락산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등 서울/경기 지역의 19, 20세기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는
데, 1883년에 개운사 감로도를 그린 대허 체훈(大虛 軆訓)과 천기(天機)가 봉은사 불사에 깊
이 관여한 적이 있어 그들이 사용했던 초본을 참고한 것이 아닐까 싶다. |
▲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보물 1819호
후불탱인 삼세불도(三世佛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34호 |
대웅전의 주인장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651년에 조각승 승일(勝一)이 9명의 보조 조각승
과 함께 만든 것이다. 1689년 화재로 본존불이 소실되자 새로 조성했는데, 이는 1765년에 제
작되어 불상 뱃속에 넣은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밝혀졌다.
명상에 잠긴 듯 조용한 모습의 가운데 본존불은 좌우협시상보다 30cm 정도 크고, 변형식 편단
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한 모습이다. 좌우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발원문(發願文)과 개금문을 뱃속에
품고 있어 17
세기 불교 조각의 한 단면을 소상히 알려준다. 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요즘에는 복장유물이나 조성 관련 명문이 분명히 있는 경우 거의 국가 보물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센스 하나가 그들이 남긴 작품의 가치를 백두산만
큼이나 높여주는 것이다.
삼불좌상 뒤에 듬직하게 걸린 후불탱은 삼세불도이다. 붉은 색채가 유난히 많이 느껴지는 그
는 1892년에 제작된 것으로 세로 319.7cm, 가로 291.8cm 큰 규모이나 현 삼불좌상의 후불벽(
後佛壁)보다는 폭이 좁다. 하여 그 시절 대웅전 후불벽 규모가 삼세불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
다.
그림 상단 가운데에는 석가여래, 그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이 삼세불을 이루고 있는
데, 보살 6구, 나한 8구, 사천왕, 화불 2구, 용왕, 용녀 등이 삼세불을 둘러싸고 있다. 석가
여래는 높은 수미단 위에 닦여진 청련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했는데, 이마 부분이 넓고
턱 부분이 다소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으며, 육계가 뾰족하다. 신체는 좋은 편으로 왼
쪽 어깨에 붉은 대의를 걸친 후 대의 자락을 오른쪽에 살짝 걸친 변형된 통견식 착의법을 하
고 있다. 대의의 가장자리에는 화문이 있으며, 동일한 화문을 지닌 군의 윗부분이 넓은 U자형
으로 처리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고 길상좌(吉祥坐)를 취한 자세가 안정감을 준다. 약사
불과 아미타불은 석가여래의 얼굴과 착의법, 자세 등이 비슷하나 광배(光背)는 이중륜광으로
처리되었으며 두 상 모두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했다.
석가여래 밑에는 가섭존자(향우)와 아난존자(향좌)가 본존을 향해 서 있고 광배 주위로 좌우
각
3구씩 제자와 분신불이 배치되었으며, 약사불 위쪽에는 용왕, 아미타불 위쪽에는 용녀가
얼굴
부분만 표현되었다.
석가여래의 대좌 아래쪽에는 6구의 보살들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다소 무거운 듯한 보
관에 붉은색 천의를 입고 중앙을 향해 서 있다. 정중앙의 두 보살은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이며, 옆의 보살은 머리에 붉은 해를 단 것으로 보아 일광보살, 반대쪽의 보살은 월광
보살, 가장자리의 두 보살은 특별한 표식은 없으나 아미타불의 협시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
살로 여겨진다.
화면 아래와 위 네 방향에는 사천왕이 있다. 향 우측 상단의 천왕은 비파, 하단의 천왕은 칼
을 들었으며, 향 좌측 상단의 천왕은 탑, 하단의 천왕은 각각 여의주와 용을 들고 있고, 위쪽
의 두 천왕은 화면의 중앙을, 아래쪽의 두 천왕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어 사방을 모두 호위하
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화면 구성은 1878년에 제작된 안성 청룡사(靑龍寺)의 삼세불화와 유사한데, 두 불화
는 일부 권속의 가감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본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세불의 뾰
족한 육계, 착의법을 비롯해 사이 사이에 배치된 분신불과 제자들, 사방을 호위하고 있는 사
천왕의 모습 등이 동일하며, 봉은사 삼세불화에서는 6보살이 표현된 것에 비하여 청룡사 삼세
불에서는 8보살과 두 천녀가 배치된 점이 다르다.
이처럼 두 불화가 동일한 도상을 보여주는 것은 봉은사 삼세불도를 그린 화승 중 영명 천기(
永明 天機), 금곡 영환(金谷 永煥). 덕월 응론(德月 應惀)이 청룡사 삼세불화 제작에도 참여
했기 때문이다.
채색은 붉은 색을 많이 사용했으며 청색과 흰색, 녹색, 금색 등을 함께 쓰고 있다. 특히 석가
여래의 신광 내부를 금색으로 칠한 것은 판전 비로자나후불도(1886년)와 같으며,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신광 내부는 다양한 색대(色帶)로 표현해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으로 보인다. 불/보살
의
얼굴은 음영 없이 처리했으나 나한과 사천왕은 음영을 강하게 사용하였는데 다소 과장되면
서도 능숙한 음영 처리가 돋보인다. 필선은 철선묘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머리카락과 수염 등
의
묘사에서 세밀한 필치가 엿보인다.
이 불화는 인권시주(引勸施主)인 오청정월(吳淸淨月)과 민두호(閔斗鎬)를 비롯하여 여러 상궁
의 시주로 조성되었으며, 이 그림을 주관한 영명 천기가 본사질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그때는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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