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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겨울 나들이 (경호정, 읍내리모전5층석탑, 미타사)



' 충북 음성 겨울 나들이 '

  음성 설성공원 경호정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설성공원 경호정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미타사 지장대불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미타사 지장대불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충북 음성(陰城)을 찾았다. 내 마음도
모르고 수북하게 쌓여만 가는 미답처(未踏處)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수도권과 가까운 적
당한 메뉴를 물색하다가 충북 음성에서 격하게 반응을 보여 그곳으로 길을 정했다.
충북 한복판에 자리한 음성군은 오래전에 1번 지나간 것이 전부일 정도로 지지리도 인연이
없던 곳이다. 하여 고려시대 마애불을 간직한 미타사를 비롯한 음성의 여러 소소한 명소를
둘러보며 그동안의 부족한 인연을 조금 채워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로 달려갔
다. 거기서 음성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 정도를 달려 음성읍의 관문인 음성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음성에 이르니 새벽까지 눈이 왔는지 천하가 온통 은빛세계였다.

음성터미널에서 미타사가 있는 비산리(碑山里) 방면 군내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무려 1시간
20분 뒤에 차가 있다. (시외직행버스도 비산리에 정차하나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음;) 그래
서 시간이나 때울 겸 터미널과 가까운 설성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미타사 후식용으로 보려
고 했던 곳인데, 버스 시간 관계로 후식을 먼저 맛보게 되었다.


 

♠  음성읍내의 소중한 휴식처, 경호정과 3층석탑 등을 간직한
음성 설성공원(雪城公園)

▲  설성공원의 중심인 경호정

음성터미널과 가까운 음성읍내 한복판에 설성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 공원은 음성읍민의 포근
한 휴식처이자 설성문화제, 음성품바축제 등이 열리는 지역 축제의 장으로 공원의 꽃인 경호
정을 비롯하여 3층석탑, 독립기념비, 이무영(李無影)문학비, 야외음악당, 음성청소년문화의집
,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 이름인 설성(雪城)은 음성의 다른 이름으로 고려 때 잠시 쓰였다. 지역 축제도 그 이름
을 따서 설성문화제라 했으며, 음성을 상징하는 옛 이름으로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공원 북부에는 테니스장과 게이트볼장, 야외음악당 등이 자리해 있는데, 매년 5월에는 이 음
악당에서 음성품바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공원 남부에는 동그란 연못과 경호정, 읍내리3층석
탑, 음성청소년문화의집,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공원 면적은 27,669㎡(8,370평)로 공원 동쪽에 음성천이 음성의 산하를 촉촉이 어루만지고 있
으며, 공원 내에 쉼터와 의자가 넉넉히 깔려있고,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읍내리5층모전석
탑 등 볼거리도 풍부해 음성 나들이 때 꼭 들려볼 만하다. 겉보기에는 시내에 흔한 공원처럼
보여 발길이 잘 가지 않겠지만 속은 제법 알찬 것이다.


▲  경호정과 얼어붙은 연못

설성공원의 갑(甲)은 뭐니뭐니해도 경호정이다. 공원 남쪽에 1,500평의 연못을 파고, 그 중심
에 200평 정도의 섬을 띄웠는데, 그 섬에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독립기념비를 두었다. 비
록 자연산은 아니지만 섬을 구경하기 힘든 음성 땅의 거의 유일한 섬으로 경호정과 어우러져
상큼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섬 서쪽과 동쪽에 속세와 섬을 잇는 돌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욱 우려낸다. 거기에 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듯, 눈까지 깔려있으니 정말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  경호정(景湖亭) -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9호

돌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서면 경호정이 반갑게 마중을 한다. 경호정은 정면과 측면이 2칸인
팔작지붕 정자로 1934년에 지어졌다. 당시 이름은 인풍정(仁風亭)으로 1955년에 음성군수 민
찬식이 중건해 경호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99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중건기(重建記)를 작성하여 정자 내부에 걸었다.

경호정은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연못 중간 섬에 자리해 있고, 사방이 개방된 형
태라 늘 시원한 바람이 앞다투어 머문다.

▲  경호정 동쪽 돌다리

▲  경호정 서쪽 돌다리


▲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29호

경호정 맞은편에는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이 경호정을 바라보며 서 있다. 독립기념
비는 1945년 8월 해방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지어진 지 80년도 되지 않은 젊은 비석이나 비
석 머리 부분에 검은 때가 가득하여 마치 몇백 년 묵은 비석처럼 고색의 멋을 풍긴다.

