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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불암사



~~~~~  한여름 산사 나들이, 불암산 불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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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불암사
▲  평화로운 불암사 경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속절없이 더해가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정말
간만에 불암산(佛巖山) 불암사를 찾았다.
햇님이 한참 허공 복판에 머물던 15시에 석계역(1/6호선)에서 그를 만나 간단히 요기를 하
고 서울시내버스 1155번(석계역↔청학리)을 잡아타고 불암산의 남쪽 관문인 불암동(佛巖洞
)에서 두 발을 내렸다.



 

♠  불암사(佛巖寺) 입문

▲  불암사 일주문(一柱門)

불암산(508m)은 서울 근교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엄청나다. 불암산 밑도
리에 터를 닦은 불암동은 일찌기 불암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산꾼과
나들이꾼, 군부대 면회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온갖 식당과 갈비집이 가득해 거의 먹거리촌
이 되었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식당의 진한 유혹으로 코가 아주 정
신을 못차린다. 간신히 그 유혹을 뿌리치며 길을 걸으니 불암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길을 따라 징하게 이어지던 식당의 행렬도 여기서 뚝 그친다.

1994년에 세워진 일주문의 현판에는 '천보산(天寶山) 불암사'라 쓰여있는데, 천보산은 불암산
의 다른 이름으로 조선 세조(世祖)가 산의 수려한 모습에 감동을 먹고 내린 이름이라고 한다.
불암산이란 이름은 산 정상을 이루는 바위가 마치 비구니의 모자를 쓴 부처의 모습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니 산 이름이 그야말로 불교 스타일이다. 그리고 필암산(筆岩山)이란 별칭도 가지
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다.


▲  불암사로 인도하는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깥보다 더욱 짙은 숲길이 펼쳐진다.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라 녹음
(綠陰)의 질감도 매우 깊은데, 잔잔한 산바람에 번뇌를 강제로 떠맡기며 계속 길을 가면 불암
사 경내가 슬슬 모습을 비춘다.


▲  물줄기가 춤추는 작은 연못 (사적비 옆)

▲  불암사의 빛바랜 일기장, 사적비(事蹟碑)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 앞에 이르면 사적비와 수초(水草)를 머금은 아기자기한 연못이 마중
을 한다.
고색의 내음이 아낌없이 서린 사적비는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왕실과 가까운 절의 위상을
보여주듯, 공조판서(工曹參判) 이덕수(李德壽)가 글을 짓고,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인 조명교(曹命敎)가 썼다. 불암사의 창건과 중건을 다룬 사적(事蹟)을 비롯해 1728년에 거사
각신(覺信)과 정인(淨仁)이 맹세 발원하여 보시한 돈으로 근기(近畿, 수도권) 지역에 전토를
마련해 절이 피폐하지 않도록 하였음을 다룬 내용도 적혀있다.

비신(碑身)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으로 지붕돌에는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역력해 고색의 멋을 진하게 풍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불암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 불암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암사
불암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824년에 지증대
사(智證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연 지
선(智詵)이 창건했다고도 하나 관련 자료와 유물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거의 없다. 이후 9세
기 말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중건했다고 하며, 조선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서울 주변 동서남북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절을 하나씩 선정했는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북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삼
성산 삼막사(三幕寺), 그리고 동쪽에 불암사를 선택했다. 그로 인해 동불암(東佛巖)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서울 근교 4대 명찰(名刹)의 하나로 널리 존재를 알렸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시절에 중건을 했고, 영조(英祖) 말년에 거의 망하기 직전에 이
른 것을 승려 명관(明瓘)이 크게 중수했다. 1731년에 왕실의 지원으로 사적비를 세워 불암사
의 내력을 기록했으며, 1782년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제월루를 세웠다.
1844년에 중수를 했고, 춘봉(春峯)이 향로전을 다시 지었으며, 1855년에 혜월(慧月) 등이 중
수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동축당(東竺堂)을 세웠다.

