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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송파구의 푸른 꿀단지, 올림픽공원(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한복판에 송파구(松坡區)의 푸른 허파이자 꿀단지로
추앙을 받는 올림픽공원을 찾았다.
올림픽공원은 내 즐겨찾기의 일원으로 매년 2~3번 이상 발걸음을 하고 있는데, 강동구청
역(8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점심을 배불리 섭취하고 올림픽공원 북1문을 통해 공원
속으로 들어섰다.


♠  올림픽공원 입문

▲  덥수룩한 모습의 푸른 성내천 (북1문 무지개다리 주변)

북1문을 지나면 성내천(城內川)에 걸린 무지개다리가 마중을 한다. 상큼한 이름과 달리 평범
하게 생긴 그를 건너면 올림픽공원의 속살로 들어서게 되는데, 다리 밑에는 생태습지보다 더
왕성한 모습의 성내천이 녹음(綠陰)을 잔뜩 드러내고 있다.

성내천은 송파구의 대표 젖줄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는 청량산(淸凉山)에서 발원하여 송
파구 동부를 가로질러 한강으로 흐르는 9.85km(유역 면적 34.11㎢)의 짧은 하천이다. 올림픽
공원의 동쪽과 북쪽을 지나가 공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며, 올림픽공원에 넓게 깃든 몽촌토
성이 바쁘게 살던 시절에는 자연산 해자(垓子)의 역할도 했다.


▲  다가서기가 껄끄러울 정도로 자연이 살아있는 성내천의 위엄
(무지개다리 주변, 한강 방향)

▲  무성한 수풀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성내천 (올림픽공원역 방향)

지금은 생태하천의 대표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울이
파도를 치던 하천이었다. 그때는 하천 제방과 바닥을 콘크리트로 싹 도배한 어리석음을 범해
하천을 완전 고자로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물이 크게 줄어 1년 내내 메마른 상태를 보였다.
게다가 오염물질과 쓰레기의 꾸준한 유입으로 악취까지 진동하여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후 굴레처럼 씌워진 콘크리트를 싹 제거하고 생태하천으로 손질해 2005년 6월에 새롭게 태
어나게 된다. 이때부터 하천 물의 상당수는 한강과 인근 지하철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가져와
채워 넣었고, 수생식물 47,000여 본을 심어 생태하천의 자격을 갖추니 이곳을 등졌던 물고기
와 곤충, 새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성내천 곳곳을 채워나갔다.
또한 산책로와 자전거길, 분수대, 수변데크는 물론 어린이를 위한 무료수영장까지 닦아 송파
구의 꿀단지로 찬양을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꼽히는 등, 속세에서
도 좋은 성적을 받고 있다. 그리고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로 칭송을 받는 서울둘레길8코스
가 오금1교에서 성내4교까지 성내천의 신세를 지며, 송파구가 닦은 송파둘레길의 성내천길은
한강에서 성내4교까지 이어져 도보 산책의 성지로도 바쁘게 살아간다.

한때 세상에서 외면을 받던 밑바닥 하천이 대중들의 사랑과 찬양을 받는 큰 꿀단지로 성장한
의미 깊은 현장으로 생태하천 복원의 정석을 보여준다.


▲  몽촌토성 외성(外城)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서 88호수로 이어지는 성내천 남쪽 산책로를 잠깐 타다가 숲이 무성한 몽
촌역사관 동쪽 언덕으로 들어섰다.
이 언덕은 얼핏 보면 평범한 자연산 언덕처럼 보여 지나치기 쉬우나 그는 몽촌토성 중심부를
보조했던 외성이다. 자연산 언덕에 인공을 조금 넣은 외성은 성내천과 몽촌토성 동벽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토성 중심부와 달리 숲을 쳐내지 않아 올림픽공원에서 가장 숲이 무성한 숲
동산이 되었다. 언덕 능선에는 숲길이 있는데, 그 길이는 300m 정도로 서울역사편찬원 뒷쪽과
몽촌토성 동벽으로 이어진다.


▲  몽촌토성 외성의 낮은 정상부

▲  울울(鬱鬱)한 숲속에 묻힌 몽촌토성 외성
하늘과 햇님, 달님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숲에 푹 묻혀있다.
비록 몽촌토성의 일부를 이루는 작은 언덕이지만 숲만큼은
올림픽공원에서 가장 삼삼하다.

