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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개원사, 연무관)



' 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  남한산성 장경사

지수당

남한산성 연무관

▲  지수당

▲  연무관

 



 

차디찬 겨울 제국이 드디어 그 끝물을 보이던 3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광주(廣州) 남
한산성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3번씩이나 갈아탄 끝에 남한산성의 서쪽 입구의 하나
인 산성역(8호선)에 이르렀다. 이 역은 해발 100m 고지에 자리해 있어 신금호역(5호선
), 만덕역(부산3호선)만큼이나 장대한 깊이를 자랑한다. 하여 역을 빠져나오는데만 한
참이 걸린다.

어두컴컴한 지하를 벗어나 산성역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성남시
내버스 52번(성남동 대형주차장↔남한산성)을 잡아탔다. 산성역에서 남한산성 내부(산
성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9번과 9-1번, 52번, 53번이 있는데, 52번은 평일에만 바퀴를
굴리는 노선으로 남한산성 안으로 바로 들어가나 배차간격이 2시간 이상이라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리고 9번은 20분대 간격이나 성남시 양지동과 은행동 지역 강제투어가 심
하다.
9-1번은 52번처럼 남한산성으로 바로 들어가나 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하며,(배차간격
은 10~20분대) 53번도 휴일에만 운행하나 배차간격이 우울하다.

남한산성 나들이객과 산꾼을 가득 머금은 버스는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
불한 고갯길(남한산성로)을 지나 산성 남문<南門, 지화문(至和門)>을 통해 남한산성으
로 진입, 남한산성 종점인 산성로터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남한산성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산성로터리에서 남한산성로를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
도를 가면 남한산성 동문<東門, 좌익문(左翼門)>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장경사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남한산성 성곽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동문 서
쪽에 있는 포장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곽길이 조금은 지름길로 20분 정도 걸리나 경
사와 성곽길이 다소 거칠며, 포장길도 시작부터 각박한 경사로 진을 제대로 빼게 하나
장경사/망월사 갈림길 이후부터 점차 순해진다. (포장길은 25분 정도 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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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망월사로 인도하는 각박한 포장길

▲  망월사 입구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

▲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를 알리는 표석



 

♠  남한산성 10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은
조선 중기 산사(山寺),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5호

▲  장경사 숲길 (장경사/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 방향)

동문 서쪽 포장길을 6~7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장경사 표석과 망월사 표석이 서
로 자기네 절에 오라며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는데, 우선 구석에 자리한 장경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망월사에 들리기로 했다,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망월사, 오른쪽 길은 장경사로 이어
짐)

장경사 표석의 손을 들어주어 오른쪽 길로 향했지만 산길의 흥분은 여전하여 숨을 제대로 헐
떡이게 만든다. 다행히 한 굽이를 지나니 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으며 다소 순화되었고, 다
시금 1굽이를 크게 도니 동문에서 서로 떨어졌던 남한산성 성곽길이 바로 옆에 붙는다. 여기
서 잠시 나란히 이어지다가 곧 갈라져 제 갈 길을 간다. 어디로 가든 장경사로 이어지나 빠르
게 가고 싶다면 숲길(왼쪽)로 가면 된다. 성곽길은 절 주차장 남쪽으로 이어진다.


▲  장경사 곁을 흐르는 남한산성(사적 57호) 동쪽 성곽 (북쪽 방향)

▲  남한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한봉(漢峰, 418m)

한봉은 남한산성(청량산)을 지키는 동쪽 봉우리로 산성의 동쪽 가지 성(枝城)인 한봉성(漢峰
城)을 품고 있다. 이 성은 산성 동장대터와 벌봉(봉암성) 능선에서 한봉 정상까지 이어지며
지형이 각박해 수비에 용이하다.


