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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문의문화재단지



'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겨울 나들이 '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 청주 관정리 고가

▲  문산리 돌다리

▲  청주 관정리 고가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이 속절없이 깊어가던 2월의 첫 무렵, 청주 문의면에 자리한 문의
문화재단지를 찾았다.
햇님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충북의 중심 도시인 청주(淸州)로 넘어가 청주시외터미널 부근
기사식당에서 일찌감치 점심을 섭취하고 청주시내버스 311번(비하동↔문의)을 타고 문의(
文義)로 이동했다.

대청호(大淸湖) 중류 부분에 자리한 문의는 청주시의 일원으로 문의면의 중심지는 미천리
이다. 오랫동안 독자적인 고을을 유지했던 지역으로 1895년 문의현(縣)에서 문의군(郡)으
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청원군(淸原郡)의 일부로 통합되면서 청주의 일부로 완전히 묻히
고 말았다. (2014년 7월, 청원군이 청주시에 통합되면서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이 됨)
1983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의 중심지인 문산리(文山里)가 수몰되자 양성산 밑인 미천리
(米川里)에 작은 도시를 지어 이전했으며, 문의의 산하가 적지 않게 대청호에 희생되면서
주민 절반이 정든 고향을 등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180도 이상 성형된 문의면은
첩첩한 산주름과 너른 호수가 어우러진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의 고장이 되었으며,
1983년에 지어진 대통령의 별장인 청남대(淸南臺)가 문의면 남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청주의 새로운 꿀명소로 크게 애지중지되고 있다.

문의 종점(미천리)에서 문의문화재단지까지는 도보 10~15분 거리로 문의대교 방면으로 가
는 시내버스를 타면 편하지만 배차간격이 오지게 길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어차피 거리도 짧다.


♠  대청댐이 빚은 산물이자 옛 문의 고을의 소소한 재현,
문의문화재단지(文義文化財團地) 입문

▲  문의문화재단지 입구에 마련된 하트 포토존(Photo Zone)

문의문화재단지(이하 문화재단지) 북쪽 밑에는 주차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주차장에서 문화
재단지까지 오르막길이 느긋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시작점에 긍정의 아이콘인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마중을 나와 내 기분을 썩 좋게 해준다. 하트 모형 앞/뒤로 의자가 닦여져 있는데,
하트와 문화재단지 오르막길을 배경으로 하는 포토존(사진 찍기 장소)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문화재단지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하트 모형을 지나 2분 남짓 오르면 그 길
의 끝에 성문(城門) 모양의 문화재단지 정문이 길을 막는다. 이곳의 뒷산인 양성산(養性山,
378m)의 이름을 따서 정문 이름을 양성문(養性門)이라 했는데, 그 좌우로 성곽을 짧게 펼쳐놓
아 마치 옛 문의고을 읍성(邑城)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허나 이들은 옛 것이 아닌 문화재단지
를 지키는 울타리로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채 여물지도 못했다.

양성문에는 매표소가 있으니 입장료가 무려 1,000원이나 한다. 허나 내게는 꿩 대신 닭을 고
를 권한 조차 없어서 그 돈을 지불하고 유료(有料)의 땅으로 들어섰다.


▲  문의문화재단지 정문인 양성문 (왼쪽 창구가 매표소)

대청호가 바라보이는 양성산 동쪽 자락에 문의문화재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대청
댐으로 인해 강제로 제자리를 잃은 문의 지역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서 기증을 받거나 개발
의 칼질로 보금자리를 잃은 문화유산을 수습해놓은 현장이다. 좋게 말하면 청주의 역사와 문
화유산을 모은 전통문화의 현장이고, 우울하게 말하면 집을 잃고 오갈 데가 없는 문화유산을
수습한 그들의 피난처이다.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의 적지 않은 곳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심지어 문의면 중심지인 문산리
까지 강제 잠수를 타게 되었으니 이곳의 심각한 상황을 알만하다. 그래서 수몰지에 있던 문화
유산을 문의면의 새 중심지인 미천리 일대로 수습했는데, 다들 서로 떨어져 있어 관리에 어려
움이 생기자 이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1997년 지금의 자리에 터를 닦기 시작해 1999년에 최종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댐 건설로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문화유산을 모아놓은 곳으로 충주댐이 빚은 제천(提
川)의 청풍문화재단지, 안동댐이 빚은 안동(安東)의 안동민속촌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산업화를 위한 개발의 칼질이 빚어낸 산물로 전기 생산과 물 관리를 위해 댐을 만들면서 사람
과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에서 발을 떼도록 만들었다.
수몰 지역 실향민과 마찬가지로 제자리를 잃은 비극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들을 한곳에 모아놓
아 일종의 문화재단지나 민속마을을 만드니 짧은 시간에 그 지역에 주요 문화유산과 역사를
둘러볼 수 있으며, 관리와 보존에도 용이하다. 그러니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는 것이다.

