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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종서 장군묘 관리사(왼쪽)와 충익사(오른쪽)
장군면 대교리 국사봉 산골에는 조선 초기 재상이자 장군으로 유명한 김종서 장군묘가 숨겨져 있다. 

순천김씨 집안인 김종서(1383~1453)는 여기서 가까운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

해지는데, 그는 무예가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했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세종 때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조선 조정의 고려사 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길림성과 연

해주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던 여진족과 북쪽 세력을 평정하고 두만강에 6진을 닦았다. 흔히 이때 조

선의 북쪽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확장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이며, 조선은 

개국 시절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요동, 길림, 연해주의 많은 지역을 점유해 4천리 영토를 이루

고 있었다. 특히 태종은 명나라와 협상을 벌여 심양 철령을 국경으로 삼았다. (여기서 철령은 요동반

도 심양 남쪽에 있는 고개임)
허나 조선은 비리비리한 나라라 북쪽 변방과 남쪽 대마도 관리에서 실수를 자주 보였는데, 그 틈을 타

고 여진족과 북쪽 세력이 소란을 피우자 세종은 김종서와 최윤덕을 각각 길림성과 요동으로 보내 그

들을 토벌하고 북쪽을 관리하는 6진(두만강)과 4군(압록강)을 닦게 했다.

문종과 단종을 보필했으며, 단종 시절에는 좌의정이 되었는데, 안평대군과 친분이 있었다. 허나 1453
년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라이벌인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때려잡았고, 이때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 황보인 등이 처단되었다.
김종서 부자가 역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겨우 김종

서의 한쪽 다리만 가져와 그의 조부 김태영 묘 옆에 몰래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가 지난 1734년 그의 충절이 재평가되어 원래 관직을 회복하고 명정을 받았으며. 

1746년에는 영조가 김종서, 김승규 부자에게 충신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1748년 공주판관 이익진과 

지역 유생들이 묘비를 세우면서 늦게나마 무덤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 홍살문과 굳게 닫힌 충익사 삼문

충익사는 김종서 장군을 봉안한 사당으로 근래 지어졌다.

 

3. 김종서, 김승규 부자 정려

1746년 영조가 김종서 부자에게 내린 충신 정려문이다. 맞배지붕 정려각 안에는 정려문이 달려있으며,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4. 정려각에 달린 김종서, 김승규 부자의 정려문

 

5. 담장 너머로 바라본 충익사 (충익사 현판이 한글로 되어 있음)

 

6. 김종서 장군묘로 인도하는 숲길

소나무가 진하게 운치와 솔내음을 우려내며 나그네를 맞는다.

 

7. 김종서 장군묘

이곳에는 김종서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전한다. 원래 무덤은 작았으나 1748년 묘비를 세우고 무

덤을 정비했으며, 근래 후손들이 무덤을 크게 손질하여 귀부와 이수를 지닌 새 묘비와 망주석, 문인석,

상석, 향로석을 새로 달았다.

 

8. 김종서 장군묘의 묘비들

검은 주근깨가 많이 끼어있는 오른쪽 작은 비석이 1748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후 1963년 지붕돌 묘
비가 세워
졌으며, 근래 귀부와 이수를 갖춘 큰 묘비를 장만해 졸지에 시대를 초월한 묘비 3기를 지니
게 되었다.

 

 

9. 김종서 묘의 늙은 묘비 (1748년 세워짐)

 

10. 김종서 장군묘의 넉넉한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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