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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운수암 (무한성)



' 한여름 산사 나들이 ~ 안성 운수암 '
운수암 대방
▲  운수암 대방
 



 

여름 제국(帝國)이 정점에 치닫던 8월의 첫 무렵, 안성(安城) 운수암을 찾았다. 수도권에
서 당일 답사로 간단히 몸을 풀 곳을 물색하다가 운수암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
았는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쉬엄쉬
엄 이동해 15시에 안성 서북부에 자리한 양성(안성시 양성면)에 이르렀다.

양성까지는 환승할인 시간에 맞게 무탈하게 이동했으나 여기서 공도(孔道)로 가는 시내버
스가 출발시간보다 5분 일찍 도망치면서 환승 리듬이 그만 깨져버렸다. 다음 버스는 거의
50분 뒤에나 있는 상태. 여름 제국의 무더위 핍박이 극에 달한 상태에 환승할인까지 날라
갔으니 정말로 복창이 터질 판이다.
허나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어서 별수 없이 50분을 강제로 기다려 공도읍으
로 가는 안성시내버스 7번(안성터미널↔원곡)에 탑승, 10분을 더 달려 운수암입구인 방신
1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운수암 입문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①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②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③

방신1리에서 운수암까지는 25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그늘도 거의 없는 길
을 10분 정도 가면 숲이 나타나면서 길도 그늘길로 변신하는데, 그늘이 짙게 깔려 무더위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며, 땀이 조금씩 나긴 해도 선선한 산바람 앞에 이내 산산히 사라진다.

길은 처음에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운수암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해진다. 밑골고개
를 넘으면 주차장이 나오며, 여기서 더 오르면 그늘에 묻힌 쉼터와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
에서 대자연이 베푼 샘물을 여러 번 떠마시며 더위와 갈증을 삼키고 길을 마저 걸으면 고갯길
의 끝에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하는데, 그 느티나무에 이르면 백운산 정상부에 자리한 운수
암이 말끔히 모습을 드러낸다.


▲  운수암 느티나무
약 1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높은 키와 큰 덩치에 걸맞게 운수암 경내에
넓게 그늘을 드리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아직 그 흔한 시/군 보호수 등급도 얻지 못한 야인의 신세이다.

▲  승탑(僧塔)을 가장한 석물
느티나무 부근 수풀 속에 승탑(부도탑) 1기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영락없는 승탑이지만 현실은 경내에 흩어진
석재를 모아서 승탑 형식으로 수습한 것이다.

▲  느티나무 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뿌연 연기를 내뿜은 소독차가 방금 다녀가 연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소독차 연기만 보면 뭐가 그리 좋은지 열심히
달려 쫓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고성산(高城山, 298m)의 남쪽 봉우리인 백운산 숲속 180m 고지에 포근히 터를 다진 운수암은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 1750년에 장씨 보살(菩薩)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의
법명(法名)은 반야명(般若明)으로 근처에 살던 청상과부였는데, 남은 여생을 부처를 봉안하며
살고자 가산을 털어서 무한성(무양성) 밖에 절을 세우려고 했다.
절을 막 짓던 날 밤, 노승(또는 부처)이 꿈에 나타나 '무한성 안에 숲이 넘어진 곳이 있으니
거기에 지으시오'
현몽했다. 그래서 다음날 성 안에 들어가 살펴보니 과연 숲이 넘어진 곳이
있어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한 여인에 의해 창건된 운수암은 고종(高宗) 시절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과의 인연 덕분에 크게 덕을 본다. 그의 지원으로 중건을 한 것이다. 이때 대방을
세우고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했는데, 이곳이 어찌 대원군과 인연을 지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그가 내린 '운수암' 현판이 대방에 있다.
1873년에는 아미타회상도(현재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음)를 제작했는데, 앞서 칠성탱 등
과 함께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어 왕실과 대원군 일가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은 불교에도 관심이 지대해 서울 화계사(華溪寺)
와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등 서울 근교의 여러 절을 오가며 온갖 지원을 아
끼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비로전(처음에는 대웅전)을 지었고, 이후 쇠락하여 무너지기 직전인 것을 현암
(玄岩)이 1980년대부터 불사를 벌여 1986년에 대웅전(대웅보전)을 지었으며,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1996년에는 광음선원(光音禪院)을 세우고 1997년 범종각을 두었으
며, 이후에 3층석탑을 세워 경내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암자(庵子)란 이름에 걸맞게 매우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비로전, 대방, 삼성각, 광음선
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해 대
방과 비로전 등이 있으며, 운수암 자체는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조성된 아미타회상도와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 성보
박물관에 가 있다.

