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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겨울 산사 나들이, 세종시 비암사 '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2월의 마지막 주말, 세종시 제일의 고찰(古刹)인 비암사
를 찾았다.

비암사가 있는 세종시(世宗市)는 옛 충남 연기군(燕岐郡)으로 2005년 국가 주도의 행정중
심복합도시를 조성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조선 세종의 묘호(
廟號)를 따 세종시로 간판을 갈았다. 이때 공주시 장기면과 청원군 부강면이 세종시의 일
원이 되었다. (세종시의 정식 이름은 '세종특별자치시')

주말 오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서 간만에 근성도 테스트할 겸, 1호선 전철을 타고 천안(天
安)까지 쭈욱 내려갔다. 소요시간은 2시간 50분. 방학역(1호선)을 기준으로 무려 115km에
달하는 그 장대한 거리를 딱딱한 전철 의자에 의지하여 가야 되는 고행(苦行)의 길이지만
버스와 전철에 최적화된 뼛속 깊은 서민인지라 별 어려움 없이 근성 시험을 마쳤다.

천안역에서 천안시내버스 700번(안서동↔전의)을 타고 소정면과 함께 세종시의 북부를 이
루고 있는 전의면(全義面)으로 이동하여 전의의 중심인 전의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
서 다방리로 들어가는 세종시내버스 82번으로 환승, 전의면의 남쪽 산하를 비집고 들어가
비암사입구에 하차했다.


 

♠  비암사 입문 (도깨비도로)

▲  인간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비암사 도깨비도로 (서쪽에서 본 모습)

비암사입구에서 비암사를 향해 10분 정도 들어가면 도깨비도로가 나타난다. 도깨비도로는 인
간의 두 눈이 결코 정상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현장으로 내리막길을 마치 오르막길처럼 보이게
하는 신기한 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이 땅에는 제주도의 '1100도로'를 비롯하여 속칭 도깨비도로가 여럿 있는데, 말로만 듣던 그
런 길을 직접 겪으니 눈이 요상하게 홀린 듯, 신기하다. 내리막길이 분명한데 올라가는 것처
럼 반대로 보이니 말이다.

이 도깨비도로(Mysterious Road)는 좁고 구불구불했던 비암사 길을 2005년부터 2007년 11월까
지 크게 손질하면서 나온 것으로 출발점(시작점 표시가 있음)에서 보면 꽤 오르막길로 보이지
만 실제로는 120cm 낮은 내리막길이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눈을 믿지 말자.


▲  동쪽에서 본 도깨비도로
이렇게 보면 정말 내리막길처럼 다가오지만 현실은 오르막길이다.

▲  해와 달, 나무의 조그만 거울, 다비숲공원 연못
도깨비도로를 지나 3거리에서 왼쪽(북쪽)으로 들어서면 조그만 연못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부터 경내 주차장 직전까지 다비숲공원 영역으로 연못과 3층석탑,
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  다비숲공원 표석

▲  비암사 부도<浮屠, 승탑(僧塔)>

다비숲공원을 지나 주차장에 이르면 왼쪽(북쪽)에 고색이 짙은 석종형(石鐘形) 승탑 2기가 눈
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 승탑 형제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노란 때가 입혀진 오른쪽 탑은 피부에 '청한당
성정탑(淸閑堂性淨塔)'이라 쓰여 있어 탑의 이름은 성정, 탑의 주인은 승려 청한당임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의 대한 정보와 탑 조성 시기는 드러난 것이 전혀 없어 한 곡절 아쉬움을 건
넨다.
그리고 왼쪽 승탑은 오른쪽 것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기단부에 '강희갑
오입탑(康熙甲午入塔)'이라 쓰여 있어 1714년)에 탑이 세워졌음을 살짝 귀뜀해주며, '施主俊
祂(시주준야)'란 글씨도 추가로 새겨져 있어 시주자가 '준야'임을 알려준다.


▲  왼쪽 승탑 기단부에 선명하게 새겨진 '강희 갑오 입탑' 6글자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비암사


※ 세종시 제일의 고찰이자, 백제의 마지막 종묘(宗廟)사찰, 운주산 비암사(雲住山 碑岩寺)
운주산의 한참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비암사는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로 일컬어진
다. 매년 4월마다 백제 제왕과 대신들에게 백제대제(百濟大祭)를 지내기 때문이다. 그 대제로
비암사는 천하에 조금씩 이름 3자를 알리고 있다.

