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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김삿갓묘


' 영월 김삿갓묘 (김삿갓유적지) '
영월 김삿갓묘
 


겨울과 봄의 마지막 경계선인 3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강원도 영월(寧越)을 찾았다. 이번
에는 이틀 일정으로 충북과 경북의 여러 지역을 거쳐 그 험하다는 마구령(馬駒嶺, 820m)
을 넘어 영월에 이르렀는데, 영월에 온 것은 김삿갓묘를 보기 위함이다. (현재 마구령에
는 마구령터널이 닦여져 있으며, 기존 마구령 고갯길은 차량 통행을 금하고 있음)

소백산(小白山) 동쪽에 뉘어진 마구령을 넘으면 바로 충북 단양군(丹陽郡)인줄 알았는데
, 고개 북쪽도 여전히 영주시(榮州市) 부석면 땅이다. '소백산 북쪽까지 영주 땅이 뻗어
있었나?' 은근 놀라고 있으려니 이내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영주 땅의 끝을 알린다.
의풍리(儀豊里)는 단양의 가장 동쪽 구석이자 충북의 동쪽 끝으로 강원도 영월군 와석리
, 영주시 남대리와 살을 대고 있다. 즉 3개의 도(道)가 만나는 산골이다.

의풍3거리에서 오른쪽(북쪽) 길로 접어들어 1굽이 넘으면 영월 땅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
중을 한다. 그리고 마포천 너머로 김삿갓문학관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내 김삿갓유적지
에 도착했다.


▲  김삿갓유적지 입구를 지나는 마포천 (단양 의풍리 방향)


♠  김삿갓유적지 둘러보기

▲  김삿갓유적지 입구

영월 땅 동남쪽 모퉁이이자 충북 단양과 경계를 이르고 있는 와석리 노루목에는 영월의 주요
명소로 손꼽히는 김삿갓유적지가 있다. 구름도, 새도 넘어오기 힘들 정도로 칼처럼 솟은 첩첩
한 산주름 속 340m 고지에 뉘어진 이곳은 김삿갓 묘를 중심으로 그의 시를 머금은 비석과 여
러 석물, 서낭당, 약수터, 돌탑 등을 갖추고 있는데, 여기서 1km 안쪽 산골에는 그가 살았던
집터가 전해오고 있어 이 일대가 조촐히 김삿갓유적지를 이루고 있다.

김삿갓유적지 주차장에서 김삿갓 묘까지는 도보 2분 거리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길 동쪽에
는 마대산(馬垈山, 1,052m)이 베푼 계곡이 졸졸졸~♪ 흐르고 있으며, 서쪽에는 김삿갓의 시를
담은 여러 석물과 돌탑이 조성되어 있어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그리 요란하지 않은 이
들 조형물은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장식용으로 닦여진 것
이다. (석물이 즐비한 길 서쪽은 거의 단양군 땅임)
서낭당 옆 계곡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동쪽)에 김삿갓 유적지의 핵심인 김삿갓 묘가 있다. 무
덤 남쪽이 확 트여있어 주차장에서도 훤히 바라보이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을 따라 들어
가면 마대산과 김삿갓집터로 이어진다.


▲  돌이 입혀진 김삿갓유적지 탐방로 (길은 이거 하나 밖에 없음)

▲  바위에 심어진 커다란 돌탑
마치 엄숙한 성지(聖地)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들은 김삿갓유적지를 꾸미면서 달아놓은 것들이다.

▲  김삿갓 묘를 찾아낸 정암 박영국(靜巖 朴泳國) 선생 공적비

김삿갓 묘하면 빠질 수 없는 고마운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정암 박영국 선생이다. 그가 없
었다면 오늘날 김삿갓 묘도 없었을 것이며, 아직까지도 그의 묘를 찾느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삿갓은 이곳에서 머나먼 전남 화순군(和順郡) 동복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2째 아들인 김
익균(金翼均)이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동복 땅에 묻힌 그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그만 후손들의 관리 소홀로 무덤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무덤은 그 주인마냥 행방이
묘연한 방랑 신세가 되었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영월 지역 향토사학자인 박영국 선생에 의
해 그 숨바꼭질은 끝이 났다.