거의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숲이 무성하여 절을 둘러싼 기운도 청정하며, 경관이 좋고 약
소하긴 하지만 동남쪽으로 약간 전망이 트여 있다. 안성과 평택 지역의 명소로 등산과 나들이
수요가 많으며, 경내까지 포장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편히 접근도 가능하다.

* 운수암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85 (성하길 80-63 ☎ 031-673-7372)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  운수암 둘러보기

▲  대웅보전 뜨락에 세워진 6면3층석탑

운수암 경내로 들어서면 대방과 3층석탑을 시작으로 광음선원과 대웅보전 등이 차례대로 마중
을 한다.
대웅전 뜨락 중앙에 자리한 3층석탑은 1990년대 후반에 마련한 것이다. 1990년대면 지금과도
꽤 가까운 시절인데, 벌써부터 기록이 누락되거나 기억이 상실되어 막연히 1990년대 말에 세
웠다고 그런다.

수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이 탑은 특이하게 6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6면3층석탑
이라 부른다. 그가 있기 전에는 절에서 그 흔한 탑도 하나 없었는데, 탑을 아주 우람하게 세
워 그 허전함을 크게 달랠 수 있게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밑에서부터 2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 상륜(相輪)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아직은 어린 탑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고 반질반질하다. 윗층 탑신에는 6마리의 석사자
를 배치해 탑신을 받쳐들며, 그 안에는 사천왕(四天王)과 관세음보살을 두었다.


▲  6면3층석탑 윗층 기단의 사자석과 사천왕상

◀  대방과 마주보는 광음선원(光音禪院)
1996년에 지어진 것으로 요사(寮舍) 및 선방
(禪房)으로 살아가고 있다.

        ◀  운수암 대웅보전(大雄寶殿)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6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가 세워짐으
로써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현판을 갈았
다.


▲  운수암 석가여래좌상과 닫집

대웅보전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고, 그 뒷쪽에 삼신후불탱을 두었다. 그들 위에
는 붉은 피부의 닫집이 있는데, 1층은 적멸궁(寂滅宮), 2층은 법왕궁(法王宮), 3층은 내원궁(
內院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극락조(極樂鳥)와 구름 등 갖은 조각을 두어 장엄함을 더했
다.

불단 좌우에는 11면관세음보살입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을 봉안했는데, 이들은 2001년에 조성
된 것으로 그 주변에는 삼장탱(三藏幀)과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 있다.


▲  운수암 대방(大房)

대웅보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양반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
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26칸 규모로 위에서 보면 'H' 모양이며, 예전에
는 법당의 역할도 겸했다. 대방은 보통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숙식/예불 편의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던 서울 근교 사찰의 필수 건물이었다. 이곳도 흥선대원군과 인연이
깊어 이렇게 대방을 마련했는데, 절이 서울과 멀어서 상류층 손님의 왕래가 적었다. 하여 평
시에는 운수암 승려와 신도들도 예불/숙식 장소로 사용했다.

비로전이 생기면서 법당의 짐은 덜게 되었으며, 지금은 요사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
할을 하고 있다. 종무소는 건물 앞부분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
는 구조이며, 공양간은 서측에, 요사는 북측에 자리한다. 근래에 북측에 지붕을 덧붙여 내부
가 좀 넓어졌다.
정면 어칸에는 흥선대원군이 내린 '운수암' 현판이 있어 그와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며, 가
로 184cm, 세로 52cm 크기로 하얀 바탕에 푸른색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체는 예서(隸書)로 3
개의 낙관이 뚜렷하다.


