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산을 지키던 오랜 갑주이자 1236년 몽골군을 때려잡았던
전승의 현장,
죽주산성(竹州山城) - 경기도 지방기념물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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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주산성 남치성(南雉城) |
태평미륵을 친견하고
차량들이 쌩쌩 바퀴를 굴리는 17번 국도를 따라 북쪽(용인 방면)으로 10
분
정도 가면 죽주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의 완만한 산
길을 오르면 한자로 된 죽주산성 표석이 나오고, 몇 굽이를 더 오르면 죽주산성 안내문과 비
봉산 안내도가 있는 너른 공간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북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성은사(聖
恩寺)란 작은 절이 있고, 왼쪽에 산으로 오르는 조금은 각박한 길을 2분 정도 임하면 죽주산
성 동문이 모습을 비춘다.
산성 입구에서 동문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 10분 정도 걸리며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차량 접근
도 용이하다. |
![](http://2.bp.blogspot.com/--G6fsmH1V-0/T14_Bq_JG1I/AAAAAAAAAu4/-kzHh1zgv5s/s1600/DSCN7385.jpg)
▲ 윗도리는 사라지고 아랫도리만 남은 죽주산성 동문(東門)
동문은
윗도리인 문루(門樓)는 없고, 아랫도리인 성곽과 홍예만 남아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이다. |
비봉산(飛鳳山, 369m)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죽주산성은 신라 후기에 축성된 것으로 외성(外
城)의
둘레가 1,688m, 높이는 2.5m~5m에 이른다. 돌로 튼튼하게 다진 산성(山城)으로 성 내부
중앙에는 1,500m 길이의 내성(內城)과 270m 길이의 중성(中城)을 두어 방어력을 한층 높였다.
죽주산성 남쪽에는 죽산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안성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신라 말부터 조
선시대까지 안성을 능가하는 큰 고을로 죽주(竹州)라 불리기도 했다. 산성의 이름은 바로
죽
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죽산 고을의 중심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라가 내리막을 타던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시절에 기훤(箕萱)이 반란을 일으켜
이 성을 접수해 세력을
키웠으며,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운 궁예(弓裔)가 그의 밑에 들어가
잠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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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4.bp.blogspot.com/-fnabTtjB7K0/T14-8TkixCI/AAAAAAAAAuo/XuC1A3NPuz8/s1600/DSCN7380.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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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 남쪽 성벽 |
▲ 동문 안쪽 |
고려 때는 성을 수리하여 관리한 것으로 보이며, 1236년
몽골(원나라)의 3번째 고려 침공 때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때 죽주산성을 지켰던 장수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인 송문
주(宋文胄)로 일찍이 1231년 몽골의 1차 공격 때 귀주성<貴州省, 평북 구성시(龜城市)>에서
박서(朴犀)를 도와 몽골군을 크게 때려잡았던 인물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주성
싸움을 간
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218년 서경(西京, 평양) 근처인 강동성(江東城) 전투였다.
신라 왕족과 고려 사람, 발해 유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털린 거란족의 잔당들이
몽골과 동진국(東眞國) 연합군에게 쫓겨 고려 땅으로 침투해 강동성을 점거하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은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몽골+동진국 연합군과 강동성을 탈환하고
거란 잔당을 토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골의 강요로 형제국 동맹을 맺었으나 힘만 앞세운 몽골의 무식한 오만함
과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에 고려는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는 몽골의 사신이 고
려 제왕의
어좌(御座) 바로 옆까지 가서 국서(國書)를 주는 무례까지 범하는 등, 고려와 몽골
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225년 몽골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의문의 개죽음을
당하자 몽골은 크게 발작하여 고려의 만행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군사를 꾸려
그 유명한 살리
타이를 총대장으로 삼아 1231년 고려를 공격하니 그 지긋지긋한 반백년의 고려 vs 몽골 전쟁
의 서막이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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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치성 부근 성곽 |
▲ 내성 북쪽 |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순식간에 고려의 북계(北界, 평안북도)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허나
정주(定州)와 서경(西京)을 점령하지 못해 북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고려군의 무력
또
한 만만치가 않아 몽골군은 크게 고전을 하게 된다. 절치부심에 빠진 살리타이는 든 것도 없
는 머리통을 열심히 굴려 북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귀주성을 공격해 전세를 만회하기로 했
다.
몽골군이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군)을 점령하고 귀주를 공격하려하자 주변 지역의 고려
장
수와 군사들, 백성들이 귀주성으로 쏙쏙 모여 결전을 준비했다. 귀주성에는 서북면병마사(西
北面兵馬使)인 박서(朴犀)와 부하 장수인 송문주가 지키고 있었다.
