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호암산 둘러보기 (호암산성, 석구상, 한우물, 신랑각시바위, 칼바위 등)


' 금천구 호암산 봄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제2한우물터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 제2한우물터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서울 서남쪽에 누워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을
찾았다.

호암산은 나의 오랜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하게
비추고 있다. 20대의 한복판이던 2002년 가을에 첫 인연을 지은 이후, 무려 100회 이상을
오갔으나 뒤를 돌아서기가 무섭게 그가 간절해진다.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들었다 놓은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
시에 걸쳐있는 뫼로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
름을 지니게 되었다. 금천구 시흥동(始興洞) 지역을 중심지로 삼았던 옛 금천<衿川, 시흥
(始興)> 고을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더
불어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오랫동안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
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암산에는 신라 중기에 조성된 호암산성을 비롯하여 한우물과 제2한우물터, 석구상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호압사(虎壓寺),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 서울에 대표적인 천주
교 성지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가 있으며, 호암산폭포와 시흥계곡, 호암산잣나
무산림욕장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를 품고 있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정상부와 서남쪽 능선, 돌산 능선에 잘생긴 바위들
이 잔뜩 포진해 있어 바위 구경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
역과 북한산(삼각산), 안양, 광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심지어 멀리 파주와 개성 지역
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 자락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산림욕장을 중
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  석구상과 호암산성(虎巖山城) 북문터 주변

▲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호암산 북쪽 자락에 안긴 약수사(藥水寺)에서 시작했다. 약수사를 둘러
보고 서울둘레길5코스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에서 남쪽 산길을 통해
민주동산(깃대봉)과 호암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약수사와 호암산 정상은 별도의 글에서)

호암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 펼쳐진 서울과 주변 지역을 굽어보며 일품 조망을 배불리 누리다
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넘어갔다. 호암산에 오면 꼭 남쪽 봉우리는 들리는 편으로 그곳에는
한우물과 석구상, 호암산성 등의 늙은 명소가 깃들여져 있고, 불영암 등의 절과 신랑각시바위
, 칼바위, 호암산폭포 등의 자연 명소도 듬뿍 들어있어 그야말로 호암산의 보물창고 같은 곳
이다.

호암산 정상부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부드럽게 이어진 서남쪽 능선길의 연속으로 그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 없는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안양시와 수리산(修理山)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 사이에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부드럽게 펼쳐진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근래 이곳이 호암산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
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밟고 지나갔던 그곳이 북문터
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안쪽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
)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새로운 곳이
발견되어 산성 관련 자료가 크게 업데이트되면서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 133,790㎡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특히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
사기지 및 행정 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쌓았다는 설
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당나라를 때려잡으며, 옛 고구려(高句麗, 고구리) 땅의 일원인 요동
(遼東)과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그래서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보고 있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했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
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
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서서히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고 있으며, 대자연에 묻힌 채, 강제로 숨바꼭질을 하던 성벽 흔적을 많이 건져내었
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
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서울 호암산성터'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는 석구상이 있다. 사방을 난간
으로 두룬 기단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 기
운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과도 비슷해 보이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한다. 하여 보면 볼수
록 답이 없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
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와 비슷해 손으
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후기로 보인다. 그는 정확
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으며,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며,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게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약간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바로 호암
산성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성곽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
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성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놓아 헝클어진 성곽을 보호한다. 그리고 성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
길이 넓게 자리한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린
산성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부근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 방향)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동북쪽 벼랑에 이르는 동벽
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크게 각이 진 벼랑급이라
성곽길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성 동북쪽 벼랑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호암산성 건물터 동북쪽에는 일품 조망을 지닌 큼직한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곳은 호암산성
동벽 구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바위 너머로 호암산 동남쪽 능선과 장군봉, 삼성산
(三聖山), 관악산(冠岳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은 정말 예술이다.
허나 장미꽃의 가시처럼 바위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보기만 해도 염통을 제대로 쫄
깃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산성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하늘의 요새 같은 낭떠러지라 그 존재
자체로도 인공적인 성곽보다 훨씬 든든하다.