김삿갓에 퐁당퐁당 빠진 박영국은 1970년대에 김삿갓 묘가 영월 근처 산골에 있다는 막연한
정보를 입수, 김삿갓 관련 자료를 뒤적이며 영월 땅 곳곳을 10여 년 동안 찾아 헤맸다. 그러
다가 1982년 10월 17일 드디어 지역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와석리 산골에서 묘를 찾았고, 김
삿갓의 후손인 안동김씨 휴암공파(休庵公派) 김천한의 확인을 거쳐 1984년 4월 28일 조그만
비석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는 무덤 뿐만 아니라 김삿갓 집터도 찾아냈고 '김삿갓유적 보존회'를 구성해 그가 지은 시
를 말끔히 수집 '김삿갓의 유산'이란 책자도 발간하는 등, 김삿갓을 위해 평생을 살아갔다.
하여 영월군은 1999년 10월 16일 '제2회 난고 김삿갓 문화큰잔치'에서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
리고자 그가 직접 발견했던 김삿갓 묘 입구에 비석을 세웠다.


▲  산책로 서쪽에 주렁주렁 지어놓은 돌탑들

▲  김삿갓이 개성 지역 인심의 야박함을 꼬집으며 지은 시

김삿갓이 개성(開城)에 갔을 때에 일이다. 날이 저물자 어느 집을 찾아가 하룻밤 잠을 청했다.
허나 집 주인이 땔감이 없다며 거절하자 뚜껑이 열린 나머지 이런 시를 지었다.

 邑名開城何閉門  -  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 걸며
 山名松岳豈無薪  -  산 이름은 송악(松嶽)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는가
 黃昏逐客非人事  -  석양의 나그네를 쫓는 것은 사람의 인사가 아니거늘
 禮義東方子獨秦  -  예의 동방의 나라에는 그대만이 진나라 진시황이던가


▲  김삿갓이 샘물을 떠 마시면서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지은 시
(또는 어느 주막에서 술에 만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고 깨어나 보니
그 꿈이 너무나 생생해 세월무상을 깨닫고 허무한 인생을 노래한 시)

白髮汝非金進士 - 허연 머리 너 김진사 아니더냐
我亦靑春如玉人 - 나도 청춘에는 옥인과 같았더라
酒量漸大黃金盡 - 술 주량은 점점 늘어가고 돈은 다 떨어졌는데
世事纔知白髮新 - 세상 일 겨우 알만하니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  물고기가 놓인 밥상에 새겨진 시

생선이 많이 잡히기로 이름난 함경도 명천(明川) 땅을 찾은 김삿갓, 허나 그는 어느 집에서도
생선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없었다. 이에 뚜껑이 뒤집힌 그는 이를 시로 표현해 명천의 무정한
인심을 욕했다.


 明川明川人不明 - 밝다 밝다 하면서도 사람은 밝지 못하고
 漁佃漁佃食無魚 - 어물전 어물전 하면서도 어느 한 집 식탁에도 생선은 없네


▲  갓을 쓴 꼬마신랑 형상과 꼬마신랑 시
13살짜리 꼬마 신랑이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고 지은 일종의 조롱시이다.


畏鳶身勢隱冠蓋 - 솔개도 무서워할 작은 몸, 갓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何人咳嗽吐棗仁 - 어떤 사람이 기침해서 내뱉은 대추씨앗인가?
若似每人皆如此 -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이 몸집이 작다면
一腹可生五六人 - 한번 출산에 대여섯의 아이를 낳을 수 있겠지


▲  환갑(還甲)이란 제목의 시

김삿갓이 천하를 주유하던 중, 환갑 잔치를 하는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시 한 수를 즉
흥적으로 지어 말했더니 주인이 그 시에 감동해 맨발로 뛰어나와 그를 맞이했다.
처음 한 행의 '사람 같지 아니하다는' 구절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욕을 하였으나 2번째 '신선
이 내려온 것 같다'는 구절에서는 다들 감탄했다. 그리고 3번째 '일곱 자식이 모두 도적'이라
는 구절이 나오자 '다음에는 뭐가 나오나' 다들 궁금해했고 그 다음 구절로 '천도복숭아를 훔
쳐다가 환갑잔치를 빛낸다'라 하니 다들 박수를 치며 술을 권했다고 한다.

