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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농다리, 보탑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봄맞이 나들이 '

진천 농다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3층목탑

보탑사 금동와불

▲  보탑사 3층목탑

▲  보탑사 금동와불

 



 

반년 가까이 천하를 주름잡던 겨울 제국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마
지막 자웅을 겨루던 3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충북 진천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엄청난 출근 차량의 버벅거림을 간신히 뚫고 진천(鎭川) 땅
에 들어섰는데, 그동안 진천은 그저 지나가기만 했지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었다. 하여
제일 먼저 진천을 찾아 그곳에 깃든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워보기로 했다.

오전 10시 경, 문백면에 자리한 농다리에 도착했다. 아직은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고 농
다리가 발을 담군 미호천에서 물연기도 살포시 피어올라 이른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고
스란히 남아있었다.



 

♠  천하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 진천 농다리(籠橋)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서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진천 구산동리에는 천하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로 추앙을 받는 농다리(농교)가 미호천(세금천)
에 발을 담구며 정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농다리는 약 94m 길이의 돌다리로 28개의 마디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마디는 다리 교
각과 같은 존재로 길쭉한 마디 사이에 길이 1m 정도의 통돌을 1~2개 정도 얹혀 다리로 삼았는
데, 각 마디마다 통돌이 일직선으로 놓여있지 않고 아주 약간 구부러진 'S'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크고 작은 돌<자석(紫石)이 많이 사용됨>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은 다음, 지네
모양처럼 길게 만들었는데,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오로지 순 100% 돌로만 쌓았다.
교각 마디를 굵게 지었고 지역 사람들이 꾸준히 다리를 보살펴 다리가 크게 무너지는 등의 피
해는 없었다고 하며, 지금도 무난히 다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농다리를 시기하던 대자연
이 1,000년 이상 비와 눈, 바람을 억수로 퍼부으며 다리를 헝클어뜨리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까지 28칸의 마디 중 3칸을 지우고, 하천의 수심을 얕게 만들어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워
진 정도가 전부이다. (예전에는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수심이 많
이 얕아짐;) 그 정도의 피해를 제외하면 거의 양호한 수준이며, 다리가 떠내려가거나 붕괴된
적은 없었다.
그저 자연석으로 구축된 아주 단순해 보이는 돌다리임에도 수십 년을 견디지 못하고 앉은뱅이
가 되버리는 요즘 건축물보다 더 단단하니 옛 사람들의 건축 실력과 농다리의 근성이 신기롭
고 두려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다리는 언제 지어졌을까? 진천의 향토사를 다룬 상산지(常山誌)와 왜정(倭政) 때
이병연(李秉延)이 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고려 초 임장군(林將軍)이 축조
했다고'고 쓰여있다. 여기서 임장군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천 지역의 유력한 세력가로
보이며 통행 편의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1,000년 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 이름이 농다리가 된 것은 단순히 길다는 뜻에 농(long)이 아니라 교각 마디마다 돌을 쌓
으면서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 당기는 돌이 있어서 농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 땅
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이자 다른 돌다리와 완전히 구별되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건
강도 양호하여 고려 초 다리 건축을 연구하는데 아주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특히 고려 후기 이전 돌다리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매우 희소가치가 높다. 허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의 지위에 머물러 있으니 그 이유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국가 지
정 보물이나 사적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데 말이다.

시골 구석의 늙은 돌다리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농다리는 2,000년대 이후 진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면서 이제는 진천 제일의 명소이자 꿀단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장대한 세월이
훔쳐간 마디 3칸을 복원하여 예전처럼 28칸으로 회복했으며, 다리 주변에 주차장과 쉼터, 미
르숲을 닦았다.
하여 주말과 휴일만 되면 농다리의 위엄을 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며, 매년 5
월에는 농다리 일대에서 진천의 주요 축제인 '생거진천농다리축제'가 열린다.