비암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
(五鳳) 원년인 기원전
57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때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니
100% 맞지가 않는다. 다만 3층석탑에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국보 106호)'이라 불리는
석불비상(石佛碑像)이 발견되었는데, 그 비상에는 계유년(癸酉年)인 673년 4월 혜명대사
(惠明
大師)가 전씨(全氏)를 비롯한 백제 유민들의 뜻을 모아 백제왕과 대신들, 법계중생들의 안녕
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이를 근거로 673년 창건설이 크게 설득을 얻고 있다.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많은 지역을 호령하며 천하의 바다를 름잡았던 백제, 허나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660년 7월 나당연합군과 웅진성주(熊津城主)를 비롯한 매국노에 의해 허망
하게
멸망의 비운을 당하자 백제 유민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왜열도에서 치열하게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왜왕(倭王)상국(上國) 백제의 멸망에 크게 곡소리를 내며 서둘러
배를 만들고 군사를 조련해 백제 부흥군을 도왔다.
비암사를 품은
세종시 지역은 백제의 국도(國都)웅진(熊津, 공주) 바로 동쪽 동네로 백
제 부흥군은 세종시 도처에 웅거해 나당연합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허나 백제 부흥
군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663년 거진 진압되고 만다.

백제 부흥이 물거품이 되자 비암사 주변에 살
았던 전씨를 중심으로 한 유민들은 망국(亡國)
한을 달래고자 673년에 비암사 자리에 백제 왕실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석불비상을 빚었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비상이 완성되자 제사를 올리니 그것이 비암사의 상징이자 백제를 그리
워하는
이들의 가슴을 치는 백제대제(百濟大祭)이며, 그 연유로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이란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이후 4월 15일마다 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 역사가 무려 1,300년이 넘
는다. 지금은 편의상 양력에 지낸다.

673년 창건설 외에도 후삼국시대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물증은 없다. 다만 경
내에 고려 때 조성된 3층석탑과 8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고려 때도 법등
(法燈)을 유
지했음을 보여주며, 그 이후 뚜렷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
(全域
誌)'에 비암사가 나오고, 경내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극락보전과 괘불 등이 있어 그런데
로 절을 꾸렸음을 보여준다.

1960년에 3층석탑에서 앞서 언급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
阿彌陀佛碑像, 보물 367호)','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보물 368호)' 등
이 발견되어 천하에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이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모두 제자리를 떠
나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다.
1991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1995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산신각과 요
사 2동을 지었다. 그리고 1996년 범종각을 세우고, 2007년에는 절 진입로를 정비했다. (이때
도깨비도로가 태어남)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산신각, 설선당, 명부전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보전과
3층석탑,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영산회괘불탱화 등의 지방문화재와 800년 묵은 느티나무, 조선
후기 승탑 2기 등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매년 4월 15일에는 백제대제가 성황리에 열리는데, 이때 영산회괘불탱화(세종시 지방유형문화
재 12호
)가 외출을 나와 대제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일
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비싼 존재임)

*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 4 (비암사길 137 ☎ 044-863-0230)


▲  비암사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둘러보기 (느티나무, 극락보전 주변)

▲  비암사 느티나무 - 세종시 보호수 8-17호

주차장에서 비암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느티나무 옆에 늘어진 돌계단을 올라야 된다. 계단 윗
쪽에는 장대하게 자라난 느티나무가 천하를 굽어보며 중생을 검문하고 있는데, 비암사는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이 없어 돌계단과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해주고 있다.
허나 느티나무가 아무리 기골이 장대한들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영혼까지 몽땅 털린 가련한 존
재에 불과하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간절히 봄의 해방군을 열망하는 모습이 석불비상을
만들며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했던 백제 유민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느티나무는 세종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197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81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이 얹혀져 대략 850살 정도 되었다. 지방기념물
이나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으나 아직까지 보호수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 아무래
도 관련 철밥통들의 보는 눈이 없나 보다. 도깨비도로에 홀린 탓일까?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 7.5m로 방대한 나이에 비해 덩치는 작은 편이며, 잎이 밑에서 피어
나 윗쪽으로 올라가면 흉년, 위에서 아래로 피면 풍년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올해는 과연 잎
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사람의 심리상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이
니 매년마다 바람직한 곳에서 잎이 시작되어 주변 농민들의 마음에 늘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
면 좋겠다. 그것이 비암사와 느티나무의 중생들을 위한 소임일 것이다.


▲  중생들에게 금연을 권하는 비암사 느티나무
호랑이가 담배를 빨다가 폐암으로 죽었다고 한다. 하여 산에 호랑이가 없는 거라고??
이유야 어쨌든 담배는 백해무익한 존재이니 비암사를 찾거나 본글을 접한
흡연 중생들은 다들 금연에 동참해 천수를 누리기를 바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잘 다듬어진 돌계단

▲  계단의 끝에 등장하는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3층석탑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정면에 3층석탑과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설선당, 왼쪽에는 범종각과 요
사 등이 경내를 메운다.
극락보전 뜨락에 단정하게 자리한 3층석탑은 땅바닥에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基壇)
과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 등을 지니고 있다. 1982년에 탑을 손질하면서 기단부를 보완하
고 뒤집어져 있던 석재를 바로 잡았으며, 탑신 지붕돌은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고, 밑면에
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 1층은 2층보다 2배 이상 커서 균형이 그리 맞아보이질 않으며,
밑면의 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1960년 탑 꼭대기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기축명아미타불비상','미륵보살반가사
유비상'이 발견되어 창건 시기를 몰라 애태우던 비암사의 한줄기 단비를 뿌렸으며, 비상과 느
티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세종시 출범으로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란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19호였음)