♠  제2한우물터에서 호암산성 남문터까지

▲  호암산 제2한우물터

석구상, 북문터에서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능선길을 3~4분 정도 가면 제2한우물터와 건
물터가 황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호암산성 동벽 산길로 가도 나옴)

제2한우물터는 남북 18.5m, 동서 10m 이상, 추정 깊이 2m에 이르는 커다란 사각형 우물 유적
이다. 길이 50cm, 너비 35cm, 높이 25cm 크기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0단(높이 1.75m)
까지 쌓았는데, 2번에 걸쳐 15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되었다.
우물 바닥과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전체적인 모양새 등은 북서쪽 밑에 있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비슷하며, 여기서는 신라 중/후기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제 숟가락이 햇
살을 보았는데, 숟가락에는 정말 고맙게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仍伐內力 只來(잉
벌내역 지래)..'로 여기서 잉벌내(仍伐內)는 고구려 시절 금천 지역의 지명으로 여겨지는 잉
벌노(仍伐奴)와 비슷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6세기 이후에도 그 이름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
인다.


▲  상큼하게 봄옷을 입은 제2한우물터 (남쪽에서 본 모습)

산꼭대기에 커다란 우물이 1개도 아닌 2개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이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큰
우물을 2개나 둘 정도로 물이 풍부했음을 알려준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장난으로 제대로 헝클어져 땅
속에 잠겨있던 것을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 꺼내놓았는데, 복원된 제1한우물과 달리 복원은
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자연 상태로 두고 있어 조금은 우울한 모습이다. 우물터 곳곳에는
우물을 구성하던 돌이 널려있으며, 복원 계획은 예전부터 나오고는 있으나 구체적인 것은 없
다. 허나 제1한우물이 복원되었으니 제2한우물은 어설프게 복원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라고 본다.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내린 현재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현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  옆에서 바라본 제2한우물터
돌로 다진 석축이 없었다면 자연산 늪지대로
봐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이곳은 대자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  제2한우물터에 모여있는 수분들
비록 흔적만 남은 늙은 우물이나 비가 내린 이
후에는 약간씩 물이 고여 이곳의 본분을 조금
이나마 회복한다.
하지만 우물터는 제대로 흩어진 상태라 식수는
곤란하며, 우물터 주변 수풀들이 이 물에 의지
해 살아가 늪지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터

제2한우물터 동쪽에는 건물터가 수풀을 뒤집어 쓰며 조용히 누워있다. 여기서는 시기가 다른
건물터들이 중복되어 확인되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기단(基壇)을 지닌 건물이 자리했다. 이
건물은 신라 중/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세월에게 잡혀간 이후, 23x27m 범위에
서 기존 건물터의 초석을 옮기고 평지를 닦은 다음, 새로운 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신라 후기 기와편과 글씨가 새겨진 기와 등, 많은 기와들이 햇살을 보았으며, 축조
시기가 아리송한 문비석(門扉石)과 네모꼴의 석렬, 외곽의 자취가 확인되었으나 이곳에 깃든
흔적들이 워낙 복잡하여 건물터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곳이 호암산성 내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산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장
수와 군사들의 숙소로 여겨진다.


▲  호암산성 건물터 주춧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오랫동안 상실한 채,
윗도리가 묵직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사랑바위)