문의문화재단지는 금강(錦江)을 앞에 두고 양성산을 뒤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로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서 옮겨온 문화유산까지 흡수하여 청주
제일의 문화유산 집합지로 성장했다. 게다가 청주의 역사와 동산(動産) 문화유산을 담은 문화
유물전시관과 현대 미술을 다룬 대청호미술관까지 갖추고 있어 청주의 문화와 역사,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이며, 산과 호수를 옆구리에 낀 하늘도 반한 명소로 이곳의 값어치를 크게 불리
고 있다.

문화재단지에는 옛 문의군의 객사인 문산관을 비롯해 문산리 돌다리, 노현리 고가, 부강리 고
가, 관정리 고가 등의 지방문화재와 고인돌, 옛 비석, 효자각, 충신각, 학소리 유적 등이 있
다. 그 외에 양반가, 주막집, 토담집, 성황당, 돌탑, 성문과 성곽 등을 재현했으며, 문화유물
전시관에는 청주의 선사시대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유물과 역사를 담았다. 또한 애국지사
조형물과 조각공원, 대청호미술관 등이 아낌없이 닦여져 있어 볼거리가 그야말로 풍년을 이룬
다.

* 문의문화재단지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 산6-1 (대청호반로 721,
  ☎ 043-201-0915)
* 문의문화재단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돌탑 무리들
양성문을 지나 문화재단지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돌탑들이 마중을 한다.

▲  아들을 기원하던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상징물, 기자석(祈子石)
<실물이 아닌 재현된 것임>


▲  문의면의 산하를 적지 않게 집어 삼킨 하늘빛 대청호

문의면의 옛 중심지인 문산리 마을은 저 호수 속에 고이 잠겨 있다. 대청호에 터전을 빼앗긴
실향민들은 저 호수의 물을 모두 빼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라 고향에 대
한 향수 또한 호수의 수심만큼이나 깊을 것이다. 뻔히 바라보이는 저 호수 속에 고향을 묻었
으니 말이다.

▲  대청호를 바라보고 선 초정(草亭)

▲  서덕길 효자각(徐德吉 孝子閣)

서덕길 효자각은 문의 출신 효자(孝子)로 이름이 높은 서덕길(1599~1658)의 효행을 기리고자
그가 살았던 문의면 도원리 마장마을에 1706년 나라에서 지어준 1칸짜리 정려각(旌閭閣)이다.
그의 후손(이천서씨)들이 계속 관리하고 있었으나 1997년 이곳에 의탁되면서 문화재단지의 일
원이 되었다.


▲  청주 각지에서 수습된 고인돌(지석묘)들

서덕길 효자각 맞은편에는 3기의 고인돌이 바짝 엎드려 있다. 이들은 미원면 수산리와 내수읍
학평리,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마을에서 가져온 것들로 이중 아득이마을 고인돌만 1997년 4월
수몰지에서 가져온 것이고, 학평리 고인돌은 1997년 5월에, 수산리 고인돌은 같은 해 7월 관
리상의 이유로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안착했다.
이들은 옛 조선이 천하에 크게 위엄을 날렸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지역 세력가의 무덤
으로 학평리 고인돌은 마을 사람들이 개석(蓋石, 뚜껑돌)을 제단(祭壇)으로 삼아 매년 정월대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모두 개석만 남아있는 상태로 개석을 받치는 기둥과 석실(돌방
)은 없어졌다.