▲  장경사 일주문(一柱門)

성곽길과 떨어지면 얼마 안가서 장경사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남한산 장경사' 현
판을 정면에 내밀며 절의 정체를 널리 드러내고 있는데, 다른 일주문과 달리 지붕과 현판이
달린 평방(平枋)의 높이가 너무 낮다. 그 문을 들어서면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장경사의 속살
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럼 여기서 잠시 장경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남한산성 내에서 제일 동쪽 구석 360m 고지에 자리한 장경사는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에 창
건되었다.
1624년 전국의 승려를 소환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했는데, 공사가 끝나자 그들을 제
자리로 보내지 않고 산성에 눌러앉게 하여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무를 맡겼다. 허나 그 시절
산성 안에는 망월사와 옥정사(玉井寺) 등 2개의 절 밖에는 없어서 수용 공간이 너무 딸렸다.
그러니 승려들의 불만과 원성은 대단했다. 하여 1638년에 장경사와 개원사,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남단사(南壇寺) 등 7개의 절을 새로 지어
이들을 수용했고, 그로 인해 남한산성에는 9개의 절이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중 장경사는 충
청도 출신 승려(승군)들이 머물렀다.
병자호란이 한참이던 1637년 1월 19일 청나라군이 동문 주변을 공격했는데 어영별장 이기축(
李起築)이 장경사 자리에 있다가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을 격퇴했다. 이에 인조가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가선(嘉善)의 품계를 더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했다.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을 찾아와 9개 사찰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모두 정리했는데, 그것들이
화약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8개의 절이 몽땅 파괴되었으나 장경사는 그나마 피해가 덜해 유일
하게 살아남았다. 하여 창건 당시의 모습과 가람 배치를 많이 유지하고 있으며, 1975년 화재
를 만나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심향각, 삼성각, 대방, 요사, 범종각, 무심당 등 8~9동 정도의 건
물이 있으며, 이중 대웅전은 19세기 건물이나 20세기 후반에 너무 변형을 주면서 고색의 향기
는 거의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강희21년명 동종이 있는데, 이 종은 오랫동안 삼성
동 봉은사(奉恩寺)에서 객지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 겨우 돌아왔다.

▲  검은 피부를 지닌 똥배 포대화상
그의 배를 어루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  경내를 가리고 앉은 무심당(無心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선방과 요사로 쓰이는 심향당(心香堂)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장경사는 남쪽을 제외하면 모두 산으로 막혀있다.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절이긴 하지만 가장 동쪽 외진 곳에 자리해 있고 숲에 완전 감싸인 곳이라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법당(法堂)인 대웅전 앞에는 뜨락이 있는데, 뜨락에는 1995년에 조성된 9층석탑이 파리도 미
끄러울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좌우에 심향당과 요사가 서로 마주보
고 있으며, 대웅전 맞은편에는 무심당이란 건물이 있는데, 예전 진남루(鎭南樓)로 근래에 지
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  장경사 현판을 내건 요사(寮舍)

▲  법당 뜨락에 세워진 9층사리탑


▲  장경사의 빛바랜 과거 (1958년 사진)
지금과 달리 뜨락이 좁고 동쪽 요사 건물과 대웅전이 많이 달랐음을 알려준다.

▲  장경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너무 변형을 많이 주어 옛 모습을 다소
잃었다. 1958년 사진과 비교하면 오히려 젊어진 느낌이랄까~~! 저 안에
이곳의 보물인 강희21년명 동종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살짝 미소를 던지고 있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들 뒤에는 붉은 색채의 후불탱이 있으며, 그 좌우로 조그만
원불(願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장관을 이룬다.

▲  강희(康熙) 21년명 장경사 동종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대웅전 안에는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동종이 있다. 그의 시커먼 피부에는 '강희 21년명~'
글씨가 있어 1682년 3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종이 작아 보여 거뜬히 들 수 있을
듯 싶지만 그의 무게는 300근(약 180kg)에 이르니 괜한 생각은 하지도 말자.