▲  동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농다리가 튼튼하긴 하나 돌로 닦여진 다리라 길이 꽤 울퉁불퉁하다. 게다가 마디(교각) 사이
에 통행을 위한 통돌을 1~2개 붙여놓은 것이 고작이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과 마주친다면
괜히 다리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지 말고 먼저 쿨하게 양보하기 바란다.
그렇게 돌다리를 건너면 진천군청이 현대모비스와 자연환경국민신탁 등과 닦은 미르숲에 이른
다. 미르숲은 농다리 수식용으로 지어진 공원으로 천년정과 농암정, 인공폭포, 징검다리, 쉼
터, 야외음악당, 산길, 미르전망대 등이 닦여져 있으며, 여기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진
천의 대표적인 호수로 명성이 자자한 초평저수지(미호지)가 모습을 비춰 시간이 넉넉하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를 권한다. 다만 초평저수지는 덩치가 꽤 크기 때문에 전체를 둘러보
는 것은 좀 무리가 있으며, 농다리와 이웃한 서쪽 부분과 하늘다리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  마디(교각) 사이에 걸린 2개의 통돌

▲  마디를 이어주는 좁은 통돌

▲  서로 비슷한 모습을 지닌 2개의 통돌

▲  농다리의 단잠을 깨우는 중부고속도로

농다리 서쪽에는 중부고속도로가 흐르고 있다. 통행 수요가 겁나게 많은 도로라 차량들의 질
주 본능 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인데, 고속도로와 바로 이웃하고 있어 서울 방향(상행선)으
로 이동할 때, 잠시 오른쪽을 살펴보면 농다리가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렇다고 갓길에 아
예 바퀴를 접고 구경하지는 말자. 갓길은 긴급시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  미호천의 물살이 혼돈을 이루고 있는 농다리 (천년정에서 바라본 모습)

▲  지네가 징그럽게 기어가는 듯한 모습의 농다리
(동쪽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  농다리를 쌓은 이들의 아련한 흔적,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

농다리 동쪽에는 바위들이 주름선을 이루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 붉은 피부의
화살표가 밑을 가르키고 있는데, 그곳에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이라고 전하는 흔적이 서려있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살짝 귀띔해준다.

때는 고려 초 어느 날, 임장군이 농다리를 만들고자 큰 바위를 짊어지고 말을 탄 채, 용고개(
살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다. 농다리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말이 바위 무게에 너무 지친 나머
지 잠깐 주춤하더니 그때 발을 디딘 바위가 움푹 들어가 말의 발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이 움
직일 수 없게 되자 임장군이 바위를 든 채, 말에서 뛰어내리니 그가 발을 디딘 곳에도 장군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생겨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하지만 임장군을 바위도 거뜬히 드는 괴력의 사나이로 꾸
밀 정도면 그에 대한 지역 사람들에 높은 추앙을 엿볼 수 있으며, 말이 지쳐 발자국이 생겼다
는 전설은 다리 축조가 그만큼 고단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이들 흔적은 다리를 만드
는 과정(석재를 캐던 현장 정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  농다리의 신선한 양념, 1칸짜리 천년정(千年亭)
정자의 이름이 천년이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농다리가 1,000년 이상 숙성된
늙은 돌다리라 그를 기리고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북쪽 징검다리

농다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북쪽으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징
검다리에 이르게 되는데, 보통 농다리를 찾으면 농다리를 건너 징검다리로 원점회귀하는 코스
로 많이 둘러본다. 시간이 넉넉하면 여로(旅路)도 좀 살찌울 겸, 바로 이웃에 자리한 초평저
수지로 잠깐 넘어가도 되겠지만  우리는 진천부터 경북까지 둘러볼 곳을 많이 잡은 관계로 그
냥 징검다리로 돌아왔다.


