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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악산이 빚은 일품 계곡, 현등사계곡(현등사골) - 현등사 불이문 직전


2. 현등사 불이문 직전 숲길

 

3. 현등사 불이문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현등사 경내에 이른다.

 

4. 불이문 직전에서 운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숲길

저 숲길로 들어서 1시간 20~40분 정도 오르면 운악산 정상(해발 936m)에 이른다. 중간에 운악산의 일품 폭포로 꼽히는 무

지개폭포가 있으며, 현등사 이후 구간은 아직까지 미답의 길로 남아있다.

 

5. 불이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6. 현등사3층지진탑 (하판리 지진탑)

불이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중간에 지진탑이라 불리는 키 작은 3층석탑이 있다. 그는 보조국사 지눌이 현등사를
크게 일으켜 세웠을 때 땅의 기운을 진정시키고자 세웠다고 전하며, 그래서 이름도 지진탑이다. (지역 이름을 따서 '하판
리 지진탑'이
란 이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2개의 바닥돌과 2층 탑신, 탑신이 없는 지붕돌 1층, 탑신을 지닌 지붕돌 2층,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없어진 부분이 많아
원래 모습은 파악하기 힘들다. 바닥 받침돌은 2장의 돌이 서로 어긋나 있으며, 앞에 바닥돌 1개가 따로 자리해 있다. 지
붕돌
은 처마마다 평평한데 끝이 급하게 올라가 있으며, 지붕돌 1층과 2층은 4단, 3층은 3단의 지붕돌받침이 있다. 탑신 2
는 모두 기둥 모양의 장식이 양 끝에 있으며, 각 면에 석가여래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머리장식은 받침돌만 남아있
데, 가운데에 쇠로 된 기둥을 끼운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세웠는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탑의 모양새로 모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땅의 기운을 진정시
키고자
세웠다는 사연 때문인지 사람들이 소망을 들이밀며 던져놓은 10원, 50원, 100원, 500원짜리 동전이 지붕돌과 탑 아
랫도리, 탑 주변에 수북하게 쌓여있
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조성한 동전인만큼 저리 방치할 것이 아니라 수거하여 좋은 곳
(불우이웃돕기, 어려운 학생들 돕기 등)에 썼으면 한다.

 

 

6. 정면에서 바라본 지진탑

탑 밑도리와 주변에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모두 동전이다.

 

 

7. 현등사3층석탑

현등사 경내에 들어서면 앞서 지진탑보다 키와 덩치가 훨씬 크고 더 잘생긴 삼층석탑이 마중을 한다. 그는 높은 바닥돌과
2층 기단, 3층
탑신, 머리장식을 지닌 탑으로 아랫기단은 불상의 대좌와 같이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상/하대석에는
장식문이 있는 연화문과 장방형의 액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중대석에는 대나무형의 원주로 된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윗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는데, 기둥 사이에는 장방형의 액을, 상면에는 복련(꽃잎을 아래로 펼친 연꽃)
이 조각된 갑석을 두었다. 탑신석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신 각 면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 하면에는 원주, 2층은 4단, 3층은 3단의 옥개받침이 있으며, 머리장식은 복발주, 연주문주, 보륜주, 보주 등이 하나

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탑에서 1470년에 현등사를 중수한 기록이 새겨진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었으며 석탑의 모습으로 보아 조선 초에 조성
된 것으로 여겨진다.

 

 

 

8. 현등사 경내 보광전

운악산 동쪽 자락에 470m 고지에 둥지를 튼 현등사는 가평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시절 포교를 위해 석
여래의 진신사리와 대장경을 들고 라를 찾은 인도 승려 마라하미의 거처를 위해 540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신라 후기인 898년 도선대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하여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적당한 자리를 찾가 
악산의 산세가 빼어나 그 품으로 들어가니 법흥왕 때 세웠다는 절터가 있어 그곳에 절을 중건했다고 전다. 허나
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다. (그 시절 한양은 도읍으로 정해지지도 않았음)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부근을 지나다가 운악산 중턱에 이상한 불빛을 보았다. 하여 그를 쫓아가보니 절터의 석등과 미
바위에 불이 밝혀져 있음을 보고 감동해 절을 중창하고 현등사라 했다고 전한다. 이후 1411년 함허득통화상이 금강산
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 주변을 방황하다가
운악산 서쪽 능선에서 하얀 피부의 사슴을 만났다. 사슴은 그를 현등사로 인도했고

인연으로 절을 중창하고 머물렀다. 그는 이곳 보합태화루(보광전)에서 '현정론'과 '금강경오가해'를 작성했다고 전한다.

 

1447년 세종은 현등사에 머물던 함허의 상수 제자인 혜각존자 신미에게 명해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을 편찬했으며 1461

세조는 간경도감을 만들고 스승으로 삼은 신미에게 '능엄경','묘법연화경','원각경','목우자수심결' 등을 훈민정음 해석본으

로 내게 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삼장(경,률,논)의 대가였던 화담당 경화선사가 머물기도 했다.

 

현등사는 수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으로 경기도 3대 기도성지(현등사, 관악산 연주암, 석모도 보문사)의 하나

로 꼽히기도 했으며,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보광전, 삼성각, 영산보전, 만월보전, 적멸보궁, 운악산방,

불이문, 요사채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동종을 위시해 3층석탑, 목조

아미타좌상, 청동지장보살좌상, 아미타회상도, 신중도, 수월관음도, 함허당득통탑과 석등, 지진탑, 지장시왕도, 칠성정화도,

독성도, 또 다른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볼거리도 아주 풍부하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 조정에 진상한 금병풍이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9. 특이하게 생긴 보광전
보광전은 'ㄷ' 구조의 팔작지붕 집으로 일종의 대방 역할을 했다. 선방과 요사, 예불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여러 존재가 저 안에 깃들여져 있다.

 

10. 보광전 뜨락에 닦여진 네모난 연못

 

11. 운악산이 베푼 옥계수가 파도를 치는 오래된 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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