▲  청주 관정리 고가(官井里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38호

고인돌 무리 옆에는 초가 돌담을 두룬 고색의 초가집이 자리해 있다. 낭성면 관정리에 '신방
호'란 사람의 집으로 청주시(청원군)가 인수하여 1994년 이곳으로 가져왔는데, 전형적인 중부
지방 초가로 'ㅡ' 형태의 안채와 대문이 있는 광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주문(四柱門) 같은 경우에는 원래 담장 사이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광채와 함께
설치하여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며, 안채 뒷쪽에는 장독대들이 놓여져 있고, 안채에는 전통 체
험이나 혼인식 때 쓰이는 가마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  무늬만 남은 관정리 고가 장독대들

▲  관정리 고가 안채에 들어앉은 가마


▲  초가 주막(酒幕)
1995년에 지어진 중부지방 스타일의 초가 주막이다. 예천(醴泉)의 삼강주막처럼
전통 주막으로 활용하면 좋을듯 싶은데, 음료수 자판기만 한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 그냥 묵혀두고 있다.

▲  1998년에 지어진 민화정(民和亭)

▲  민화정 현판의 위엄
옛날 문의 고을에 있었던 '민화루'에서 이름을
따왔다. <김수온(金守溫, 1409~1481)이
누각 이름을 지음>


♠  문화유물전시관 주변

▲  문의문화재단지 문화유물전시관

문화유물전시관(유물전시관)은 대청호로 제자리를 잃은 문의 지역의 문화유산과 청주 각지에
서 가져온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문화유산을 머금고 있다.
(전시관 유물은 일부만 사진에 담았으며, 그 일부만 본글에 꺼냈음)


▲  구석기 사람들의 두루봉동굴 생활 모습

청주에는 천하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구석기 유적이 있다. 바로 문의면 노현리에 있는 두루봉
동굴이다. 중고등학교 국사책은 물론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 참고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
로 그의 이름 5자만 외우고 있으면 선사시대 관련 문제 하나는 그냥 따놓은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그 시대에서 비중이 큰 존재이다. 특히 이 땅에서 유일하게 구석기 사람의 뼈가 발견
되었으며, 지금은 사라진 8종의 동물 뼈도 발견되는 등, 그 시절의 다양한 흔적과 유물이 쏟
아져 나와 머나먼 구석기시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익히 듣고 있던 터라 그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발굴 이후 개발의
칼질(석회석 광산)에 완전히 아작이 난 상태였다. 겨우 흔적 일부만 간신히 고개를 들고 있을
뿐으로 그들이 발견된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석회석 채석장이 계속 둥지를 틀며 동굴
주변의 살을 깎아내고 있었다.
다채로운 유물이 쏟아져 나온 구석기시대의 소중한 보고(寶庫)가 어찌하여 개발의 칼질에 난
도질을 당하도록 방치가 되었는지 심히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하긴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하
느라 급급한 더러운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니 오죽할까.
(두루봉동굴에서 나온 유물과 흥수아이의 해골, 복원된 전신상은 청주 충북대박물관에 있음)


▲  꽃을 사용했던 구석기 사람들의 장례 풍습

두루봉동굴 중에는 흥수동굴이란 가지 굴이 있다. 이곳에서는 약 40,000년 전 구석기 후반에
살았던 사람의 뼈가 나와 천하 고고학계를 잔뜩 흥분시켰는데, 그 해골을 검사한 결과, 어린
이로 파악이 되었다. 그래서 그 해골을 '흥수아이'로, 동굴을 '흥수동굴'이라 이름지었는데,
이는 그 동굴을 처음 발견한 석회석 광업소 현장소장인 '김흥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렇게 수만 년 묵은 해골이 미라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던 것은 이곳이 알칼리(Alkali)성
석회암 지대라 그렇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 동굴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 동굴을 앞장서서 아작을 냈다는 것이다. 그
러니 지금이라도 그 동굴과 해골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파괴한 이들의 이름을
달아주는 것은 동굴과 구석기 해골에 대한 예의가 아닐터, 아주 쉽게 지역 이름(문의면 노현
리)을 따서 노현동굴, 노현아이라고 하면 어떨까.

흥수아이 해골이 발견된 곳에서는 매장 흔적이 나왔는데, 납작한 석회석 판자돌을 놓고 흙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시신을 두었다. 이를 통해 시신을 아무 데나 버리거나 방치한 것이 아닌
나름 형식을 갖추어 매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해골 주변의 흙을 분석해보니 가슴뼈 부분에서 많은 양의 국화과 꽃가루가 나왔다. 이는
국화꽃을 죽은 이에게 바치며 애도했음을 보여주며, 국화가 만발했던 가을에 아이가 죽었음을
수만 년이 지난 우리에게 살짝 속삭여준다. 물론 구석기인의 장례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
견이 분분하나 흥수아이를 통해 그들도 매장 형식을 갖추고 꽃으로 애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좋아하고 또한 그것으로 애도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원초
적 본능인 모양이다.


