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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굴암에서 바라본 다락능선

거대한 바위 봉우리인 만장봉과 선인봉 밑 해발 460m 고지에 석굴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의 암자로 조계사의 말사로 들어있는데, 673년에 무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도봉산 산신도 심히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절 주변에서 고려

중/후기 것으로 보이는 청자 대접과 조각, 조선 초기 백자와 분청사기의 파편이 나와서 적어도 고

려 중기 이후에 아주 작게 법등을 켠 것으로 짐작된다.

19세기 이후에는 북한산성을 보조하는 병영 사찰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절 주변에 가마터를 만들

어 기와와 그릇을 만들었다. 절 주변에서 '순치6년'(1649년)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나와서 1649년

에 절을 중창한 것으로 여겨지며, 6번 절이 망하고, 6번 중창되었다고 하나 기록이 미비하다.

1935년 석굴암 화주였던 승려 강응담이 불교 신자인 거사 김병용의 시주와 도움으로 건물을 증축

했으며, 김병용은 이때 관세음탱화 1본을 절에 흔쾌히 기증했다.

 

만장봉 그늘에 깃든 경내에는 법당인 만월보전을 비롯해 오백나한전, 범종각, 요사, 석굴법당 등 4

~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천룡도가 전한다. 이 탱화는 1745

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것인데, 다른 곳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쉽

게도 탱화를 공개하지 않아서 그를 친견하지 못했다.

그 외에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조성된 산신도와 절과 주변에서 발견된 고려 후기 청자 대접, 순

치6년명 기와 등도 있었으나 석굴암 주지인 정재가 이들을 2003년 10월에 서울역사박물관에 흔쾌히

기증했다. 그래서 석굴암에서 누릴 수 있는 고색의 기운은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 건물과 석굴은 모

두 근래 손질된 것이며, 소장문화유산 또한 비공개(천룡도) 또는 서울역사박물관에 모두 가 있기 때

문이다.

 

 

2. 석굴암에서 바라본 천하

이곳은 동쪽과 동남쪽이 확 트여있어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여기서는 도봉산의 너른 산주름과 내가

살고 있는 도봉구 일대를 비롯하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광진구, 성북구, 수락산, 불암

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구리와 남양주의 산하가 시야에 들어온다.

 

3. 오색연등이 대롱대롱 걸린 석굴암 경내 (요사와 오백나한전 앞)

 

4. 석굴법당 위에 깃든 검은 피부의 석굴암 바위글씨와 그 위로 장대하게 자리한 만장봉

 

5. 만월보전 금동약사삼존상

만월보전의 주인장인 약사여래상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대동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중생들

을 위로한다.

 

6. 석굴암 오백나한전

경내에서 가장 북쪽 구석에 자리한 오백나한전은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오백나한의 공간이다.

석굴암이 들어 앉은 위치상 만월보전처럼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건물 주변으로 고추장 등의 음식

재료들을 머금은 장독대들이 가득해 은근히 침을 고이게 한다.

석굴암은 공양밥 인심만큼은 아주 후한 곳이다. 특히 초파일(부처님오신날) 공양밥이 백미로 내가 갔

을 때는 나물이 무려 10여 가지, 떡은 7~8가지가 나왔는데, 지금까지 접한 절 공양밥 중 가히 최대급

이다. (보통은 나물이 5~6가지 이내가 나오며, 떡은 1~2가지가 전부임) 그러다 보니 내가 먹어본 절

공양밥 중 이곳이 독보적 1위이다. (이곳을 넘어설 수준의 절 공양밥은 천하에 없었음)

 

7. 관불의식의 현장

즐거운 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 사월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부처가 1년만에 외출을 나왔다. 석굴

암은 오백나한전 앞에 관불의식의 현장을 차렸는데, 꽃으로 곱게 치장된 관불대 앞에 온갖 과일들이

차려져 있다.

 

8. 석굴암을 뒤로 하며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경사의 계단길)

 

9. 석굴암입구

속세에서 궁벽한 곳에 자리한 도봉산 석굴암을 가려면 무조건 이 계단길을 거쳐가야 된다. 다른 길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