그런 독립기념비 옆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읍내리3층석탑이 있다. 그는 높이 2.4m로 읍내
부근 평곡리 절터에 있던 것을 1934년에 현재 자리로 가져와 경호정의 장식물로 삼았다.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붕돌은 밑면에 3단 받침을 두었고, 지
붕돌 귀퉁이는 아주 살짝 들려져 있으며, 3층 위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손상이 없이
무탈한 모습을 보인다.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9호

경호정에서 남쪽으로 가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이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음성에서 가
장 늙은 탑인 읍내리5층모전석탑이 자리해 있다.
모전탑(模塼塔)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것으로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과 조
금 비슷하다.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탑은 매우 흔하나 전탑과 모전탑은 거의 흔치 않은 존재
로 전탑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경북 안동(安東)과 영양(英陽), 의성(義城), 경주(慶州)
지역에 간간히 남아있을 뿐이다.

이 모전탑은 원래 음성향교 부근 교동(校洞) 절터<'읍내리 사지(寺址)'라고도 함>에 있던 것
으로 1946년 수봉초교 교장인 이철세가 학교 교내로 옮긴 것을 1995년 현재 자리에 안착시켰
다. 탑이 있던 교동 절터는 고려 중기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탑의 구조를 보면 땅에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과 5층 탑신을 차례대로 올렸
는데, 2층과 5층 탑신의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며, 1층 탑신 4면에는 얇게 감실(龕室)을 팠다.
지붕돌은 위와 아랫면 모두 전탑처럼 층단을 이루고 있고,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
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탑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중기로 여겨지며, 안동 지역 모전탑의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탑 옆에는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碑座)가 누워있는데,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으로
오래전에 가출한 비신(碑身)을 애타게 기다린다.


▲  읍내리 5층모전석탑과 성문처럼 생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5층모전석탑 옆에 자리한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은 음성 군립(郡立) 박물관으로 1994년 4
월에 문을 열었다. 소장 유물은 950점 정도로 음성의 역사와 문화, 생활, 민속을 아낌없이 담
고 있지만 아직까진 인지도가 낮아 관람객은 별로 없다. 내가 들어선 시간은 주말 낮 11시였
는데, 관람객은 나홀로 뿐이었다.

전시관 1층(향토역사실)은 음성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진, 디오라마 등
을 전시하고 있으며, 음성 지역의 지정문화재와 향토문화재를 축소 재현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2층(민속유물실)은 음성의 풍습과 민속, 농민문학가 이무영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
진, 이무영의 작품과 유품 등을 두었으며, 전시관에 대한 내용은 이쯤에서 선을 긋는다.

* 설성공원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 향토자료전시관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817-12 (설성공원길 10-7 ☎ 043-
  871-5931)


 

♠  가섭산 미타사(迦葉山 彌陀寺) 아랫 구역
(느티나무, 지장대불, 마애여래입상)

▲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저 멀리 금동 피부의 지장대불이 보인다


설성공원을 둘러보고 음성터미널로 돌아오니 비산리를 경유하여 후미리로 가는 음성군내버스
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일요일 낮시간이라 승객은 노인 2명 뿐, 그 상태로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터미널에 남기
며 육중한 바퀴를 움직인다. 음성읍내를 돌아 음성향교 고개를 넘어 10분 정도 가니 왼쪽 창
밖으로 미치도록 거대한 불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바로 미타사 금동지장대불로 천하에
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높이 41m)이라 멀리서도 제법 크게 보인다.

버스는 비산1리 정류장을 지나 비산4거리에 이르렀는데, 운전사에게 미타사 길을 문의하니 여
기서 내리라고 그런다. 하여 버스에서 내려 충청대로를 건너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로 들어섰다.


▲  미타사입구에 자리한 비선거리 느티나무 - 음성군 보호수 3-14호

비산리 미타사입구에서 미타사로 걸음을 재촉하면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발길을 붙잡는
다.
이 나무는 2004년에 음성군 보호수로 지정된 것으로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20년 가량이 보태져 대략 220년 정도 된다. 높이는 10m, 둘레 130cm로 미타사에서 관
리하고 있으며,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린 초췌한 모습으로 간절하게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나무 그늘에는 구름무늬 이수(螭首)를 갖춘 오래된 비석 2기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들은 조
선 후기에 음성 고을을 다스렸던 음성목사(牧使, 현재 군수나 시장) 엄씨와 이씨의 송덕비(頌
德碑)이다. 이들 비석 때문에 이곳을 이 땅에 흔한 지명의 하나인 '비석거리'라 불리게 되었
으며, 그것이 1글자 와전되어 지금은 '비선거리'라 불린다.


