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열리던 1월의 첫 무렵, 남동임해지역의 중심 공업도시인
울산
(蔚山)을 찾았다.
전날 부산 해운대(海雲臺)에서 1박을 머물다가 요즘 크게 뜨고 있는 태화강 십리대숲이
무척이나 궁금하여 다음날 아침 울산 땅으로 출동했는데, 그 십리대숲을 중심으로 태화
강 국가정원이 넓게 닦여져 있다. 그래서 태화루를 시작으로 십리대숲을 비롯한 태화강
국가정원을 크게 더듬기로
하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 태화강(太和江) 높은 벼랑에 자리한 울산 지역의 대표 누각
태화루(太和樓)
▲ 정면에서 바라본 태화루
울산 지역의 대표 누각인 태화루는 울산 도심인 태화동(太和洞) 태화강변 언덕에 높이 자리해
있다.
태화강을 도도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는 신라 중기에 창건된 태화사(太和寺) 시절에 지어졌다
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제6대 제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 그의 마지막 해
인
997년에 멀리 울산까지 순행(巡行)하여 태화루에서 신하들과 지역 세력들에게 연회를 베푼
추억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적어도 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울주8경의 하나로 꼽혔으며, 영남의 대표급 누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하여
이름만 들어도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이는 문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조선 초에는 2번 중수했는데, 권근(權近)과 서거정(徐居正)이 기문(記文)과 중수(重修) 기문
을 남겼으며,
특히 서거정은 '경치는 내가 전에 보아온 누대(樓臺)들과 엇비슷하나 앞이 멀리
까지 트인
것은 태화루가 으뜸이다!'라며 태화루를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경치와 풍류를 즐기는 공간 외에도 공무 공간으로도 바쁘게 살았으나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
어 쓰러지고 만다. 허나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재건되지 못했으며, 그렇게 울산 제일의 경승지
태화루는 전설 속의 아련한 존재로 묻히고 만다.
이후 400년이 흐른 1990년대에 이르러 '태화루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2007년에 울산
시가 복원 기본 계획을 마련해 행동에 나섰다. 그 시절 태화루 자리에는
로얄예식장이 들어앉
아 있었는데, 토지와 건물 보상을 치루어 다른 곳으로 보냈으며, 2011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가
2014년
4월 30일 드디어 완성을 보았다.
지역 기업인 S-OIL 등이 흔쾌히 건립비를 내어 총 507억원이 소요되었으며, 2014년 울산시 최
고 시정 성과로 태화루 복원이 채택되었을 정도로 울산 시민들의 태화루 애정이 남달랐다.
태화루는 생전의 모습이 깃든 그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 막연히 고려 건축 양식을 참조하여
정면 7칸(21.6m), 측면 4칸(10.8m), 높이 13m의 주심포 팔작지붕 누각으로 지었다. 동쪽에는
고려 스타일의 대문채를 높이 지어 대문으로 삼았으며, 그 동쪽에 휴게/문화동을, 누각 앞쪽
에는 태화마당을 닦아
시민들의 쉼터로 삼았다.
태화강 북쪽 절벽 위에 있다는 옛 기록과 학성지(鶴城志)에 딸린 조선시대 지도에 현재 자리
가
'태화루 구지(舊地)'라 나와있어 바로 이곳에 재현된 것이며, 한때 태화루와 경쟁했던 밀
양
영남루(嶺南樓), 진주 촉석루(矗石樓)를 의식한 듯, 그들보다 약간 크게 지어 다시금 왕년
의
위엄을 꿈꾼다.
* 태화루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91-2 (태화로 300, ☎ 052-211-0888)
▲ 고려 양식으로 지어진 대문채(대문)
▲ 태화루 남쪽 현판의 위엄
태화루로 들어서려면
높이 지어진 동쪽 대문이나 서쪽 기와문을 거쳐야 된다. 입장료는 없으
나 공개시간에 제한이 있어 9시부터 18시까지만 문을 연다. (11~2월은 17시까지)
태화루 정면(북쪽)에는 한글로 쓰인 태화루 현판이, 태화강이 있는 남쪽에는 한문 현판을 내
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누각 서쪽에는 익랑(翼廊)을, 대문채와 연결된 동쪽에
는 계단을 닦아 누각 통행을 돕고 있다. 누각 내부로 들어설 때는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가
야 되며, 신발은 들고 가거나 신발장에 넣어두면 된다.
