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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늦가을 나들이


' 운현궁 늦가을 나들이 '
운현궁
 


늦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내 즐겨찾기의 일원인 북촌(北村)을 찾았
다. 늦가을 누님의 상큼한 향기와 북촌의 구수한 향을 따라 여기저기를 유유자적 거닐었고
그 과정에서 운현궁에도 잠깐 들렸다.
운현궁은 북촌 식구임에도 크게 마음이 가질 않아서 3~4번 오간 것이 전부이다. 하여 운현
궁의 늦가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진지한 복습도 겸해서 억지로 두 발을 운현궁에 들였다.


♠  운현궁(雲峴宮, 국가 사적) 입문

▲  활짝 열린 운현궁 후문(정문)
운현궁에는 4개의 대문이 있었으나 무심한 세월이 모두 잡아가고 지금은
정문으로 쓰이는 후문만 남아 바깥 사람들을 맞아들인다.


북촌 남부이자 안국역(3호선) 남쪽에 자리한 운현궁은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
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던 집이다. 이곳이 무려 '궁(宮)'을 칭하게 된 것은 고종이 태
어난 곳이자 그의 부모가 사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원래 하늘의 표정을 살피던 관상감(觀象監) 자리로 민심이 흉흉하던 19세기 한복판에
여기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민요가 서울 장안에 유행했다. 그 노래에 잔뜩 흥분한 이하응은
그 왕기를 훔치고자 현재 운현궁 동북쪽인 운현초교 북쪽에 집을 마련해 살았고, 최고 명당(
明堂)으로 지목을 받던 덕산 가야사(伽倻寺)를 불질러버려 그곳으로 아비인 남연군(南燕君)의
묘를 옮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1852년 둘째 아들인 이재황(李載晃)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조선 26대 군주인 고종(高宗). 그
양반이다. 우연인지 땅의 기운인지 몰라도 제왕이 될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  운현궁 대문과 대문채 주변

1863년 헌종(憲宗, 재위 1849~1863)이 승하하자 이하응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
>의 도움을 받아 이재황을 왕위에 앉혔다. 하여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어미인 민씨는 부
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로 지위가 크게 격상된다. 또한 제왕이 태어난 곳이고 그 부모가 사
는 집이라 그 위엄에 걸맞게 집을 크게 불렸는데, 신정왕후는 공사비로 17,830냥을 지원했으
며, 매월 쌀 10섬과 돈 100냥을 추가로 보태주었다.
그리하여 1864년 운현궁의 중심이 되는 노락당과 노안당이 지어졌고, 1869년에 이로당이 세워
졌으며, 순종(純宗) 시절까지 적지 않은 건물이 들어섰다. 고종은 이곳에 '운현궁'이란 이름
을 내렸는데, 관상감<서운관(書雲觀)> 앞 고개를 '운현'이라 불러서 그 이름을 취했다. <서운
관 앞에 있는 고개라 하여 '운현'이라 불렸음>

지금은 많이 쪼그라들어 실감이 덜하겠으나 왕년에는 북쪽으로 안국역, 남쪽은 교동초교와 낙
원상가, 동쪽은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와 운현초교를 싹 아우르던 규모로 주위 담장만 몇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길어봐야 3리 이내) 또한 대문도 4개씩이나 두어 제왕의 작은 궁궐과 같았
다. 고종이 주로 이용하는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을 이어주던 경근문(敬覲門), 대원군 전용
문인 공근문(恭覲門)이 있었으며, 그 외에 정문과 후문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정문으로 쓰이
는 후문만 남아있으며, 공근문은 일본문화원 부근에 주춧돌만 겨우 남아있다.
또한 집이 크다 보니 대원군 가족 외에 그의 큰형인 흥녕군(興寧君)의 손자, 운현궁에서 일하
는 사람과 그의 식솔, 군사들, 그리고 그림과 글씨에 능한 문인과 판소리꾼 등의 식객(食客)
들까지 사람들로 봐글봐글했다. 왕년에는 수백 명이 머물렀으며, 1945년 무렵에는 100여 명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  늦가을을 제대로 타고 있는 노안당 대문 앞 느티나무

1866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여기서 가례(嘉禮)를 올렸으며, 대원군이 고종을 대
신해 섭정(攝政)을 하면서 운현궁에서 주로 공무를 보았다. 하여 이곳은 그 시절 조선을 움직
이던 정치/행정1번지이자 권력의 중심지로 바쁜 곳이었으며, 그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운
현궁과 하늘과의 거리가 1자 5치 밖에 안된다며 노락당기에 썼을 정도이다.