1907년 왜군이 장경사에서 무기를 압수하고 절을 파괴했는데 그때 동종까지 집어가 삼성동 봉
은사에 넘겨버렸다. 이후 봉은사에서 100년 이상 타향살이를 하다가 2013년 제자리로 돌아왔
으며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강제로 타지로 넘어간 문화유산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며, 그의 무사 귀환 덕분인지 2014년 6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의 지위를 얻
게 되었다. (종의 위치는 절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음)


▲  장경사 9층사리탑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많이도 닮은 9층사리탑은 19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그 이전에는 경내에 탑이란 존재가 없어서
무척 허전했었는데, 그를 장만함으로써 허전함이 많이 가셨다.

▲  티벳 불교 스타일로 지어진 동그란 경통(經筒)

경통이란 불경을 넣어두던 통으로 티벳 불교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경통을 티벳어로 '마니
차'라고 함)
우리의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으로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읽거나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
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밑에 닦여진 돌탑
돌탑 중앙에 일종의 감실(龕室)까지 갖추고 있어 마치 경주 첨성대(瞻星臺)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장경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2-1 (남한산성로 676 ☎ 031-743-6548)


▲  돌탑 감실을 장악한 조그만 존재들의 위엄
동자승과 돌하루방, 불상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이루었다.



 

♠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 망월사(望月寺)
- 망월사지(경기도 지방기념물 111호)

▲  가파른 곳에 세워진 망월사 일주문

장경사를 4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갈림길(망월사, 장경사 갈림길)로 나왔다. 이번에는 장경
사 때문에 미루어둔 망월사로 길을 잡았는데, 이곳 역시 각박한 경사를 내밀고 있어 숨을 또
헐떡이게 한다. 장경사는 어느 정도 길을 오르면 흥분을 가라앉지만 망월사는 경내 끝까지 가
파른 경사의 연속이라 속세에 은근히 까칠한 모습을 보인다.

장경사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420m 고지 가파른 곳에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망월사는 남한
산성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남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
이나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을 도읍으로 꾸밀 때, 서울에
있던 장의사(莊義寺)를 밀어버리고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華嚴經), 금
솥 등을 수습해 남한산에 망월사를 지었다고 한다.
허나 불교를 신봉하던 이성계가 도성을 닦을 자리에 있었다는 장의사를 밀어버렸다는 것도 그
리 신뢰가 가지 않으며, 서울 4대문 안에는 장의사란 절도 없었다. 다만 창의문(彰義門) 바깥
인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연산군(燕山君) 때 사라진 장의사가 있어(절터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음) 거기서 가져온 것을 봉안하려고 지었거나 기존에 있던 망월사에 옮겨놓고 장의사의 뒤
를 이었다는 식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처음 이름은 망월암이었다고 하며, 남한산성의 역사가 담긴 남한지(南漢誌)에는 남한산성 9개
사찰 중 가장 늙은 절로 나왔다. 또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는
망월사가 폐사(廢寺)터로 나와 18세기에 잠시 망한 것으로 보이며,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에
있는 절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강제 폐사되고 만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폐허의 절터에 중창불사를 일으켜 대웅보전(1994년)과 극락보전(1993년)
, 범종각(2003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을 갖추었으며, 특히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요사는
하나같이 규모가 장대하여 아직은 조촐한 절의 규모를 능히 커버하고도 남는다. 그 외에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13층 사리탑이 있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 자부하나 소장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돌로 쌓은 축대가
곳곳에 남아있고 늙은 대형 맷돌 1기가 전할 따름이다. 또한 절터라고 해봐야 그 위에 모두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우며, 극락보전 자리가 옛 망월사 법당이 있던
터이다. 현재 망월사는 망월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부도, 비석군에서 바라본 망월사 (극락보전과 13층석탑)

망월사는 경사진 곳에 자리해 있어 석축을 다지고 건물을 주렁주렁 지어 올렸다. 그래서 밑에
서 보면 자못 웅장해 보인다. 건물은 몇 채 안되지만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등이 한 덩치를 자
랑하니 더욱 그렇다.
절 뒷쪽은 남한산성 동장대(東將臺) 쪽이나 이어지는 산길은 없으며, 각박한 경사지라 이곳도
사실상 막다른 곳이다. 하여 절을 둘러봤으면 미련 없이 다시 왔던 길로 나가야 된다.