▲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대방 (정면에 보이는 문이 공양간임)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방의 뒷모습

▲  흥선대원군이 쓴 푸른색 운수암 현판의 위엄
'庵'자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생기가 감돈다.

▲  비로전(왼쪽)과 삼성각(윗쪽)

▲  운수암 비로전(毘盧殿)

대웅보전 옆구리에는 비로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2번째로 늙은 건물인데, 건축 양식과 내부에 있었던 칠성탱과 산신탱이 1870년에 조성된 것으
로 보아 19세기 후반(1870년 또는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대웅전의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에 불단에 봉안된 석불(비로자나불)이 마모가 심
하고 깨진 부분이 많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1986년에 대웅보전이 신축되자 땅속에 파묻
은 석불을 다시 꺼내 이곳에 봉안하고 건물 이름을 비로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1986년
이면 40년도 채 되지 않는 지척의 시절임에도 이곳은 기록을 너무 남기지 않아 혼돈을 유발한
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뒤에는 아미타회상도(아미타후
불탱)이 있으나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고 그 모조품이 대신 한다. 그 외에 현왕탱
과 신중탱이 걸려있고, 절을 세운 장씨 보살의 진영(眞影)이 걸려 있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비로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때 석불(石佛)로 왜정 말기에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
고 전한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자 옛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높이 107cm, 어깨 폭 82cm인데, 파
손된 부분이 많아서 1980년대에 땅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6년에 다시 꺼내 비
로전의 주인으로 삼았으며, 불상의 피부와 옷이 온통 하얀 것은 땅속에 묻힌 흔적과 이전에
파손된 부분을 커버하고자 백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나 좀 고색의 때가 감돌지
나머지는 고색의 기운도 거의 잠들었다.
그는 1986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 향토유적 16호의 지위를 얻었으나 2006년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로 지위가 높아졌으며, 연꽃과 구름 무늬가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까지 갖추고 있
다.

불상의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백분과 검
은색이 뒤섞여 고단해 보이는 얼굴은 통통한데, 눈과 코, 입, 귀가 선명하며, 귀는 목까지 늘
어져 중생의 소리를 경청한다. 목은 두껍고 삼도(三道)가 있었으나 훼손되었으며,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었다.
두 손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오른쪽 발을 올
려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정강이 부분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리한 부분이 많지만
조각솜씨는 괜찮은 편이며,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형태를 통해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진다.

석불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제작된 것이다. 허
나 이 그림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으며, 그림 화기(畵記)에는 왕과
왕비의 만수세(萬壽歲)를 기원하는 글과 대원군 일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의 시주자 명
단이 있어 운수암도 왕실 원찰(願刹)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화기에는 '高聖山 雲峀庵'이라 쓰여있어 이름은 같지만 지금과 한자(漢字)가 1글자씩 달랐음
을 보여주며,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大明 崇禎紀元後 五癸酉閏六月二十八日(대명 숭정기원후
오계유윤육월이십팔일) ~~'이라 쓰여 있어 오래전에 망한 명나라에 대한 쓸데없는 사대주의와
그리움이 여전했음을 보여주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현왕탱(現王幀)과 창건주 장씨 보살의 진영(오른쪽)

비로전 불단 옆에는 명부(冥府, 저승)의 왕인 현왕(現王)을 담은 현왕탱과 창건주 장씨 보살
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창건주의 진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으며, 그림 상단
측면에 '伽藍刱建大化主 淸信女 般若明 張氏 眞影(가람창건대화주 청신녀 반야명 장씨 진영)'
이라 쓰여 있고, 그 앞에 단을 마련해 창건주를 기린다.