대원군은 말년에 공덕동에 아소정(我笑亭)이란 99칸 규모의 별장을 마련하면서 그곳에서 보내
는 시간이 많아졌으나, 그들 부부는 운현궁에서 모두 생을 마감했다. 1897년 12월 부대부인민
씨가 이로당에서 세상을 떴고, 그 2달 뒤인 1898년 2월 대원군이 노안당에서 눈을 감은 것이
다. 하여 그의 장자인 이재면<李載冕, 흥친왕(興親王 1845~1912)>이 운현궁의 주인이 되었고,
흥친왕의 장남인 영선군 이준(永宣君 李埈, 1870~1917), 영선군의 양자이자 의친왕(義親王)의
차남인 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 1912~1945), 이우의 아들인 이청(李淸) 순으로 계승된다.

1912년 왜정(倭政)은 조선 황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시키고 이왕직(李王職) 장관을 시켜
운현궁에 손을 대면서 궁 영역을 조금씩 뜯어먹었다. 허나 대원군 후손들(이로당의 안주인들)
이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곳에 머물며 관리했으며, 1948년 미군정(美軍政)은 이곳을 대원군 후
손에게 넘겼으나 그 소유권을 두고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이 법정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허나 대원군의 후손인 '이청'이 이곳의 소유권을 인정받아 계속 들어앉게 된다.
6.25시절에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우리나라를 방문했는데 전쟁으로 서울에 마땅
한 거처가 없어 그나마 멀쩡하던 운현궁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때 미군의 의뢰를 받아 운
현궁에 좌변기와 수세식 화장실, 욕실을 설치한 이가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이다.


▲  이로당, 노락당 서쪽 뜨락

운현궁의 마지막 주인인 이청은 운현궁 관리에 크게 어려움을 겪어 건물과 적지 않은 부지를
팔아먹었다. 그 과정에서 육사당과 양관 등이 덕성여대에 넘어갔으며, 고종이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운현궁 이전부터 있던 집(운현궁 동북부에 있었음)과 주변 토지까지 1966년에 매각되
어 사라지고 만다. (현재 운현초교 북쪽 율곡로 길가)
1991년 운현궁 모두를 서울시에 매각했으며, 그때 운현궁에 전하는 문화유산을 통 크게 서울
시에 기증했는데, 이들 유물은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들어가 있다.
이곳을 매입한 서울시는 1993년 12월 보수공사를 벌여 속세에 내놓았으며, 처음에는 입장료를
받았으나 2014년 3월부터 무료의 공간으로 해방되어 돈 부담 없이 마음껏 두 발을 들일 수 있
게 되었다. <관람시간 9~18시, 4~10월은 19시까지, 4~11월 금요일은 21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

현재 운현궁에는 노락당, 노안당, 이로당, 수직사, 대문(정문) 정도가 남아있다. 운현궁 식구
였던 육사당과 양관, 양관 정문, 양관 초소는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 들어가 있고, 영로당은
운현궁 일가의 주치의인 김승현에게 넘어가 서로 뻔히 보고 있음에도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

운현궁은 국가 사적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남남이 된 영로당은 '운니동 김승현 가옥(운
현궁 영로당)'이란 이름으로 서울 민속문화유산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운현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114-10 (삼일대로 464, ☎ 02-766-9090)
* 운현궁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노안당 서행각 바깥 부분과 솟을대문

운현궁 후문(정문)을 들어서면 늦가을에 잠긴 너른 뜨락과 함께 길게 담장과 행각을 두룬 공
간이 모습을 비춘다. 담장 등으로 속살을 가리고 있는 그 공간이 운현궁의 심장부로 제일 북
쪽에 이로당, 중간에 노락당, 남쪽에 노안당이 자리한다. 이들은 일반 사대부가에 궁궐 건축
이 가미된 형태로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에 각각 행각(行閣)이 길게 둘러져 있으며, 하나 같
이 크고 길쭉하여 운현궁과 대원군 할배의 높았던 위엄을 보여준다.

▲  노안당 솟을대문

▲  노락당 대문(대문채)


▲  노안당 솟을대문 앞 하마석(下馬石)
견고하게 생긴 이 돌덩어리는 대원군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것이다.
이제는 쓰일 일도 없어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붉게 뜬 낙엽이 주변에 가득 널려 뒷전으로 물려난 잊혀진
존재들끼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노안당(老安堂)

노안당은 1864년 3월에 지어진 것으로 대원군 할배가 생활하던 사랑채이다. 높게 닦여진 기단
위에 크게 들어앉은 그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굴다리를 쓴 민도리집으로 'T'자 구조를 취하
고 있는데, 대청과 사랑방, 침방(침실) 등의 온돌방과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 퇴방(하인들
의 대기 공간), 마루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공간 구성과 견실한 목조 구조, 세부기법은 궁궐
건축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평가를 받는다.
집 이름인 '노안'은 눈이 침침한 그 노안이 아니라 논어(論語)에 나오는 '노인을 편하게 하다
(老者安之)'에서 따온 것이다. 즉 아들이 제왕이 되면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보내게
되어 매우 흡족하다는 의미이다.