▲  수미당 본견의 부도탑과 망월사 복원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옛 법당터 자리에 우뚝 선 극락보전
(極樂寶殿) - 1993년에 지어졌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망월사 요사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
(아미타불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  1994년에 지어진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망월사의 자랑, 13층사리탑의 위엄

대웅보전 옆구리에 세워진 13층사리탑에는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
가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온갖 정성을 다해 지어올린 망월사의 야심작으로 밑도리 3층은
동그란 모습, 중간의 3층은 8각형, 나머지 윗층은 4각형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조각
수법도 매우 현란하며, 최근에 조성된 탓에 피부가 매끌매끌하다.


▲  경내에서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  바위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망월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의 보금자리인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이라 해서 번
듯한 기와집이 있는 것은 아니며, 원래 바위 밑에 그의 노천 거처를 마련했다가 석고를 이용
해 홍예 모양의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봉안했다.
흑백 피부의 산신은 역시나 같은 피부색인 호랑이 등에 앉아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그
옆에 색이 입혀진 별도의 산신상이 따로 있어 특이하게 2개의 산신상을 간직하고 있다. 허나
덩치 면에서 흑백 산신이 훨씬 우위를 점하며 정면에 앉아있고, 그에게 밀려난 칼라 산신은
뒷전에 있으니 산신 세계도 속세처럼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다.

산신각 뒤에는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와 벼랑들이 포진해 있어 절이 있기 전에도 기도처나 민
간신앙의 애듯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망월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4 (남한산성로 680, ☎ 031-747-3312)
* 망월사 홈페이지는 위의 산신각 사진을 클릭한다.



 

♠  지수당과 연무관

▲  지수당(池水堂)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4호

망월사를 둘러보고 다시 동문으로 내려와 지수당으로 이동했다. 남한산성의 조그만 꽃이라 할
수 있는 지수당은 1672년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지었다.
이곳은 연못 3개와 지수당, 관어정 등 정자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중심인 지수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정자(亭子)로 연못을 바라보며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사방이
뻥 뚫려 있다. 허나 20세기 이후 연못 하나는 쥐도새도 모르게 매몰되었고, 관어정 또한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  지수당 느티나무 (추정 나이 250년, 높이 25m, 둘레 3.5m)

지수당 동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근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시름시름 앓던 것을 경기
도와 LG상록재단에서 외과수술을 벌이고 그의 삶터 확보를 위해 울타리를 치면서 생육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는데, 이후 예전처럼 왕년의 모습을 보이며 지수당에 시원한 그늘을 베푼다.

▲  옆에서 바라본 지수당과 연못

▲  연못 너머에서 바라본 지수당

지수당 동쪽 연못은 지수당을 중심으로 하여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지수당이 있는 대
지가 연못의 중심부로 크게 튀어나와 있어 3면에서 연못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연못 테두
리를 돌로 정연하게 다져 안정감을 주었다.


▲  동그란 섬을 띄워놓은 지수당 서쪽 연못

지수당 서쪽 연못은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연못 복판에는 동그란 섬을 두둥실 띄워 풍치
를 돋구고 있으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상징하
는 것 같다.
맨물을 드러낸 동쪽 연못과 달리 겨울 제국이 씌워놓은 두꺼운 봉인(얼음)이 입혀져 있어 봄
이 코앞에 이르렀음에도 아직까지도 겨울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연못 섬은 남한산성
의 유일한 섬으로 소나무들이 바깥 세상의 간섭을 거부하며 그들만의 작은 세상을 일구고 있
다.

