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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삼성산 삼막사, 석수동 석실분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3층석탑
▲  삼막사3층석탑
 



 

겨울 제국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를 완전히 휘어잡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삼성산
삼막사를 찾았다.
삼성산(三聖山, 481m)을 오르면 삼막사는 거의 거쳐가기 마련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
려있던 12시에 서울대입구역(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515번(양천차고지
↔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청, 서울대를 지나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
다. 바로 여기서 삼막사를 찾기 위한 삼성산 산행을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를 지나 호암산(虎
巖山, 385m) 정상 부근에서 속세(俗世)에서 가져온 먹거리(김밥, 과일, 과자 등)로 간단
히 점심을 때웠다.
호암산 정상에서 삼성산까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삼성산 서북쪽 능선이 펼쳐져 있는
데, 능선길이 느긋하고 각박한 구간이 별로 없어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장군
봉과 운동장바위, 446봉을 지나 15시에 삼성산 정상 서남쪽에 자리한 삼막사에 도착했다.


▲  경내에서 내려다본 삼막사 일주문(一柱門)



 

♠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삼성산의 대표 산사,
~ 안양 삼막사(三幕寺)

▲  밑에서 바라본 삼막사 - 마치 산 위에 닦여진 요새를 보는 것 같다.

삼성산 정상(481m) 서쪽 36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막사는 삼성산(三聖山)의 대표적인 고찰(古
刹)이다. 오래된 절들은 그럴싸한 창건 설화나 사연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이곳
역시 창건 설화 한 토막을 내밀고 있다.
때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시절인 677년, 신라(新羅) 불교의 핵심 인물인 원효
(元曉)와 의상(義湘), 윤필(潤筆) 3명의 고승이 삼성산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는데, 원
효가 지은 막이 1막, 윤필은 2막, 의상은 3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면서 그들이 막을 지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삼막사라 하였으며 산
이름도 삼성산이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삼성(三聖)은 3명의 성인으로 원효, 의상, 윤필을 뜻
한다. 하지만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의 좌우를 지키는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삼성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 이름을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삼성산에는 절이 많았다. (지금도 많음)

삼성산의 이름은 그렇다쳐도 삼막사 창건설화는 어디까지나 삼막사에서 지어낸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창건 시기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상은 당나
라에서 가져온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추구하면서 왕경(王京, 경주)과 그
가 지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등 10개 사찰에 주로 머물러 있었으며, 원효 또한 불교 대중화
를 위해 민중에 뛰어들던 시기이므로 그가 지은 절은 정작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절 이름인 '
삼막'은 어디서 나왔을까?
관음사(觀音寺)로 불리던 신라 후기 또는 고려 때, 절이 나날이 융성하여 도량의 짜임이 송나
라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격하게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자연스레 삼막사
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는데, 절에서 창건 설화를 지으면서 한자를
바꾸고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신라 고승 3명을 강제로 등장시켜 그들이 막을 치고 머물렀다고
설화를 짠 것이다. 그러니 절의 처음 이름도 '삼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후기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道詵)이 절을 중건하고 불상을 봉안하여 관음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며,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다시 삼막사로 바꿨다고 전한다. 태조는 삼막사
남쪽에 있는 염불사(念佛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안양사(安養寺, ☞ 관련글 보러가기) 창
건 설화에도 절찬리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백제(後百濟)를 치러 갈 때, 그 길목인 삼성산에
여러 절을 짓거나 중수를 도와준 것으로 여겨진다.

1348년 나옹(懶翁)과 지공(指空)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날렸고,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1398년 왕명으로 중건했다. 그 인연으로 북
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동쪽에 불암
사(佛巖寺,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중 삼막사는 남쪽에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연유로 남왈삼막(南
曰三幕)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으나 법당이 타지 않아서 그들은 참회를 하고 철수했다고 전하
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1880년에는 의민(義旻)이 명부전을 짓고,
1881년 칠성각을 지었으며,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池雲英)이 절 옆에 백련
암을 지어 은거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천불전과 명부전, 망해루, 대방, 칠성각, 육관음전 등 10여 동이 있으며, 상당수의
건물이 지형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
석탑과 명부전, 사적비, 남녀근석, 마애3존불 등이 있고, 삼귀자 바위글씨와 감로정 등의 비
지정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아낌없이 대변해준다. 특히 3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늙
은 존재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이라 절이 적어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음을 알려준다.

