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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지어진 천도교의 중심 교당, 왜정 시절 서울 장안 3대 건축물의 하나로 추앙을 받았던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
도봉산고양이 2024. 10. 17. 00:54
1.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
운현궁 서쪽 맞은편이자 삼일대로 서쪽에는 천도교의 중심 건물인 수운회관과 붉은 피부를 지닌 천
도교 중앙대교당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수운회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천도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과 행
사를 치루는 중심 교당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가 세웠다. 그는 300만 교인에게 1가구당 10
원씩을 목표로 돈을 거둬들여 무려 22만원의 거금을 장만해서 지었는데, 설계는 왜인 나카무라 요
시헤이가, 시공은 중원대륙에서 온 장시영에게 시켰다.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1919년
에 일어난 3.1운동으로 다소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400평 규모로 크게 지으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너무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개소리를 떠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의 규모로 축소하여 세상에
내놓으니 그것이 현재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이때 남은 자금은 독립운동에 몰래 투입되었다.
붉은 피부의 벽돌과 화강석으로 다져진 지상 2층, 중앙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로 아르누보
(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세제션(Vienna Secession)풍으로 지어 외형이 견고하고 이색
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은 212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평이며, 정면 좌우
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강당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외벽은 대부분 붉은
벽돌을 쓰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썼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으로 반원아치를 들여 쌓았는데 고딕
양식의 성당 출입문과 비슷하며, 현관 양쪽 끝에는 화강석의 부축벽을 세워 장식했다.
정면 1층 창은 사각형으로 머리 부분에 3개의 화강석, 2층 반원형 아치창에는 7개의 화강석을 넣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탑 중앙부에도 반원아치의 큰 창과 그 위로 3개의 작은 반원아치창을 내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천도교의 중심 교당임에도 딱히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에는 우리 겨례를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며, 비록 조선총독부의 개소리 태클로 작게 지어졌지만 왕년에는 명동성당, 조
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장안의 3대 건축물의 일원으로 추앙을 받았던 위엄 돋는 건물이다. 또
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도 가치가 높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바쁘게 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2. 정면에서 바라본 천도교중앙대교당의 위엄
대교당 내부는 관람이 가능하나 종교행사나 건물 내부 관리 등으로 종종 통제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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