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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최영장군묘
▲  최영장군묘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고양시 대자동(大慈洞)을 찾았다.

서울에서 파주, 개성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대자동은 조선 태종의 4째
아들인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대자사(大慈寺)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전원(田
園) 분위기 가득한 이곳에는 나를 여기로 부른 최영장군묘를 비롯하여 성녕대군묘와 온녕군
묘, 경안군묘, 임창군묘 등 늙은 무덤이 즐비해 무덤 답사의 숨겨진 성지(聖地)로 꼽힌다.


▲  겨울잠에 잠긴 대자동 들판



 

♠  고려의 마지막 보루, 풀이 자라지 않는 무덤으로 유명했던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23호

▲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양로(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를 비롯한 대자동 지역의 무덤 답사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필리핀참전비
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3,6호선 불광역과 연신내역, 3호선 구파발역, 3호선 삼송역에서
벽제, 내유동, 금촌, 문산 방향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이용>
필리핀참전비 동쪽에는 대자동 안쪽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대양로)이 있는데, 고양동과 중부
대학교 고양캠퍼스로 이어지는 길로 단풍나무가 길게 가로수를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 오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특히 고양시(高陽市)가 닦은 지역 둘레길인 '고양누리길'의 '고양
동누리길(필리핀참전비~만장고개, 7.56km)'이 이 길을 거쳐 최영장군묘와 대자산으로 흘러가
며, 최영장군묘와 성녕대군묘, 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 대자산 등의 여러 명소를 끼고 있어
볼거리도 풍부하다.

대자동 산하에는 최영장군묘역을 비롯해 성녕대군과 경혜공주, 경안군, 이성군(利城君), 온녕
군(溫寧君), 임창군 등의 조선 왕족들, 김홍집(金弘集)과 김주신(金柱臣) 등의 조선 후기 인
물 등, 오래된 무덤이 즐비하다.
이곳에 이토록 옛 사람들의 무덤이 많은 것은 고려 후기 이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
했던 탓이다. 처음에 최원직(최영의 부친)이 이곳에 묻혔고, 그 다음 최영장군이,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성녕대군이 최영장군묘 밑에 둥지를 틀기 시작해 많은 왕족과 사대부들이 대자동
산천에 비빌 구석을 마련했다. 이렇게 한 동네에서 고려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무덤을 만날 수 있어 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그만이다.

필리핀참전비에서 1km 정도 들어가면 대자동회전교차로(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무민로
로 들어서(오른쪽으로 가면 고양동) 3분 정도 가면 대자동 마을회관인데, 여기서 오른쪽 성녕
길로 7분 정도 들어가면 농가와 주차장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자
산 숲길이 활짝 마중을 한다.


▲  최영장군묘, 대자산 입구 (고양동누리길)

대자산(大慈山)은 고양시 대자동과 고양동(高陽洞)에 걸쳐있는 해발 210m의 나지막한 뫼이다.
최영장군과 성녕대군, 경안군 묘역을 품고 있는데, 최영장군묘 밑에서 대자산 정상부를 찍고
고양향교까지 2.5km의 숲길이 달달하게 펼쳐져 있으며, 고양동누리길이 이곳의 신세를 진다.
그 길을 7~8분 정도 들어가면 최영장군묘 안내문과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모습을 비춘다.


▲  겨울에 잠긴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대자산 남쪽 자락에는 고려의 마지막 보루였던 최영장군 묘역이 포근히 자리해 있다. 묘역에
는 2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쪽에는 그의 아버지인 최원직(崔元直)묘가 있으며, 그 밑에 최영
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묘(合葬墓)가 자리잡고 있다.

최영(崔瑩, 1316~1388)은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동주최씨 집안
으로 동주(東州,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낸 최원직,
어머니는 지씨이다. 그리고 그의 5대조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유청(崔惟淸, 1095~1174)
이다.

