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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십리 안정사(청련사)터와 무학봉 남쪽 벼랑

서울 도심에서 가까운 성동구 하왕십리동 998번지 일대에는 안정사란 오래된 절이 있었다. 안정사(安
靜寺 또는 安定寺)는 신라 후기인 82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절 이름인 '안정'은 백성을 편안히
하여 나라를 굳건히 한다는 의미이다.

1395년 무학대사가 절을 중창하여 머물렀는데, 중창을 위한 기도 회향 때 법당 앞 연못에서 푸른 연꽃
이 홀연히 피어나 절 이름을 청련사로 갈았다고 전한다. 허나 안정사란 이름도 계속 사용했으며,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로 명성을 쭉 이어갔다. 왜정 때는 김상옥 의사가 잠시 숨어있기도 했으며, 6.25 시절
에 절이 파괴된 것을 덕봉화상이 중수했다.

 

안정사는 무학봉 남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절에서는 무학봉을 종남산이라 불러 '종남산 안정사'
, '종남산 청련사'를 칭했다.

1950년대 이후, 왕십리 지역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주거지에 둘러싸인 외로운 모습이 되었으며, 2000
년대 이후 절 주변에 재개발 칼질이 요란하게 일어나자 주지인 백우는 재개발로 비싼 땅이 되버린 절
부지를 2008년 매각해 절 곳간을 풍요롭게 채우고 연고도 전혀 없는 양주시 장흥면 장흥유원지 산골
에 자리를 넓게 매입해 절을 옮겼다.

절 이건 공사는 2010년에 마무리를 지었는데, 양주로 넘어간 이후에는 절 이름을 청련사로 완전히 갈

았으며, 안정사란 이름은 더 이상 내세우지 않는다.

 

안정사가 떠난 자리에는 이름도 긴 왕십리KCC스위첸아파트란 회색빛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아파트

뒤쪽에 안정사의 흔적들이 일부 남아 이곳을 떠난 안정사를 추억한다. 그들은 2009년 12월에 안정사

대웅전을 철거하면서 대웅전 뒷쪽 암벽에 강제로 묻혀있던 마애불과 약사불, 명문이다.

청련사는 안정사 건물과 소장 문화유산을 모두 가져갔으나 대웅전 철거로 나온 존재들은 두고 갔다.

바위에 깃든 것들이라 굳이 떼기도 그렇고, 옛 자리를 지키는 존재는 필요할 것이라 여겨 그들을 이

곳에 둔 것이다.

그들 외에 절 뒷쪽에 병풍처럼 들어선 벼랑도 대부분 남아있다. 벼랑 윗쪽은 무학봉 자락으로 벼랑
동쪽에 무학봉 남쪽 자락 숲이 있고, 서쪽에는 왕십리금호베스트빌아파트가 높이 들어앉아 있다.

 

2. 안정사터 마애불과 명문, 약사불

2009년 12월 안정사 대웅전을 철거하면서 대웅전 뒷쪽 벼랑에 묻혀있던 마애불과 명문, 약사불이 다
시 햇살을 보게 되었다.

암벽 감실(가로 1m, 세로 40cm, 길이 30cm 크기)에 작게 깃든 마애불(마애여래좌상)은 조선 후기(
19세기 정도)에 조성된 것으로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나타난 민불 형태이다. 그 옆에 있는 명
문은 '나무산왕대신지위(南無山王大神之位)'로 산신각을 대체한 산신 신앙의 대상으로 조성된 것으
로 여겨지며, 하얀 피부의 약사불은 불상과 배경을 채색하여 마치 불화 형태로 19~20세기 초에 조성
되었다.

 

그들이 깃든 벼랑 앞에 1943년 대웅전을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대웅전 벽에 완전히 가려져 묻히게
되었다. 대웅전을 짓는데 급급하다 보니 그들이 누락되는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그렇게 66년 동
안 어둠 속에 강제로 봉인되어 있다가 대웅전 철거로 다시금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안정사는
그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고 옛 장소 추억용으로 이곳에 두고 떠났다. 그들은 1943년부터 80년 이상
안정사(청련사)의 버려진 자식 같은 존재로 살고 있는 것이다.

 

안정사터 마애불과 명문, 약사불, 그리고 그들을 머금은 바위 벼랑은 성동구 향토유적의 지위를 누
리고 있다.

 

3. 옛 안정사의 소소한 흔적들을 머금은 벼랑

저 주름진 벼랑에 옛 안정사의 흔적들인 마애불과 명문, 약사불이 소중히 깃들여져 있다.

 

4. 바위 감실에 작게 깃든 안정사터 마애불

견고한 벼랑에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민불 스타일의 마애불을 작게 새겼다.

 

5. 바위 벼랑에 깃든 안정사터 명문(바위에 새겨진 글씨)

'나무산왕대신지위(南無山王大神之位)'이라 쓰여 있는데, 여기서 산왕대신은 산신을 높인 것으로 산
왕대신의 자리라는 뜻이다.

 

6. 하얀 피부의 안정사터 약사불

19~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조그만 불상이다. 돋은새김의 마애불처럼 조성되어 있고,
그의 뒷쪽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약사불에 씌워진 돌지붕 보호각은 2010년 이후에 지은 것들임)

 

7. 아파트와 아파트 부속 공원으로 변해버린 옛 안정사터에 늘 그늘을 드리우는 벼랑

 

8. 무학봉 안정사터 벼랑

이곳은 무학봉 남쪽 자락으로 벼랑 밑에 안정사가 자리해 있었다. 이곳과 가까운 신당동에 살던 초
등학교 시절, 안정사까지 2번 정도 가본 기억이 있는데, (그때는 절 이름도 몰랐음) 경내 뒤로 나무
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 있었고, 절 경내와 동산 주위로 담장을 빙 둘러 속세와 절의 경계를 그었다.

 

안정사가 이곳에 계속 있었다면 서울 도심에서 가까운 늙은 고찰의 하나로 명성을 어느 정도 누렸
을 것이고, 이곳에 있던 조선 후기 탱화와 불상, 보살상 중 괜찮은 것들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갯수를 크게 늘려주었을 것이다. 허나 안정사가 이곳을 떠나면서 서울에서 역
사적 가치가 있는 늙은 절은 하나가 줄게 되었고, 절에 깃든 문화유산도 그만큼 줄어버렸다. 비록
절이 파괴되어 사라진 것이 아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것이지만 그의 빈 자리가 상당히 아쉬울
따름이다.

대신 양주시는 청련사의 이전으로 고찰이 하나 늘어났고, 지역 문화유산도 그만큼 증가했다. (청련

사에 있는 조선 후기 문화유산 상당수가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9. 잘생긴 무학봉 안정사터 벼랑

벼랑 밑에 있던 고즈넉한 절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회색빛 아파트와 아파트에 딸린 공원, 인공 연
못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니 정말 세월무상,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연못 너머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정도의 키
작은 난간을 둘러 벼랑 접근을 통제하고 있어 마애불과 약사불, 명문은 난간 앞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
해야 된다.

만약 안정사터의 흔적들이 아니었다면 저 벼랑도 개발의 칼질에 진작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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