대원군은 여기서 많은 국정을 살폈는데, 그의 굵직한 정책과 그릇된 정책이 거의 여기서 태어
나고 논의되었다. 또한 그림과 글씨 등의 취미활동도 여기서 많이 했으며, 인생의 마지막 날
을 보내고 눈을 감은 곳 또한 노안당 큰방 뒤쪽 속방이라 대원군 삶의 절반인 40여 년이 고스
란히 담긴 현장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체취가 조금은 와닿는 기분이다.


▲  노안당 현판의 위엄
노안당 현판은 대원군과 친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다. 허나 그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대원군이 그의 글씨를 모방해서 쓴 것이라고 한다.

▲  노안당 내부 ①

주인이 가고 없는 노안당 내부에는 병풍과 옛날 생활용품, 당시 의상을 취한 대원군과 고종의
인형(마네킹)들이 채워져 있다. 이 방에는 대원군 할배가 그의 주특기인 난을 그리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며, 직접 난을 그려보는 유료 프로그램도 여기서 운영한다.


▲  노안당 내부 ②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인 비리비리한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우리의 장대한 역사를 싹 말
아먹은 대원군 부자가 앉아있다. (조선 이씨 정권이 말아먹은 우리 역사와 영토가 정말로 어
마어마함) 막 왕위에 오른 11살짜리 고종(이재황)이 청도포를 입고 있고, 흑단령(黑團領)을
입은 대원군이 그 앞에 앉아 예를 표한다.


▲  노안당의 뒷모습과 잘생긴 굴뚝(왼쪽)

▲  노안당 뒷쪽과 노락당 남행각

▲  노안당 서행각(西行閣)

▲  텅 비어있는 노안당 부엌

노안당을 서쪽에서 감싸고 있는 서행각은 대원군의 심복인 천하장안, 즉 천희연(千喜然)과 하
정일(河靖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必周)가 머물던 공간이다. 그들은 중인 신분으로 성
을 따서 '천하장안'이라 불렸는데, 대원군이 야인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가 조선 권
력의 핵심이 되자 심복이 되어 대원군의 경호와 정보 수집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  그늘진 노안당과 노락당 뒤쪽 뜨락
높이 석축이 다져진 언덕에는 대나무 등이 무성하게 우거져 일품 그늘을
선사한다. 지금은 운현궁과 속세의 경계선이 되었으나 언덕 너머도
원래 운현궁의 영역이었다. (현재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  운현궁 노락당과 이로당

▲  노락당(老樂堂)의 중심 부분

노안당 북쪽에는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해 있다. 부대부인민씨의 생활공간으로 정면
10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운현궁에서 가장 큰 건물로 대청과 안방, 침방(안주인과
며느리의 침실), 협실(하인들의 대기 공간), 퇴방(상궁들의 대기 장소), 부엌, 마루 등을 지
니고 있다.
1864년에 노안당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건물의 이름인 노(老)는 대원군 본인을 뜻하며, 건물
의 뜻은 '아들이 제왕이 되어 이 늙은이가 즐겁다'는 의미이다.

1866년 3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혼인)를 여기서 치루었는데, 이 가례는 순조 이후 오랫
동안 바닥을 기고 있는 왕실의 권위를 다시 높이고자 조선의 역대 제왕 중 가장 성대하게 하
였다. 운현궁에서 친영례(親迎禮, 제왕이 왕비를 데리고 가는 의식)를 마치고 환궁하는 행렬
에는 2,430명의 인원과 600여 필의 말이 동원되었으며, 고종 내외의 행렬 뒤에 대원군 내외의
행렬이 뒤따르니 이 또한 기존에 없던 모습이었다.
명성황후는 혼인 이후에도 노락당을 찾아 왕실의 예절과 소양을 익히는 등 이른바 왕비 수업
을 받았으며, 대원군 가족의 회갑 잔치와 생일 잔치 등의 큰 행사는 모두 여기서 가졌다.


▲  대원군이 쓴 노락당 현판의 위엄
글씨들이 마치 춤을 추며 움직이는 것 같다.