▲  농다리와 징검다리를 이어주는 미호천 동쪽 산책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21세기판 농다리? 농다리 북쪽에 닦여진 징검다리

징검다리는 미호천에 촘촘히 박힌 큰 돌로 이루어져 있다. 농다리 주변을 꾸미면서 닦은 다리
로 한참이나 선배인 농다리와 서로 경쟁하는 듯 하다. 허나 농다리의 위엄 앞에 이제 10~20년
이 갓 넘었을 징검다리가 어디 감히 이름과 위엄을 내밀겠는가. 그저 묵묵히 농다리를 보조하
는 역할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미호천

▲  서쪽에서 바라본 징검다리


* 농다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 601-32



 

♠  폐허에 옛 절터에 연꽃처럼 피어난 현대 사찰
~ 진천 보련산 보탑사(寶蓮山 寶塔寺)

농다리를 둘러보고 다리 서쪽에 자리한 농다리전시관도 살펴보려고 했으나 귀차니즘에 휩싸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진천읍내로 나왔다.
원래는 바로 보은(報恩) 땅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문득 보탑사 3자가 스치듯 생각이 나 그곳
을 그날의 2번째 메뉴로 흔쾌히 정했다. 솔직히 농다리 하나만 보고 진천을 떠나기에는 다소
허전했지. 마치 50%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보탑사로 나머지 50%를 채우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진첩읍내에서 뼈다귀해장국으로 점
심을 때우고 보탑사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그곳까지는 약 13km, 진천 지역에서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자 벽지인 연곡리 골짜기를 굽이굽이 들어가 김유신(金庾信)장군 탄생지와 연곡저수지
(연곡제)를 거쳐 그 길(김유신길)의 끝에 자리한 보탑사에 도착했다.


▲  보탑사 느티나무 - 진천군 보호수 4호

보탑사에 이르니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자 봄의 해방
군이 지척에 왔건만 나무는 여전히 겨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봄이 더 분발하여
겨울로부터 천하를 속히 해방시켜야 되지만 겨울 제국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라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보탑사 느티나무는 나이가 약 370년 정도(198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될 때 추정 나이가 327년
)로 높이 18m, 둘레 5.3m의 덩치를 지녔다.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비립동 마을(보
탑사 밑에 자리한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어엿하게 성장했는데, 그의 그늘을 지나면
보탑사의 정문인 천왕문이 두툼한 덩치를 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탑사
의 짧은 내력을 살펴보자.


▲  보탑사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현판 대신 절 이름이 담긴 현판을 내걸었다.

▲  비파를 연주하는 흰 수염의 다문천왕
(多聞天王)과 칼을 다듬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  작은 용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과
보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


▲  경내 바깥 주차장에서 바라본 보탑사의 위엄
왼쪽 2층 건물이 수련원, 오른쪽 석축 위에 자리한 건물이 범종각,
그리고 그들 사이로 3층 목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진천의 명산인 만뢰산(萬賴山, 611m) 남쪽 자락에는 20세기 말 현대 사찰인 보탑사가 우람하
게 둥지를 틀고 있다. 보탑사는 만뢰산을 보련산(寶蓮山)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절을 둘러
싼 도덕봉과 약수봉, 옥녀봉 등 만뢰산의 남쪽 9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그것이
마치 1송이 연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아름답다 하여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연꽃
의 골짜기란 뜻의 연곡리(蓮谷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보탑사 자리에는 오래된 절터가 아련히 전해오고 있었다. 그 절은 백비로 유명한 연곡리
석비와 석탑을 남긴 채,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절의 이
름과 정보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어 안따까움을 더한다. 그러다가 1988년 보탑사 창건
주인 지광(智光), 삼선포교원 주지인 묘순(妙純), 보탑사 주지가 된 능현(能現) 등 3명의 비
구니가 그 터를 매입해 보탑사를 세워 기백(幾百)년 이상 끊어진 이곳의 법등(法燈)을 다시
켰다.

