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수국사 염화미소전
황금법당으로 유명한 구산동 수국사는 봉산(207.8m) 정상 북쪽 밑에 자리해 있다. 이곳은 오래간만
에 방문으로 경내로 들어서니 예전에는 없던 염화미소전이 팔작지붕을 휘날리며 나를 맞는다.
염화미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500나한의 공간인
데, 건물 현판이 한자가 아닌 한글로 쓰인 점이 특이하다.
2. 염화미소전 내부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오백나한이 가지각색의 모습과 옷차림을 보이며 중생들을 맞는다. 오백나한
은 모두 색이 입혀져 있어 현란하기 그지 없으며, 건물 허공에는 온갖 디자인의 장엄등이 걸려있어
건물 내부를 환하게 수식해준다.
3. 황금법당 대웅보전 앞
수국사는 봉산(수국사에서는 태화산이라 부르고 있음) 북쪽 자락에 자리한 절이다. 이곳은 특이하게
법당을 금으로 거의 도배하여 이 땅 유일의 황금사원이자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임을 내세우고 있는
데, 그로 인해 황금절, 황금사원이란 근사한 별명을 지니고 있다.
이곳은 겉으로 보면 현대 사찰로 보이겠지만 나름 역사가 있는 절로 1459년 세조가 그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고자 그의 묘역인 경릉 동쪽에 세운 정인사(正因寺)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승
려 설준이 절을 지으면서 설계까지 모두 도맡았다.
1471년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성종의 어머니)는
'절을 처음 지었을 때 급하게 만들어서 재목이 좋지 않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 이르며 판내시
부사 이효지(李孝智)로 하여금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중창된 절의 규모는 119칸으로 단청이 아
름다워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하며, 1472년 석가탄신일에 낙성법회를 화려하
게 베풀자 법회에 참관한 승려 수백 명이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인수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그의 남편인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됨>의 원찰이기 때
문이다. 이후 예종의 원찰까지 겸하게 되었고 성종은 봉선사와 비슷하게 쌀 30섬, 면포와 정포를 각
각 50필씩 지원했다.
1504년 절에 불이 나자 연산군은 경기감사와 형조참판를 소환하여 불을 낸 이를 국문하게 하고 놀란
영혼을 위해 위안제를 지내게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다시 중건되어 법등을 이어오다가 1721년 숙종과 인현왕
후의 능인 명릉의 원찰이 되면서 나라를 지키는 뜻의 수국사로 이름을 갈게 된다. 하지만 다시 지원이
끊기면서 절은 폐허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잠시 속세의 뇌리에서 두리뭉실 잊혀져 갔다.
1897년 북한산성 총섭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이하 월초)은 진관사에 들렸다. 진관사는 북한산
(삼각산) 서부를 대표하는 절로 왕실의 지원이 각별했던 곳이다.
그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다가 문득 구석에 처박혀있던 아미타불 앞에 불기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진관사 승려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퉁명스럽게
'그 불상은 수국사가 망해서 부득이 우리 절로 가져온 겁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서 차나 향을 공양한
적이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월초는 발끈하여 아미타불에게 예불을 올리면서 수국사를 반드시 일으
켜 세울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1900년 황태자(훗날 순종)가 중한 병에 걸리자 다급한 고종이 월초에게 태자의 쾌차를 기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월초는 청도 운문사 부근 사리암에서 100일 동안 나반존자 기도를 올렸는데, 80여 일
되는 날에 늙은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금침(金針)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은 월초에게 소망을 물으니 그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을 올렸다. 그러자 황
제가 관직과 녹봉을 제의하자 월초는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어찌 출가한 승려가 나라의 녹을 받겠습니까? 다만 서오릉 부근에 수국사
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긴 것이 애석하오니 그 절의 중창을 소망합니다'
이에 황제가 '효심과 신심(信心)은 원래 하나다'라 치하하며 어용 목수를 보내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
겨 중창하게 했다. 또한 황실에서 내린 돈과 관리들이 모금한 26만 8천냥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2곳에 땅을 구입하여 절에 제공했으며, 1907년에 황실에서 하사한 금 1,500원으로 개금
, 탱화 불사를 하였다. 이때 진관사에 얹혀 살며 굴욕의 시간을 보냈던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와 봉안
했다.
1908년 석가탄신일에는 월초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러 승려의 도움으로 괘불탱과 금강번 31위
를 조성했으며,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금 1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금 4백을 지원했다.