披坐老人不似人 - 저기 앉은 저 노인네 사람 같지 아니하고
疑是天上降神仙 -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인가 하노라
膝下七子皆爲盜 - 슬하에 일곱 자식이 모두 도둑놈인 것이
偸得天桃獻壽宴 -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잔치를 빛내는구나

▲  천도복숭아를 쥐어든 김삿갓 형상
'환갑' 시의 복숭아를 상징하는 것 같다.

▲  동그란 맷돌 - 김삿갓 유적지를 꾸미고자
영월 어딘가에서 소환한 견고한 맷돌이다.


▲  시선(詩仙) 김삿갓 난고 선생 유적비
2003년에 세운 기념비로 여기서 시선이란 천재적인 시인을 뜻한다.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제일의 시인 이백(李白)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  마대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김삿갓유적지 샘터
동그란 석조에는 마대산이 빚은 옥계수로 가득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담백하기 그지 없다.

▲  금줄이 쳐진 서낭당(성황당)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의 보금자리이다.

▲  서낭신이 봉안된 서낭당(성황당) 내부

▲  김삿갓묘로 인도하는 계곡 다리


▲  마대산과 김삿갓 집터로 인도하는 길 (서낭당 앞)

여기서 1km 정도 들어가면 김삿갓의 집터가 나온다. 그는 부유했던 안동김씨 양반가였지만 어
리석은 할아버지 때문에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거의 폐문(閉門)의 신세가 되면서 이
곳 산골까지 들어와 살았다.

김삿갓유적지를 찾았다면 무덤 주변만 살피지 말고 집터(2002년에 지어진 초가가 있음)까지는
꼭 갔다 오기 바란다. 그리 힘든 길도 아니다. (나는 그곳까지 안 들어갔음;;)

▲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대산 계곡 (김삿갓 집터 방면)

▲  나무로 지어진 난고정(蘭皐亭)
전통차와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다.


▲  난고정에서 바라본 김삿갓유적지
오늘도 이 첩첩한 산골은 바깥 세상과 달리 평화롭고 한적하기 그지 없다.


♠  방랑시인 김삿갓의 마지막 체취, 김삿갓 묘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김삿갓묘

김삿갓유적지 북쪽 언덕에는 이곳의 상징인 김삿갓묘가 둥지를 틀고 있다. 계곡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가면 산뜻하게 정비된 그의 무덤 앞에 이르게 되는데, 서쪽과 남쪽은 나무를 모두
치고 잔디를 깔아 놓아 주차장과 유적지 어디서든 그의 묘가 바라보인다.
평생 천하를 방랑하며 수수하고도 어렵게 살았던 그의 모습처럼 무덤 또한 소박하기 그지 없
는데, 봉긋 솟은 봉분(封墳) 주위로 돌을 적당히 다듬어서 세운 묘비(1984년에 세움), 커다란
돌덩어리를 그냥 엎어놓은 듯한 상석(床石), 간단하게 빚어서 세운 망주석(望柱石)용 돌기둥
2기가 무덤을 지킨다. 만약 후손들이 무덤을 과하게 손질했더라면 (커다란 문인석과 돌난간,
비석, 망주석, 봉분 크게 부풀리기 등)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이 딱
김삿갓에게 어울리고 보기도 좋으며, 정감도 크게 불러일으킨다.
방랑시인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던 김삿갓(1807~1863), 그는 과연 누구인가?