▲  비로전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칠성탱

▲  삼성각 독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삼성각이 있기 전에는 비로전에 얹혀 살았
는데, 이곳에 있던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은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
로 진품은 모두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복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그림이 꽤
선명도가 진하고 세월의 주름이 전혀 없다.



 

♠  무양성<舞陽城. 무한성(無限城)> - 안성시 향토유적 2호

▲  무한성의 북쪽 부분

조촐한 규모의 운수암을 둘러보고 절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성(무양성)을 1바퀴 돌았다. 무한
성은 무한하다는 뜻의 성으로 성의 역사는 무한해도 규모는 그리 무한하지 못하다.
고성산 남쪽 산정(山頂)에 둥글게 닦여진 둘레 약 120m, 높이 2~4m에 조그만 퇴뫼식 산성으로
무양성(無陽城), 무양산성(舞陽山城), 무란성(舞鸞城)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무란성이란
이름은 힘이 장사인 '무란'이란 여인네가 쌓았다고 해서, 그리고 무양성은 '무양'이 운수암을
지키려는 용도로 축성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고성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에 양성현(안성시 양성면)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 1,305척, 성 안에 못이 하
나 있다는 기록이 있고, 1899년에 제작된 양성읍지(陽城邑誌)에 '무한성 남단 아래 고성(古城
)이 있어 옛 고을터가 완연하다'
는 내용이 있다.
성 내부에는 건물터와 많은 기와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을 통해 막연히 삼국시대(백제 또
는 신라)에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증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  무한성에서 바라본 운수암

▲  무한성 서쪽 부분

무한성(무양산성)은 오랫동안 버려진 성이라 속세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해 왕년의 위엄은
자연과 세월의 집요한 시비 앞에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남벽과 동벽, 내성벽,
성문터 등이 일부 남아있을 뿐인데, 아무리 옛 사람들이 철옹성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대자연
과 세월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름 제국의 뜨거운 햇살을 굴복시킬 정도로 나무와 수풀에 제대로 치여 성곽의 모습은 흐트
러졌지만 다행히 산성의 윤곽이 잘 남아있고, 성곽을 이루던 성돌도 여럿 남아있어 무한성의
존재감을 그런데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성이 들어앉은 지형은 대체로 경사가 각박해 성은 작지
만 요새지로는 아주 그만이다. 이곳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삼국시대에 조
성된 것이 맞다면 자기 밥값은 충분히 했을 것이며, 18세기에 운수암이 성내에 들어앉으면서
운수암을 지키는 소소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무양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산42


▲  무한성 서남쪽 부분

▲  숲길 같은 무한성 남쪽 부분

▲  경사가 각박한 무한성 남쪽 부분

▲  성문터로 여겨지는 부분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안성 공도읍 지역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독정저수지와 안성 원곡면 지역

▲  운수암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

무한성(무양산성)을 1바퀴 도니 다시 운수암이다. 무한성 성곽길은 운수암에서 시작해서 운수
암에서 끝나는 순환형 산길인 것이다.

다시 찾은 운수암에서 대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금까지 고생한 두 다리를 어루만지며 땀을
씻었다. 솔솔 불어오는 고성산 산바람이 땀을 앗아가면서 몸도 좀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산중에 묻힌 이곳에 며칠 신세를 지고 싶지만 그럴만한 처지도 되지 못해 쿨하게 작별을 고하
며 운수암을 나온다. 올라올 때는 무더위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려갈 때는 내리막과 초저녁 기
운의 탄력을 받아 금세 운수암입구 방신1리 정류장에 이른다.

여기서 공도와 평택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햇으나 그러면 너무 돌아가는 것이 되
어 다시 양성으로 나왔다. 다행히 버스가 10분 만에 와서 무난히 양성까지 왔으나 용인으로
가는 용인시내버스 22-1번이 무려 40여 분 만에 오면서 다시금 환승할인이 깨져 가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비운을 겪었다. 어떻게 같은 곳에서 2번 연속 그런 고통이 생기는 것인지 여기가
그만큼 벽지 비슷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안성 운수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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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8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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