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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雲峴宮, 국가 사적) 입문

▲ 활짝 열린 운현궁 후문(정문)
운현궁에는 4개의 대문이 있었으나 무심한 세월이 모두 잡아가고 지금은
정문으로 쓰이는 후문만 남아 바깥 사람들을 맞아들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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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남부이자 안국역(3호선) 남쪽에 자리한 운현궁은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
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던 집이다. 이곳이 무려 '궁(宮)'을 칭하게 된 것은 고종이 태
어난 곳이자 그의 부모가 사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원래 하늘의 표정을 살피던 관상감(觀象監) 자리로 민심이 흉흉하던 19세기 한복판에
여기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민요가 서울 장안에 유행했다. 그 노래에 잔뜩 흥분한 이하응은
그
왕기를 훔치고자 현재 운현궁 동북쪽인 운현초교 북쪽에 집을 마련해 살았고, 최고 명당(
明堂)으로 지목을 받던 덕산 가야사(伽倻寺)를 불질러버려 그곳으로 아비인 남연군(南燕君)의
묘를 옮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1852년 둘째 아들인 이재황(李載晃)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조선 26대 군주인 고종(高宗). 그
양반이다. 우연인지 땅의
기운인지 몰라도 제왕이 될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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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현궁 대문과 대문채 주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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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헌종(憲宗,
재위 1849~1863)이 승하하자 이하응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
>의 도움을 받아 이재황을 왕위에 앉혔다. 하여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어미인 민씨는
부
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로 지위가 크게 격상된다. 또한 제왕이 태어난 곳이고 그 부모가
사
는 집이라 그 위엄에 걸맞게 집을 크게 불렸는데, 신정왕후는 공사비로 17,830냥을 지원했으
며, 매월 쌀 10섬과 돈 100냥을 추가로 보태주었다.
그리하여 1864년 운현궁의 중심이 되는 노락당과 노안당이 지어졌고, 1869년에 이로당이 세워
졌으며, 순종(純宗) 시절까지 적지 않은 건물이 들어섰다. 고종은 이곳에 '운현궁'이란 이름
을 내렸는데, 관상감<서운관(書雲觀)> 앞 고개를 '운현'이라 불러서 그 이름을 취했다. <서운
관 앞에 있는 고개라 하여 '운현'이라 불렸음>
지금은 많이 쪼그라들어 실감이 덜하겠으나 왕년에는 북쪽으로 안국역, 남쪽은 교동초교와 낙
원상가, 동쪽은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와 운현초교를 싹 아우르던 규모로 주위 담장만 몇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길어봐야 3리 이내) 또한 대문도 4개씩이나 두어 제왕의 작은
궁궐과 같았
다. 고종이 주로 이용하는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을
이어주던 경근문(敬覲門), 대원군 전용
문인 공근문(恭覲門)이 있었으며, 그 외에 정문과 후문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정문으로 쓰이
는 후문만 남아있으며, 공근문은 일본문화원 부근에
주춧돌만 겨우 남아있다.
또한 집이 크다 보니 대원군 가족 외에
그의 큰형인 흥녕군(興寧君)의 손자, 운현궁에서 일하
는 사람과 그의 식솔, 군사들, 그리고
그림과 글씨에 능한 문인과 판소리꾼 등의 식객(食客)
들까지 사람들로 봐글봐글했다. 왕년에는 수백 명이 머물렀으며, 1945년 무렵에는 100여 명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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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을 제대로 타고 있는 노안당 대문 앞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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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여기서 가례(嘉禮)를 올렸으며, 대원군이 고종을 대
신해 섭정(攝政)을 하면서 운현궁에서 주로 공무를 보았다. 하여 이곳은 그 시절 조선을 움직
이던 정치/행정1번지이자 권력의 중심지로 바쁜 곳이었으며, 그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운
현궁과 하늘과의 거리가 1자 5치 밖에 안된다며
노락당기에 썼을 정도이다.
대원군은
말년에 공덕동에 아소정(我笑亭)이란 99칸 규모의 별장을 마련하면서 그곳에서 보내
는 시간이 많아졌으나, 그들 부부는 운현궁에서 모두 생을 마감했다. 1897년 12월 부대부인민
씨가 이로당에서 세상을 떴고, 그 2달 뒤인 1898년 2월 대원군이 노안당에서 눈을 감은 것이
다. 하여 그의 장자인 이재면<李載冕, 흥친왕(興親王 1845~1912)>이 운현궁의 주인이 되었고,
흥친왕의 장남인 영선군 이준(永宣君 李埈, 1870~1917), 영선군의 양자이자 의친왕(義親王)의
차남인 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 1912~1945), 이우의 아들인 이청(李淸) 순으로 계승된다.
1912년 왜정(倭政)은 조선 황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시키고 이왕직(李王職) 장관을 시켜
운현궁에 손을 대면서 궁 영역을 조금씩 뜯어먹었다. 허나 대원군 후손들(이로당의 안주인들)
이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곳에 머물며 관리했으며, 1948년 미군정(美軍政)은 이곳을 대원군
후
손에게 넘겼으나 그 소유권을 두고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이 법정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허나 대원군의 후손인 '이청'이 이곳의 소유권을 인정받아 계속 들어앉게 된다.
6.25시절에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우리나라를 방문했는데 전쟁으로 서울에 마땅
한 거처가 없어 그나마 멀쩡하던 운현궁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때 미군의 의뢰를 받아 운
현궁에 좌변기와 수세식 화장실, 욕실을 설치한 이가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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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당, 노락당 서쪽 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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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마지막 주인인 이청은 운현궁
관리에 크게 어려움을 겪어 건물과 적지 않은 부지를
팔아먹었다. 그 과정에서 육사당과 양관 등이 덕성여대에 넘어갔으며, 고종이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운현궁 이전부터 있던 집(운현궁 동북부에 있었음)과 주변 토지까지 1966년에 매각되
어 사라지고 만다. (현재 운현초교 북쪽 율곡로 길가)
1991년 운현궁 모두를 서울시에 매각했으며, 그때 운현궁에 전하는 문화유산을 통 크게 서울
시에 기증했는데, 이들 유물은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들어가 있다.
이곳을 매입한 서울시는 1993년 12월 보수공사를 벌여 속세에 내놓았으며, 처음에는 입장료를
받았으나 2014년 3월부터 무료의 공간으로 해방되어 돈 부담 없이 마음껏 두 발을 들일 수 있
게 되었다. <관람시간 9~18시, 4~10월은 19시까지, 4~11월 금요일은 21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
현재 운현궁에는 노락당, 노안당, 이로당, 수직사, 대문(정문) 정도가 남아있다. 운현궁 식구
였던 육사당과
양관, 양관 정문, 양관 초소는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 들어가 있고, 영로당은
운현궁 일가의 주치의인 김승현에게 넘어가 서로 뻔히 보고 있음에도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
운현궁은 국가 사적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남남이 된 영로당은
'운니동 김승현 가옥(운
현궁 영로당)'이란 이름으로 서울 민속문화유산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운현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114-10 (삼일대로 464, ☎
02-766-9090)
* 운현궁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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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안당 서행각 바깥 부분과 솟을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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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후문(정문)을
들어서면 늦가을에 잠긴 너른 뜨락과 함께 길게 담장과 행각을 두룬 공
간이 모습을 비춘다. 담장 등으로 속살을 가리고 있는 그 공간이 운현궁의 심장부로 제일 북
쪽에 이로당, 중간에 노락당, 남쪽에 노안당이 자리한다. 이들은 일반 사대부가에 궁궐 건축
이 가미된 형태로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에 각각 행각(行閣)이 길게 둘러져 있으며, 하나 같
이 크고 길쭉하여 운현궁과 대원군
할배의 높았던 위엄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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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안당 솟을대문 |
▲ 노락당 대문(대문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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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안당 솟을대문 앞 하마석(下馬石)
견고하게 생긴 이 돌덩어리는 대원군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것이다.
이제는 쓰일 일도 없어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붉게
뜬
낙엽이 주변에 가득 널려 뒷전으로 물려난 잊혀진
존재들끼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노안당(老安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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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당은 1864년
3월에 지어진 것으로 대원군 할배가 생활하던 사랑채이다. 높게 닦여진 기단
위에 크게 들어앉은 그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굴다리를 쓴 민도리집으로 'T'자 구조를
취하
고 있는데, 대청과 사랑방, 침방(침실) 등의 온돌방과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 퇴방(하인들
의 대기 공간), 마루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공간 구성과 견실한 목조 구조, 세부기법은 궁궐
건축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평가를 받는다.
집 이름인 '노안'은 눈이 침침한 그 노안이 아니라 논어(論語)에 나오는 '노인을 편하게 하다
(老者安之)'에서 따온 것이다. 즉 아들이 제왕이 되면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보내게
되어 매우 흡족하다는 의미이다.
대원군은 여기서 많은 국정을 살폈는데, 그의 굵직한 정책과 그릇된 정책이 거의 여기서 태어
나고 논의되었다. 또한 그림과 글씨 등의 취미활동도 여기서 많이 했으며, 인생의 마지막 날
을 보내고 눈을 감은 곳 또한 노안당 큰방 뒤쪽 속방이라 대원군 삶의 절반인 40여 년이 고스
란히 담긴 현장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체취가 조금은 와닿는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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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안당 현판의 위엄
노안당 현판은 대원군과 친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다. 허나 그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대원군이 그의 글씨를 모방해서 쓴 것이라고 한다.