지금은 자연의 공간이 되었지만 섬 중앙에는 1804년에 지어진 관어정(觀魚亭)이 있었다. 생전
의 모습을 남기지 못해 생김새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네모난 정자로 여겨지며, 지수당과 마
주보면서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었다. 바깥에서 섬까지는 다리를 놓지 않고 조그만 배를 이용
해 섬을 오갔으며, 관어정이란 이름은 중원대륙(서토)의 개허접 소설인 삼국지에 지겹도록 나
오는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못에 임(臨)하여 방책을 결정하며 적을 헤아렸다는 고사
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섬으로의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며, 연못 바깥에서 그림의 떡처럼 바라봐야 된다. 허나
바깥에서도 섬 내부가 훤히 보이니 굳이 깊은 연못을 무릅쓰면서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다.

* 지수당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24-1


▲  지수당 서쪽 연못과 관어정터를 품은 동그란 섬
섬 중앙에 관어정이 자리하여 동쪽에 있는 지수당을 바라보았다.

▲  연무관(演武館) - 보물 2,154호

지수당에서 산성로터리 방면으로 4~5분 가면 오른쪽 언덕(남한산초교 동쪽)에 기와집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남한산성 군사훈련장으로 살았던 연무관이다.
연무관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보기만 해도 시
원스런 팔작지붕을 날개처럼 펄럭이고 있다. 군사 훈련장이라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로 남쪽
(앞면)은 뻥 뚫려있어 군사 훈련을 지휘하거나 감독하기에 좋다. 나머지 3면은 문이 달린 벽
으로 막혀있으나 건물 뒷쪽은 화살을 쏘거나 창검술을 익히던 곳이었으며 서쪽에는 이아(貳衙
)가 있었다.

이 건물은 1624년 남한산성을 손질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연무당(演武堂)
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숙종 시절에 수어사(守禦使) 김재호(金在好)가 건물을 수리하자 숙종
임금이 연병관(練兵冠)이란 편액을 내리면서 연병관 또는 연무관으로 이름이 갈렸다. 정조 때
는 수어영(守禦營)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나 이후로도 쭉 연병관, 연무관으로 불려왔다.
장수와 군사들이 몸을 풀던 훈련장이지만 가끔씩 무과(武科)나 문과(文科)가 열리기도 했으며,
여기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무기 시연과 주조, 야조 등의 군사
훈련도 이루어졌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은 여러 번의 보
수공사로 지금처럼 뚫린 형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연무관은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
었다.

▲  연무관 현판의 위엄
1762년에 쓰인 현판으로 글씨들이 마치
군사들이 몸을 푸는 모습 같다.

▲  연무관의 뒷모습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으로
지금은 무늬만 남아있다.


▲  주춧돌만 일부 남은 이아(貳衙)터

연무관 옆에는 이아 또는 제승헌(制勝軒)이라 불리던 관청이 있었다. 1748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아에 있던 작청(作廳)은 중간 관리층인 이방과 아전들이 남한산성과 광주부(廣州府)
관내의 행정 업무를 보던 곳이다.
관리와 민원을 넣는 백성들로 시끌시끌했을 이아는 장대한 세월(왜정 때 없어진 것으로 여겨
짐)에 녹아 없어지고 겨우 터만 희미하게 남아있으며, 그 터의 상당수는 농경지로 쓰이고 있
어 옛 기억 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  봄을 향한 몸부림, 연무관 느티나무 - 광주시 보호수 13호, 14호

연무관 밑에는 5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애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중 광주시 보호수 13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1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470년),
높이 23m, 둘레 7m이며, 광주시 보호수 14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5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510년), 높이 24m, 둘레는 8.9m에 달한다.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월을 무한리필로 씹어먹어 이렇게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는데,
이들도 한때 건강의 적신호가 켜졌던 것을 2008년 LG상록재단의 보살핌으로 생육환경 개선사
업을 받아 예전의 생기를 되찾았다.
3월도 왔으니 빨리 잎을 피워야 되겠지만 겨울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앙상한
가지만이 가득하다.