▲  목이 사라진 오송읍 쌍청리 석불
쌍청리 봉도리마을 이상현씨 집 뒷쪽에 있던 석불로 199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높이 95cm, 어깨 폭 34cm으로 고려 때 석불로 여겨진다.

▲  옛 사람들의 낙서판, 주역석(周易石)

주역석은 선비나 사대부(士大夫)가 태극과 팔괘를 중심으로 자연의 생성원리를 밝히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겠다는 희망사항을 새긴 바위 낙서판이다. 그 내용이 주역(周易)과 일치하여
주역석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남이면 부용외천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돌판 윗쪽과 사방
모서리에도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돌판 전체를 주역의 내용으로 빼곡히 도배를 한
것인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대략 이렇다.
'오랜 세월 음(陰)은 세상을 열고, 양(陽)은 세상을 감싼다. 음과 양은 세상의 모든 원리를
내포하고 팔괘도(八卦圖)가 이들을 맑게 한다' (한문은 생략함)


▲  태함(胎函)
조선 왕족의 태를 머금은 석물로 낭성면 무성리 태봉산에 있던 영조(英祖)의
태함으로 여겨진다.

▲  옛 사람들의 큼직한 수저들 - 오늘날 숟가락보다 훨씬 크다.

▲  고려, 조선시대 기와들

▲  괴산 외사리에서 출토된 와당(瓦當)들

▲  백제 와당들

▲  어처구니를 잃은 늙은 맷돌

문화유물전시관에 전시된 기와(와당)는 모두 청주 지역 사람들이 기증한 것이다. <옥산면 출
신인 재단법인 간송문화재단의 고(故) 권태성, 부강면(원래 청원군이었으나 지금은 세종시 관
할)의 전상복, 문의면 괴곡리에 박승인 등>
멀리 백제부터 가까이는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기와들이 시대를 초월하며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이중 괴산 외사리 와당은 그 유명한 산막이옛길(☞ 관련글 보기)
이 있는 외사리 절터에서 수습된 것이다.


▲  청주 문산리 돌다리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2호

유물전시관 앞에는 오래된 돌다리가 놓여져 있다. 그를 위해 작게 연못을 파고 다리를 두었는
데, 겨울 제국이 씌워놓은 두터운 얼음이 연못을 꽁꽁 봉해버렸다.

이 돌다리는 원래 문산리 문의초교 정문 남쪽에 있던 것으로 다리 양식으로 보아 고려 때 조
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의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헌종(憲宗) 때 편찬된 '충청도읍지'
로 다리 상판은 2.5x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 10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주(石柱)는
1.3m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판 장대석(長臺石)은 장축(長軸)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
결하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해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는 동서로 교각을 두었으
며, 석재는 일정한 크기가 아닌 거칠게 다듬었다.
다리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해 교각의 역할을 하게 하였고, 멍에석
을 설치하고 상부에 넓은 석재를 덮었다. 교각에는 '乙卯二月(을묘이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어느 을묘년 2월에 다리가 조성되거나 보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산리 일대가 대청호에 희생되자 1980년 문산관과 함께 미천리로 이전되었다가 2002년 3월에
이곳에 들어왔다. 그래도 돌다리인지라 그의 체면을 위해 연못까지 깔아주었으니 비록 그 길
이는 짧아도 다리의 역할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다리 통행 가능)


▲  아직도 튼실한 문산리 돌다리 (옆에서 바라본 모습)

▲  오창에서 이곳으로 밀려난 학소리 유적 (I유적 1호 집자리)