▲  몽촌토성 동벽과 외성이 만나는 야트막한 고갯길
(북문터 방향)

▲  몽촌토성 동벽 목책(木柵)

몽촌토성 외성 언덕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넘어가면 토성 동벽과 산책로가 나오고 여기서 남쪽
으로 방향을 틀면 동벽 앞에 나무를 엮어서 닦은 목책이 모습을 비춘다.

몽촌토성이 흙 중심의 토성(土城)이라 돌로 다진 석성보다 방어력이 조금 떨어질 수 밖에 없
다. 그래서 토성 밖에 보통 목책과 해자 등을 닦아 방어력 상승을 꾀했는데, 몽촌토성은 서북
쪽과 동벽 앞에서 목책의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생토 암반층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로 기둥을 세운 것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 기둥을
세웠으며, 목책 높이는 정확하지 않으나 2m 이상으로 여겨진다.
동벽 목책터에는 목책 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재현/복원했는데, 서북쪽과 동벽 외에도 남
벽 일대에도 목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동벽(東壁) 앞 산책로 (북문터 직전)

▲  몽촌토성 북문터

이곳은 토성의 북문(北門)이 있던 곳으로 토성 동벽과 북벽이 만난다. 여기서 북벽을 타고 나
홀로나무를 지나 서벽으로 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그새 변덕이 일어나 동벽으
로 갈아탔다.


▲  푸른 초원 같은 동벽 안쪽 (북문터 남쪽 가족놀이동산)

▲  몽촌토성 동벽 토성길 (북문터에서 움집터전시관 구간)

올림픽공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夢村土城,
가 사적
)이다. 몽촌토성은 이곳의 진정한 알맹이로 그가 없는 올림픽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
탕과 같다. 즉 그가 있기에 이곳이 역사가 깃든 사적공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와 문
화, 자연이 어우러진 싱그러운 자연지대로 서울 부도심에 남게 된 것이다.

올림픽공원의 거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삼국시대 초기에 조성된 꽤 늙은 토성이
다. 이곳을 인근에 있는 풍납동토성(풍납토성)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제 초기 국도(國都)인
위례성(慰禮城)이나 한성(漢城)으로 우기고 있는데, 위례성과 한성 시절 백제를 한성백제(漢
城百濟)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곳이 위례성이나 한성임을 밝혀주는 유물과 기록, 유적은
무지하게 부실한 실정이다. 또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나라의 도읍으로 보기에는 사이즈도
너무 작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그래도 추정한다고 하더니만 21세기 이후부터는 근거
도 빈약하면서 아주 대놓고 한성백제시대 유적이라고 내세운다.

몽촌토성은 둘레 2.3km(2,285m)에 긴 토성으로 그냥 막연히 백제 때 토성으로 전해져 왔을 뿐
, 거의 방치 수준이었으며, 토성의 이름인 몽촌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 원래 이름은 아
니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되면서 1980년대 초
에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을 이곳에 닦기로 했다.
하여 공사 전에 토성의 비밀을 밝히고자 1983년부터 서울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
후 1989년까지 6차에 걸쳐 조사를 받았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현재 모습으로 복원, 재현되었
다. (1982년 7월 국가 사적 297호로 지정됨)

몽촌토성은 자연산 언덕과 지형에 진흙을 붙인 것으로 경주 반월성(半月城)과 대구 달성(達城
)과 비슷한 유형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다듬기도 했으며, 동북쪽 구릉에
서는 외성의 흔적이 나왔다. 그리고 성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서는 동문/남문/북문터가 확인
되었으며, 토성의 지형을 통해 남~북, 동~서를 잇는 도로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토성의 단점을 보완하고 수비력을 높이고자 서북쪽과 동벽 바깥에서 목책의 흔적이 나왔
고, 서벽과 북벽 앞에서는 도랑(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북벽과 외성은 성내천을 자연
산 해자로 삼았다.