귀주성에 당도한 몽골군은 항복 권고 한마디도 없이 바로 공성전(攻城戰)에 들어갔다. 귀주성
은
산자락에 자리한 탓에 공격이 쉽지 않은데, 단순한 살리타이는 단지 머릿수만 믿고 군사를
나눠
쉬지 않고 돌리면서 공격했다. 그렇게 고려군을 지치게 만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들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을 오르기도 전에 고려군의 화살비에 많은 군사가 죽어나갔다.
이렇게 몽골군이 고전하는 틈을 노려 김경손(金慶孫)이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
가
적군을 무수히 죽였으며, 검은 말을 타고 있던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이자 몽골군은 전의
를 잃고 바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1차 공성전에서 단단히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잠시 작전을 바꾸어 항복한 위주부사(渭州
副使) 박문창(朴文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허나 박서는 '어찌 오랑캐에게 항복을 한단 말
이냐.
너도 고려의 신하이거늘 자존심도 없냐!' 답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박문창을 죽여 그 목
을 몽골군에게 보냈다.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살리타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방패차
와
성문을 부시는 충차(衝車)를 앞세워 성문을 집중공격했다. 허나 성이 산자락이고 성 북쪽
과 동쪽에 동문천(東門川)이 흐르면서 행군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겨우 하천을 건너 성문
앞에 이르렀으나 고려군이 불화살과 큰 돌을 날려 보내면서 충차와 방패차는 산산이 박살이
나고 몽골군은 죄다 사지가 헝클어진 귀신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이번에는 성 밑에 굴을 파고 침투하는 방법을 썼다. 이
작전
에는 '두거'라는 물을 먹인 소가죽을 쓴 이동식 상자와 두거 보호용 누차(樓車)를 보냈는데,
고려군은 용광로에 쇠를 녹여 쇳물을 통에 담아 누차를 향해 마구 던졌다. 쇳물을 뒤집어쓴
누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면서 누차에 탄 몽골군은 죄다 즉석 통구이가 되었다.
또한 몽골군이 판 갱도에 군사를 보내 굴을 떠받치던 목재 버팀목을 불태우면서 갱도가 무너
져
삽질을 하던
몽골군도 죄다 생매장을 당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나무를 모아
띠로
묶은 다음 불을 붙여 두거 위로 던졌다. 가시나무 가지가 두거에 그대로 박히면서 계속
타오르니 아무리 물을 먹인 소가죽도 소용이 없었고, 그대로 불이 옮겨타면서 작전에 임한 몽
골군은
그대로 폐기처분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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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터 북쪽 성곽 |
▲ 내성(內城) |
이렇게 30일 이상
처절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귀주성은 건재했다. 기가 확 질러버린 몽골군
은
인근에 있던 군사들까지 싹 소환해 30여 대의 포차(砲車)를 급히 마련하여 다시 성을 공격
했다.
포차가 무수히 돌덩어리를 날리니 성곽 곳곳에 금이 가고 성내(城內)의 건물도 적지 않게 피
해를 입었다. 성벽의 무너진 틈새를 이용해 몽골군이 기들어오려 했으나 그 앞에 검차(檢車)
를 설치해 적군을 쫓아냈다. 그리고 무너진 틈을 쇠사슬을 엮어서 막았다.
몽골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단단하던 귀주성의 성벽도 슬슬 지쳐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여 박
서는 정예병을 뽑아 성 밖으로 보내 몽골군을 공격했다. 고려군의 기습에 몽골군은 적지 않게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혼란한 틈을 타 박서가 포차공격을 퍼부으니 그들은 목을 붙
잡고 후퇴했다.
단단히 똥줄을 탄 살리타이는 항복한 고려 왕족의 서신을 이용해 제발 투항좀 해주십사 부탁
을
했으나 박서는 살리타이의 사신을 내쫓았다. 이에 다시 발작한 살리타이는 운제(雲梯) 등
의 공성무기를 모두 동원해 공격에 들어갔다. 허나 고려는 운제 사다리를 파괴하고자 자물쇠
의 걸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크고 무거운 칼 대우포를 개발해 비치한 상태였다. 대우포의 공격
에
운제는 죄다 박살이 났고, 사다리에 올라탄 몽고군은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천하 최강의 깡패 나라로 악명을 날린 몽골군은 그보다 더 독한 귀주성 앞에 형편없이
꼬랑지
를 내렸고, 결국 공격 1달 만에 공격을 멈추었다. 또한 개경(開京)을 점령하고 돌아오는
몽골
군까지 격파되면서 몽골군의 간이 완전 쫄깃해졌다.
하지만 귀주성과 정반대의 상황이던 고려 조정은 개경이 함락된 휴유증에 몽골과 화의(和議)
를
맺었고, 당시 고려 군주인 고종(高宗)이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崔林壽)를
보내 항복
을 종용하는
칙서(勅書)를 전하니 박서는 분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창칼을 내던지고 몽골군
에게 항복하고 만다.