돌다리 남쪽에는 학소리 유적을 품은 보호각이 있다. 같은 청주 땅이긴 해도 이곳과는 완전히
반대편인 오창면 학소리 불당산(해발 246m) 동남쪽 자락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집
터 4기, 석관묘 7기, 토광묘(土壙墓) 19점, 석기류 10점, 청동류 14점, 철기류 40점, 옥석(玉
石)류 15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소중한 옛 흔적을 내비친 학소리 유적이 제자리를 두고 머나먼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
는 510번 지방도 우회도로가 바로 유적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발이 우선인 이 땅의
현실에서 아무리 엄청 늙은 유물과 유적이 쏟아져 나와도 개발의 칼질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
한 존재라 신작로(新作路)에게 자리를 모두 내주고 겨우 I유적 1호 집자리만 이곳으로 넘어왔
다. (나머지는 모두 밀어버림) 그래도 두루봉동굴처럼 개발의 칼질에 완전히 아작나는 꼴은
면했으니 그것으로도 다행이라 하겠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오창 학소리 I유적 1호 집자리

▲  옛 문의 고을의 비석들

이들 비석은 문의 고을 현감(縣監)과 이곳을 다녀갔던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의 공덕비, 선정
비(善政碑)들로 문의 고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준다. 장대한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와 얼
룩진 피부가 고색의 내음을 진하게 선사해주는데, 원래 문산리와 미천리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대청댐 건설로 모두 미천리 일대로 집합시켰다가 1997년 4월 이곳으로 옮겼다.
저중에는 정말로 비석을 받을만한 사람도 있겠지만 마땅한 선정(善政)도 없음에도 억지로 챙
긴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 자신
의 배때기를 채우는 지방 관리가 적지 않았다.


▲  동그란 석조(石槽)로 이루어진 샘터
문의문화재단지를 닦으면서 만든 산사(山寺) 스타일의 석조 샘터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목을 무한리필로 아낌없이 축여준다. 석조 피부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어 잠시 고적한 산사의 샘터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김선복 충신각(金善復 忠臣閣)

샘터 옆에 자리한 김선복 충신각은 임진왜란 시절 중봉 조헌(重峯 趙憲)을 따라 왜군과 싸웠
던 김선복(1571~1592)의 충절을 기리고자 조선 후기에 문의면 동동리 정가울에 세운 것이다.

김선복은 조헌의 수하로 불과 21살 나이에 청주성 공격에 참전해 공을 세웠으나 그가 무리하
게 벌인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때 불과 700여 명으로 왜군 15,000명과 무
작정 싸웠으니 딱히 계략을 쓰지 않는 이상은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충신각은 1칸짜리 팔작지붕 건물로 김선복의 후손(의성김씨)들이 관리하여 오다가 1997년 이
곳에 의탁했다.


♠  부강리 고가, 문산관 주변

▲  양반가옥

김선복 충신각 옆에는 잘 지어진 기와집(양반가옥)이 있다. 1994년 문화재단지 수식용으로 지
어진 것으로 중부지방 양반 한옥을 재현했는데,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가묘, 광채 등을 갖
추고 있으며, 집 안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사랑채와 안채, 가묘를 두었다.

▲  양반가옥 안쪽에 자리한 사랑채와 안채

▲  집 주인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  3대 조상까지 제를 지내던 가묘(家廟)

▲  벽에 붙여진 부적


▲  부강리 고가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1호

문산관 밑에는 부강리(현재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에서 옮겨온 늙은 기와집이 있다. 집은 안
채와 광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채가 원래 집으로 1995년 집 주인이 청원군(청주시)에 집을
내놓으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그 이후에 돌기와집 형태의 광채를 새로 덧붙여 지금의 모
습을 이루게 되었다.

▲  부강리 고가 안채

▲  안채 툇마루

제아무리 잘 만든 집이라 해도 사람이 살지 않
으면 금방 망가지기 마련이다. 집은 좋든 싫든
사람의 손때를 타야 별탈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화재단지에서 노후를 보내게 되어 그
리 망가질 일은 없겠지만 그냥 저리 장식용으
로 두는 것보다는 전통 가옥 체험이나 민박용
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호수가 바라
보이는 언덕에 그림처럼 자리한 늙은 한옥에서
의 하룻밤 체험도 괜찮아 보인다.

▲  뒷쪽에서 바라본 부강리 고가

 


▲  오호라 통제라.. 몸단장으로 몸을 가린 매정한
'문의 문산관(文山館)'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49호


문화재단지 가장 윗쪽에는 문의고을의 객사(客舍)였던 문산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가
장 존재감이 큰 건물이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갔을 때는 몸을 꽁꽁 가리며 한참 몸단장 중이었
다. (기와 교체 및 좌익사 보수공사) 그래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구경하지 못했지. 가는 날이
문 닫는 날이라고 진짜 날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못 맞췄다.