토성 안에서는 출입구가 달린 6각형 모양의 움집터(12곳)와 건물터(4곳), 연못터(2곳), 저장
용 구덩이(30여 개), 무덤 등이 확인되었는데, 삼국시대 초/중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삼
국시대 초반 유물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으니 그중 중원대륙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3세기
경에 동전무늬 도기조각 3점이 성 내부 퇴적층에서 나와 토성 축성시기가 늦어도 3세기 후반
이전임이 분명해졌다.
움집터는 토성을 지켰던 군사들의 막사로 여겨지며, 건물터는 자갈을 다져 기단과 적심을 만
든 정면 3칸 이상, 측면 2칸의 구조로 밝혀졌다. 저장용 구덩이는 입구가 좁고 아랫 바닥이
넓은 복주머니 모양 구덩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구덩이는 음식물을 저장하기에 아
주 좋다. 여기서 220개 이상의 큰 독이 나왔으며, 부뚜막 시설과 조리용 토기, 배식용 토기
등도 나와 그 시절 식문화를 약간 보여준다.
그리고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금귀걸이, 세발토기, 굽다리 뚜껑항아리, 손잡이잔, 돌절구, 쇠
집게, 뼈갑옷, 화살촉 등 왕족과 귀족의 장신구부터 제사 유물, 군사 유물까지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  몽촌토성 동문터 (북쪽에서 본 모습)

토성 내부 면적은 216,000㎡로 인근 해자와 성내천까지 합치면 542,542㎡까지 덩치가 올라간
다. 토성에는 산책로(토성길)가 그림처럼 그어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며, 잠실 지역이 개발되
기 전에는 서벽에서 무려 행주산성(幸州山城)까지 보였다고 전한다.
옛날처럼 방어용의 역할은 상실되었지만 관광/나들이의 성지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올림픽공
원에 왔다면 꼭 1바퀴는 돌아야 1년이 잘 풀리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이자 꿀단지로 높은 인
기를 누리고 있다.

얼떨결에 백제 초기 유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그럼 백제는 어떤 나라였
을까?
백제는 기원전 1세기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溫祚)가 세운 나라로 위례성(한성) 시절이 끝
나던 5세기 말까지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왜정(倭政) 시절에 쓰여진
더러운 식민사관과 지금도 그것을 추종하는 식민사관 쓰레기들, 그리고 그 쓰레기 학설을 신
봉하는 정신불량자들에 의해 백제는 아주 작고 형편없는 나라로 폄하되고 있으나 그들의 좁은
생각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큰 나라였음이 많은 역사자료와 유물, 유적을 통해 흔쾌히 밝혀
지고 있다.

백제는 북경 서남쪽의 요서(遼西)와 산동반도(山東半島), 강남과 오월(吳越) 지역 등 중원대
륙의 많은 지역을 점령, 경영했고, <절강성을 비롯한 수천 리의 영토를 점유했다는 기록, 본
토에서 배로 3개월 이상 걸리는 탐모라(耽毛羅, 대만?)를 통치했다는 기록,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군사가 수십만으로 대륙 상당수를 먹었다는 기록, 신라와 발해가
백제 땅을 나눠가졌다는 기록 등> 가야(伽倻)가 점유하여 꿀을 빨던 왜열도까지 잡아먹어 그
곳을 백제의 별채이자 일부로 만들었다. 또한 동남아까지 힘을 뻗어 많은 지역에 담로(擔魯)
를 설치해 다스렸다.
특히 동성왕(東城王) 시절 북위(北魏)의 기병 수십 만을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현장
은 중원대륙 한복판이다. 백제와 선비족(鮮卑族) 나라인 북위와의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승리
. 남조(南朝)의 여러 잡국들한테 국서를 보내 자랑을 하며 그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  몽촌토성 동문터 (남쪽에서 본 모습)

이렇게 잘나갔던 위례성 시절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태왕(長壽太王)이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 군주인 개로왕(蓋鹵王)을 처단하면서 아주 비참하게 막을 내린다. 이후 위례성 3글자는
아주 희미하게 되어버린다. (이후에도 위례성 이름이 잠깐씩 등장하지만 그것 뿐임)
위례성과 많은 땅을 잃은 백제는 웅진(熊津)으로 천도했으며, 동성왕 시절에 북위를 크게 때
려잡으며 번영을 누렸다. 그러다가 성왕(聖王) 시절에 사비(泗沘)로 국도를 천도했고, 고구려
와 자웅을 겨루며 잃어버린 땅 찾기에 열을 올리다가 신라에게 뒷통수를 맞게 된다. 이에 열
받은 성왕이 신라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신라에게 크게 털리면서 백제 제왕(성
왕)이 포로로 잡혀 처단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이후 무왕(武王)와 의자왕(義慈王)이 신라를 크게 위협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660년 7월 신라
와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연합군에게 허무하게 망하고 만다.