▲  후평소류지(구룡연)와 구생범종루(사진 왼쪽 누각)
하얀 눈옷을 걸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 삼아 겨울에 지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미타사에서 운영하는 밝은언덕노인요양원과 추모공원(가족납골공원)을 관
리하는 건물이 나온다. 미타사 길은 여기서 동쪽으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옆에 후평소류지(비
산소류지)라 불리는 저수지가 그림 같은 풍경을 드리운다. 미타사에서는 그를 구룡연(九龍淵)
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래는 농지로 이곳에 큰 샘터가 있었다.
이후 1970년대에 농사를 위해 버들골을 막아서 소류지(沼溜地)를 만들었으며, 지금의 절이 있
도록 도와준 비산1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미타사에서 공사 비용을 많이 내주었다.

후평소류지 북쪽에는 2층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그는 범종(梵鍾)을 품고 있는데, 그
냥 범종루(梵鍾樓)도 아닌 무려 중생을 구한다는 뜻의 '구생(求生)범종루'를 칭하고 있다. 범
종루에 안긴 범종은 2001년에 주지 명안(明岸)이 미타사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성지
로 다지는 차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범종의 높이는 3.3m, 두께 20cm, 지름 2.1m, 무게 18톤에
청동범종이다.

2006년에 명안이 입적하자 2007년 그의 열반일에 맞춰 범종루를 완성시키며 그를 기리는 회향
(回向) 타종식을 가졌다.


▲  천하 최대의 지장보살상으로 명성이 높은 지장대불(地藏大佛)

구생범종루 북쪽에는 지장대불을 중심으로 한 추모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2001년에
주지 명안이 진공당 탄성(眞空堂 呑性)과 쌍계사(雙磎寺)의 조실(祖室)인 고산(高山)의 도움
으로 만든 것으로 이 일대에 있던 밭과 평평한 모습의 마당바위를 밀어버리고 자리를 닦았다.

공원 북부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지장대불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고 장엄한 모습으로 납골
당 영가(靈駕)들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의 높이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척(41m)으로
1998년 4월에 짓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으며, 천하에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으
로 미타사의 자부심이 담긴 큰 보살상이자 듬직한 후광(後光)이다.
그가 어찌나 크던지 멀리 충청대로에서도 시야에 보이며, 그 앞에 서면 정말 주눅이 잔뜩 들
정도이다. 특히 거구의 지장보살이 서 있는 연화대(蓮花臺)도 그 덩치에 못지 않게 상당하여
높이가 3m에 이르며, 그 밑의 기단석에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중(八部衆) 등의 여러 호법신
(護法神)들이 새겨져 영가들을 보살피는데 정신이 없는 지장보살을 지킨다.

참고로 이 자리는 백룡이 여의주를 품은 최고의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뒤에는 가섭산의 오
색비단 장막이, 동에는 좌청룡, 서에는 우백호가 지켜주고 탁트인 남쪽에는 여의주가 뚜렷하
다는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지장대불

▲  지장대불의 연화대와 기단부


▲  그윽한 설경에 미타사 숲길 (미타사 마애불 남쪽)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30호

지장대불을 지나면 설경에 잠긴 오르막 숲길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선사한다. 푸른 나뭇잎
대신 하얀 눈꽃을 가득 머금으며 순백의 아름다움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그 숲길을 조금 오
르면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미타사의 오롯한 흔적인 마애여래입상이 보호각의 보
호를 받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미타사 마애불은 마치 현신하듯 바위에 진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는 405cm로 머리에는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이다. 눈은 지워진 듯 보이지 않고,
코는 형태만 남아있으며, 입도 그 형태만 있다. 볼살은 두터워 보이고, 얼굴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청력 하나는 정말 대단할 것 같다.
어깨는 유연하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쳐를 취했다. 옷은 왼
쪽 어깨를 시작으로 발까지 덮고 있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으며, 형식화된 신체 표현,
직선적인 윤곽,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과 옷자락에서 신라 후기 불상 양식을 따른 고
려 중기 마애불로 여겨진다.