최영은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과 무예가 뛰어났으며, 윤관
(尹瓘)장군처럼 병서(兵書)를 늘 옆에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조언을 받고 그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여 재물과는 담을 쌓고 살
았으며, 조선 초기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하고 강직하여 백
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  누렇게 시든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 안내문 직전)

청년 시절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 있으면서 왜구와의 싸움에서 많은 전공
을 세웠는데, 생포한 왜구가 꽤 되었다. 하여 그 공으로 우다치(亏達赤)에 임명되었다.

1352년 공민왕(恭愍王)의 측근이던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우(安祐), 최원(崔源
)과 함께 이를 때려잡아 크게 존재를 드러냈다. 그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었으며, 1354
년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그해 중원대륙<서토(西土)>에서 홍건적(紅巾賊)
이 크게 난을 일으켜 온갖 민폐를 부리자 원나라(몽골)에서 고려에 급히 원군을 요청했다. 하
여 공민왕은 최영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 2,000명을 딸려 원나라로 파견했다.

최영은 원나라에서 살던 고려인 2만 명을 휘하에 넣었으며, 고우(高郵)를 정벌하는 등, 28번
의 전투를 벌이며 많은 공을 세웠다. 허나 이에 배가 아프던 원나라 승상 톡토(脫脫)가 참소
하면서 전쟁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1355년 회안로(淮安路, 강소성 회안시)에서 홍건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莊)에서 여러 차
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사주(泗州. 강소성 우이현)와 화주(和州, 안휘성 화현)에서 홍건적들
이 8,000여 척의 배로 무더기로 회안성을 포위하자 밤낮으로 수비해 그것들을 잘 다져진 고깃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후 적들이 다시 침범하여 성을 넘으려고 하자 최영은 여러 번 창에 찔
렸음에도 친히 앞장서 적들을 무수히 때려죽이며 성을 지켰다.

그렇게 홍건적의 난에서 크게 명성을 날리며 대륙의 정세를 살피다가 귀국하여 공민왕의 명으
로 인당(印璫)과 함께 원나라(몽골)를 공격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게 빼앗긴 요동(遼東)과
남만주 지역을 회복할 큰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최영과 인당은 요동과 요서(遼西)의 8개의
참(站)을 점령하여 이후 추진될 공민왕의 요동정벌에 큰 발판이 된다.
또한 왕명으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 지역)를 공격하자 원나라(몽골)
의 벼슬을 지내며 쌍성 지역을 관리하던 이자춘(李子春), 이성계(李成桂) 부자가 투항하면서
쉽게 쌍성을 점령했다. 하여 고려의 영토는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길림성, 연해주 지역)까지
크게 확장되었다.


▲  최영장군묘 밑 (안내문과 묘소로 인도하는 계단)

1357년 체복사(體覆使)가 되어 서해, 평양, 니성(泥城), 강계 지역을 살폈으며, 1358년 왜구
가 400여 척의 배로 오차포(吾叉浦)를 공격하자 군사를 매복시켜 승리했다. 그리고 1359년 서
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던 중, 홍건적 패거리들이 4만의 군사로 쳐들어오자 생양역(生
陽驛), 철화현(鐵和縣), 함종현(咸從縣), 서경(西京, 평양) 일대에서 크게 격파했다.

1360년 평양윤(平攘尹) 겸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가 되었는데, 전쟁의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진제장(賑濟場)을 여러 곳에 설치해 양식과 종자를 나눠주면서 농사를 장려
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매장해주었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개경을 탈환하고 그들을 때려잡았다. 그때 목을 붙잡고 도망친 홍건적은 불과 수백에 불과했
으며, 그 공으로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승진되었다.
1362년 안우, 이방실과 함께 홍건적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이 안치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부모와 부인도 모두 작위를 받았다.

1363년 공민왕의 측근이던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했
다. 최영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그들을 모두 처단했으며,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되고 진충분의좌
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의 칭호가 내려졌으며 평리(評理)로 전임되었다.