▲ 시원스런 태화루 내부
누각 내부에서 바라보는
태화강과 주변 조망 맛이 제법 좋다. 오죽하면 서거정이 '멀리까지
확트인 것은 이곳이 으뜸'이라며 격하게 찬양까지 했겠는가? 지금은 비록 강 건너로 키다리
건물이 많이 들어서 보이는 범위가 조금 줄어들긴 했으나 그래도 누각의 기능은 여전하다.
▲ 태화루에서 바라본 태화강과 태화교, 그리고 높은 건물이
즐비한
강 건너 신정동 지역
▲ 태화루에서 바라본 태화강과 십리대숲(태화강 국가정원)
태화강이 크게 굽이치는 저곳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십리대숲이 있다.
마음은 벌써 저곳을 맴돌고 있으나 몸이 태화루에 붙잡혀 이렇게
입맛만 다시고 있다.
▲ 태화루와 돌담이 둘러진 남쪽 산책로
▲ 강변 벼랑에 깃든 모감주나무 군락(울산시 보호수 2009-4호)
태화루 남쪽 벼랑에는 110여 년 묵은 모감주나무 18본이 무리를 지으며 몸을 기대고 있다. (
200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00년) 그들은 키가 5~10m 정도로 까칠한 벼랑에
뿌리를 내려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데, 제아무리 철벽 방어의 모감주나무 군락이라고
해도 겨울 제국의 압정(壓政)만큼은 피할 수 없다. 하여
제국에게 모든 것이 털려 앙상한 가
지만 드러낸 채, 애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 대나무잎이 사각사각 율동을 부리는 태화루 서쪽 산책로
▲ 태화강 강변 산책로(십리대숲 방향)에서 바라본 태화루와 용연
태화루 밑에는 주름진
벼랑들이 모감주나무 등의 수풀과 태화강 강물과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
내고 있다.
이곳은 울산 강북과 강남을 이어주던 옛 태화나루터로 용금소, 용연(龍淵), 황룡
소(黃龍沼)라
불렸는데, 이는 태화사를 세웠다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 태화지(太和池
)에서 만난
용의 복을 빌고 조국 신라(新羅)의 번창을 기원한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한낱 전설로 흩어진 태화사 시절, 태화사를 지키던 용의 안식처로 오랫동안 인식이 되
었으며, 이곳 수심이 매우 깊어 명주실 한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인
근 백양사(白楊寺) 우물과 연결된 굴이 있다는 전설까지 나오는 등, 용연에 대한 지역 사람들
의 경외심은 대단했다.
비록 주변이 개발의 칼질로 많이 도시화가 되었으나 용연 주변 풍경은 아직 여전하며,
태화사
시절부터 신성한 곳으로 추앙받다 보니 벼랑 바위에 기우단(祈雨壇)을 설치해
가뭄 때
기우제
를 지내기도 했다.
▲ 태화강 강변 산책로에서 바라본 태화루 주변과 태화강, 그리고
강 건너 신정동 지역
▲ 저만치 멀어진 태화루
태화루를 둘러보고
태화강 강변 산책로를 따라 십리대숲으로 이동했다. 마음은 벌써 십리대숲
과 태화강 국가정원을 몇 번씩 헤매고 있으나 몸은 늙었는지 마음을 금세 따라잡지 못한다.
강변 산책로는 상큼하게 잘 닦여져 있는데, 태화강이 너무 푸르러 하늘과 비슷한 색채를 보여
준다. 하여 태화루를 비롯한 주변 건물과 하늘은 강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한때 지나친 개발주의로 심하게 때가 끼면서 저주 받은 강으로 전락했던 태화강, 허나 지금은
생태가 살아있는 강으로 천하에 모범이 되고 있으며, 강변에는 태화강 국가정원 등 달달한 존
재들이 닦여져 울산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했다.
♠ 태화강 십리대숲 거닐기
▲ 거대한 장벽처럼 둘러진 태화강 십리대숲
태화강 십리대숲은 태화교 서쪽에서 태화강변을 따라 오산광장까지 이어진 기나긴 대나무 숲
길이다. 천하에서 가장 긴 대나무 숲으로 폭은 최대 100m 가까이 되며 면적은 236,600㎡이다.
지금은 10리를 칭하고 있으나 계속 서쪽으로 연장할 계획으로 언양을 넘어 석남사(石南寺)에
이르는 100리 대나무 숲길을 꿈꾸고 있다.
태화강 대나무숲은 제법 역사가 서려있다. 아마도 태화루의 수식용으로 심어진 듯 싶은데 고
려 중기 인물인 김극기(金克己)가 태화루에서 지은 시에 대나무숲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1749년에 제작된 '학성지'에도 그 존재가 나온다.