6.25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를 없었으며, 1959년에 만허(滿虛)가 칠성각을 중수하
고, 낡거나 협소한 건물을 죄다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989년 타이(태
국)와 스리랑카에서 부처의 사리를 기증받아 5층 진신사리탑을 세웠으며, 1991년에 화재로 관
음전이 무너지자 1992년에 다시 지었고, 1996년에 협소하던 동축당을 부시고 그 목재를 포천
보문사(普門寺)에 선물하여 그곳 대웅전 불사에 쓰게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약사전, 제월루, 지장전, 칠성각,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응화사적 목판(釋氏源流應化事蹟
木板)이 있으나<여기서 석씨(釋氏)는 석가모니를 뜻함> 현재는 연구와 보호를 위해 서울 불교
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된 '불암사 경판'이 전하고
있는데, 이 경판은 1635년부터 1795년까지 간행된 것으로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밖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895년에 제작된 괘불도(掛佛圖, 경기도 지방유형
문화재 315호
), 석가삼존십육나한도, 목조석가여래좌상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적비와
지장시왕탱, 칠성탱 등 오래된 비지정 문화유산이 있다.

속세와 가깝긴 하나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어 산사의 내음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고색
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사적비와 여러 늙은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케 해준다.

끝으로 불암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6.25시절에 활약했던 '호랑이' 유격
대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육사 1,2기 생도들은 포천(抱川)과 서울 노원구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
웠으나 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중 육사 생도 13명(1기 10명, 2기 3명)은 후퇴하지
않고 국군 7명과 의기투합하여 불암산 정상과 석천암 주변 바위 동굴에 은신했다. 그들은 암
호명 '호랑이'란 유격대를 결성했는데, 불암사 주지승 윤응문과 석천암(石泉庵) 주지승 김한
구가 그들을 크게 도와주었다.

허나 호랑이 유격대는 겨우 20명이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 북한군에게 새카맣게 점령된 상태
이다. 하여 산에 은둔하여 치밀하게 기회를 노려 총 4차례에 기습전을 전개했는데, 7월 11일
불암산과 가까운 퇴계원 보급소를 습격해 적 30여 명을 죽이고 기름 50드럼을 폭파하면서 그
들의 첫 작품을 근사하게 치루었다.
7월 31일, 창동(倉洞) 수송부대를 습격해 6명을 죽이고, 보급차량 다수를 폭파했으며, 8월 15
일에는 북한군 훈련소를 기습해 50여 명을 사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9월 21일에 북
한군에게 끌려가는 주민 100여 명을 남양주 내곡리에서 구출하고 적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
만 적들의 반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19명이 장렬히 전사했으며, 강원기 생도(육사 1기)는
중상을 입고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며칠 안가서 결국 눈을 감고 만다.
딱 7일만 더 버텼다면 서울 수복의 기쁨을 누렸을텐데. 하늘도 참 야속했다. 그러고보면 이
땅의 하늘은 정의로운 사람에게만 화를 주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만 주로 복을 주니 참 하
늘값을 제대로 못한다. 그런 하늘은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

* 불암사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797 (불암산로 190 ☎ 031-527-8345)
* 불암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동자승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과 깨알 같은 불전함



 

♠  불암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  불암사 제월루(霽月樓)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짜리 집이다. 1782년에 지어졌다고 하나
현재 건물은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며, 정면에 걸린 불암사 현판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70세 때 쓴 것이다.
1층은 종무소(宗務所)와 기념품 가게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차가람'
이란 현판을 내건 개방된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와 잠시 두 발을 쉬거나 차 1잔, 독서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책장과 평상, 방석, 선풍기, 난로, 자판기 커피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여
름에는 산바람이 솔솔 기웃거려 시원하다.


▲  제월루 2층 내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대웅전 뜨락과 제월루(왼쪽)

▲  툇마루를 갖춘 약사전(藥師殿)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의 거처로 가운데 3칸은 약사전,
좌우 1칸씩 2칸은 요사(寮舍)로 쓰이는 복합적인 건물이다.

▲  약사전을 마주보며 툇마루를 내민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1991년에 불탄 것을 1992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은 관음전, 나머지 2칸은 종무소와 요사로 쓰인다.

▲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상(보물 2,003호)과 천수천안관음보살탱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49년에 무염(無染), 성수, 심인, 상림, 경성 등 5명의
조각승이 합심하여 만들었다. 보살상의 뱃속에에서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과 중수발원문이
나와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는데, 원래는 전북 대둔산(大芚山) 묘련암(妙蓮庵)에 봉
안하고자 제작되었다. 허나 1900년 무렵 불암사에서 만일회(萬日會)가 열리면서 살짝 이곳으
로 옮겨진 것으로 여겨지며, 1907년 개금 중수했다.