자신들의 힘이 아닌 고려 군주의 칙명으로 어거지로 귀주성의 항복을 받은 몽골군은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철수했는데, 당시 전쟁에 참여한 몽골 장수는
이
런 말을 남겼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군에 있으면서 천하 곳곳의 성지(城地)에 대한 공성전을 무수히 보았지
만
이처럼 지독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항복하지 않은 성을 본 일이 없다. 이 성을 지킨 장수들
은 훗날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역사에 전하지는 않지만 박서도 아마 몽골군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전쟁터에서 늙었지만 너희처럼 징글징글한 오랑캐는 처음이다. 너희들도 고생 많았다'
귀주성대첩 이후 박서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을 했고
송문주는 낭장(郎將)으로 특진되었다가 몇 년 뒤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죽주를 지키게 되었다.
1236년 몽골군이 다시 고려를 침범해 죽산 인근에 이르자, 송문주는 백성을 이끌고 죽주산성
으로 들어갔다. 전에 귀주성에서 송문주에게 혹독하게 당한 몽골군은 그의 이름 3자에 잠시
염통이 쫄깃해져 서둘러 항복을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포를 쏘면서 맹렬히 성을 공격했다.
성문이 부서지는 피해가 있었지만 고려군도 바로 포로 응수하면서 적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
혔고, 몽골군은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火攻)을 펼쳤으나 송문주는 성문을 열고 그
들을 기습해 수천의 몽골군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다시 한번 귀주성의 영웅에게 제대로
털린 몽골군은 공격 15일 만에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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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1957504F4F5F7B8632) |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 |
▲ 북치성(北雉城), 포루(砲樓) |
송문주는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질리도록 경험하여 그들의 전법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효
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었고, 다시 빛나는 승리를 취하게 된 것이다. 죽산 백성들은 그런
그를 '귀신','신명(神明)'이라 부르며 존경했으며, 그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었
다.
또한 백성들은 그를 기리고자 성 안에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참고로 박서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죽산이 고향이다. 바로 그 죽주산성에서
그의 부하장수
였던 송문주가 몽골군을 격퇴했으니 이것도 참 인연인가 보다. 몽골 애들 입장에서는 지독한
곳에서 지독한 적장과 적군을 만나 허벌나게 개고생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인 청주(淸州)와 충주(忠州)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
충지라 애지중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잠시 점거했으나 황진(黃進)이 기습작전으로
탈환하면서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 지역을 넘보지 못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절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구하고자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
이 진을 쳤으나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머리를 박고 항복하자 분을 삼키며 철수했
다.
조선 후기에는 조정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방치되어 나무로 다진 문루 등의 건물은 사라지고
견고한 성곽만 남게 되었다. 성곽 대부분이 남아있으나 외성 북부와 중성은 거의 주저앉았고,
외성 남부와 내성도 곳곳이 벗겨지거나 무너져 아픈 속살을 드러냈으나 2006년 이후 보수공사
를 벌여 외성 남쪽과 내성, 치성(雉城)을 손질해 왕년의 위엄을 조금은 되찾았다.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으며, 그 외에 성문터 3~4개가 더 있다.
남쪽 끝과 북
쪽 끝에는 치성(남치성, 북치성)을 두었고 외성 북쪽에도 조그만 치성을 3개 정도
만들어 수
비력을 드높였으며, 남치성에는 장대(將臺)터가 아련히 남아있고, 북치성에는 포루(砲樓)터가
있다. 우물은 2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현재 약수터로 쓰인다. 또한 남문 밖에는
도랑을 판
자리가 있어 조촐하게 해자(垓子)를 두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성 내부는 분지(盆地)로
북쪽
과 남쪽을 제외하고는 지형이 평탄해 군사시설과 집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와 절 건물로 쓰이는 집 몇 동이 있다.
죽주산성과 비봉산은 근래에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이정표와 안내문을 설치했으며, 비봉산 정
상을 거쳐 삼죽면이나 죽산리로 내려가도 된다. 산성은 외성 남쪽과 내성 북쪽을 돈다면 대략
30~40분 정도 걸리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외성 북쪽까지 모두 돌 경우에는 2시간이 넘는다. |
![](http://1.bp.blogspot.com/-ahcWznzuD1c/T14-3CR-q8I/AAAAAAAAAuY/kPqYuA0ZNHA/s1600/DSCN7377.jpg)
▲ 죽주산성 안내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
안성의 주요 명소이자
대몽항쟁의 승전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이리저리 헝클어진 모습을
보면 인간의 창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그저 허술한 모래성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근래에 복원을 하였지만 고색의 때가 자욱한 옛돌과 하얀 피부의 새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
고 있으니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서로가 조화를 이룰 것이다.
남치성에 이르면 죽산면 중심지(죽산리)가 두 눈에 바라보이고, 북치성에는 백암 지역이 시야
에 들어와 조망이 일품이며, 평택과 충주, 청주로 통하는 길목에 가파른 곳에 의지해 자리해
있어 천하의 요새임을 실감할 것이다.
* 죽주산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5-1, 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