▲  비암사 설선당(設禪堂)

▲  범종각과 우측 선방(禪房)


▲  비암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호

3층석탑이 있는 서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
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이다. 공포(空包)가 평
방(平枋) 위에 촘촘히 박혀있는 다포(多包)양식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도깨비도 모르는 실정
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록 법당의 역할을 대웅전에게 넘겨주고 2인자로 밀려났지만 법당 건물의 품격을 잘 간직하
고 있으며, 내부에는 소조아미타불좌상과 화려한 닫집,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민화 스타일의
산신탱, 독성탱,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탱 등이 걸려있다.
이 건물은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79호였으나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세종시 지
방유형문화재 제1호란 큼직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지붕에는 겨울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아 경내를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고
살짝 올려진 추녀는 마치 새의 경쾌한 날개짓을 보는 듯 하다.

▲  비암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3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우람한 모습의 아미타여래좌상이 홀로 자리하여 중생을 맞이한다. 이 불상
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 도금을 입힌 소조상(塑造像)으로 높이 196cm, 어깨 폭
89cm, 무릎 폭 132cm에 이르는 큰 불상이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아주 두툼하게 솟아있고, 중간에 반원 모양의 중간계주
(繫柱)가 있다.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로 꼽슬이 꽤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큰 덩치
에 맞게 푸짐하고 듬직한 인상인데, 볼에 살이 두툼해 거의 사각형에 가깝다. 눈썹은 직선으
로 그어져 있고, 그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박혀있으며, 두 눈은 가늘게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두 귀
는 중생의 조그만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
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양 어깨부터 다리까지 이어져 있고, 어깨는 딱 벌어져 듬직하다. 손
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데, 불상의 생김새를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민화(속화)처럼 그려진 독성탱과
산신탱

▲  극락보전의 지킴이, 신중탱



♠  비암사 마무리

▲  대웅전(大雄殿)과 괘불석주,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1991년에 지어진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극락보전을 대신하여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1년에 딱 1번 백제대제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영산회괘
불탱화가 담긴 함이 있다.
이 괘불은 1657년에 화승 신겸(信謙)이 그린 것으로 도상(圖像)의 내용이 그가 1652년에 제작
한 청주 안심사(安心寺) 괘불과 비슷하여 그것을 참고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괘불은 대웅
전 앞에 놓인 붉은 피부의 괘불석주(掛佛石柱)에 몸을 기대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데, 괘불이
그때만 외출을 하여(석가탄신일에도 외출 가능성 있음) 만나기가 꽤 까다롭듯이 석주 역시 그
때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외에는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불을 이룬다.

▲  석가3존불 옆에 있는 검은 피부의 '기축명 아미타불 비상' 모조품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비상 가운데 하나로 진품은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고
모조품이 덩그러니 앉아 진품을 닮아간다.

▲  비암사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보살입상

대웅전 우측 옆구리에는 근래에 지어진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의 거처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꽤 컬러풀한 스타
일로 그의 좌우에 서 있고, 색채가 고운 지장탱이 그들의 뒤를 받쳐준다.


▲  비암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과 대웅전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1칸짜리 산신각이 있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1칸짜리 건물로 1995년에 지어졌다.

▲  산신각 산신탱과 산신상

산신각에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호랑이를 옆에 품은 산신상과 산신탱 2점이 걸려있다. 산신탱
은 보통 1점만 걸려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려 2점이나 걸어두어 산신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기대감을 표시했다. 산신상과 산신탱에 묘사된 호랑이는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마냥 귀엽게 다
가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비암사 경내 (바로 앞 건물이
극락보전의 뒷통수)


비암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절
로 생각했으나 직접 와보니 이게 전부야? 싶을 정도로 조촐한 모습이었다. 극락보전과 대웅전
주변이 전부기 때문이다. 허나 지나치게 겉모습만 추구하며 으리으리함을 강조하는 절보다는
이런 아담한 산사가 적지 않게 정감이 가며, 거기에 고색의 내음도 무척 진하니 정말 금상첨
화가 따로 없다.

이렇게 하여 비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백제대제를 알았다면 그때를 맞춰서 찾
아와 괘불탱화까지 몽땅 챙겨보는 것인데 그것을 몰라서 다시 와야 될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아마도 다시 인연을 짓자는 비암사의 지극한 뜻인가 보다. 비암사에 간다면 백제대제가 열리
는 4월 15일이나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9~10월에 가는 것을 권한다. 그래야 괘불탱화를 비롯한
비암사의 숨겨진 끼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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