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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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