삼막사는 삼성산 정상부 서쪽 요충지에 자리하여 산꾼과 답사꾼들이 많이 찾아오며, 특히 삼
성산 정상을 가거나 삼성산을 가로지를 경우 거의 꼭 거쳐야되는 황금 길목에 위치해 사람들
로 늘 북적거린다. 게다가 절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도 가능하다. (서울대와 삼
성산성지, 호압사, 경인교대, 안양예술공원에서 등산으로 1~2시간 정도 걸림)
또한 서울과 안양(安養) 도심에서 가깝고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괜찮으며, 공기질
이 좋을 때는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잡힌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삼막로 478, ☎ 031-471-5978)


▲  삼막사 명부전(冥府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서울대와 호압사, 호암산 주변, 경인교대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일주문에서 계단길을 오
르면 비로소 삼막사 경내에 이른다. 경내는 일주문 윗쪽에 높이 자리해 있는데, 망해루와 범
종각 등을 바깥에 내밀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경내 북부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과 망해루 등 다
른 건물들이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명부전은 거의 혼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
향(南向) 건물이 이 땅에서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곳만큼은 그 원칙은 서향(西向)이 진리이다.
(물론 지형적인 영향이 크지만;;)
이 건물은 1880년에 의민이 지은 것으로 1975년에 수리를 했다. 네모난 장대석(長臺石)으로
다진 기단(基壇)을 2단으로 깔고 그 위에 집을 얹혔는데, 현재 맞배지붕 건물에 흔치 않은 방
풍판(防風板)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팔작지붕인 것을 개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태로 귀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으며, 건물 내부에
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시왕상은 명부전 이상으로 늙은 보물이다.


▲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4개의 지물, 사물(四物)이 담겨진
범종루(梵鍾樓)

▲  삼막사 망해루(望海樓)

범종루와 함께 경내를 가리고 앉은 망해루는 삼막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을 20세기에 중건했는데, 건물 이름 그대로 바
다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나 인천(仁川)과 시흥(始興), 안산(安山) 지역의 갯벌이
마구 매립되어 육지가 늘어남에 따라 바다는 그만큼 멀어졌고, 대기오염도 툭하면 말썽을 부
려 이제는 공기질이 아주 좋은 날이 아닌 이상은 바다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망해루' 이
름 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막사는 서울을 지키는 남쪽 비보 사찰이라 선비와 관리들의 출입이 잦았는데, 그중에는 백
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쓸데없이 능했
던 송시열(宋時烈) 마저 질리게 만든 문인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 직전에 삼막사를 찾아 망해루에 걸터앉으며 시 1수를 지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
 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
 이때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
 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허나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시가 될 줄은... 이처럼 망해루는 문인들 시에 종
종 등장했으며, 현재는 주로 강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  망해루 옆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경인교대를 비롯하여 안양 석수동, 광명 남부 지역, 시흥시,
그리고 멀리 인천 땅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이날은 아무리 인상을
쓰고 살펴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청기와를 지닌 육관음전(六觀音殿)

명부전 옆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6명의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육관음전이 청기와 지붕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칸을 구분 짓
는 기둥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나름 이형(異形)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다양한 관세음보살을 모아놓은 육관음전 내부

▲  삼막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

육관음전과 천불전 중간 높은 곳에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
려운 석축 윗쪽 바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보통 석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다소 구석진 곳에 두어 사람의 손길을 피하게 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삼막사 출신인 승려 김윤후(金允
侯)가 몽골(원나라)의 제2차 침공(1232년) 때 처인성(處仁城, 용인 남쪽)에서 몽골군 우두머
리인 살리타이를 처단하여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살례탑'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김윤후는 이후 충주(忠州)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그 위엄을 크게 떨쳤으며, 나라에서 상장군(
上將軍) 직을 내리려고 했으나 쿨하게 거절했다.