김삿갓의 원래 이름은 김병연(金炳淵)이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로 김삿갓, 김
립(金笠)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보통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립은 삿갓을 한
자로 표현한 것임)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안동김씨 집안인 김안근(金安根)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지는 함평
이씨, 할아버지는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던 김익순(金益淳)이다.

김익순이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가 되어 그곳을 다스리던 중,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터졌다. 홍경래의 반란군은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여 위엄을 떨쳤는
데,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가 반란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처단되었다. 허나 김익
순은 그 난리통에 술을 거하게 마셔 잠까지 자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반란군은 바로 그때를
이용해 선천을 쉽게 점령해 버렸고 그는 홍경래에게 잡히고 만다. 허나 인물됨됨이가 썩 변변
치못해 목숨을 애걸하며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항복하여 반란군의 일원이 되었으나 반란은 금방 평정되었고, 김익순은 그 실수를 만
회하고자 반란군 참모였던 김창시의 목을 급히 1,000냥에 구입, 조정에 보내 자신의 공으로
위장하는 뻔뻔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비열한 행위는 이내 들통이 났고, 김익순은 조정을 희롱하고 반란군에 항복한 역적
으로 처단되고 만다. 그 못난 할아버지로 인해 부유하게 살던 김삿갓 집안은 졸지에 멸족(滅
族)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김병하(金炳河)와 김삿갓 형제는 집안 노비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으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했다.

허나 그 시절은 순원왕후(純元王后)를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패거리가 나라를 장악하고 있었
다. 그래서 같은 안동김씨라는 점이 작용해 김익순만 죽이고 그의 아들과 손자는 가문에서 폐
문<閉門, 폐족(廢族>시키는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 지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김삿갓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비록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으나 역적의 자손이라는 손가락질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고 앞
날까지도 막혀 버리고 말았으며, 아버지는 집안이 박살난 것에 대한 울분이 쌓여 결국 화병으
로 죽고 만다.

▲  서쪽에서 바라본 김삿갓묘

▲  서쪽 멀리서 바라본 김삿갓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집안의 비극을 숨긴 채, 경기도 광주(廣州)로 거처를 옮겼다. 허나 그것
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아 이천, 가평, 평창을 전전하여 끝내 마대산 자락인 영월 와석리 산골
까지 흘러들어왔다. 그 산골에서 어머니는 할아버지 김익순의 정체를 꽁꽁 숨기며 김삿갓 형
제를 정성껏 양육했다. 직접 글과 온갖 경서(經書)까지 가르쳤는데, 김삿갓의 글재주가 출중
한 점으로 미루어 어머니의 교양 수준이 꽤 높았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무심히 흐르면서 그들은 완전히 강원도 산골 사람이 다되어갔고, 김
삿갓 형제는 과거 급제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를 닦았다. 그 와중에서 다들 장가를 들면서 썰
렁했던 집안 분위기도 한껏 좋아졌다. 허나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타지역에서 온 가난한 사대
부 집안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들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었다. 김삿갓 어머니의 철저한
비밀 유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때, 영월 고을에서 백일장(白日場)이 열렸다. 열심히 학문을 닦아 자신감이 대단
했던 김삿갓은 60리나 떨어진 영월부 관청으로 달려가 시험에 응시했다. 백일장의 시제는 공
교롭게도 '정시 가산군수의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는 것.
허나 할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김삿갓은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
어 마땅하다'
며 김익순을 실컷 욕하는 내용을 써서 1등을 먹었다.

너무 기뻤던 김삿갓은 집에 돌아와 '엄마 나 1등 먹었어여' 외치며 시험 이야기를 하니 어머
니는 깜짝 놀라 눈물을 흘리며 숨겨진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김삿갓은 그야말
로 큰 충격이었지. 손자로써 본의 아니게 친할아버지를 욕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풍비박산
난 집안이라는 2가지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크게 자책과 좌절을 하게 된다. 백일장 시험이 결국
할아버지를 욕하는 현장이 되었고 바로 그 사람을 팔아먹어서 바로 1등이 된 것이었다.