나를 상심케 만든 문산관은 제왕의 전패(殿牌)를 봉안하여 지방 관리들이 매월 2회 예를 올리
는 공간이자 조정에서 출장을 나온 관리의 숙식을 제공하던 객사이다. 건물 구조는 가운데에
3칸짜리 정당(正堂)을 두고 그 좌측에 4칸, 우측에 3칸 건물을 날개처럼 덧붙이니 이것을 익
사(翼舍)라고 하여 좌익사, 우익사라 불렀다. 그래서 문산관은 정면이 10칸 규모가 된다. 정
당에는 전패가 담겨져 있는데, 벽돌로 바닥을 깔았으며,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는 우물마루
를 깔았다.

이 건물은 1666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붕 암막새 기와에 '擁正六年 戊申四月(옹정
6년 무신4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8년 4월에 중건되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허나 1910
년 이후 왜정(倭政)은 문의 고을의 관청 건물을 싹 밀어버리고 달랑 문산관만 생색내듯 남겨
두었는데, 그마저도 문의국민학교(문의초교) 건물로 변질시켜 망국(亡國) 관청의 건물을 욕보
였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문의초교 건물로 쓰였으며, 대청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이전 비용(3,000만원)이 여의치 않아 이전 대책도 딱히 세우지 않으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대책이 마련되어 1979년 문의향교 옆으로 이전되었으며, 이때 앞서 언급했던 문산리
돌다리를 문산관 앞에 놓았다. 이후 1997년 지금의 자리에 안착했다.

객사 건물은 전주 고을 객사인 풍패지관(豊沛之館)과 비슷한 모습으로 비록 규모와 양식면에
서는 그보다 떨어지지만 이 땅에 흔치 않은 객사 건물 형식으로 문의 고을의 위상을 보여준다.


▲  옆에서 바라본 문의 문산관
원래 공사기간은 20일 전까지였는데 무슨 영문인지 아직까지도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문산관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  흑백사진에 담긴 문산관의 흑역사
문산관을 가린 임시 담장에는 문산관의 현재와 과거 사진을 걸어두었다. 과거 사진
중에는 1978년 사진도 있는데, 오랫동안 초등학교 건물로 쓰이면서
원형을 많이 잃었던 흑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문산관 보수 공사에 투입된 기와들
저들이 모두 지붕 위에 올라가야 끝나는데
아직도 저만큼이나 남아있었다.

▲  문화재단지 전망대로 인도하는 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  문화재단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전망대

문산관에서 박석이 입혀진 남쪽 오솔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전망대가 있다. 문산관과 더불
어 문화재단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으로 이곳에 오르면 문화재단지 일대와 대청호,
그 너머 산줄기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
높은 곳에서 옛 문의 고을을 굽어보는 기분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의문화재단지와 대청호

▲  전망대에서 바라본 노현리 고가(왼쪽 'ㄱ'자 집)와
옹기전수관 (오른쪽 기와집)

▲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청호미술관 주변과 대청호


♠  문의문화재단지 마무리

▲  여막(廬幕)

전망대와 양반가옥 사이에는 초가 지붕을 지닌 돌집이 있다. 옛날식 창고인가 싶어서 살펴보
니 여막이라 불리는 집이다. 여막이란 무덤 부근에 지어놓고 상주(喪主)가 상을 마칠 때까지
머물던 집을 일컫는다.
문화재단지가 제자리를 잃은 문화유산의 보금자리긴 하지만 민속촌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문화재단지를 닦으면서 초가, 기와집, 돌탑 등을 새로 지어놓아 이 여막도 그런 것인줄 알았
는데 알고 보니 나름 사연이 있는 집이었다.
강내면 연정리 한양조씨 집안인 조육형과 그의 아버지인 조병천이 20세기 한복판에 대를 이어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신문과 방송에 크게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효행을
기리고자 그들이 사용했던 여막을 재현한 것이다. 물론 그 옆에 무덤도 그대로 재현했다.

조병천(趙炳天) 같은 경우는 1957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무려 3년
씩이나 생식(生食)을 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그 이후 무덤 일대에 공단이 들어서자 부득이하
게 다른 곳으로 무덤을 옮겼는데, 이때 또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  조병천의 시묘생활 모습

▲  조병천의 아들인 조육형의 시묘생활 모습

▲  여막 안에 재현된 시묘살이 모습
3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그 3년 동안 저렇게 살았다고 한다.