탑의 높이는 2.55m로 조그만 편인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3층 탑
신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만 겨우 남은 실정이다.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며, 탑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하얀 피부
를 드러내고 있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탑 뒤에는 소나
무들이 푸르름을 드러내며 탑의 우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  감로정 석조 옆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삼막사는 육관음전이라 하여 6명의 관세음보살을 두었는데, 밖에도 마애불(磨崖佛)
비슷하게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두어 관음도량처럼 꾸몄다.

▲  감로정 석조(甘露井 石槽)

3층석탑 바로 밑에는 삼막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감로정 석조가 누워있다. 삼성산이 베푼 감
로(甘露) 같은 약수가 늘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와 대자연 형님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
는데, 감로를 머금은 거북 모양의 석조에는 고색의 때와 주근깨가 자욱하다. 그 역시 삼막사
의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 앞쪽에 '甘露井(감로정)'이란 글씨와 183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글씨가 있어 그의 이름과 경력을 알려준다.

거북 모양의 석조 옆에 원통형 석조는 근래 마련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뚜껑이 닫힌 거
북 석조에서 직접 물을 떠다 마셨다. 지금은 옆으로 홈을 내서 물이 원통형 석조로 흘러내려
와 그것을 마시면 된다. 특히 이 석조에는 조선 정조 때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 설화
가 전하고 있다.


▲  삼막사의 법당 역할을 하는 천불전(千佛殿)

육관음전 못지 않게 청기와 지붕을 드러내고 있는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역시나 서쪽을 향하고 있다.
천불전이란 이름 그대로 1,000개의 조그만 불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 땅의 7천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이다. 귀찮아서 건물 내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현재 법당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 뒷쪽에는 원효가 수행했다고 전하는 토굴(土窟)이 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宗務所) 옆 쉼터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아직까지 남은
식량이 있어서 커피와 과자 등을 꺼내 잠시나마 조촐한 향연을 즐긴다. 서쪽 전방에 펼쳐진
일품 조망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며,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
람은 번뇌와 온갖 상념을 싹 털어간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삼막사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자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보통 천불전과 명부전, 육관음전, 3층석탑이 있는 경내가 삼막사의 전부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삼막사의 함정이다. 아직 사적비와 삼귀자, 마애불, 남녀근석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있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을 지나치면 삼막사의 절반 밖에는 못보는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말끔하게 보고 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삼막사에 대한 작은 예의가 될 것이다.
사적비와 삼귀자는 경내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마애불과 남녀근석(칠성각 구역)은 5~6분 정
도 산을 타야 된다.


▲  삼막사 사적비(事蹟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길을 접어들면 바로 왼쪽 높은 곳에 빛바랜 비석 하나가 눈에 아른
거릴 것이다. 그는 삼막사의 일기장인 사적비로 네모난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인데, 삼막사 창건 설화부터 조선 후기까지 내력이 적혀있으나 아쉽게도
비문(碑文) 상당수가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관악산맥 삼성산 밑에 있다는 것과 절 이름이 삼막사로 향로봉이 왼쪽에 있다는 것, 사
적비를 1707년에 세웠음을 알리는 내용만 간신히 확인이 가능하다.


▲  산신각 - 바위에 새겨진 마애 산신탱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에 깃든 산신탱이 마중을 한다. 지팡이를 든 대머리 산신 할배를 중심으
로 동자와 호랑이, 소나무, 구름, 햇님 등을 담았는데, 색을 입히지 않아서 윗쪽을 제외하면
모두 하얀색이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이렇게 산신탱을 닦고 그 주변을 노천식 산신각(山神閣)으로 삼았는데, 산신탱 앞에는 중생들
이 올린 막걸리와 사탕, 과자, 떡 등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삼귀자(三龜字) 바위글씨를 머금은 바위

예전에는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가려면 무조건 사적비와 삼귀자 앞을 지나가야 했다. 허
나 지금은 질러가는 길이 생겨서 그들 앞을 굳이 지나갈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들은 삼막사의
오랜 보물들이니 이곳이 초행이라면 꼭 살펴보기 바란다.