그 번민에 빠져 무지하게 허우적거리던 김삿갓은 20세 무렵(22살이라는 설도 있음)에 가족을
무책임하게 버려두며 가출을 했다. 이때부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자
책하며 삿갓을 눌러쓰고 죽장을 짚으며 끝없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못난 할아버지 때문에 생
겨난 비극이자 자신과 가족들을 평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절망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삿갓이 조부의 행적과 집안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록 폐문의 처
지를 받기는 했으나 조부 외에는 모두 처벌 받지 않았으며, 양반의 신분도 미약하게나마 유지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풍비박산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서울에 올라가 공부를 했으
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영월 백일장에서 썼다는 시도 조부의 못난 행적을 알고 있음
에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일부러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자신의 뜻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입신양명의 욕심을 버리고
방랑시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김삿갓묘
무덤 앞에 망주석용 돌기둥 1쌍이 서 있어
외로운 묘역을 지킨다.

▲  정면에서 본 김삿갓 묘
묘비에는 '시선 난고 김병연지묘(詩仙蘭皐
金炳淵之墓)'라 쓰여 있다.


김삿갓은 제일 먼저 금강산(金剛山)을 찾았다. 거기서 많은 시객(詩客)을 만나 시를 지으며
술을 얻어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의 금강산 시는 제법 유명하여 선비들이 그의 시구절
(詩句節)을 앞다투어 받았고, 그 시구절을 가보처럼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그 다음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가 4년 뒤 집에 돌아와 1년 남짓 머물렀다. 그때 2째 아들 김
익균을 보게 된다. 아들까지 새로 보게 되자 다시 집을 나와 서울과 충청도, 경상도를 돌았고
,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書堂)에서 몇 년 동안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돈이 조금 생기자 다시 뛰쳐나와 전라도와 충청도, 평안도를 돌고 어린 시절 잠시 살
았던 곡산에 들려 노비 김성수의 아들 집에서 1년 정도 훈장 노릇을 했다.

한편 그의 아들 김익균은 못난 아비를 찾고자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무리 응어리지는 한
이 있다고 해도 가장(家長)이 가족을 팽개치고 바깥을 전전하며 풍자시나 짓고 앉았으니 아들
도 마누라도 가슴이 참 답답했을 것이다.
다행히 계룡산(鷄龍山) 밑에서 부자가 상봉을 하게 된다. 태어난 이후 한참 만에 보는 것인데
어떻게 서로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렇게 상봉을 했건만 아들이 자고 있는 틈을 타 무심
하게 도망을 쳤고, 1년 뒤 경상도 어느 산골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
내놓고 그 사이에 또 도망을 치는 비정함을 보였다. 그러다가 3년 뒤 경상도 진주(晋州)에서
다시 만나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이내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 삼아 또
사라졌다. 이후로도 아들의 아버지 찾기는 계속 되었으나 실패했으며, 그 후로는 다시 아들과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전라도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화순 동복(同福)에서 쓰러지고 말았는데, 지나가는 선비가 나귀
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보살핀 인연으로 그 집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김삿갓의 글솜씨
가 뛰어나니 아마도 집에 있게 해준 모양이다.
몸을 어느 정도 추스린 김삿갓은 다시 길을 떠나 지리산을 1바퀴 둘러보았으나 건강이 더 나
빠진 상태로 그 선비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 집에서 1863년 56세
의 나이로 한 맺힌 인생을 정리하게 된다. 이후 부근에 묻혔다가 김익순이 수소문 끝에 발견,
수백리 길을 힘들게 운구하여 영월 의풍리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아들 덕분에 객지에서 이름
없는 무덤으로 영원히 방랑할 뻔한 위기를 면하고 집 근처에 고이 잠들어 길고 긴 방랑을 끝
낸 것이다.


▲  김삿갓묘에서 바라본 유적지 모습
가운데에 보이는 길이 김삿갓 집터와 마대산의 속살로 인도하는 길이다.