허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그 대나무숲은 사라지고 말았으며, 이후 환경오염에 고통
받던 태화강을 살리면서 이곳 강변에 대나무숲을 닦으니 그것이 지금의 십리대숲이다. 보통
너른 대나무숲하면 전남 담양(潭陽) 등 시골 지역을 생각하기 쉬우나 울산은 그런 고정관념을
흔쾌히 깨부셨으며, 대도시 한복판 강변에 대숲을 닦아 대나무숲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단단
히 자리를
잡았다.
십리대숲 외에도 대나무생태원과 대나무테마정원 등의 대나무 공간이 있으며, 십리대숲 서쪽
구간에는 삼색 레이저빔 발광 등기구를 설치해 은하수길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다.
10리에 이
를 정도로 긴 대숲이나 그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으며, 대숲 속에서는 공기 속의 비타민이라
불리는 음이온이 다량으로 나와 신경 안정과 피로 회복 등 병에 대한 저항성을 돋구는 효과를
선사한다.
십리대숲을 태화강대공원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십리대숲과 그 주변에 닦여진 여러 정원을 한
덩어리로 묶어 '태화강 국가정원'이라 부른다. 이곳은 우리나라 12대 생태관광지역의 하나이
자 울산12경의 일원으로 2018년 3월 '태화강 지방정원'으로 등록되었으며, 그 다음달인 4월에
태화강 정원박람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2019년 7월 '국가정원 제2호'란 지위를 얻었으며, 그 1호는
그 유명한 순천만(順天灣)으로 순
천만이 자연산이라면 태화강 국가정원은 다소 인공이 가해진
자연 공간이다.
태화강을 활용하
여 다진 이 땅 최초의 수변생태정원이며, 오염된 태화강을 살리고 자연과 정원을 연계해 도시
재생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곳으로서 격하게 추앙을 받고 있다.
태화강 국가정원은 대나무정원(십리대숲) 외에 생태정원, 계절정원, 수생정원, 참여정원, 무
궁화정원, 기타녹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화교에서 삼호교 강변까지 835,452㎡의 너른 규모
를 지니고 있다. (태화지구 484,998㎡, 삼호지구 350,454㎡) 게다가 여름에는 백로, 겨울에는
까마귀들이 즐겨찾는 도심 속 철새도래지이며, 태화강에는 철새와 낚시꾼들을 유혹하는 온갖
물고기들이 뛰어논다.
강변과 도시 정원의 대명사이자 울산에 왔다면 꼭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울산의 필수 관광지
로 나는 이곳의 꿀단지인 십리대숲을 중심으로 국가정원 일대를 거닐었다.
* 십리대숲 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107, 636일대 (☎ 태화강국가정원 안내센터
052
-229-3147~48)
* 태화강 국가정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태화강 십리대숲 동쪽 구간 (대숲 북쪽 길)
대나무숲은 겨울 제국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협동심으로 싱그러운
녹색 빛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대나무숲 밖은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려 폐허의 모습을 보인다.
▲ 태화강변 습지와 징검다리
겨울 제국에게 너무 시달렸는지 얼굴이 누렇게 뜬 갈대들이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소쩍새가 울면 그 봄이 나래를 펼치며
겨울 치하의 세상을 해방시킬 것이다.
▲ 갈대들이 펼쳐진 십리대숲 수변 습지
하얀 털의 백로가 습지를 유유자적하고 있고, 그 너머로 내가 방금까지
있었던 태화루가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태화강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십리대밭교
하얀 너울이 일렁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뚜벅이와 자전거만
통행이 가능하다.
▲ 태화강을 따라 이어진 십리대숲과 강변 산책로
▲ 십리대숲의 속살로 들어서다
길쭉하게 이어진 대숲 속살에 숲길이 숨겨져 있다. 그런 대숲을 중심으로 대숲 숲길, 대숲 북
쪽 길, 태화강과 맞닿은 강변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록 피부의 대나무로 울창한
이곳
만큼은 겨울을 잠시 잊어도 좋을 정도이다. 사각사각 들려오는 대나무 잎소리가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두 귀를 싹 정화시켜주며, 귀(후각) 뿐만 아니라 눈, 코, 마음까지 모두 힐
링이 되는 즐거운 곳이다.
▲ 달달하게 펼쳐진 십리대숲
푸른 대숲 속에 잠시 나를 숨겨본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끔.
허나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함정..
▲ 대나무 내음에 빠져들다 ①
음이온을 비롯한 대나무가 가진 좋은 기운들이 아낌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들의 몸과 마음을 긍정적으로 어루만진다.