제2한우물터에서 석수역 방향 서남쪽 능선길을 6~7분 내려가면 호암산성 남문터가 나온다. 이
곳 직전 서쪽에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있는데, 남문터는 잠시 접어두고 그 조망대로 내려
가보자. 한참 내려갈 것도 없이 성벽터 경사에 닦여진 계단만 내려가면 끝으로 거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신랑각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반갑게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호암산은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잘
생긴 바위와 벼랑이 많다. 신랑각시바위도 호
암산을 수식하는 명품 바위의 하나로 사람 손
과 발이 닿기 어려운 벼랑에 우뚝 솟아 금천구
를 비롯한 천하를 굽어본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과 혼인, 심지어 아들까지
얻게 해준다는 특별한 바위로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히 전하
고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익히기 전인 한참 옛날, 금천 고을(시흥동)에 잘생긴 총각과 아리따운 낭
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집안은 대대로 원수
관계라 부모가 쌍수를 들고 교제를 반대했다. 하여 서로 불이 난 자식들을 떼어놓고자 다른
곳에 혼인을 시키려 했고, 이에 뚜껑이 뒤집힌 낭자는 깊은 밤에 가출하여 호암산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이를 늦게 안 총각은 낭자를 찾으러 서둘러 호암산으로 올라갔는데,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태
였다. 허나 다행히도 산중턱 절벽 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낭자를 발견, 그녀에게 달려가 서
로 격하게 껴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즙을 짰다.
그들은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기도를 올리고 밤을 지샜는데, 이를 엿들은 달님
은 신통력을 부려 서로 마주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달의 친절한(?) 배려 덕에 영
원히 같이 있게는 되었으나 문제는 돌이라는 것. 혼인은 커녕 움직일 수도 없고, 숨도 못쉬며
, 아주 중요한 예민한(?) 짓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해피엔딩인지 그 반대인지 솔직히 판단
이 서질 않는다.

어쨌든 그 전설로 인해 이 바위는 사랑바위, 신랑각시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호암산
그늘에 사는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한
다. 또한 혼인을 하여 여기서 기도를 하면 옥동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늙어 죽을 때
까지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물론 전설의 내용처럼 그들이 바위로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집을 뛰
쳐나와 여기서 사랑을 굳게 다짐하고 인근 산속이나 머나먼 곳에서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비관해 같이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이며, 그 사연이 바위에
씌워져 사랑과 관련된 바위로 포장되었을 것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신랑각시바위의 위엄
호암산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서쪽과 북서쪽이 확 트여있다.
하여 일품 바위와 함께 일품 조망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과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지역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암산성 남문터 주변 서쪽 남벽(南壁)터

신랑각시바위 동남쪽에는 호암산성 남문터가 있다. 신랑각시바위 관람용으로 지어진 조망대도
산성 성벽터에 닦여진 것으로 이곳은 석수역에서 호암산,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산꾼
들의 발길이 무척 잦다.
나도 이 코스를 여러 번 탔었으나 산성의 흔적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근래 발굴조사에
서 교묘하게 숨바꼭질을 벌이던 남문터와 주변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그들을 보존하
고자 기존 산길에는 금줄을 치고 서쪽에 나무데크 계단길을 내었으며(남문터 동쪽에도 오르는
길이 있음) 호암산성 안내문과 안내도를 설치했다.

▲  일부만 남아있는 호암산성 남벽

▲  남문터 서쪽 남벽터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황토색 흙 사이로 고된 세월에 지친 남벽 성돌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며 이곳이 옛 산성이었음을 애써 속삭인다.

▲  호암산성 남문터
인공티가 느껴지는 돌들의 무리가 여기저기 모여있으니 그들이 호암산성과
남문을 이루던 성곽의 흔적들이다. 뒤늦게 세상에 잡힌 그들의 보존을
위해 기존 산길에 금줄을 치고 옆에 우회길을 내었다.

▲  경사를 따라 층층이 주름진 남문터

이곳은 오랫동안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로 바쁘게 살았다. 커다란 바위와 인공티가 다소 느껴
지는 층층이 둘러진 둘들은 이곳이 예사로운 장소가 아니었음을 오랜 세월 동안 눈치를 보냈
으나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다.
허나 그들이 글쎄 호암산성의 숨겨진 흔적들이었다.
그냥 돌무더기가 아닌 늙은 호암산성의 흔적이라니 그들이 정말 180도 달라 보인다. 사람에게
는 옷이 날개이듯, 돌에게는 문화유산 경력이 날개인 모양이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

남문터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한 서남쪽 성곽길을 쫓아갔다. 이 성
곽길은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을 따라 이어지며 서서히 능선길과 멀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숨겨진 길이나 성곽터가 얇게 이어져 있고, 사람들의 발길도 이미 적지 않게 들어간 상
태라 그런데로 길 티를 낸다.
벼랑 구간이 많으나 괜찮은 조망지가 많아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이 늘 시야에 따라와
두 망막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그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서문터 뒤쪽으로 이어진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에서 바라본 천하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지역