▲  몽촌토성 동벽에서 바라본 올림픽공원 경기장들

올림픽공원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몽촌토성은 공원의 주
인공이 아닌 조연 신세였다. (지금은 거의 주인공처럼 보임) 물론 이곳이 공원이 되면서 몽촌
토성이 개발의 칼질에서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었기 때
문에 토성의 동쪽 부분은 죄다 경기장 등의 체육시설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서둘러 경
기장을 만들고 공원을 닦으면서 발굴조사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6년 만에 뚝 멈춰섰다.

그러다가 2013년 11월, 몽촌토성 발굴 30주년이 되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그 특별전을 기획했
고, 아직도 적지 않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몽촌토성의 속살과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를 들추
고자 2014년부터 다시 조사를 벌이고 있다.


▲  동문터 북쪽 동벽

토성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높이는 왠만한 산성이나 석성(石城) 높이에 버금가서
낮은 곳은 5~6m, 높은 곳은 무려 10~15m에 달하며, 몽촌해자와 접한 북벽과 서벽은 높이도 상
당하고 경사도 아주 각박하다.
토성 보호를 위해 성벽 부분은 금줄을 둘러놓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경사가 완만한 곳은
부드러운 능선을 보여 겨울 제국(帝國)이 눈폭탄을 투하해 은빛세계를 만들면 포대자루를 가
져와 썰매를 타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

* 몽촌토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 (올림픽로 424)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둘러보기

▲  88호수와 88호수수변무대

동문터에서 다시 마음의 변덕이 일어나 토성길을 잠시 버리고 토성 밖 동북쪽에 있는 88호수
를 찾았다.
88호수는 외성 남쪽에 누워있는 작은 호수로 올림픽공원 동북쪽 끝에 자리한다. 성내천 물을
가져와 만든 것으로 성내천의 유수지(遊水池) 역할을 하며, 호수 남쪽에는 88호수수변무대가
자리하여 종종 공연 같은 것이 열린다. 호수 너머로 팔각정과 앞서 거닐었던 외성을 지닌 푸
른 숲동산이 보이며,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풍경이라 속세(俗世)에서 놀라고 상처받은 마음이
어느 정도 위로가 되는 것 같다.


▲  88호수와 쾌청한 5월 하늘
호수 주변의 나무들과 몽촌토성, 햇님과 달님, 구름 등 하늘 식구들까지
호수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  남문터 주변에 있는 야생화학습장 향기원

88호수를 항아리 겉돌듯 남쪽만 살짝 돌고 동문터로 복귀했다. 북문터로 넘어가 북벽, 서벽으
로 돌 생각을 했으나 여기서 가까이에 있는 김구 묘역이 문득 생각에 비쳐 동문터로 도돌이표
처럼 돌아간 것이다.

동문터에서 부드럽게 펼쳐진 토성 남벽길을 500m 정도 가면 남문터이다. 이곳 주변에는 야생
화학습장이 닦여져 있는데, 향기원은 그 일원으로 온갖 들꽃과 작은 수풀들이 무럭무럭 자라
고 있다. 또한 어여쁜 코스모스와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핑크뮬리의 공간도 있어 그들이 한
참 물이 오른 가을에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  몽촌토성 남문터 주변

▲  부드럽고 굵직하게 솟은 몽촌토성 남벽

몽촌토성길은 마치 구름 위를 거닐 듯 거의 완만하고 부드러운 상큼한 길이다. 아무리 걸어도
지루하기는커녕 자꾸만 걷고 싶은 길로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마음만 굴뚝 같지 현실은 어림도 없음)


