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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양계곡 만동묘

화양계곡(화양구곡) 제4곡인 금사담 주변에 만동묘와 화양서원 묘정비가 있다. 17세기 문인이자 성리학의 대표급 인물로
쓸데없이 큰 이름을 지닌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화양계곡 경치에 퐁당퐁당 반해 이곳에 별서짓고 팔자좋게 머문
인연이 있는데, 그는 조정에 출사를 했다가 그만두고 이곳에 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고 전한다.
그는 왕세자 책봉 문제로 숙종에게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심문을 받고자 상경하는 중에 정읍에서 숙종이

린 사약을 먹고 82세의 나이로 강제 사망했다. 그는 골로 가기 전, 자신의 열성제자였던 수암 권상하에게 이미 망해버린

나라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지을 것을 요구했다. 하여 권상하와 그 떨거지들은 아름다운 화양계곡에 명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가 서린 만동묘를 짓게 되는데, 그 이름은 가평 조종암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에 첫 글자와 끝 자를 딴

것이다.


명나라 신종(만력제)은 국정은 신경쓰지 않고 그저 돈 모으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아편 중독도 장난 아니었다고 함)
임진왜란이 터지고 조선이 원군
요구하자 그동안 모은 돈을 싹 털어 군사와 막대한 물자를 보냈다. 하여 조선천자, 고려
천자라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명나라군이
갖은 민폐를 부리고 심지어 조선군의 군사작전까지 방해하는 짓거리까지 저질렀으나 신종의 막대한 물자지원
으로 덕을 본 것도
사실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조선 위정자와 선비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된다는 재조지은 사상이 쓸데없이

팽배해다.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은 당연한 도리겠으나 어느 것이든 도를 지나치면 않하는 것만 못하다.

명나라상국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로 받들고 신종과 명을 말아먹은 의종, 그리고 명을 세운 주원장 태조까지 마치 신처

하는 것이 개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친척 민족인 청나라가 우리의 옛 땅인 만주에서 일어나 명나라를 밀어냈고 조선까지 공격삼전도 굴욕 같은

망신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1644년 명나라가 자체 내분으로 망하면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그리움과대주의는 더욱
커져갔다.

효종 때는 삼전도 개망신의 설욕을 갚고 명나라의 원수까지 갚아 소중화인 조선이 중원을 차지해 중화가 되야 된다며 청을
치자는 북벌론
이 뜨겁게 일어났다. 그게 계속 추진되어 좋은 성과를 거두면 모르겠으나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승하하면서
그마저 흐지부지 되고 만다.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론을 적극 도운 인물로 효종이 승하하자 화양9곡 제3곡인 읍궁암에서 대
성통곡을 했다.


송시열이 골로 가면서 명 신종,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를 지내라는 것은 그 시절 명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가 팽배했음을 보

여주며 청나라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그 아니꼬운 만동묘는 1704년 화양계곡에 자리한 화양서원에 세워지게

된다.
조선 조정 또한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만연하여 전토와 노비를 지원하였고 영조 때인 1726년 면세전 20결을 추가로 지원했
다.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렸으며,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사당을 지키게 했다.

1809년 만동묘를 새롭게 중수했으며, 1844년에는 봄과 가을에 각각 1번씩 충청도관찰사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다. 허나

만동묘와 화양서원 소속 유생들의 개짓이 나날이 심해져 지역 백성들을 등처먹는 것이 가관이었으며, 돈을 대지 못한 백성

을 잡아와 문초를 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도 관아에서 처벌을 받지 않아 이곳에서는 '원님 위에 감사, 감

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우스개 노

래까지 퍼졌다. 또한 야인 시절 이곳을 찾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그가 집권하자
창덕궁 대보단에서 명 신종, 의종의 위패를 넣어 제를 지내니 만동묘는 필요없다며 1865년 만동묘를
기 좋게 단죄하여 부셔버렸다. 만동묘에 있던 편액과 여러 문서들은 창덕궁 대보단 경봉각으로 싹 가져왔는데, 정신을 못차

린 유생들이 만동묘 부활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대원군이 실각된 이후인 1874년 이항로, 최익현의 요구로 다시 지어져

그 망할넘의 꼴통 역사를 잇게 했다. 다만 제사를 나라에서 주관하여 만동묘 유생과 좨주들에게 권한을 거의 주지 않았다.
1907년 왜군이 의병을 토벌한다며 만동묘에 들어와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질렀으며, 1908년에 만동묘를 폐철하고 만동묘에
속한 재산
을 나라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왜정 이후에도 정신 못차린 지방 유생들이 몰래 제사를 지내는 개짓을 저질렀으나 발각되어 1940년 제사가 완전 중단되었
으며 왜정은 1942년에 만동묘에 남은 건물을 다 밀어버리고 만동묘묘정비를 완전 누더기로 만들어 땅에 생매장시켰다. 우

리 역사를 철저하게 왜곡하던 왜정에게 만동묘는 그야말로 역사왜곡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으나 그럼에도 밀어버린 것은
만동묘에 봉안된 명 신종이 임진왜란 때 원군과 물자를 보내 조선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남다가 1983년 홍수로 땅에 묻혀있던 묘정비가 발견되었으며,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일부 건물이 복원되고 이

후 2018년까지 일부가 복원되어 지금에 이른다.

 

2. 만동묘 돌계단

만동묘는 화양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만동묘로 오르는 돌계단이 무척 높고 각박한 모습인데 이는 명나라 제
(태조 주원장, 신종, 의종)의 은혜가 높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뜻에게 저따위로 지었다고 한다.

돌계단은 만동묘가 보기 좋게 철거된 이후에도 남아있었으며, 그 외에 담장과 건물은 근래 복원된 것이다. 계단이 가파르기

때문에 오르락내리락 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나 굳이 관심이 없다면 올라갈 필요도 없다.

 

 

 

 

3. 만동묘로 인도하는 추양문과 그 좌우에 자리한 증반청(왼쪽), 존사청(오른쪽)

 

4. 증반청과 자사(담장 너머의 맞배지붕 집)

송시열은 송자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동이족 출신 사상가인 공구를 공자로, 역시 동이족인 맹가를 맹자로, 주희를 주자

로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임) 하여 그의 문집과 서적을 보관한 서고의 이름을 송자사라 했다. 저들 모두 근래 복원된 것이며,
건물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5. 존사청과 풍천재(오른쪽 팔작지붕 건물)

 

6. 옛 만동묘와 화양서원 건물의 주춧돌

 

7. 만동묘묘정비

이 비석은 1747년에 세워진 것으로 만동묘를 세운 이유가 적혀 있다.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는데, 비석은 비

좌와 비신, 지붕돌을 지닌 비석으로 1942년 왜정이 만동묘를 밀어버리면서 비석을 꼼꼼하게 난도질을 해 땅속에 묻었다.

1983년 홍수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는데, 왜정이 비석을 꼼꼼하게 뜯어놓아 글씨 확인은 불가능하며, 근래에 팔작지붕

비각을 씌웠다.

 

8. 만동묘의 부질없는 내력이 적힌 만동묘정비 (만동묘 묘정비)

 

 

 

9. 확대해서 바라본 만동묘정비

 

10. 성공문에서 바라본 만동묘

만동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화양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명 신종과 의종의 사당으로 파괴

되어 터만 남은 것을 근래 2001년 이후에 복원했다. 아름다운 계곡인 화양계곡(화양구곡)의 오랜 옥의 티로 굳이 저렇게까

지 복원을 했어야 했나 회의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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