보살상의 높이는 67cm으로 연꽃과 불꽃문양이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가사
는 2벌을 겹쳐서 입은 이중착의법으로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렸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당하
고 신체의 자연스런 양감이 돋보이는데, 얼굴은 이마가 넓으며, 턱 부분은 좁아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된 턱 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
재감 있는 이목구비의 표현 등은 아담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추구했던 무염의 불상/보살상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보살상은 2018년 10월에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는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조성발원문 1점과 후령통 1점, 중수발원문 1점도 같이 지정되었다.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
상'이란 이름으로 지정됨) 그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그의 조성 시기와 조성 승려, 봉안처 등
을 알려주는 발원문 덕분이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과 천진불(天眞佛)
그 주변(사진 오른쪽)에 포대자루를 맨 포대화상이 서 있다.

▲  3층석탑 옆에 핀 한 송이 백련(白蓮)
저 안에서 심청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잘익은 백련 앞에 내 마음은 콩닥콩닥~~♪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불암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석가3
존상을 봉안했는데, 그 뒤로 1907년에 보암긍법, 범화윤익, 법연 등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이
걸려있다. 그리고 1982년에 그려진 천불탱과 2001년에 조성된 신중탱, 감로탱 등이 법당 내부
를 장엄하게 꾸며준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8호)과 석가3존상

대웅전 불단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조그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
상을 이루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상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743년에 개금(改金)을 했다는 기
록이 전하고 있다. 그때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시주자로 참여하여 왕실과 크게
관련이 있는 불상임을 알려준다.
불상의 상체가 길고 무릎의 높이가 낮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네모난 얼굴은 양쪽
볼이 두꺼우며, 반쯤 뜬 눈에 우뚝한 콧날과 작은 입술을 지녔다. 머리는 나발로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정수리와 이마 사이에 원통형과 반달 모양의 상투 매듭 구슬이
뚜렷하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했고, 왼손
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옷자락이 다소 두터워 신체의 양감이 드러나지 않는데, 옷자락은 몇 가닥의 깊은 골주름을 그
리며 좌우로 뻗었으며 그 끝자락은 대좌 위로 드리워져 물결 모양의 부채살처럼 마무리가 되
었다.

그의 좌우에 자리한 문수/보현보살은 근래 만들어 붙인 것이며, 그들 뒤에는 1907년에 그려진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
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유희좌(遊戱坐)로 앉아있다.

그들 좌우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세음보살이 한 자
리씩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뒤에는 붉은색과 하얀 색으로 이루어진 천불탱이 걸려있다.



 

♠  불암사 마무리

▲  한 지붕 다 가족을 이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칠성각은 1959년에 중수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특이
하게 각 칸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가운데는 칠성각, 그 좌우는 산신각(山神閣), 신통전(神通殿
) 현판을 내밀고 있는데, 그냥 속편하게 그들을 모두 아우른 삼성각(三聖閣)을 칭하면 될 것
을 괜히 복잡하게 현판만 주렁주렁 달고 있다.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 외에 16나한과 지장시왕탱, 석가여래상도 봉안되어 있어
완전 한지붕 다가족을 이루고 있으며, 이중 칠성탱과 16나한도,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다.


▲  석가삼존16나한도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16나한도는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을 담은 탱화이다. 그림 중앙에 석가여래가 있
고, 그 밑에 조그만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있으며, 그 주위로 16명의 나한(羅漢)이 각자
의 스타일을 드러내며 그려져 있는데. 특이한 점은 나한이 모두 독자적인 칸을 지니며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할 구도법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많이 나타
나는 불화 양식으로 한 화면에 이렇게 구획을 만들어 16나한을 모두 넣은 것은 불암사만의 독
창적 특징이다.

이 탱화는 1897년에 경선응석(慶船應釋), 명응환감(明應幻鑑), 보암긍법(普庵肯法), 범화윤익
(梵華潤益), 설암재오(雪庵在悟), 운조(雲祚) 등이 그린 것으로 고색의 기운을 제법 풍기고
있으며, 그 앞에는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다.