▲  몽촌토성 남벽에서 바라본 야외조형전시장 주변

▲  몽촌토성 남벽에서 바라본 소마미술관과 지구촌공원 그리고
송파구 방이동(芳荑洞) 지역

▲  몽촌토성 서벽에서 바라본 몽촌호(몽촌해자) 주변

국기광장 뒷쪽이자 몽촌토성 서벽 바깥에는 몽촌호라 불리는 너른 호수가 누워있다. 몽촌토성
의 해자 역할을 했던 곳이라 '몽촌해자'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이곳에서 도랑(해자)의 흔
적이 나왔다. 하여 그 흔적을 바탕으로 호수를 닦았으며, 물은 가까이에 있는 성내천에서 충
당했다.
호수 둘레는 1,800m, 총면적 53,500㎡, 수심 1.4~2m, 담수량은 76,000톤이며, 소마미술관 북
쪽 물레방아에서 물길은 뚝 끊긴다.

호수 중앙에는 포항제철에서 1989년에 달아준 음악분수가 있는데, 물줄기가 최고 30m까지 치
솟아 하늘을 건드리며, 140여 곡의 멜로디에 맞춰 14종 14,000여 가지의 황홀한 물줄기를 연
출한다. 그리고 호수 남쪽에는 국기광장을 사이에 두고 수변무대 2개를 닦았고, 자연형 호안
(湖岸)과 6개의 식물섬을 띄워놓아 생태계를 적극 배려했다.


▲  저 푸른 초원처럼 달달하게 펼쳐진 몽촌토성 서벽 남쪽 구간
서벽 남쪽 구간은 소나무 그늘에 묻혀 솔내음이 진하며, 토성의 비탈진
경사에는 마치 푸른색 양탄자가 깔린 듯,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

▲  충헌공 김구 묘역(忠憲公 金構 墓域) - 서울 유형문화유산

몽촌토성 서벽 남쪽 구간을 거닐면서 토성 안쪽(동쪽)을 잘 살펴보면 소나무들 너머로 철책이
둘러진 어떤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토성길의 유혹에 빠져 주마간산처럼 움직이면 놓치
기 쉬우니 속도를 좀 줄이고 잘 살펴보자. 그 철책에는 올림픽공원의 숨겨진 늙은 명소인 충
헌공 김구 묘역이 조용히 들어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다.

이 묘역은 약간 구석에 있어서 기웃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한 모습인데, 올림픽공원에
서 몽촌토성, 보호수 3그루 다음으로 늙은 이곳의 토박이로 토성 산책로를 거닌다면 여로(旅
路)를 한층 살찌울 겸, 꼭 챙겨보기 바란다.


▲  철책 안에 감싸인 충헌공 김구 묘역
묘역 보호를 위해 그 주위로 바짝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으나
묘역을 관람하는데 별 지장은 없다. 그러니 애써 철책을 넘지 말고
밖에서 조용히 둘러보고 가던 길을 가면 된다.


묘역의 주인공인 김구는 친일파들이 싫어하는 애국지사 김구(金九)가 아니라 조선 중기에 살
았던 김구(金構)로 이름만 같지 한자는 다르다.

김구(1649~1704)는 청풍김씨 집안으로 김징(金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봉 이의길(李義吉)
의 딸이며,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166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1683년 춘당대(春塘臺)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관직 생활
을 시작했다. 전적과 각 조의 낭관(郎官)를 거쳤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있을
때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계속되는 대립을 조정하려고 만언(萬言)에 가까운 시무소(時務
疏)를 올리기도 했다.

경연관(經筵官)과 승지(承旨),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관찰사(觀察使)를 두루 지냈
으며,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어 장녕전(長寧殿)을 경영해 공
을 세웠다. 허나 흉년으로 모든 역사(役事)가 중지된 마당에 내전(內殿)의 명을 받아 집을 지
었다고 해서 오도일(吳道一), 이광좌(李光佐) 등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다.