마애불의 보호를 위해 2002년에 맞배지붕 보호각을 씌워 눈과 비를 막아주고 있으며, 보호각
이 사방으로 뚫린 오픈식이라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상 앞에는 예를 올리는 공간이 있는
데, 하얀 눈이 가득 입혀져 있어 예를 표하지는 못했다.


▲  멀리서 바라본 미타사 마애여래입상과 그의 조촐한 거처

▲  표정을 잃어버린 듯한 마애여래입상
눈과 눈썹은 거의 지워졌고, 코와 입, 귀만 형식적으로 남아있다.


 

♠  미타사 경내


▲  미타사 경내 직전 (돌담길)

마애불에서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한 굽이 오르면 가섭산(해발 710m) 동남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타사는 이 땅에 아주 흔한 절 이름의 하나로 서울에만 보문동(普門洞), 옥수동(玉水洞), 개
화동(開花洞)에 오래된 미타사가 있다. 미타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뜻하며, 아미타불의 절
이 바로 미타사가 된다.

음성 미타사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으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의 비구니 수행도량이다. 미타사
란 이름은 1964년 창건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옛 이름은 유룡사(有龍寺)라고 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63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신빙성은 없으며, 876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1370
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경내에 고려 후기 석불이, 경내 밑에 고려 중기 마애불이 있고, 절터에서 고려 때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파편,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연 것은 확
실하다.

1584년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6년 병자
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으로 청나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그의 소망에 따라 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허나 1724년(또는 1723년) 화재로 파괴되면서 오랫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이후 마애불만 속세에 드러낸 채, 간신히 터만 남아있다가 19세기에 비산리에 살던 만석꾼 경
주최씨가 '나를 좀 꺼내줘' 외치는 불상 꿈을 꾸고 땅을 파서 석불을 발견했다. 그것이 인연
이 되어 경주최씨는 아들을 얻었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석불은 동네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허나 불상의 적당한 거처를 만들진 못하고 김치광처럼 앞가림을 하거나 토굴을 만들어 봉안했
으며, 경주최씨 일가에서 계속 불상을 관리했다.

1964년 인근 충주에 사는 어느 무당이 석불을 가져가려고 인부를 동원했으나 불상이 이상하게
도 너무 무거워서 하루 동안 겨우 지장대불 밑에 있는 비산소류지 밖에 가지 못했다. 그 소식
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죄다 몰려가 무당을 쫓아내고 불상을 되찾았는데, 이상하게도 불상이
가벼워져 금방 제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있던 비구니 명안은 음성에 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
곳 절터의 존재와 무당 사건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안내로 절터를 답사하게 되었는데, 석
불 관리인인 경주최씨 일가 최봉락은 그에게 석불을 모시며 이곳에 머물러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일단 땅 주인이 절터에 지은 원두막을 대충 손질하여 머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명안에게 머물 곳과 먹을 거리를 지원해주었고, 같이 절을 짓기로 의견을 모았
다. 하여 명안과 마을 사람들은 '미타사 창건 기성회'를 조직하여 가가호호 돈을 모으고, 일
일이 공사 자재를 짊어지며 집을 지어 1965년 4월, 8칸의 법당과 산신각이 지어졌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미타사의 시작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 절을 지은 점
이 특이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석불을 수호신으로 무척 애지중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
당이 석불을 몰래 빼돌리려는 사건까지 터졌으니 더욱 그렇다. 하여 이곳에 온 명안에게 석불
봉안을 부탁하고 절까지 지어준 것이며, 석불과 운 덕분에 수덕사 비구니의 일원이었던 명안
은 자기 이름으로 절을 운영하게 되었다.

1965년 절 창건 당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1973년에
는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이 나왔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나오기도 하
여 옛 절의 위엄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1979년에는 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웠고, 1980년에 선방과 3층석탑을 세웠으며, 납골당
사업에도 손을 뻗쳐 2001년에 추모공원과 지장대불, 구생범종루 등을 만드는 등, 나날이 사세
를 확장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을 꾸리게 된 명안 이정화(李貞和)는 2006년에 입적했는데, 다비식
(茶毘式)을 하자 연꽃 봉오리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 현재는 그의 제자인 희원이 주지로 있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약사전, 선방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
입구에 지장대불과 관련 건물, 복지시설인 밝은언덕노인요양원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
는 지방문화재인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해 지금의 절을 있게 해준 석조여래좌상, 대형 맷돌 등
이 전하고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채 익지도 못했지만 첩첩한 산자락에 묻힌 산사(山寺)로 경
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  미타사 경내 (대광명세존진신 사리탑과 극락전)