▲ 대나무 내음에 빠져들다 ②
▲ 대나무 내음에 빠져들다 ③
▲ 대나무 내음에 빠져들다 ④
▲ 대나무 내음에 빠져들다 ⑤
▲ 대낮을 씹어먹을 정도로 울창한 대숲의 위엄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대나무들은 빈틈이 별로 없을 정도로
울창하여
바깥보다 다소 어둡다. 그러다 보니 마치 천연 감옥 속에
갇혀있는
기분이다.
▲ 삼삼하게 뻗은 대나무숲길
대나무의 성지로 추앙받은 담양 죽녹원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대숲 길이다. 이런 숲길이 산골
도 아니고 대도시 한복판에 길게 펼쳐져 있으니 그 감동은 담양 이상으로 컸다.
▲ 직접 칠 수 있는 대나무 실로폰
이름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실로폰이다.
▲ 십리대숲 은하수길 ①
십리대숲 서쪽 구간은 '은하수길'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대숲이라고 해도
변화도 없이 같은 풍경이 계속되면 지루할 수가 있는 법, 그래서 약간의 변화를 준 곳이
은하
수길이다. 그 600m 구간에 '삼색 레이저빔 발광 등기구' 276개를 설치해 조촐하게 야경을
선
사한다.
낮에는 평범한 대숲길로 조용히 묻혀 있다가 햇님이 퇴근하면 일제히 빛을 발산하며 운영시간
은 일몰부터 23시까지이다.
▲ 십리대숲 은하수길 ②
▲ 십리대숲 은하수길 ③
▲ 십리대숲 은하수길 ④
끝이 보이는 듯 싶어 이제 다 왔나? 싶지만 아직도 더 가야 된다.
▲ 십리대숲 은하수길 ⑤
▲ 십리대숲 은하수길 ⑥
▲ 십리대숲 은하수길 ⑦
▲ 대나무숲길에서 고개를 들어 바라본 푸른 겨울 하늘
▲ 대나무 울타리와 대나무 줄기를 쌓아놓은 곳
십리대숲은 산책로를 제외하고 모두 대나무로 이루어진 대나무 세상이다.
심지어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키가 작은 울타리도 대나무이다.
▲ 어두운 대숲 너머로 살짝 보이는 바깥 세상
이곳은 기나긴 십리대숲 은하수길의 서쪽 끝이다. 그 길이 너무 고와
지루할 틈도 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이르렀다.
▲ 태화강 십리대숲 은하수길의 서쪽 종점
▲ 오산 만회정으로 이어지는 대숲길
내 시간과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십리대숲 은하수길을 끝으로 대숲길이 끝났나 싶었다. 허나
또 다른 대숲길이 나타나 나를 맞이하니 대숲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현재 대숲길은 오
산 만회정까지 닦여져 있음)
▲ 겨울 오후를 깨우는 오산못 분수대와 길게도 펼쳐진 십리대숲
오산못 분수대 너머로 짙게 펼쳐진 푸른 공간이 모두 십리대숲이다.
♠
태화강 십리대숲, 국가정원 마무리
▲ 오산 만회정(鰲山 晩悔亭)
십리대숲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만회정은 만회 박취문(朴就文, 1617~1690)이 말응정마을 앞
오산(鰲山) 기슭에 세운 것이다. (지금보다 북쪽임) 그는 말년에 만회정을 지어 여기서 휴식
을 취하며 벗들을 불러 놀았는데, 1800년대에 소실되어 사라진 것을 2011년에 울산시가 현재
자리에 복원하여 200년 전에 사라진 만회정의 뒤를 잇게 했다.
고즈넉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만회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원래는 가운
데 마루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고, 앞면 전체에 툇마루를 둔 형태였다. 허나 시민들의 관람
과 휴식 편의를 위해 하나의 마루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 앞에서 바라본 만회정
▲ 만회정 주변 태화강 산책로
▲ 만회정에서 바라본 태화강 (삼호교 방향)
오늘도 울산의 젖줄, 태화강은 유유히 동대해(東大海)로 흘러간다.