김구가 잘한 일을 하나 끄집어 본다면 바로 단종(端宗) 부부의 원통한 넋을 조금이라도 풀어
준 것이다. 그는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의 복위를 숙종(肅宗)에게 건의했
는데, 그로 인해 노산군은 강제로 눈을 감은지 241년만인 1698년에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廟
號)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단종의 부인인 송씨의 묘도 능으로 추봉(追封)할 것을 건의해 사릉
(思陵)이란 능호를 받게 했으며, 사릉 능역(陵域) 공사를 맡아 그 공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
가 되었다.
이렇게 단종 부부에게 큰 선물을 안겨준 그는 170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1704년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숙종은 충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구는 제왕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게 존경을 받았다. 육도(六韜)와 도가(道家) 관련 서적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가 패기가 넘쳤다. 그가 남긴 글씨로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는 '백천교중창비(百川橋重刱
碑)'와 경상도 선산(善山, 구미)에 있는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가 있다.

그는 말년에 몽촌토성에 거주했는데, 광주유수(廣州留守)도 자주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하며,
비록 죄인이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김구의 허락을 받아야 잡아갈 수 있었다고 하니 몽촌 지역
에서 마치 지방 세력처럼 그의 영향력이 제법 컸음을 알려준다.

묘역에는 커다란 봉분(封墳)과 비석, 상석(上席), 망주석(望柱石) 1쌍, 양석(羊石) 1쌍이 있
으며, 양석은 근래 후손들이 달아놓은 것이다.


▲  충헌공 김구 신도비(神道碑)

묘역 동남쪽에는 김구의 행적이 소상히 적힌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신도비는 고급 관료와 왕
족 묘역에만 쓸 수 있던 아주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
다.
이 비석은 1743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徐命均)이 썼
다. 무려 280년 묵은 늙은 비석이지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잘 유지하고 있으
며, 네모난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 2마리가 다투는 모습을 새
긴 지붕돌을 얹혔는데, 조각 솜씨가 꽤 현란하다.


▲  토성 바깥에서 바라본 몽촌토성 북벽

서벽을 지나 북벽이 시작되는 망월봉(望月峰) 직전에서 아쉽지만 토성길을 버리고 토성 밑으
로 내려가 북벽 바깥 길로 갈아탔다. 몽촌토성은 토성길을 중심으로 돌다 보니 북벽 바깥 길
은 별로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성 북벽의 서쪽 구간에는 1983년 발굴조사 때 나온 기둥 구덩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 말에
복원한 50m 규모의 목책이 있었다. 2014년에 그 목책을 새로 교체했는데, 그에 앞서 2014년
10월 23일부터 11월 14일까지 목책 주변 144㎡에 대해 다시 조사를 벌였다. 그때 지표로부터
40~80cm 내외 깊이에서 인위적으로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의 다짐층과 토성 축조과정에서 사용
된 다수의 기둥 흔적을 건졌는데, 이를 통해 삼국시대부터 토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토성과 나무 (몽촌토성 북벽)
대자연이 내던진 씨앗들이 토성에 뿌리를 내려 큰 나무로 성장했다. 토성이
얼마나 큰지 나무도 그곳을 언덕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  올림픽공원 피크닉장에서 만난 세모 모양의 큰 나무와 현대 조각품

북벽 밑도리에 닦여진 북벽 바깥 길은 몽촌호와 성내천을 따라 이어지는데, 동쪽으로 크게 구
부러지는 곳에 이르면 나무와 풀밭, 현대 조각품이 어우러진 피크닉장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면 공원 나들이를 시작했던 무지개다리가 나온다.
원래는 몽촌토성 1바퀴와 공원에 깃든 늙은 보호수 3그루를 모두 복습하려고 했지만 여름 제
국이 선발로 보낸 무더운 기운에 몸이 지친다. 하여 여기서 공원 나들이를 쿨하게 접고 무지
개다리와 북1문을 통해 공원 밖으로 나와 강바람과 그늘 맛이 좋은 성내천으로 빠졌다. 더울
때는 그저 물과 그늘이 진리이다.

성내천도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으로 슬슬 다가오는 일몰시간의 재촉으로 오금1교까지 거닐
다가 시내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에서 찾아간 올림픽공원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벌처
럼 날라가서 개미처럼 천천히 나오려고 했는데, 정말 벌처럼 날라가서 벌처럼 나온 기분이다.
허나 올림픽공원이 개장한 1988년부터 40년 가까이 거의 100회 가까이 오가며 복습을 한 곳이
고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우리집에서 올림픽공원까지는 지
하철로 1시간 10~30분 거리)


▲  오금1교에서 성내천을 마무리 짓다 (오금동, 마천동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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