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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우동 충익공 신경진 묘역

망우산(282m) 서쪽 자락 밑인 면북초교 북쪽에 신경진을 중심으로 한 평산신씨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묘역의 중심은 충익공 신경진(1575~1643)으로 그는 임진왜란 시절 탄금대 전투를 거하게 말아먹고 전

사했던 신립의 아들이다.

 

신경진의 자는 군수로 서울 출신이며, 아비의 후광으로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이후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했으며, 태안군수와 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진첨사가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장악한 도쿠가와(덕천가강) 막부와의 화의를 반대하며 그들이 파견한 사신을 접대하지

않고 추방했는데, 그 일로 체임(녹봉을 당분간 받지 못함)이 되기도 했으며, 이후 갑산부사가 되었고,

함경남도병마우후를 지내던 중, 체찰사 이항복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를 지내 함경도 변방

을 관리했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우리의 친척 민족인 여진족의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을 펼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관직을 접고 쉬다가 1620년 광해군에게 반감을 품은 김류, 이귀, 최

명길 등과 반란을 모의, 그와 인척 관계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세우기로 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이 되기를 자원하여 반란 준비를 꾀

했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효성령별장으로 쫓겨나면서 이듬해 자행된 인조반정(1623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인조반정 이후 공조참의. 병조참지가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 호위청. 포도청 대장을

겸해 왕실을 호위했다. 또한 제일 먼저 반정 계획을 세운 공로로 이름도 오지게 긴 '분충찬모입 기명륜

정사 일등공신(奮忠贊模立 紀明倫靖社 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에 봉해졌다.

 

1624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와 서인 패거리들은 충남 공주로 줄행랑을

쳤다. 이때 신경진은 훈련대장으로 어가를 호위했으며, 난이 평정되자 이괄이 추대했던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을 멋대로 쳐죽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평성부원군으로 승진했다.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리던 신경진은 자신의 공과 지위를 과시하며 남의 집터 수천 칸을 빼앗는 등, 영

좋지 않은 행동을 보였으며, 그로 인해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 목릉과 혜릉의 봉심관(奉審官)

이 되었으나 능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다시 복직되어 형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겸했다. 그리

고 1636년 병조판서까지 겸하게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줄행랑을 치던 인조를 받들며 청나라군에 대항

했다. 허나 청군이 산성을 포위한 채, 소규모의 도발만 벌이며 조선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니

인조는 결국 배겨나지 못하고 45일만에 문을 열고 항복했다.

 

1637년 이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했는데

이때 호란 이후 민심수습책을 논의하고 지방 수령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건의했다. 1638년 청나라

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좌의정이 되었으며, 최명길과 의논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선의 명나라를 향한 꼴사나운 사대주

의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1641년 다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인질로 잡혀있던 김상헌 등을 옹호했으며,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서 병으로 사퇴했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0일도 안되어 병사했다.

 

신경진은 그의 아비를 닮아 무예가 뛰어났다. 그래서 훈련도감, 호위청 등의 친병 관리 업무를 담당

하면서 제왕의 호위를 맡았다. 또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

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 시절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무관으로는 드물게 영의정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는 외교 활동에도 소질이 있어 청나라에 여러 번 사신으로 가면서 청나라의 과도한 내정 간섭을

줄이게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훈서와 청서로 분열되어 훈서의 우두

머리가 되었으나 자신이 무신임을 내세워 간여하기를 꺼렸다. 또한 송시열 등의 사림을 천거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의 시호는 '충익'으로 1651년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은혜를 받았던 송시열이 직접 찬한

내용이 신경진 신도비에 전하고 있다.

 

2. 숲에 감싸인 신경진 묘역

신경진 묘는 신경진과 부인 순창조씨의 합장분이다. 밑도리에 호석을 두른 동그란 봉분을 비롯하여

묘표(묘비), 상석, 향로석, 조그만 동자석 1쌍,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으로 이루어진 사대부 묘역으

로 주변이 나무로 무성하다. 특히 동자상을 상석 주변에 깔고 있어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묘역 동쪽 산자락에는 신경진의 선조와 후손들 무덤 30여 기가 흩어져 있다. 신경진묘역을 비롯한

이들 묘역을 한 덩어리로 평산신씨 묘역이라 부르는데, 신말평(1452~1509)과 그의 아들인 신상

(1480~1530), 신경진의 손자 신여철(1634~1701) 등이 묻혀있으며, 그중 신상은 신도비도 갖추고

있다.

조선 초부터 후기까지 조성된 묘역으로 조선 초/중/후기 무덤 양식을 고루고루 살펴볼 수 있는데,

신경진 묘역과 그의 일가 묘역은 모두 철책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내부 접근은 어렵다. 하지만 신경

진묘는 고맙게도 철책 바로 너머에 자리해 있어 무덤 확인은 충분히 가능하다.

 

3. 철책 너머로 금지된 땅을 대하듯 바라본 신경진 묘역

 

4. 신경진 묘역의 두툼한 봉분과 묘표, 상석, 향로석, 조그만 동자상

 

5. 비각에 감싸인 충익공 신경진 신도비

신경진 묘역 서쪽에는 신경진의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신도비는 보통 무덤에서 신도로 통한다는 무
덤 동남쪽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서쪽에 비석을 두었는데, 신경진묘의 신도는 아마도

서쪽이었던 모양이다.

신도비와 신경진 묘 사이에는 주차장이 있으며, 예전에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그의 건강을 위

해 근래 비각을 크게 씌웠다.

 

신도비의 높이는 3.68m로 고위 관리, 양반사대부의 신도비 중 가장 큰 측에 속한다. 특히 귀부의 몸

집이 상당해 더욱 장대하게 다가온다.

땅바닥에는 바닥돌과 기단석을 차례대로 깔고, 그 위에 거북 모양의 귀부를 두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면 마치 성이 난 듯, 무엇인가를 뿜어낼 듯한 기세 같다. 입에는 동그란 무언가를 물고 있으니 그

것은 여의주로 보이며, 앞다리는 바짝 웅크려 앉아있고, 등짝에는 세월의 검은 때가 가득 입혀진 거

북 등껍질이 새겨져 있다.

뒷쪽에는 뒷다리와 두꺼운 꼬랑지가 서쪽으로 말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생동적이고 귀여워 진짜 거

북의 꼬랑지 같다.

 

귀부 위에는 빗돌을 세워 신경진의 생애와 신숭겸 등 그의 유명한 조상을 간단히 다루었고, 비석 꼭

대기에는 정교하게 처리된 이수를 두었다. 신도비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박태유가 글씨를 썼으며,

머리글인 두전은 왕족 출신인 이정영이 썼다.

 

비석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는 커다란 거북받침돌 덕에 '거북비'라 불렸는데, 귀부가 지나치게 커서

전체적인 비례는 좀 떨어진다. 허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 조선 중기 신도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6. 신경진 신도비의 앞모습

 

7. 신경진 신도비의 옆모습

 

8. 신경진 신도비의 뒷모습과 두툼한 꼬랑지

 

9. 신경진 신도비의 옆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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