(태화강 좌우 공간이 모두 태화강 국가정원 영역임)
▲ 자라 암각화
만회정 앞 태화강
강변에 자라 그림 암각화(巖刻畵)와 학 암각화, 관어대 바위글씨, 서장성의
시(詩)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다. (안내문과 이정표가 있음)
누런 피부를 지닌 퇴적변성암에 새겨진 자라 암각화(자라 그림)는 그림 높이 55cm, 입에서 꼬
리까지 길이 69cm로 태화강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태화강 용왕도 모르는 실정이나 자라의 모습은 물론 선까지 아주 선명하여 방금 찍어낸 듯한
모습이다. 지금까지 많은 바위글씨와 바위 그림을 보았지만 이런 자라 그림은 처음이며, 19세
기나 20세기 초에 관어대에 퐁당퐁당 빠진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학 암각화
자라 암각화 옆에는 한
발로 도도하게 선 학 암각화가 있다. 학 그림은 1700년대에 새겨진 것
으로 여겨지는데, 그가 진품이면 그 감동이 십리대숲만큼 컸겠으나 유감스럽게도 근래에 재현
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북쪽으로 50m 떨어진 명정천 동쪽 가장 자리에 있었다. 그림의 높이는 110cm, 너
비 67cm 정도로 '鶴天(학천)'이란 바위글씨도 같이 있었는데, 2000년대에 명정천 하천을 정비
하는 과정에서 아주 어이없게 파괴되어 학 그림과 학천 바위글씨 모두 더블로 사라지고 만다.
개발의 칼질로 허무하게 날라간 그들을 복원하려고 했으나 원래 자리에 데크길이 조성되면서
부득이 관어대 옆 바위에 재현을 했는데, 학 그림은 원래 모습과 다르게 재현되어 논란이 되
기도 했다.
▲ 관어대(觀魚臺) 바위글씨
관어대는 태화강과
명정천이 만나는 지점의 얕은 구릉으로 현재 만회정 주변이다. 여기는 오
산(내오산) 남쪽 밑으로 예로부터 낚시터로 유명해 물고기를 보는 곳이란 뜻의 관어대라 불렸
는데, 바로 그곳 바위(퇴적변성암)에 관어대 바위글씨가 깃들여져 있다.
글씨의 전체 높이는 41cm, 각 글자의 높이 12cm 정도로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글씨가 너무 또렷하여 근래 찍어낸
듯한 모습으로 앞서 자라 암각화처럼 19세기나 20세기 초
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 관어대에서 바라본 태화강 (삼호교 방향)
관어대 바위글씨와 학 암각화, 자라 암각화는 강물과 맞닿은 바위에 새겨져 있다. 하여 비가
많이 내려 태화강이 크게 흥분을 보이는 경우 침수 위험이 있으니 폭우 때나 강물 수위 상승
때는 접근을 삼가하기 바란다.
▲ 오산못, 수생침상원 주변 산책로
산책로 너머로 두텁게 깔린 푸른 존재가 내가 앞서 거닐었던 십리대숲이다.
▲ 십리대숲을 따라 살짝 구부러진 수생침상원 주변 산책로
▲ 십리대숲 은하수길 북쪽에 닦여진 수생침상원 (수생습지)
▲ 십리대숲 은하수길 북쪽 산책로와 겨울에 깊이 잠긴
국화정원(왼쪽)
▲ 대나무 테마정원에서 만난 금양옥죽
줄기 표면이 금황색 바탕으로 불규칙적인 녹색 세로 무늬가 있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주로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 대나무 테마정원에서 만난 오죽(烏竹)
줄기가 첫해에는 녹색이나 2년째부터 검은 자색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피부가 된다. 그래서
이름도 검은 대나무를 뜻하는 오죽이 되었다. 그는 높이 2m에서 최대 20m까지 자라며, 지름은
2~5cm까지 자란다.
▲ 대나무 죽순(竹筍) 모양의 커다란 조형물 (대나무테마정원)
▲ 십리대숲의 시커먼(?) 속살로 인도하는 길
이렇게 보니 십리대숲이 정말 울창하긴 울창하다. 저 안으로 괜히
발을 들였다가 나오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다. (나오기는 쉬움)
▲ 겨울잠에 들어간 나비생태원과 동그란 나비광장
▲ 십리대숲 수변 습지 (새터다리 주변)
▲ 봄의 해방군을 열망하는 수변 습지 주변 나무
십리대숲을 제외한
태화강 국가정원의 다른 식구들은 겨울 제국 치하(治下)라 거의 황량한 상
태이다. 하여 주마등(走馬燈)처럼 간단히 둘러보고 태화동 시내로 나왔다. 솔직히 십리대숲을
목적으로 왔고 그 십리대숲을 고루고루 거닐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른다. 거
기에 겨울에 잠긴 다른 정원들을 후식으로 겯드리면서 여로(旅路)를 크게 살찌웠더니 배가 아
주 터질려고 그런다.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보면 몸과 마음, 머리가 힘듬)
태화동 이후는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전부라 본글에서는 생략하며, 새해 맞이 울
산 태화강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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