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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북쪽 산자락에는 택견수련터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인왕산둘레길이 지나가는 이곳은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이라 불리는 송덕기(1893~1987)가 택견을 수련하던 현장이다.

대한제국 시절,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는 사람이 많

았다.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호랑이'라 불리던 '임호'도 있었는데, 그는 배화여고 앞

에 살고 있었다.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고 전한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좋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깊어 16살에 사직골 대표로 출전해 승리를 했

다.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비록 체격

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오르며 쓰는 발차기가 매우 일품

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1910년 이후, 왜정은 이 땅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켜 그 맥을 끊으려

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

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

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이러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택견을 잠시 접어두고 활쏘기로 관심을 돌려 황학정

에서 국궁을 익혔다. 그는 궁술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오르

기도 했다.

그는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

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기에 참가해 큰 활

약을 보여주었다.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

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을 죄다 제압했고, 당시 종로 지역 주먹패의 우두머리인 김두한과도 맞짱을 뜬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서울을 벗어나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

퇴 때 경남 밀양으로 피난을 갔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그를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예라 혼자 시범을 보

이기가 마땅치 않아서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가 열렸던 소공동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하여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송덕기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일으켜 보고자 충북 충주에서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

견을 홍보했다.

허나 지금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과연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 가

면서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갈라진 것이다. 그

는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

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

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 하는 현대인들의​ 무

관심과 체육관 운영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다.

1987년 오랫동안 즐겼던 활을 놓았으며, 이후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

서 그해 7월 22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981년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 예술제'에서 '무도대상'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

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회)이 그 자리에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영원히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 시설이 닦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2. 택견수련터와 송덕기 안내문

 

3. 택견수련터 남쪽 바위

택견수련터 남쪽에는 바위들이 황학정을 향해 길게 늘어서 있다. 이 바위군(암릉)은 딱히 이름은 없으

며, 그들 중간 정도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다.

 

4. 인왕산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택견수련터 남쪽에 있다. 이곳에 서면 황학정

을 비롯해 사직공원과 서울 도심, 남산이 바라보이는데, 송덕기는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푼다음 이곳에 걸터 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전한다.

 

5. 감투바위의 넉넉한 옆 모습

 

6. 울퉁불퉁한 감투바위

인왕산은 화강암 바위 뫼라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벼랑이 아주 많다. 감투바위 또한 인왕산 명물 바위

의 일원이나 인지도는 거의 없어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만 찾아온다.

 

7. 감투바위 표석과 몸풀기용 샌드백

 

8. 감투바위 북쪽 산길

감투바위 바로 남쪽이 추모성왕(동명성왕)의 후예들이 수시로 국궁을 즐기는 황학정이고, 동쪽에는

매동초교가 자리해 있어 이 산길은 시내 쪽으로 거의 끊겨 있다. 하여 여기서는 택견수련터로 다시

올라가야 된다. (숨겨진 길이 있는지는 모르겠음)

 

9. 누렇게 뜬 낙엽들이 귀를 접고 누워있는 감투바위 북쪽 산길

 

10. 체육공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택견수련터 서쪽 공간 (인왕산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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