한편 고려의 요동정벌과 반원정책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원나라 기황후<奇皇后. 고려인 기
철(奇轍)의 여동생이자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비>는 공민왕을 철저히 응징하려고 했다. 하여
원나라에 머물던 덕흥군<德興君, 고려 26대 군주인 충선왕(忠宣王)의 3번째 아들>을 고려 왕
으로 내세우며 최유(崔濡)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처음에는 선주(宣州)까지 점령하며 승승장구했으나 공민왕이 최영을 도순위사로 임명해 안주
(安州)로 보내면서 상황은 크게 반전되었다. 결국 최유의 원나라군은 최영에게 크게 털려 최
유 등 일부만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적을 토벌하자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 1필,
은 2정을 내렸다.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인 박바이에다이(朴伯也大)가 연주(延州, 평안북도 영변)를 공격하자
최영이 휘하 장수를 보내 단죄했으며, 1365년 왜구가 교동도(喬桐島)와 강화도까지 기들어와
소란을 피우자 최영이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을 지키며 왜구를 토벌
했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최영장군 묘역

한편 공민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돈(辛旽)은 예전에 밀직(密直) 벼슬에 있던 김란(金蘭)이
딸을 자신에게 바치자 최영이 크게 꾸짖은 일로 인해 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최영이 고봉현(高峯縣, 고양시)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그것을 구실로 왕에게 참소하니
공민왕은 그를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켜 내쫓았다.
신돈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최영과 이구수(李龜壽) 등이 환관과 결탁해 왕과 신하를 이간시킨
다고 무고하자 왕은 신돈과 친한 이득림(李得林)을 보내어 최영을 국문케 했다. 최영은 이제
끝난 듯 싶어 거짓 자복하며 죽여달라고 청하자 마음이 약해진 왕은 3품 이상의 작위를 삭탈
하고 그의 전민(田民)을 몰수하여 유배를 보냈다.
이득림은 최영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난리를 쳤으나 정사도(鄭思道)가 죽기를 각오하고 이득림
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이득림이 신돈에게 보고하여 정사도까지 파면시켰다.

이후 1371년 다시 복귀하여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73년, 6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어 군적(軍籍)을 작성하고 전함(戰艦)을 건조했으며, 장수들의 계급을 진급 또는 강등시키
고 죄지은 수령들을 독단으로 단죄하자 사람들의 비판이 대단했다. 또한 70살 이상 노인들부
터 차등을 두어 쌀을 징수하여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자 백성들의 원성까지 자자했다.
1374년 경상도와 전라도, 양광도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두고 헌사(憲司)에서 예전
도순찰사로 있을 때 6도를 소란하게 했다며 반대했다. 이에 최영이 울면서 한탄하며 벼슬을
받지 않자 공민왕은 그를 비판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을 파면하고 최영에게 '진충분의선
위좌명정난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칭호를 내려주며 그를 달랬다.

한편 그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임밀(林密) 등을 제주도에 보내 말 2천 필을 보내라
고 했다. 당시 제주도는 원나라의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관할로 원나라의 잔여 세력<목호(
牧胡)>들이 지방 세력과 결탁해 고려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따로 놀고 있었는데, 겨우 300필
을 보냈다는 소식에 공민왕은 제주도를 공격해 탈환하기로 했다.
그래서 최영을 총대장으로 삼아 양광도와 전라도, 경상도 도통사(都統使)로, 염흥방(廉興邦)
과 이희필(李希泌), 변안열(邊安烈), 목인길(睦仁吉), 임견미(林堅味)를 원수(元帥)로 삼아
314척의 배와 25,600명의 군사를 보냈다.