보탑사란 이름은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온 것으로 석가여래의 법문을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증명하고자 칠보탑(七寶塔)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비록 그것에 미치지는 못해도
보배탑(3층 목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이들의 마음에 부처의 가르침을 심어주고 자비심으로 가
득 채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었다.
또한 그냥 절만 으리으리하게 닦으면 다소 식상할 수 있으니 통일 기원 도량임을 강조하여 나
름의 절의 성격과 존재의 이유를 부여했다. 이는 부근에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문무왕(文武
王)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까지 토벌한 김유신장군의 탄생지가 있기 때문이다.

1991년 우람한 규모의 3층 목탑을 세우고자 당시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
재팀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현장을 살피고 건물 설계를 마친 다음 1992년 5월 공사에 들
어가 1996년 8월 완성을 보았으며, 이후 지장전과 영산전 등 여러 건물을 줄줄이 지어올려 절
의 빈 공간을 채워나갔고, 2014년에 불사가 최종 마무리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옛 절터에 지었다고 하나 엄연한 현대 사찰로 법등이 켜진지는 이제 30여 년에 불과하다.
현대 사찰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내가 보탑사를 몸소 찾은 것은 그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가 궁
금하기도 했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 연곡리석비도 서려있어 그것도 같이 보고자 함이다.

넓게 자리한 경내(부지 규모는 약 13,223㎡)에는 이곳의 법당이자 자랑인 40m가 넘는 3층 목
탑을 비롯해 산신각, 삼소실, 지장전, 해행당, 영산전, 수련원, 천왕문 등 10여 동의 크고 작
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연곡리 석비와 비지정문화재인 늙은 석탑 하나가 전
하고 있다.
또한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산뜻하고 정갈하며,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 왠만한 고급 정원
부럽지가 않다. 또한 금낭화와 앵초, 영산홍 등을 화단과 대형 화분에 심어놓아 4~5월에는 그
들의 봄꽃 향연이 펼쳐지며,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도 펼쳐져 볼거리도 넉넉하다.
 
보탑사에서 눈여겨 볼 존재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연곡리석비와 오래된 석탑을 위시
해 3층 목탑과 목탑 내부(3층까지 관람 가능), 적조전에 봉안된 금빛 와불, 특이한 모양의 지
장전과 산신각, 영산전 정도이며, 봄에 왔다면 야생화를, 여름에 왔다면 연꽃의 향연을 구경
하고, 겨울 동짓날에 왔다면 팥죽과 7개월 묵은 수박을 꼭 먹어보자.

* 보탑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김유신길 641, ☎ 043-533-6865)


▲  와불이 봉안된 적조전(寂照殿)

적조전에는 부처가 열반에 들 때 반쯤 누운 모습을 재현한 금빛 와불(臥佛)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앞에는 동그란 존재가 놓여져 있는데, 그것은 부처의 발자국을 표현했다는 불족석(佛足
石)으로 비가 내릴 때 발자국 안에 물이 고이고 그 위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안에 새겨진
물고기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허나 나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
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적조전에 누워있는 와불의 위엄
와불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푸른 초원이 담긴 그림을 걸어두었다.

▲  연꽃 보개(寶蓋) 밑에서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그 유명한 백제의 반가사유상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다소곳하게 앉은 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있을까?

▲  보탑사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그 흔한 기와집 대신 너와지붕을 얹힌 귀틀집 모양을 하고 있다. 귀틀집이 산악지방
에서 많이 지어진 집이라 산을 근거지로 삼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인 산신각도 그렇게 지은
모양이다.


▲  산신각 산신탱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를 중심으로 동자, 호랑이, 소나무, 산, 폭포 등이
담겨져 있다.

▲  보탑사의 조촐한 여흥거리, 야생화 화단과 화분들
아직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이라 꽃들은 아직 피지도 못했다.

▲  삼소실(三笑室)
승려들의 생활, 참선 공간이다.

