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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 금호문

금호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북서쪽에 있는 1칸짜리 기와 궁문이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는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창덕궁을 조성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이름이 없다가

1475년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비로소 이름을 달게 되었다.

금호문이란 이름은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왕궁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며, 금(金)은 오

행에서 서쪽을 뜻하고, 호(虎)는 호랑이로 서쪽을 의미하는 동물이다. 즉 이름 자체가 서쪽 문을

뜻하는데, 이는 돈화문 서쪽이자 창덕궁 서쪽 경계에 자리해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단 것이다.

 

조그만 궁문이라 승정원, 홍문관 등 궐내각사에서 일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조선 후기

에 각 문마다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했는데, 금호문은 조정 관리인 조신들의 통로로 쓰였다.

그러다가 1789년 정조가 다니고 싶은 문으로 출입하라고 명했지만 오랜 관행 때문인지 잘 지켜

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반란군이 이 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침투했는데, 이때 금호문 수문장인 박효

립이 문을 열었다. 1645년에는 창덕궁을 찾는 이들이 마구잡이로 금호문을 드나들자 근처에 있

던 서연청에서 세자가 조용히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3년 동안 문의 빗장을 걸어두기도 했

다. (이후에도 여러 번 문 폐쇄와 개방이 반복되었음)

 

현재 금호문은 창덕궁 관람객들이 퇴장하는 문으로 살아가고 있다. 보통 창덕궁은 입장권을 끊고

돈화문과 함양문(창경궁과 이어지는 문)으로 들어서며, 금호문과 함양문(17시 이전)으로 퇴장하

면 된다.

 

금호문은 관람시간 이후에는 굳게 문을 걸어잠구며, 휴궁일(매주 월요일)에도 문을 닫는다.

 

2. 입을 굳게 닫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금호문 (이때는 휴궁일인 월요일이었음)

 

3. 금호문 옆에 있는 송학선의사의거터 표석

금호문은 1926년 4월 28일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를 도살하려다가 실패한 아쉬운

현장이기도 하다.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순종이 창덕궁에서 붕어했는데, 빈소를 창덕궁에

차렸다. 이때 빈소로 가는 문을 금호문으로 정했는데, 그 소식을 접한 송학선은 조선총독이 반드시 찾

을 것이라 여기고 금호문 주변에 숨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4월 28일 왜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에서 나왔다. 이에 그 차에 총독 떨거지가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 바로 공격을 가해 칼로 왜인 2명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폐사시키고, 1명은 반

병신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차에는 총독과 그 비슷한 고위 관리는 없었다. 이때 폐사된

2명은 국수회 지부장 다카야마와 경성부회 평의원 사토였으며, 중상을 입은 자는 평의원 이케다로 칼

을 크게 맞았으나 요행히 목숨을 부지했다.

이후 송학선은 왜경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927년 5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

다.

 

송학선의거터 표석은 처음에 돈화문 부근에 있었으나 2024년 10월 17일 금호문 옆으로 옮겼다. 금호

문이 그가 의거를 행했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4. 돈화문 은행나무 (서울시 보호수)

돈화문 서쪽에 푸르게 솟은 은행나무는 약 480년(1972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425년) 묵은 늙은 나무이다. 높이 15m, 나무둘레 3.35m 규모로 창덕궁 관람객들에게 늘 그늘을 베

풀며 소중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사람들이 심은 것들이 대부분인데, 나무에 얽힌 자세한 사연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궁궐 정문 옆에 자리해 있어서 왕족이나 고위 관리가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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