▲  노락당에 재현된 신정왕후 조씨(오른쪽)와 철종의 왕후인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왼쪽)

노락당도 노안당처럼 비어있는 방에 병풍과 옛 생활유물, 부대부인민씨와
명성황후 등을 재현한 인형들이 채워져 있다.

▲  노락당에 재현된 명성황후(왼쪽)와 부대부인민씨(오른쪽),
민씨 품에 안긴 왕자(순종)와 그 옆에 선 이준용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은 이재면의 아들이자 고종의 조카로 친일매국
버러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작자이다.

▲  맛있는 냄새가 풍길 것 같은
노락당 부엌

▲  노락당 서쪽 문


▲  산뜻한 모습의 노락당 서쪽 뜨락

▲  노락당 서쪽 뜨락을 장식하고 있는 수석들
대원군 후손들이 가지고 있던 수석이다.

▲  세월과 자연이 달아놓은 주름선이 매력적인 수석

▲  된장을 막 빚은 듯 울퉁불퉁 못생긴 수석

▲  노락당 행각과 그 너머로 보이는 양관(洋館)

노락당 행각 너머로 하얀 피부와 어두운 색 머리를 지닌 근대 건축물이 가까이에 아른거린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면 지나치기 쉬우나 그는 운현궁의 옛 식구였던 양관이다. 즉 운현궁에서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운현궁 안내문에는 양관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여 모르기 쉬움)

양관 주변은 대원군의 또 다른 사랑채였던 아재당(我在堂)과 은신군(恩信君, 대원군의 할아버
지)과 남연군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왜국이 조선 황족들에게 당근용으로 1907년에 지어주었다.
왜열도에서 온 가타야마도쿠마(片山東熊)가 설계한 것으로 바로크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지어
졌는데, 곡선과 타원형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현관 출입문을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돌
출되게 지었다.
이준과 이우가 머물러 이준공저(公邸), 이우공저라 불렸으며, 1946년에 덕성여대에 매각되어
덕성여대 종로운현캠퍼스로 쓰이고 있다. 2017년에 방영했던 '도깨비' 촬영지로 속세에 조금
알려졌으나 덕성여대는 외부인 접근에 매우 까칠하여 관람은 꽤 어려운 편이다. 정 보고 싶다
면 학교 정문 수위실에 잘 말해보기 바란다. 참고로 학교 정문으로 쓰이는 기와문은 양관의
정문으로 운현궁의 식구였으며, 양관 옆에 양관 초소(哨所)가 있는데, 양관을 지키고자 세웠
다고 하나 현실은 왜정이 운현궁을 감시하려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가함에 익숙해진 노락당 굴뚝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대던 옛날을 그리워하겠지.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참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이로당(二老堂)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했던 집으로 1869년에 지어졌다. 정면 7칸(또
는 8칸), 측면 7칸 규모로 대청, 안방, 침실, 협실, 퇴방, 마루를 지니고 있으며, 여인들의
중심 공간이라 'ㅁ'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건물의 이름인 이로는 두 늙은이 즉 대원군
과 부대부인민씨를 일컫는다.

1891년 대원군 내외가 회혼례(回婚禮)를 여기서 가졌으며, 1895년 이후 대원군 내외는 이 건
물과 아소정에서 주로 지냈다.


▲  투박한 모습의 이로당 현판의 위엄
'二'는 위쪽으로 납작하게 쓰여졌고, '老'는 너무 다른 글씨 같다.
'堂'은 머리 부분 양쪽 획이 마치 금슬 좋은 새처럼 보여
대원군 부부의 금슬을 표현하는 듯 하다.

▲  이로당 동쪽 행각(동행각)
이로당과 노락당을 이어주던 복도식 행각으로 그 중간 칸 밑에 낮게
문을 두었다. (궁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

▲  이로당 동쪽 뜨락에 곱게 깃든 늦가을 (북쪽 방향)

▲  활짝 열린 이로당 협문

▲  이로당, 노락당 서쪽 뜨락의
네모난 석조(石槽)


▲  경송비(慶松碑)

이로당 뒤쪽에는 경송비란 비석이 있다. 고종이 어린 시절, 집 주변에 있는 소나무에 자주 올
라가서 놀았던 추억이 있는데, 제왕이 된 이후, 그 나무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10대 초반이니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 나무에게 무려 정2품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
고 대부송(大夫松)이란 이름을 내렸다. 소나무를 찬양하고 경축한다는 뜻의 경송비는 바로 그
것을 기리고자 세워진 것이다.
대부송은 대원군이 이곳에 정착한 초기에 살던 집 주변에 있던 것은 분명하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며, 왜정 때 말라죽고 말았다. 아마도 왜정이 고의로 그 나무를
죽인 듯 싶다. 비석 뒷면에는 대부송의 사연이 담겨져 있으며, 원래는 그 나무 앞에 비석이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졌다.


