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청룡사 사천왕문(천왕문)

안성의 대표 명산인 서운산(548m)에는 석남사와 청룡사 2곳의 고찰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중 청룡

는 서운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청룡사는 1265년 몽골 원나라에서 넘어온 명본국사가 창건하여 대장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1364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건했는데, 이때 청룡이 서기가 가득 서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

다. 하여 산 이름을 서운산, 절 이름을 청룡사로 갈았다. 과연 청룡이 구름을 타고 하강했는지는 모르

겠으나 1372년에 청룡사에서 간행한 능엄경이 전하고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된 것은 명확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서별당, 청룡당, 종각, 사천왕문, 지봉당, 명부전, 산신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사인비구 제작 동종(청룡사 동

종)과 대웅전, 영산회괘불탱, 감로탱, 소조석가여래삼존상, 금동관음보살좌상과 지방문화재인 사적

비, 아미타여래회도, 지장시왕도, 석가여래삼불회도, 3층석탑, 안성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부도군

등이 있어 고색의 기운도 풍부하다.

부속 암자로는 은적암과 내원암, 서운암이 있으며, 왕년에는 은신암, 청련암도 있었으나 이제는 흔적

도 없다.

 

2. 몸단장 중인 청룡사 대웅전

청룡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국가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다. 가는 날이

문 닫는 날이라고 무려 30년 만에 청룡사 방문이거늘, 하필이면 그는 해체 보수로 인해 잠시 온전한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대웅전 자리에는 임시 보호각을 씌웠으며, 그 안에서 대웅전 손질이 한참 이루어져 지고 있었다. 보

호막 정면에는 대웅전 사진을 걸어두었고, 부근에 가건물식의 큰법당을 세워 잠시 대웅전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3. 청룡사3층석탑

대웅전 앞뜰에 자리한 3층석탑은 바닥돌과 1층 기단, 3층 탑신으로 이루어진 2.38m의 작은 탑이다.

2매의 석재로 제작된 바닥돌에 3단의 받침을 표현했으며, 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었다.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기단의 갑석하면은 경사가 졌고, 윗면에

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의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정연히 모각했다.

1층 탑신에 비해 2층으로 가면서 높이가 낮아져 비례가 떨어지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머리

장식도 사라졌고, 탑도 여기저기가 훼손되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 탑으로 여겨져 청룡사가 그때

도 활발히 법등을 켰음을 알려준다.

 

4. 서운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석조(샘터)

연꽃 석조에는 서운산이 아낌없이 베푼 맑은 수분들로 가득하다. 절에 왔으면 물 한모금은 마셔야 되

겠지. 하여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투하해 여름 갈증으로 타들어가는 목구

멍을 진정시킨다.

 

5. 임시 큰법당에 걸린 대웅전 현판의 위엄

 

6. 청룡사 관음전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의 거처로 'ㄱ' 구조의 집이다.

 

7. 관음전 앞에서 바라본 청룡당(가운데 건물)과 그 너머로 높이 솟은 대웅전 임시 보호각

 

8. 관음전 금동관음보살좌상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관음전의 주인장인 관음보살좌상(관세음보살좌상)은 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청룡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머리에 수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는데, 보관과 대좌는 원래부

터 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새로 만들어 보충한 것이다.

갸름한 얼굴에 복스럽게 표현된 얼굴 표정, 보계와 귀걸이, 고개를 앞으로 내민 구부정한 자세 등의

표현에서 고려 후기 전통양식으로 이해되는 일군의 보살상과 비슷함을 보인다. 그리고 다소 좁고 왜

소해진 어깨와 긴 허리, 높은 무릎 등의 표현은 고려 후기 전통양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

다. 하여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을 취하고 있어 과도기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보고 있다.

또한 비슷한 유형의 보살좌상들이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진 것에 반해 드물게 금동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이 보살좌상이 정확히 언제 제작되어 언제부터 청룡사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뱃속에서 나

온 중수발원문에 수리 기록이 있어 최소 1722년 이전부터 청룡사에 안착했음을 알려준다.

 

9. 대웅전의 역할을 잠시 맡고 있는 임시 큰법당

 

10. 큰법당 내부에 있는 괘불함

저 길쭉한 괘불함에 1658년에 조성된 늙은 영산회괘불탱이 고이 들어있다. 괘불은 석가탄신일(부처

님오신날) 등 극히 일부 날에만 잠깐씩 모습을 비추는 아주 보기 힘든 존재로 천하에 400곳이 넘는 절

을 오갔던 본인도 괘불을 친견한 횟수는 정말 손에 꼽는다.

 

11.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존상과 석가여래삼불회도

이곳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1603년에 조성되었다. 1874년 개금불

사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한 계란형으로 가늘고 긴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고, 이마에서 콧등까지가 편평하게 연결되었으며, 인중이 돌출했다. 그리고 미소 띤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으며 얼굴에 비해 어깨는 좁은 편이고 신체는 평판적이다.

 

본존상은 나발이 크고 투박한데 발제선을 따라서 작은 크기의 나발이 붙어있고 그 위쪽으로는 큰 나

발이 붙어있다. 양손은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은 설법인을 취했

다. 내의 윗주름이나 대의 옷주름은 유연하고 복잡하게 표현되었는데, 흙의 가소성이 잘 활용된 듯하

다. 좌우 협시보살상(문수보살, 보현보살)의 보관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며, 목걸이나 수인은 서로

비슷한 모습이나 착의형식에는변화를 나타낸다. 하여 보현보살상은 어깨 뒤로 쇼올 형태의 천의를

두르고 손목 위에 천의자락을 걸친 천의형이고, 문수보살상은 여래의 대의형태의 옷을 입은 가사형

이다.

이들 삼존불은 뱃속에서 발견된 조성원문을 통해 1603년(만력31년)에 화원 광원이 수화승을 맡아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푸른색 비단에 붉은 경명주사로 쓰여진 발원문에 커다란 글씨로 화원(畵員,

조각승) 6명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데, 보통 불상 조성은 승려로 이루어진 화원들이 100% 담당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5명은 승려, 1명(이금정)은 일반 사람이다.

 

그리고 삼존상 뒤에 걸린 후불탱은 석가여래삼불회도로 1874년에 조성되었다. 19세기에 조성된 후

불탱으로는 드물게 3m가 넘는 큰 그림으로 수화승 한담(漢潭) 천신(天娠)을 비롯해 금곡 영환, 서허

기규, 한봉 창엽, 덕해 도의, 덕월 응륜, 성암 승의, 취연 긍엽, 대허 체훈 등 그 시절 서울과 경기 지역

에서 크게 활동했던 17명의 화승이 금어와 도편수, 출초를 맡아 조성했다. 또한 전체적인 도상과 설채

법 등이 1870년대 불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12. 동그란 석조에 상큼하게 피어난 1송이 수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