* 연무관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400-1



 

♠  한때 남한산성의 중심 사찰이었던 개원사(開元寺)
- 개원사터(경기도 지방기념물 119호)

▲  개원사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

연무관에서 다시 지수당 쪽으로 가다가 지수당 못미쳐에서 남쪽 길로 빠지면 개원사로 인도하
는 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랄까? 온갖 음식 냄새로 사람들의 후각을 희롱하는 식당
들을 지나면 높은 키의 개원사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청량산(淸凉山) 개원사 조계문'이라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밀고 있어 이곳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조계문은 일주문의
이름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남옹성(南甕城)으로 유혹하는 산길이 나오고, 곧이어 문짝이 달린 커다
란 문이 길을 막는다. 그 문은 천왕문으로 이 땅에 흔한 천왕문의 모습이 아닌 여닫는 문짝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짝에 사천왕(四天王)을 그려 넣어 그런데로 천왕문의 기능을 수행한다.
허나 방패 같은 그 문짝은 차량 통행이나 석가탄신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열리며, 보통은
오른쪽 문짝에 조그맣게 달린 출입문으로 오가면 된다. (보통 18시까지만 열어둠)


▲  큰 문짝으로 이루어진 개원사 천왕문(天王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속세의 기운을 막고자 저렇게 문을 지은 모양이다.

▲  개원사 사적비(事蹟碑)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구석에서 홀로 오후 햇살을 즐기는
조선 후기 석종형 부도(石鐘形 浮屠)

▲  승장조사전(僧將祖師殿)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병자호란 때 산성을
지켰던 벽암대사의 사당이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조그만 연못
절 주변 나무들이 연못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옆에 절의 내력을 담은 사적비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
덕비 등 비석 3기가 때깔 고운 모습으로 나란히 환영을 해준다. 그들을 지나면 왼쪽 숲에 홀
로 자리한 맞배지붕 건물이 홀로 보일 것인데, 그 건물은 승장조사전으로 1624년에 승려들을
독려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승려의 거처 해결을 위해 산성 안에 여러 절을 지었으며, 병자호
란 때 성을 지켰던 벽암대사(碧巖大師)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 이렇게 조사전을 둔 것을 개원사가 조선 후기에 전국 승병을 지휘하던 곳이었기 때문
이다. 지금 건물은 근래 지어진 것으로 절이 비록 뒷전으로 물러나 초야에 묻힌 신세나 다름
이 없지만 한때는 천하 승병을 주름잡고 지휘하던 왕년의 영광을 고스란히 추억하고 있다.

경내 앞에 이르니 개원사 안내문과 돌에 새겨진 2기의 석불입상이 마중을 하고 그 뒤로 개원
사 건물들이 모습을 비춘다.


▲  경내 앞에 자리한 석불입상과 개원사 안내문

앞서 장경사가 남한산성의 가장 동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면, 개원사는 가장 남쪽 구석에 자리
해 있다. 그러니까 남한산성 성내(城內)를 동에서 남으로 바쁘게 가로지른 셈이 된다.

1624년 남한산성을 보수하려고 전국의 승려들을 징발했는데, 그들에게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
무까지 떠맡기면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1638년에 7개의 절이 새로 지어졌다. 기존에 있는 2개
의 절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원사는 바로 그 7개 절의 하나로 으뜸을 연다는 절의
이름처럼 1894년까지 남한산성 본영(本營) 사찰 및 조선 승병의 총지휘소로 위엄을 떨쳤다.
그리고 전국 사찰의 승풍(僧風)을 감찰하는 규정소(糾正所)의 역할까지 도맡으면서 조선 불교
의 중심격 사찰로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되자 승병의 총지휘소, 규정
소의 감투를 강제로 내려놓게 되었으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왜군이 남한산성 사찰의 무기
고를 강제로 정리했을 때 개원사에 보관 중이던 화약을 처리하다가 미련하게도 절을 홀라당
태워먹어 졸지에 망하고 말았다. 허나 그것들이 실수가 아닌 고의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쓰러진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1970년에 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1동을 제외하
고 몽땅 태워먹었다. 이후 선효화상(禪曉和尙)이 신도들과 함께 10여 년 간 불사(佛事)를 일
으켜 대각전과 요사, 범종루 등 건물 다수를 다시 세웠다.