김삿갓은 산적에게 붙잡혀 모사 노릇을 강요 받거나, 유명한 승려나 기생들과 시 대결을 했다
는 등 다양한 일화가 전하고 있다. 물론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만
큼 김삿갓을 좋아하며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의 시를 통해 야박한 민심과 부패한 양반, 부자들을 마음껏 풍자하고 조롱했으며, 권력층
에게 피해를 받은 민중의 한을 시로 풀어주는 통쾌함도 있었으니 다음의 일화가 전한다.

어느 농민이 지체 높은 양반 세도가가 자신의 집안 묘자리를 빼앗아 그들 딸의 무덤을 썼다며
김삿갓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에 김삿갓은
'사대부의 따님을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눕혔으니 할아버지 몫으로 하오리까? 아버지 몫
으로 하오리까~?'
내용의 시를 써주며 못된 양반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그 시를 본 양반은 얼
굴이 새파랗게 질려 바로 딸의 무덤을 빼서 다른 곳으로 옮겼고 그 자리를 농민에게 돌려주었
다.

또한 그의 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畫的)으로 한시(漢詩)에 파격적 요인이 되
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보면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 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 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 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
間 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이 시에서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과 권위에 대한 도전, 그리고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문자를 맞추고 글자의 고저를 따지고 화조월석(花鳥月石)
이나 음풍농월(吟風弄月)만을 따지는 한시를 거부했다. 비록 칠언고시(七言古詩) 따위의 형식
을 빌려 운자를 달았으나 그가 다루는 것은 모두가 속세의 일이었고, 그의 시어에는 더러운
것과 아니꼬운 것, 뒤틀린 것, 속어, 비어가 질펀하게 깔려있다.

작품으로는 그의 시를 정리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으며, 1978년 김삿갓의 후손들이 광
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를 세웠고, 1987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영월에 시비를 세웠다.


▲  김삿갓 유적을 뒤로하며

김삿갓묘까지 다 둘러보니 약하게 내리던 비도 뚝 멈추었다. 그의 집터까지 갈까 했으나 아직
은 갈 길이 멀어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쿨하게 넘겼다. 그게 언제가 될지? 과연 그 인연
이 또 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번에 떠나면 영영 못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김삿갓유적의 모든 것을 뒤로 하며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길 건너편 마포천(馬浦川)으로 가봤
다. 마포천은 마구령 북쪽에서 발원하여 옥동천(玉洞川)을 거쳐 남한강(南漢江)으로 흘러가는
산악하천이다. 하천 하류는 이곳을 수시로 지나다녔던 김삿갓의 이름을 따서 김삿갓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피서의 성지로 김삿갓유적지만큼이나 명성을 날리고 있다. 김삿갓은 바로 이
마포천을 따라 영월 고을과 바깥 세상을 왔다 갔다 했다.

주차장 맞은편 마포천에는 강원도 스타일의 섶다리가 놓여져 있다. 섶다리는 Y자형 나무를 다
리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소나무 솔가지 등을 깐 다음 흙을 덮은 것으로 김삿갓유적지를
꾸민 이후에 지어졌다. 얼핏 보면 좀 부실해 보이지만 이래 봬도 건너다닐만하며 한때 강원도
의 하천을 주름잡던 다리이지만 신식 다리에게 밀려 이제는 영월과 평창, 정선, 횡성 등에 관
광 눈요깃감으로 여럿 지어져 있을 뿐이다.


▲  마포천에 다리를 담군 섶다리
다리를 건너면 김삿갓문학관으로 이어진다. 물론 저 멀리 보이는 다리를 이용해도
상관없다. 허나 강원도에 왔으니 섶다리는 한번 건너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섶다리

▲  소백산의 맑은 기운과 봄의 대한 설래임을 품으며 한강으로 길을
재촉하는 마포천 (섶다리에서 바라본 모습)


섶다리를 1바퀴 거닐다가 차량도 이따금 지나가는 이 고적한 곳에 외마디 부릉 소리를 남기며
다음 행선지로 넘어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
게 마무리 짓는다.

* 김삿갓묘(김삿갓유적지)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8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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