▲  양반가 모습의 해행당(解行堂)
주지를 비롯한 선임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  보탑사 마무리 (연곡리석비, 영산전, 3층목탑)

▲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앞쪽에 3칸짜리 맞배지붕 기와집을 배치하고 뒷쪽은 돌로 다져 석굴(石窟)처럼 꾸민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구려 제20대 태왕(太王)으로 북경(北京)을 비롯한 하북(河北) 지역과 내몽골(지
두우), 경상북도까지 너른 영토를 닦았던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능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단순히 남북통일 뿐 아니라 북방의 옛 땅까지 모두 아우르는 대통일을 염원하고자 그리
만든 듯 싶다.


▲  동그란 지붕 밑에 자리한 보탑사 석조(샘터)
보련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석조에는 늘 물이 가득하다.

▲  고된 세월에 완전 떡이 되버린 옛 연곡리절터 석탑

석조 뒷쪽에는 옛 연곡리절터의 흔적인 석탑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2중의 기단(
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금은 2층만 남아있는 상태이나 원래는 3층이나 5층
탑으로 여겨진다.
윗 기단은 석재가 떨어져 나간 것을 붙였으며, 1층과 2층 탑신은 그런데로 남아있으나 그 윗
쪽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산산이 부셔진 머리장식의 잔재가 얹혀져 있어 그의 삶이
순탄치 못했음을 보여준다.
고려 때 탑으로 보이며, 현재 높이는 2.5m 정도로 그나마 보탑사가 수습해주었으니 망정이지
그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  연곡리석비 보호각

▲  하얀 백지로 남아있는 연곡리석비(石碑) - 보물 404호

보탑사 경내 서쪽에는 이곳의 가장 늙은 보물인 연곡리석비가 보호각에 두텁게 감싸인 채 자
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이른바 백비(白碑)로 유명하다. 무슨 글자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비신(碑身, 빗돌)을 아무리 뚫어지라 바라봤지만 글씨는 커녕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선만
보일 뿐. 글씨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백지로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세
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보다 더 불가사의하게도 그 이유는 밝혀진 것이 없다. 처음부터 백
지로 세웠다는 설과 중간에 지워졌다는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비석 조각 기법이 우수한
것으로 보아 애당초 백지용으로 세웠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비석을 세울 당시, 귀부와 이수가 완성되고 글씨를 새기려는 찰라 절이 불의의 이유(전
쟁이나 천재지변, 민란)로 파괴되면서 그 작업이 중단된 채, 버려졌을 가능성도 있고 글씨는
있었으나 절을 파괴한 자들이 그 글씨를 빡빡 밀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허나 어느 것이 정
답인지는 석비만 알 뿐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비석 제일 밑바닥에는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머리에 귀갑(龜甲)을 갖춘 귀부(龜趺)를 두었는
데, 귀부 머리는 거북이 아닌 말 머리와 비슷해 보인다. 비석 머리에는 9마리 용이 새겨진 이
수(螭首)가 달려 있으며, 조각 기법이 매우 우수하다. 비신 높이는 2.13m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비신의 윗부분과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이수

▲  8각형을 이루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 제자인 500나한의 거처이다. 이들 500나한은 신도들이
기증한 것으로 각자 다른 얼굴과 옷, 포즈를 취하며 바위처럼 새겨진
자리에 빼곡히 앉아있다.

▲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한 영산전 내부

▲  석가여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들, 500나한의 위엄

▲  정면에서 바라본 3층 목탑의 위엄

나보다 나이가 어린 보탑사가 짧은 시간에 진천 제일의 명소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3층
목탑 때문이다.
보탑사의 야심작이자 자존심이며, 소중한 꿀단지인 3층 목탑은 1991년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
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재팀에 의해 설계되어 1992년 5월에 공사를 시작, 1996년 8월에 완성을
본 20세기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목탑 높이는 42.73m, 꼭대기 상륜부(相輪部)의 높이는 9.99
m로 총 높이는 52.72m에 달한다.