산신탱을 지나치면 기묘하게 생긴 삼귀자 바위글씨가 발목을 붙잡는다. 바위 피부에 쓰인 글
씨는 모두 거북 귀(龜)로 그 글씨를 전서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디자인하여 새긴 것인데, 오
른쪽 글씨는 그나마 귀자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슨 부적 분위기가 나고, 가운데 글씨는 엉금엉
금 기어가는 거북이(또는 무당벌레) 모습 같으며, 왼쪽 글씨 또한 거북이를 닮았다.
이들 삼귀자는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의 친형 지운영(地雲英, 1852~1935)
이 이곳에 소박하게 백련암(白蓮庵,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짓고 은거했을 때 쓴 것으로 지
석영이야 워낙 인지도가 높아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운영은 여기서 관세음보살 누님을 친견하는 꿈을 꾸고 너무 기뻐 새겼다고 하며, 삼귀자 이
웃 바위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그 소감을 밝혔다.

삼귀자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불기(佛紀) 2947년 경신중양 불
제자 지운영'이란 글씨가 있어 1920년에 그가 썼음을 귀띔해 준다. 그리고 옆 바위에는 시주
자 명단이 적힌 명문이 있다.


▲  거북귀(龜)의 화려한 변신, 삼귀자(3개의 거북귀) 바위글씨의 위엄
명필가는 이렇게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악필가는 살아있는 글씨마저
죽여버린다.

▲  삼귀자 안내문 뒷쪽 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바위글씨



 

♠  삼막사 마무리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①

삼막사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까지는 5~6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그만큼 외딴 곳에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까지는 돌로 길을 잘 닦아놓아 통행에 어려움은 없으며, 혹시나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연분홍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다.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②

▲  삼막사 남녀근석(남근석) - 경기도 지방민속문화재 3호

삼막사 경내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 칠성각 구역에 이르면 아주 재미있게 생긴 바위가 마
중을 한다. 바로 삼막사의 백미이자 이곳에서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근석(男根石)과 여근
석(女根石)이다.
이들은 2개의 바위로 남쪽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남근석이, 북쪽에는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여근석이 누워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특히나 여근
석은 그 부분과 너무 닮아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거시기하게 생긴 돌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른바 성기신앙(性器信仰)
의 대상으로 격하게 숭배를 받았다. 이 바위를 만지며 기원을 하면 아들 낳기와 출산에 효험
이 있다고 전해져 석가탄신일과 7월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특히 아줌마들)이 찾아온다.
남근석의 높이는 1.5m, 여근석은 1.1m로 삼막사는 이 바위를 매우 애지중지 다루고 있다. 여
자를 멀리해야 되는 절간에서 예민하게 생긴 바위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점이 참 이채롭기
까지 하는데, 이는 모두 절의 인지도와 수입을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는 그들
옆에 마애불을 세우고 칠성각을 세워 칠성신앙까지 어우러진 현장으로 만들었다.


▲  대자연 형님의 심술궂은 작품, 여근석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여근석의 위엄
앞이나 옆이 아닌 바로 위에서 보면 기가 막히게 실감이 난다. 마치 그 모습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느낌. 나는 쑥쓰러워서(?) 위에서 사진을 담지 않고
약간 옆에서 살짝(?) 담았다. 이거 좀 무안해서 말이지 ~~~!