숲에 감싸인 경내에는 법당인 대각전을 비롯해 불유각, 범종루, 승장조사전,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2차례에 걸친 대화재로 절의 장대한 역사와 유물이 죄다 흩어져 지금은 승군
들이 사용했던 유분(鍮盆) 1점과 석장(石杖). 옹기, 함지를 비롯해 석종형 부도, 조선 후기
것으로 보이는 불유각 석불입상, 조선 중기 것으로 보이는 화현전 석불좌상 등이 있다, 그리
고 군기고터와 누각터, 종각터 등의 건물터와 돌계단, 박석 등 옛 흔적이 남아 개원사의 왕년
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또한 지금은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남한산성 사찰 중, 유일하게 대장경(大藏經)을 지닌 절로
1638년 이후부터 쭉 보관되어 왔다. 그 대장경을 실은 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서호(西湖)
에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배 위에 '중원개원사간(中原開元寺刊)'이라 쓰인 책함만 있는지라
그 말을 들은 소심한 인조(仁祖)는 전국에 개원사란 절을 찾아 봉안하도록 지시했다.
허나 그 이름을 지닌 절이 오로지 남한산 개원사가 전부라 거기에 봉안했다는 거짓말 같은 전
설이 덧붙여 전해온다. 그 대장경은 금란보 10벌에 싸서 애지중지 보관했으나 1970년 화재로
모두 날라가버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만약 살아남았다면 아무리 못해도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누렸을텐데 말이다.

현재 개원사는 개원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절 건물이 버젓이 있
는데도 터를 붙인 것은 대화재로 건물이 몽땅 날라가 새로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앞서
망월사도 마찬가지이다.

* 개원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98-5 (남한산성로 731-73, ☎ 031-743-
  6568)


▲  청기와를 두룬 대각전(大覺殿)
개원사의 법당으로 그 흔한 대웅전이 아닌 크게 깨닫는다는 뜻의
대각전을 칭하고 있다.
 

▲  불유각(佛乳閣)과 화현전(化現殿)

보통 불유각이라 하면 우물이나 샘터가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그런 것은 없고 조선 후기 것으
로 여겨지는 석불입상이 있다.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넉넉한 표정과 온화
한 미소를 머금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중생들을 위로한다.


▲  불유각의 주인, 석불입상
피부에 검은 때가 많이 낀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늦어도 구한말
석불로 여겨진다. (확실한 정보는 없음)

▲  화현전에 봉안된 누런 피부의 석불좌상
돌에 마치 현신한 듯 진하게 자리한 석불로 조선 중기 석불로 여겨진다. 그 역시
자세한 정보는 없으며,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름도 참 생소한 화현전은 누런 피부를 지닌 늙은 석불좌상과 산신탱, 독성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석불좌상 뒤에는 색채가 곱게 입혀진 목조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중생들이 올
린 쌀과 과일, 과자 등의 음식 제물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무 조각에 색을 입힌 독성탱

▲  대각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

▲  2층 범종루

개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턱 밑에 이르렀다. 마침 아줌마 신도가 나오
더니 곧 문닫을 시간이라고 그런다. 다시는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둘러본 상태라
물론 승군이 사용했다는 조선 후기 유물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런 조그만 것들은 보기도 힘
든 존재들이니 애시당초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렇게 개원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산성리로 나와 산성로터리 서쪽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을 구경했다. 낮이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18시부터는 어두운 기운이 적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지라 더 이상의 사진 촬영은 어려웠다. (찍어봐야 다 흐리게 나오니)
인근에 자리한 침괘정(枕戈亭)이 잠시 들렸다 가라며 꼬리를 치지만 몸도 좀 지친 상태라 남
한산성과의 그날 인연을 쿨하게 정리하고 성남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남한산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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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3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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