▲ 노안당 내부 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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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가고 없는 노안당 내부에는 병풍과 옛날 생활용품, 당시 의상을 취한 대원군과 고종의
인형(마네킹)들이 채워져 있다. 이 방에는 대원군 할배가 그의 주특기인
난을 그리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며, 직접 난을 그려보는 유료 프로그램도 여기서 운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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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안당 내부 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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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호구 국가인 비리비리한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우리의 장대한 역사를 싹 말
아먹은 대원군 부자가 앉아있다. (조선 이씨 정권이 말아먹은 우리 역사와 영토가 정말로 어
마어마함) 막 왕위에 오른 11살짜리
고종(이재황)이 청도포를 입고 있고, 흑단령(黑團領)을
입은 대원군이 그 앞에
앉아 예를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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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안당의 뒷모습과 잘생긴 굴뚝(왼쪽)

▲ 노안당 뒷쪽과 노락당 남행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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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안당 서행각(西行閣) |
▲ 텅 비어있는 노안당 부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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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당을 서쪽에서 감싸고 있는 서행각은 대원군의 심복인 천하장안, 즉 천희연(千喜然)과 하
정일(河靖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必周)가 머물던 공간이다. 그들은 중인
신분으로 성
을 따서 '천하장안'이라 불렸는데, 대원군이 야인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가 조선 권
력의 핵심이 되자 심복이 되어 대원군의 경호와 정보 수집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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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진 노안당과 노락당 뒤쪽 뜨락
높이 석축이 다져진 언덕에는 대나무 등이 무성하게 우거져 일품 그늘을
선사한다. 지금은 운현궁과 속세의 경계선이 되었으나 언덕 너머도
원래 운현궁의 영역이었다. (현재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