6.25전쟁 때 싹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2005년 이후 주지 토진과 원담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이 땅 유일의 황금사원이란 이미지를 진하게 내걸며 절을 꾸리고 있으며,
초전법륜상과 특이하게 'V'수인(手印)을 취한 성취여래불<成就如來佛>, 여름에만 있다는 목탁새 등
독특한 명물을 지니고 있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녹슬었고 구산동 주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
기도 다소 떨어진다. 또한 많은 절집들이 앞다투어 외형을 불리다 보니 그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은
편으로 수국사는 사치품인 금으로 법당을 꾸며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참고로 금은 사
악한 것을 몰아낸다고 하며, 불상에 금을 입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좋아하
는 광물과 색깔이 바로 금과 금색임)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대웅보전)을 비롯해 지장전, 삼성각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
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이 있다. 그리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 6점이 있으나 이들은 조계사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어서 여기서
는 친견할 수 없다.
4. 찬란하기 그지 없는 대웅보전 내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대웅보전이 들어앉아 수국사의 황금 사원 감성을 가득 자아내고 있다. 계단
위쪽에 높이 들어앉은 탓에 그 위엄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돋보여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7칸, 면적 108평에 이르는 팔작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제외하
고는 기둥과 문짝, 벽, 평방(平枋), 공포 등 건물 안팎을 99.9%의 순금으로 싹 도배하여 호화로움을
마음껏 뽐낸다. 그래서 고운 빛깔의 단청은 없으며 건물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절에서 꽤나 애지중
지한다.
해가 질 무렵이나 어둑어둑한 저녁, 연등 빛에 비친 대웅전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으며, 그 내
부 역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온통 도금이 입혀진 기둥과 벽, 천정을 희롱하는 연등과 장엄등
은 중생의 눈을 잔뜩 흥분시키며 그 황홀한 빛에 두 눈이 머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불단에는 각각의 표정과 제스처를 취한 5개의 커다란 금동불상을 두었고, 그 사이로 작은 보살상과
불상 4개를 배치해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5. 연병장처럼 넓은 대웅보전 내부와 그 허공을 가득 채운 장엄등의 화려한 물결
6.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보전 불단에 들어앉은 불상과 보살상 가운데 특별히 눈여겨 볼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아미타여
래좌상이다.
그는 수국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제외>로 나무로 다져 금을 입혔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앉은 키 104cm, 무릎 폭 72
cm이다. 원래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었으나 수국사로 넘어왔으며, 조선 후기에 절이 망하면서
진관사에서 샛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허나 다른 절의 불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공양도 받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굴욕을 당하다가 그것
을 발견한 월초가 발끈하여 그에게 예불을 표하며 수국사 중창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의 지원으로 절을 중건하고 그를 다시 가져와 법당에 두었다. 진관사에서의 안좋은 추억 때
문인지 약간 인상은 쓰고 있지만 중후하고 넉넉한 얼굴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하
며, 예전에는 신변보호를 위해 유리막으로 감쌌으나 지금은 거추장스러운 유리막을 치우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7. 초전법륜상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내가 갔을 때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직후라 아직까지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었다. 온갖
꽃으로 치장된 공간에 오른손을 치켜든 아기 부처가 자리해 중생들에게 냉수마찰과 복전함 서비스를
애타게 바라고 있다.
8. 초전법륜상(오비구상)
대웅전 우측에는 부처가 승려 5명과 야외학습을 벌이고 있는 공간이 있다. 다들 진지하게 부처의 설
법을 듣고 있는 승려들, 오른쪽 어깨를 훤하게 드러낸 법의를 입은 그들은 부처의 설법에 기뻐하며,
어떤 이는 합장으로 예를 올린다.
이들은 초전법륜상으로 오비구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부처가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는 모
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 땅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합성수지로 조성된 것으로 그
들의 뜨거운 학습 현장을 인자한 모습의 관세음보살 누님이 묵묵히 지켜본다.
9. 수국사의 자랑이자 대표 감성, 황금법당 대웅보전의 위엄
'서울 사진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평구의 서쪽 지붕이자 해돋이 및 일몰 명소, 봉산 정상부 <봉산 봉수대, 봉화정, 서울둘레길16코스> (0) | 2025.02.07 |
---|---|
황금법당으로 유명한 구산동 수국사 ② 황금법당 대웅보전, 석조미륵불입상, 지장전, 삼성각 (0) | 2025.02.06 |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서울에서 가장 큰 고찰, 삼성동 봉은사 <봉은사 영산전, 북극보전, 판전, 판전 현판, 판전 비로자나불도> (0) | 2025.01.30 |
삼성동 수도산 봉은사 <봉은사 영산전, 북극보전, 판전, 연지 관세음보살상> (0) | 2025.01.30 |
호암산성 서문터와 칼바위, 팽이바위 <칼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0) | 2025.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