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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십리 무학봉 (무학봉체육관 옆 접근로)

중구 신당동과 성동구 왕십리동 경계에는 무학봉이란 작은 봉우리가 솟아 있다. 그는 해발 90.1m의
낮은 뫼로 중구의 동쪽 끝을 잡고 있는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서울 도읍 자리를 살피고자 이곳
에 올라 주변 지형을 살폈다고 해서 무학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무학봉은 북쪽으로 청계천까지 산주름을 늘어뜨리고 있고, 남쪽은 매봉산, 응봉산과 이어지는데, 개
발의 칼질로 회색빛 아파트와 주거지가 산 주변에 가득 들어차 도시에 갇힌 외로운 뒷동산이 되었다.
다행히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산 전체가 개발로 날라가는 꼴은 면했으며, 예전부터 작게나마 숲을
지닌 신당동과 왕십리의 소중한 뒷동산으로 1980~1990년대 시절 동네 아이들은 이곳을 대머리산이
라 불렀다.

 

2010년대 이후 무학대사 테마마당과 테마정원 등을 닦고, 숲과 산책로를 크게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
며, 산남쪽 자락에는 서울 도심의 주요 고찰이었던 안정사(청련사)가 있었으나 2009년 양주시 장흥
으로 이사를 가면서 아파트촌이 되었다. (옛 안정사 자리에는 19~20세기 마애불과 명문, 약사불, 절
뒷쪽 벼랑이 남아있음)

 

2. 무학봉근린공원 안내도

무학봉은 무학봉공원(무학봉근린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 아랫도리는 모두 도시화가 되고 윗도
리만 살아남았는데, 산에 깃든 특별한 명소는 딱히 없으며, 도시에 평범한 뒷동산 공원이다.

 

3. 계단이 첩첩히 펼쳐진 무학봉 산책로

 

4. 푸른 숲에 묻힌 무학봉 산책로

 

5. 무학봉 정상부

이곳이 무학봉 정상(해발 90.1m)이다. 정상부에는 나무와 봄꽃이 좀 우거져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다.

 

6. 쉼터가 넉넉히 닦여진 무학봉 동쪽 자락 숲 (무학봉 정상 동쪽)

 

7. 무학봉근린공원 안내문

 

8. 무학대사 테마마당에 있는 무학대사 탄생 설화 안내문

 

9. 무학대사와 왕십리 지명에 얽힌 이야기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뒤엎고 비리비리한 조선을 세웠다. 고려의 국도인 개경을 도읍으로 삼
아 머물
렀으나 안그래도 명분이 떨어지는 조선 개국으로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자 결국 도
읍을 옮길 궁리
를 하게 된다. 이때 계룡산 신도안, 서울 서대문구 지역이 새 도읍 후보에 올랐으나 고
려의 남경 자리로 여겨
지는 한양(서울)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래서 태조는 무학대사에게 도읍 자리를 봐달라고 청했다. 도성을 어느 코스로 쌓고 어디에 궁궐을
쌓을지
를 말이다. 그 크나큰 과제를 안은 무학은 서울 일대를 샅샅이 뒤지며 적당한 자리를 살폈는데,
그 과정에서
이곳 무학봉에도 올라 주변 지형을 살폈다.

 

처음에는 성동구 서부 지역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이유는 북으로 행당산(무학봉인듯), 서로 매봉산이
이어
져 있고, 동과 남은 청계천이 명당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낮은 언덕(현재 한양대 자리)
이 있어 그
곳이 도읍의 중심지로 적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한양대 자리를 더 살피고자 그곳을 둘러볼 무렵, 갑자기 한 노인이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그가
소에게 '이 무학처럼 미련한 소야' 이러는 것이다.

 

이에 무학이 깜짝 놀라 무슨 사연이 있을듯 싶어 말을 주고 받다가 도읍으로 좋은 자리가 있냐고 물었
다. 그
러자 노인이 '북서쪽으로 10리를 더 가보시오' 하고는 사라졌다. 그 말에 무학은 북서쪽으로 10
리를 갔는데,
그 10리를 가서 도착한 곳이 현재 경복궁 자리라고 하며 여기서 자신이 본 자리보다 훨
씬 좋은 자리를 발견
했다.

그 사연으로 10리를 갔다는 뜻의 왕십리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하며, 무학대사에게 자리를 알려준 노
인은 도
선대사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만큼 새 도읍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음을 알려주는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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