▲  바위에 씌워진 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바위에 깃든 마애3존불의 거처로 1881년에 지어졌다. 바위와 마애불에 맞게 짓다 보
니 지붕이 2겹이 되어버렸는데, 마애불이 바라보는 서쪽에 문과 성인 키 정도의 계단을 내었
다. 전실(前室)처럼 자리한 건물 내부는 마치 석굴(石窟) 마냥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
생들이 달아놓은 조그만 인등(引燈)이 강인한 협동심을 드러내며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삼막사 마애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4호

칠성각에 담긴 마애3존불은 칠성(치성광여래)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
보살(月光菩薩)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존재를 칠성이라 한 것은 건물 이름이 바로 칠성각
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칠성각인데 엉뚱한 존재가 중심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연화좌(蓮花座)에 앉아있는데, 보관(寶冠)을 눌러쓴 양쪽 보살상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칠성은 두 손을 가부좌(跏趺坐)를 튼 무릎 위에 대고 보륜(寶輪)를 들고 있
다.
수인(手印)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부터 옷주름까지 진하게 남아있어
형태를 알아보는데 문제는 없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마애불 밑에는 고맙게도 '乾隆二十八年癸未八月日化主悟心'이란 명문이 있어 1763년 계미년 8
월에 화주(化主) 오심이 조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 땅에 칠성을 담은 그림(칠성탱, 칠
성도)은 많지만 이렇게 바위에 마애불로 새긴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조성 관련 명
문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 마애불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

마애3존불의 눈, 입, 귀, 눈썹이 매우 선명하나 코는 닳아져 형태만 남아있다. 이는 그 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그의 코를 마구 갈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성
기신앙의 현장이 옆에 있으니 그 현상은 심했으리라, 그렇게 중생들에게 코까지 떼였으니 마
애불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마애불이 누구를 위해 있는가? 바로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 중생을 위해 기꺼이 코 하나 내놓는 것은 그들의 임무이며, 코는 나중
에 새로 달아도 된다.


▲  칠성각을 뒤로하며



 

♠  삼성산 서남쪽 능선에 숨겨진 아주 늙은 무덤,
석수동 석실분(石室墳)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이렇게 삼막사를 고루고루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이제 고개가 아픈지 슬슬 지
평선 너머로 내려앉을 준비를 한다.
염불사(염불암)를 둘러보고 안양예술공원으로 내려갔는데,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삼
성산의 숨겨진 명소이자 은자(隱者)인 석수동 석실분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둘러보기로 했
다.

석수동 석실분은 안양예술공원 공영주차장 뒷쪽에 있는 석수동 마애종(磨崖鍾)을 기준으로 삼
아서 찾는 것이 편하다. 마애종에서 서쪽 길(예술공원로117번길)로 들어가면 막다른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예술공원로 117번길)로 접어들면 안양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쭉 올라가면 된다. 이곳은 옛날
에 광산이 있던 곳으로 마을의 밥줄이던 광산이 없어지면서 가옥 몇 채와 폐광의 흔적만 황량
하게 남아 늦은 시간에 오면 으시시함까지 느끼게 한다.

석실분을 알리는 이정표는 다행히 넉넉하게 닦여져 있어 길을 잃을만하면 나타나 길을 비춰준
다. 심지어 무덤 50m 전까지도 이정표가 있다. (석수동 마애종에서 도보 20분 거리)

▲  돌탑 위에 피어난 석실분 이정표

▲  석실분으로 인도하는 산길

▲  북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  동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 서남쪽 능선 30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국시대 무덤이다. 보통 고구려
무덤들은 흙무덤과 돌무덤(4세기 이후) 중심으로 주로 평지에 널려있고, 백제 무덤은 거의 흙
무덤 중심으로 바깥은 흙으로, 안은 돌로 돌방(석실)을 만든 구조인데, 대체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다. (백제 돌무덤도 석촌동고분군을 비롯해 일부 남아있음) 그리고 신라 무덤은 흙으로
다지고 안에 돌방을 넣은 형태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고, 가야는 특이하게 산자락이나 능선
을 주로 선호했다.