돌담길을 지나면 경내의 중심인 극락전(極樂殿)이 나온다. 극락전 뜨락에는 특이하게도 6각형
을 띈 날씬한 모습의 3층석탑이 서 있는데, 탑의 이름이 무려 '대광명세존진신사리탑'으로 그
이름 그대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탑에 봉안된 사리는 인도의 네루 수상이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찾아온 것으로 미얀마 만다래힐
사원에 전달했다. 만다래힐 주지승은 이중 3과를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인 일타에게
주었고, 일타는 다시 미타사에 기증했다. 이에 미타사는 1992년 사리를 봉안할 탑을 만들어
봉안함으로서 부처의 사리를 보유한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을 얹혔으며, 4기의 석사자를 모서리에 두어 3
층 탑신을 지탱한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 등을 갖추며 탑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가 하얗고 탱탱하지만 100~200년에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후반
을 대표하는 석탑의 하나로 크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  미타사의 법당인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새로 지었다. 지붕이 건물의 무려
⅔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육중한 탓에 건물이 꽤 커 보이며, 내부에는 1965년에 조성된 석가
여래상과 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절의 창건주인 명안(이정화)의 영정이 봉
안되어 있다.

극락전 자리에는 원래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무를 베려고
연장질을 하면 사람들이 계속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통에 나무에 귀신이 있는 것으로 여겨 아
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미타사 주지 명안은 우리가 나무를 처리할테니 연장을
빌려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청했으나 빌려주는 사람까지 해를 입을까봐 아무도 호응하지 않
았다.
하여 명안은 나무에 제를 지내 절을 지키는 옹호신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고, 연장을 빌려 나
무를 건드리니 글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20세기 한복판에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일이 있
었다니 정말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상

▲  미타사의 창건주 명안의 진영

▲  청기와를 눌러쓴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지하에는
공양간이 있다.

▲  눈이 잔잔히 입혀진 얼어붙은 샘터
겨울에게 털린 물지갑을 쥐어든 동자상의
뻘쭘함은 언제쯤이나 끌날까?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극락전 뒷쪽 좌측에는 삼성각이 높이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9년 기존의 산신각을 부시고 새로 만들었으며,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그려진 산신탱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천태산이
그려진 독성탱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보금자리
로 절터에서 나온 석불을 약사여래로 삼아 봉안하고 있다.

1724년(1723년) 절이 화재로 붕괴되자 그 충격으로 머리와 양손을 잃은 채, 지옥보다 더 어두
컴컴한 땅속에 갇혀 기나긴 외로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비산리에 사는 경주최
씨의 꿈속에 나타나 꺼내달라고 애원하면서 그의 의해 비로소 다시 속세로 나오게 된다.
당시 경주최씨는 마을의 부호(富戶)였으나 불상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노천
에 김치광처럼 덮개를 씌우거나 토굴을 파서 봉안을 했고, 그 후손인 최봉락이 비구니 명안에
게 이 절터와 석불을 보여주면서 석불을 모시고 살 것을 권해 지금의 미타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양손과 머리는 1964년에 새로 만들어 끼었으며,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점이 약
사여래로 여겨져 약사전을 짓고 그 건물의 주인으로 삼았다. 석불 높이는 90cm, 어깨폭 50cm
이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여겨져 절 밑에 있는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석불의 머리와 손은 새로 했기 때문에 세월의 고된 때로 자욱한 기존 부분과 확연히 색깔 차
이가 난다. 하얀 얼굴에는 미소가 환하게 번져 있고, 몸에 걸친 통견(通肩)은 마치 겨울에 조
성된 듯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윗도리와 아랫도리의 균
형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이렇게 미타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솔직히 경내 밑에 자리한 마애불이
땡겨서 이곳에 온 것이지 미타사 자체에 반응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늙은 절터에
다시 세웠다 한들, 지금의 미타사는 분명 새 절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의 인도로 찾아온 미타사. 거기에 겨울 제국이 폭풍처럼 선사한 눈이 천하를 순백으로
채색하면서 산사의 그윽한 설경까지 이리 챙기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음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미타사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소이로61번길164 ☎ 043-872-0522)
* 미타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미타사를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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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7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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