▲  유리막에 갇힌 독성상
동자승처럼 귀여운 조그만 독성상이 방석 위에 앉아있다. 다른 절과
달리 독성상만 있을 뿐, 독성탱은 없다.

▲  칠성각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 석가3존상과 칠성탱(뒤에 있는 그림)

칠성각 중앙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이 문수/보현보살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그 뒤에는 칠성 가
족을 머금은 칠성탱이 석가여래의 후불탱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는 경내에서 가장 늙은 탱화
로 1855년에 퇴운주경(退雲周景), 창엽(瑲曄), 환익(幻益), 민수(旼修), 긍섭(肯攝), 법인(法
仁) 등이 그렸다.
그림 중앙 윗쪽에는 치성광여래가 하얀 사슴이 끄는 수레에 타고 있고, 그 밑에 황색 대의를
걸친 자미대제(紫微大帝)가 있다. 그 옆에는 칠성원군(七星元君)이, 그 뒤로는 일광보살(日光
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좌우보필성(左右輔弼星), 육성(六星)이 있다. 다시 그 주위로
남두칠성(南斗七星)과 칠성여래(七星如來)가 자리해 있고, 머리에 별을 이고 있는 28숙(宿)이
시립해 있다. 등장인물이 많아 좀 복잡하나 인물이 위로 가면서 작아지는 원근적인 표현을 하
고 있다.


▲  산신탱과 산신상
붉은 옷을 걸친 수염 지긋한 산신 할배가 중앙에 앉아있고, 그 옆에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앉아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첩첩하게 주름진 산줄기, 학 등이 탱화를 가득 채워준다.

▲  밝은 색채의 지장시왕탱

산신탱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탱은 1890년에 완송종현(琓松宗顯), 혜조(慧照), 보암긍법(普庵
肯法), 등한(等閑) 등이 제작한 것이다.
연화좌(蓮花座)에 앉은 지장보살은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고, 왼손은 결가부좌(結跏
趺坐)한 두 발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그 좌우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비롯한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사자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어두운 곳에 사는 존재들이지만 밝은 색채를 주로 사용하여 밝은 느낌을 크게 준다. 저승도
나름 살만한 곳이구나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  하얀 연등을 두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불암사의 보물인 석씨원류응화사적책
판과 경판을 머금던 장경각(藏經閣)이었다. 허나 석씨원류가 서울로 옮겨지고(현재는 불교중
앙박물관에 있음) 경판 또한 별도의 장소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이 되었다가 2004년에 내부를
손질하여 지장전으로 삼았다.
불단에는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로 이루어진 지장3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모두 금
동으로 되어 있다.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자리하고 있고, 그 좌우 감실(龕室)에는 16명의
나한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  마애3존불과 12지신상

경내 뒷쪽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중 적당한 바위를 손질하여 마애3존불과 세존진
신사리탑을 세웠는데, 그중 사리탑을 세운 바위에 부처바위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경내에서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목에는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좌우로 6개씩 늘어서 있어 나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들의 검문을 받으면 바위에 하얗게 새겨진 마애3존불 앞에 이
르게 된다.
이 마애불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바위에서 그대로 현신한듯 자리해 있는데, 중앙에
는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나란히 취한 미륵불이 있고, 그 좌우에 정병(政柄)과 연꽃을 든 관세
음보살과 금강저(金剛杵)란 무기를 쥔 보살상이 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상 (내가 말띠라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매끈하다.

▲  바위에 선명하게 자국을 낸 마애3존불

▲  부처바위 위에 세워진 5층 세존진신사리탑(世尊眞身舍利塔)

마애3존불이 새겨진 바위 뒷쪽에 부처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부처의 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이 장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석탑은 1989년 타이(태국)와 스리랑카에서 얻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세운 것으
로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얹히고, 보륜(寶輪) 등의 상륜부(相輪部)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2층 기단에는 팔부중(八部衆)을 새겼고, 1층 탑신에는 동쪽에 여래상을 조
각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절도 거의 30년 만에 발걸음을 한 나
만큼이나 적지 않게 변해있었는데, 다시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구석구석 경내를 살폈다.
이제 이곳을 나오면 언제 또 이곳에 오려나? 가깝지만 참 인연이 잘 닿지 않는다. 불암산은
가끔씩 찾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불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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