우리가 찾은 석수동 석실분은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가야 무덤이 아닐까 싶지만. 가야의 무덤
은 아니다. 가야(伽倻)의 영역은 경기도에 이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삼국시대 무덤
으로만 여겨질 뿐, 정확한 조성 시기와 무덤 주인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
으나 무덤 안에 석실을 다지고 윗도리에 흙으로 봉분(封墳)을 씌웠으며, 바깥과 석실(石室)을
잇는 연도(羨道)가 없는 횡혈식고분(橫穴式古墳)인 것으로 보아 6~7세기 이후 신라 무덤으로
여겨진다.
비록 봉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심술쟁이 자연의 손길,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의 검
은 마수로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지만 석실까지 갖춘 규모와 안양시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한 점으로 보아 안양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나 지방 세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이런 첩첩한 산능선에 무덤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양사 동쪽 산자락에도 늙은
고분이 1기 있다고 하며(이곳은 확인하지 못했음), 지형 조건을 통해 조그만 고분이 더 숨겨
져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나 아직까지 이 무덤을 포함하여 주변을 싹 뒤집지는 못했다.

무덤은 산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라 발견된
유물은 없다. 들리는 풍문에는 여기서 금관(金冠)과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는데, 진위 여
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높은 인물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흙으로 다진 봉분은 무참히 벗겨나가 흔적은 없으며, 석실과 석실 천정을 이루던 거대한 판석
(板石)이 대머리처럼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가 3.4~4.5m, 폭 1.5~1.7
m, 높이 85~100cm이며,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동/서/북벽을 쌓았고, 남쪽 벽은 커다란 판
석 1매로 축조했다. 그리고 3개의 넓다란 판석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가운데 판석이 파괴되어
무덤의 속살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연도가 생기기 이전 형태로 여겨지며,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흥군(始興郡)
35. <고분>,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여기서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
음)

▲  세상을 향해 입을 벌린 석실분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①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②

무덤 내부는 문화유적 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 안되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살짝 들어
가 볼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1.5m 정도로 깊고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 다리에 무리가
없도록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주인도 오래전에 떠나버린 무덤 내부는 상석(床石)처럼 놓인 돌을 빼고는 텅 비어 있다. 무덤
이라기보다는 임시 거처나 아지트 같은 기분이다. 소름이 끼치는 무덤의 속살이지만 이곳을
알리는 문화유산 안내문이 없고, 옛 고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게 무덤인지 군사시설인지,
숨겨진 아지트인지 헷갈릴만하다. 누가 이런 곳에 무덤을 쓸 것이라 생각을 하겠는가. 죽어서
도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 싶었던 옛날의 어느 부질없는 망족(望族, 귀족)의 욕심이 이 무덤을
탄생시켰고, 그 욕심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사람과 자연, 세월에 의해 여러 차례 털리고, 파
괴되는 비운을 맞으며 '내가 과연 무덤일까?' 이곳의 성격마저 크게 흔들어 놓았다.

햇살이 조금씩 내려앉은 석실 내부는 오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다. 학우봉과 삼
막사 방면으로 산길이 나있지만 다소 외진 숨겨진 곳이라 이곳을 지나는 산꾼의 수요는 별로
없으며 석실분 내부는 포근하고 비바람을 피하기에 좋아 간단한 먹거리나 손전등을 갖춘다면
염치불구하고 하룻밤 살짝 머물고 싶은 곳이다. 물론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그리해서는 안되
지만 정말 나만의 비밀 공간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간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바라본 천하, 안양시내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안양을 서쪽에서 감싸는 수리산이다.


무덤 밖에서 눈 아래로 펼쳐진 속세를 바라보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수리산과 삼성산 사
이에 둥지를 튼 안양시내를 바라보니 그곳이 나의 영지(領地)인양 거만한 착각에 마음이 잠시
즐거워진다. 무덤 주인도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노비와 백성들을 닥달하여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아닐까?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
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면 검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환상적인 야경
을 선보인다. 안양의 야경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안양예술공원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망해
암(望海庵)도 좋지만 석수동 석실분도 엄지를 강하게 치켜들며 추천하고 싶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  석수동 석실분에서 맞이한 일몰
이렇게 하여 삼성산, 삼막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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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2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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