▲  이로당 뒤쪽 굴뚝

이로당 북쪽 담장 너머에도 운현궁 건물과 비슷하게 생겨먹은 기와집이 하나 있다. 담장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그 역시 운현궁의 옛 식구로 그 이름은 영로당(永老堂)이 되겠다.
영로당은 1869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이로당과 복도식 행각으로 연결되었다. 정면 10칸,
측면 2칸 규모로 대원군의 첫 아들인 이재면이 살던 집인데, 그가 골로 간 이후에는 이준용이
머물렀다.
해방 이후, 김승현(金承鉉) 박사가 운현궁 주치의를 담당한 적이 있는데, 1949년 영선군 이준
의 부인인 광산김씨가 그에게 사례로 영로당을 떼어주었다. 그때부터 서로 남남이 된 것이다.
이 집은 '운니동 김승현 가옥'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민속문화재(현재 민속문화유산) 19호로
지위를 얻었다.
김승현의 후손이 소유 관리하고 있어서 관람은 어려우나 나중에 운현궁의 잃어버린 조각을 맞
추어 복원을 한다면 아재당 복원과 양관 복귀, 영로당 복귀가 반드시 필요하다. (양관과 육사
당은 복귀가 어렵다면 속세에 개방이라도 했으면 좋겠음)


♠  운현궁 마무리

▲  북쪽에서 바라본 운현궁 뜨락
옛날에는 저 너머까지 운현궁이 펼쳐져 있었으나 장대한 세월의 의해
지금의 크기로 크게 접혀지고 말았다.

▲  주둥이가 닫힌 우물
운현궁 식구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다. 운현궁에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우물을 여럿 두었는데, 개발의 칼질로 모두 숨통이 끊기고 이제는
무늬만 남아있다.

▲  운현궁의 또 다른 우물
이 우물 역시 뚜껑이 봉해진 죽은 우물이다.

▲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8각형 우물

▲  재현된 정이품 대부송

운현궁 뜨락 북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이곳은 운현궁과 고종, 대원군 관련 유물과 그들의
생활상이 전시/재현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진품인줄 알고 마음이 설랬으나 이곳 유물이 모두
모조품이라는 안내문의 문구에 기운이 제대로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진품은 어디에 있을까
? 그들은 바로 서울역사박물관에 들어있다. (박물관 내에 운현궁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 있
음) 그러니 진품을 보고 싶다면 서울역사박물관을 찾기 바란다.


▲  명성황후의 가례 모습

▲  대원군 교의(交椅)

대원군 교의는 제사를 지낼 때 대원군의 위패를 올리는 단이다. 원래는 시동이라 불리던 남자
아이를 의자에 앉혀 놓던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자에 앉히는 대상이 시동에서 신주(神主)
로 바뀌었다. 그래서 교의는 '앉는다'는 의미에서 '신주를 봉안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
다.

▲  적색 조복(朝服)을 입은 대원군과
녹색 원삼을 입은 부대부인민씨

▲  대례복을 입은 고종과 명성황후

▲  대원군의 낙관 (도장)

▲  대원군이 쓰던 벼루와 먹


▲  교지(敎旨)
헌종이 1845년에 대원군에게 내린 교지 1장

▲  붉은 피부의 금색 글씨가 박힌 노락당 상량문(上樑文, 1864년)

▲  운현궁에 속한 둔토(屯土)의 소재, 등급, 면적, 소유주 등을
기록한 양안(量案)

▲  수직사(守直舍)

수직사는 후문(정문) 우측이자 현재 운현궁 남쪽 끝에 자리한 길쭉한 건물이다. 이곳은 운현
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던 사람들의 거처로 대원군의 권력이 강해지고 궁역(宮域)이 넓어
지자 경호와 궁 관리를 위해 고종이 많은 군사와 관리인을 보내 챙겼다.
지금은 화로와 가구, 호롱불 등 조선 후기 생활용품을 갖다두어 사람의 흔적이 끊긴 빈 방을
채우고 있다. 방 안에는 들어가면 안되며 상황에 따라 툇마루에는 잠깐 엉덩이를 붙일 수 있
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운현궁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는 벚꽃비가 흩날리는 봄
에 찾아가 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싶고, 운현궁의 잃어버린 건물인 양관과 육사당, 영로당도
모두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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