강원도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못 1개도 쓰지 않은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무늬만 3층이 아
닌 실제 3층이다. 1층은 법당(금당)으로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봉안했
고, 2층은 법보전(法寶殿)으로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머금은 8만대장경 번역본과 윤장대, 한글
법화경을 새긴 돌판을 봉안하고 있으며, 3층은 미륵전(彌勒殿)으로 미륵불이 기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지붕 아래 3개의 성격을 지닌 건물을 담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 땅에 전해온 목탑 비슷한 건물<법주사 5층 팔상전(八相殿)이나 1983년 불에 타버
린 쌍봉사 3층 대웅전 등>은 무늬만 증충이지 속은 하나의 층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보탑사 목
탑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3층을 지녔다. (층 중간에 2개의 숨겨진 층이 있음, 일종의
다락방 같은 것)
목탑의 정식 이름은 '보탑사 통일대탑'으로 너무 으리하고 화려하다는 눈총을 조금이나마 피
할 겸, 부근에 있는 김유신 탄생지에서 힌트를 얻어 통일 기원 목탑으로의 성격을 갖추고 있
다.

목탑 자리는 연꽃의 한 가운데 꽃술에 해당하는 지점이라고 하며, 당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은 경주 황룡사(皇龍寺) 목탑과 경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 관련글 보기)을 참고하여 제작
했다고 한다. 2층과 3층에는 바깥에 마루 난간을 두었으나 위험 때문에 평소에는 문을 닫아
출입을 금하고 있다.

이곳에는 2가지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석가탄신일 전후하여 1층 약사불 앞에 사람들이
수박을 올린다. 그런데 그 수박을 며칠 사이에 처리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12월 동짓날, 팥
죽을 먹을 때 수박을 깨서 나눠먹는다. 그 기간이 최소 7개월이고, 수박을 따로 저장고에 둔
것도 아닌데도 수박은 전혀 상하지 않고 신선함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거짓말 같아 보이지
만 사실이다. 이미 여러 번 언론을 타 화제가 된 적이 있으며, 동짓날에 절을 찾은 이들에게
실제로 나눠준다.
또한 절 앞에 자리한 37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바람개비처럼 부속 건물의 지
붕을 타고 북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들어 목탑 지붕에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실
제로 목탑에는 눈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지어진 지 이제 2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목탑이 벌
써부터 끼를 보이고 있으니 80~90년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흥미로운 건축물이라 하여 국사
나 한국미술사 서적에 절찬리에 실릴 것이다.

3층 꼭대기 부분에는 능엄경과 법화경 등 불교 경전과 절의 사적기(事蹟記)를 보관한 일종의
타임캡슐이 있는데, 불기(佛紀) 3,000년이 되는 서기 2,456년에 개봉한다고 한다. (내 생애에
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 또한 목탑 머리 부분에는 동자승 4명이 천상에서 줄을 매고 목탑으
로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  1층 아미타불(阿彌陀佛)
그 좌우로 문수,보현보살이 시립해 있다.

▲  1층 석가여래3존상
그 좌우로 지장,관세음보살이 서 있다.

▲  1층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  1층 비로자나불

▲  1층에서 2,3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며
계단은 2개가 있다.

▲  1999년 5월에 봉안된
석가여래후불탱


▲  2층 법보전 중앙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는 불경이나 불교 관련 서적을 넣어두던 책장이다. 그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고 홍보를 했는데, 이는 티벳불교의 경통과 비슷하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영업을 하고자 윤장대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  원(願) 성취대라 불리는 윤장대

▲  2층 법보전 내부

▲  3층 미륵전 미륵3존불

▲  뒷쪽에서 바라본 3층 목탑

목탑 내부는 햇살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 은근히 시원했다. 하여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조촐한
피서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50분 가량 보탑사 경내를 둘러보고 다음 답사지로 길을 향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선을 긋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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