▲  산성 안쪽에서 바라본 호암산성 서문터 (추정 서문터)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에 서문터가 있다. 허나 아직까지는 확
신이 부족하여 '추정' 2자를 붙여 회피 조건을 붙이고 있는데, 주변 지세를 보면 이곳이 성문
터는 맞는 듯 싶다. 성문이라고 해서 문루(門樓)까지 달아서 크게 지을 필요는 없으며, 조그
만 암문(暗門) 형태로도 충분하다.
산성 밑으로 난간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 길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불영암~시흥동 산
길이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산성 흔적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바로 불영암 뒷쪽으로 이어진다.
남문터에서 서남쪽 성곽과 서문터 안쪽을 거쳐 불영암을 바로 잇는 길을 새로 개척하여 호암
산 정보력과 경험치를 크게 살찌웠으니 이번 호암산 복습 산행의 성과가 실로 크다.


♠  호암산 한우물, 불영암(佛影庵)

▲  북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성 북문터에서 서남쪽 길로 내려가면 한우물과 불영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우물은 석
구상과 더불어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한우물이란 큰 우물을 뜻한다. 하여 천정(天井), 용복,
용초 등에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마땅한 수원(水源)이 없음에도
물은 늘 넉넉하게 나온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신비로움을 준다.

이 우물은 신라가 호암산성을 닦던 7~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
에서 7~8세기 우물(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못의 규모는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였다. 이후 조선 때 서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
의 장방형 못(우물)을 구축했다.
허나 조선 후기 이후, 호암산성과 함께 버려져 제대로 망가진 것을 1991년 2차 보수 정비공사
때 신라 우물터와 조선 우물터를 혼합하여 복원했다. 하여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신라 때 우
물 자리이며, 수풀이 자라는 남쪽 부분은 조선 때 우물 자리이다. 또한 동쪽 산정에도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우물 유적이 있는데, 그를 제2한우물, 불영암 옆에 있는 이곳을 제1한우물이
라 부르기도 한다.
 
1990년 봄, 한우물 2개를 발굴하면서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서 '仍伐內力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의 위엄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썼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
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상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우
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을 할 뿐
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 등의 수풀이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호암산 한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한우물과 불영암은 서쪽과 북쪽이 확 트인 벼랑에 자리해 있어 천하를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여기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양천구, 한강 이북에 서울 서북
부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광명시, 부천시, 인천 지역은 물론 대기가 좋으면 서해바다와 고
양시, 파주시, 심지어 개성(開城) 지역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한다.
그리고 한우물 주변과 한우물조망대에는 의자가 여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과 금천구,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 밑이자 한우물 옆에는 불영암이란 작은 암자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한우물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가파른 벼랑에 자리해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
고 있어 호압사나 시흥동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여기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
치해 있고, 조망도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望臺)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100년 이상 묵은 절들은 자신들의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지만 이곳은 그런
것이 일절 없어 20세기 중반 이후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이 전부이
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하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
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가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천하를 향한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서 절을 세웠을 것이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늙은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볼거리를 잠시 늘
리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
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
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남쪽 방향)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매일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
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는
물론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
진다.

▲  돌탑과 오색연등이 늘어선 불영암 앞길
(한우물 방향)

▲  산신 할배의 공간인 산신각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으로 벼랑에 목재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
은 특이하게 사슴까지 겯드려 놓았다.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마련된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
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
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세월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앞서 지났던 서문터가 다시 마중을 한
다.
앞서에는 산성 안쪽에서 서문터와 불영암~시흥동 산길을 내려다봤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
어 산성 바깥에서 이렇게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었는데, 호암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
는 편이었다.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은 생각도 못 하였고, 아직 추정이
긴 하나 이곳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버젓이
나온 것이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서문터를 둘러보고 칼바위와 호암산폭포를 거쳐 시흥동 벽산아파트로 내려갔다.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약간씩 남아있던 미답 공간과 새로 발견된 호암산성의 숨겨진 부분을 크게 들추는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를 짓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5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