▲  조병천이 시묘살이 때 신었던 짚신과
가죽가방

▲  여막 옆에 재현된 무덤


▲  노현리(蘆峴里) 고가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20호

여막 밑이자 옹기전시관 이웃에는 기와집과 초가를 모두 지닌 노현리 고가가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원래 강릉김씨 김승지의 종가(宗家)로 나중에 연안이씨 집안인 괴정 이현승(槐庭 李顯承
)에게 넘어갔으며, 그의 손자인 이양훈이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에 집을 넘겼다.
안채는 'ㄱ'자 구조의 기와집이며, 광과 사주문 측간(厠間)은 초가로 되어 있어 기와집과 초
가가 서로 어우러진 공간이 되었다.


▲  윗쪽에서 바라본 노현리 고가와 대청호

▲  초가로 이루어진 측간

▲  양반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안채

▲  옹기전수관 뒷쪽에 재현된 옹기 가마터

▲  옹기전수관 앞길


▲  애국지사 일곱 분의 상

대청호미술관 맞은편에 왜정 시절 독립운동을 벌였던 청주 지역 애국지사 7인의 상(像)이 봉
안되어 있다. 그 7명의 위인(偉人)은 신석구(申錫九, 1875~1950), 권병덕(權秉悳, 1867~1944
), 한봉수(韓鳳洙, 1883~1972),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신
규식(申圭植, 1880~1922), 신홍식(申洪植, 1872~1937)으로 이중 단채 신채호 선생(대전 어남
동 출생)을 제외하고 모두 청주 출신이다.
애국지사 7인은 모두 앉아있는 모습으로 나그네로 하여금 잠시 마음을 숙연케 한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그들이지만 정작 이 나라는 아직도 친일매국노의 후손
과 친일 잡것들의 손에 감싸여 종잡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으니 저들도 지하에서 통곡을 하
고 있을 것이다.


▲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표석과 조각공원 표석

문화재단지 가장 남쪽에는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이 자리해 있다. 2004년 10월 2일 문을 열었
으며, 충북 최초의 공립미술관으로 청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3개의 전시관과 야외조각공원
을 갖추고 있으며, 기와집을 얹힌 3층 꼭대기에는 라운지룸과 전망대가 있다. 부지 면적은
4,900㎡, 건물 연면적은 1,411㎡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입장료는 문의문화재단지 관람
료에 포함되어 있으며, 관람시간 역시 문화재단지와 같다.

따스한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 3개의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죄다 추상 미술 일색이었는데, 무
슨 내용인지는 봐도 모르겠다. 옛날 미술은 다소 흥미가 가는데 현대 미술은 그리 정도 가지
않고 내 체질에도 맞지 않다. 하여 주마등(走馬燈)처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야외조각공원(
대청호조각공원)을 간단히 살펴보고 자리를 떴다.

*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산리 산6-1 (대청호반로 721,
  ☎ 043-201-0910~14)


▲  대청호미술관에서 양성문으로 바로 이어지는 산책로

▲  양성문에서 바라본 대청호
호수에 떠있는 존재는 인공수초 재배섬이다.

▲  문의문화재단지를 뒤로 하며

작지만 볼거리가 많았던 문화재단지를 2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비록 문산관
이 몸을 가리며 몸단장 중이라 그의 모습을 살피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 외에 어지간한
것들은 죄다 살펴보았으니 그것으로도 배가 부르다.

햇님의 퇴근까지 시간이 넉넉하여 문화재단지 뒷산인 양성산과 그곳에 깃든 양성산성을 보고
자 했으나 산을 타기가 귀찮아서 몇 발자국 만에 그만두었다. 그들은 모두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문의(미천리) 중심지로 나와 동네마트에서 과자, 음료수를 사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다가 문의 중심지 뒷쪽(서쪽)에 자리한 문의향교(文義鄕校,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94
)를 찾았다.
향교는 늘 그렇듯이 모든 문이 굳게 봉해져 있어 낮은 돌담 너머로 향교의 구성원인 대성전(
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등을 구경했다. 게다가 사진도 별로라 여기서는 빼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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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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