제주해협을 건널 때 태풍으로 조금 고생을 했으나 제주도에 무사히 상륙, 명월포(제주시 한림
읍)에서 목호 세력 3천여 기를 격파해 30리를 추격했다.
날이 저물자 명월포로 되돌아와 해변에서 숙영을 했는데, 목호들이 기습해 안무사(安撫使) 이
하생(李下生)을 죽였고, 목호 우두머리 3명<시데르비스(石迭里必思), 촉투부카(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이 고려군을 살살 야골리며 유인하려고 했으나 최영이 이를 간파하고 즉시 정
예군을 보내 재빠르게 추격하니 적장은 유인책을 쓸 겨를도 없이 서귀포 남쪽 호도(虎島)로
줄행랑을 쳤다.
최영은 전 부령(副令) 정룡(鄭龍)을 보내 빠른 전함 40척으로 섬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정
예군을 이끌고 뒤쫓았다. 호도에 포위된 시데르비스는 처자와 일당 수십 명을 이끌고 섬 밖으
로 도망쳤으나 생포되었고, 촉투부카와 관음보는 항복을 해도 처형을 면치 못할 듯 싶어 쿨하
게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생포된 시데르비스와 그의 아들 3명은 허리를 잘라 죽이고 자
살한 적장의 머리를 베어 조정에 바쳤다.
동도(東道)의 카치(哈赤), 시도시멘(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은 수백의 무리로
끝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토벌했으며, 잔당까지 모두 찾아내 죽이니 적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
다. 이렇게 목호 토벌로 금패(金牌) 9개, 은패(銀牌) 10개, 인신(印信) 30개, 말 1,000필을
노획했고, 포로들은 지역 세력에게 주었으며, 말은 여러 고을에 분산해 기르게 했다. 또한 군
율을 엄하게 하니 군사들은 벌벌 떨며 군율을 어기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도를 토벌하고 10월에 귀환했으나 그 사이에 공민왕은 시해되고 말았다. 하여 왕
의 빈소에 들어가 제주도 토벌 경과를 보고하다가 끝내 주저앉아 통곡했다.


▲  뒷쪽에서 바라본 묘역 (제일 앞에 보이는 묘가 최원직묘)

공민왕이 시해되자 그의 큰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우왕(禑王, 1374~1388)이다. 우왕은
1375년 최영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으며, 1376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폄직(貶職)되었던
강순룡(康 舜龍)과 정사도(鄭思道), 염흥방(廉興邦), 정몽주(鄭夢周) 등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그 결정이 내릴 당시 최영은 마침 사냥 중이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녹사(錄事)가 관련
서류를 가져와 서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최영은 나라의 큰 일을 왜 대신(大臣)들과 합
의하지 않고 멋대로 하냐며 서명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조카사위인 판사(判事) 안덕린(安德麟)이 사사롭게 사람을 죽였는데, 최영의 권력
이 대단한 터라 어쩌지는 못하고 최영이 관장하던 순위부(巡衛府)로 보냈다. 그러자 최영은
크게 노하며 헌사(憲司)로 보내 죄값을 받도록 했다.

1376년 왜구가 충청도에 칩입했다. 연산 개태사(開泰寺)를 불지르고 조정에서 보낸 관군까지
때려잡는 등 위세가 대단하자 최영은 왕에게 출정을 요청했다. 허나 왕이 나이가 많음을 내세
우며 출정을 거부하자 2~3차례 간청하여 겨우 허가를 받았다.
최영은 급히 군사를 꾸려 왜구가 머물던 홍산(鴻山, 부여 홍산)으로 내려갔는데, 그는 좁은
험로에 의지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허나 3면이 절벽이고 왜구의 위세가 대단하므로 장졸들
이 쉽게 나서려고 하지 않자. 최영은 정예병을 이끌고 제일 선두로 달리며 간만에 몸을 푸니
왜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그때 적 하나가 수풀 속에 숨어 화살을 쏘아 최영의 입술을 맞추었는데, 피가 낭자하게 흐름
에도 아무 일도 없듯 화살로 그 적을 쏘아 죽이고 입술에 박힌 화살을 뺐다. 그리고 다시 왜
구 사냥에 나서 왜구 대부분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와 머리고기로 만들었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홍산대첩(鴻山大捷)으로 왜구들은 최영을 머리가 하얀 최만호(崔萬戶)라 부르며 매우
두려워했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백금 50냥과 의복, 술,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의
원 어백평(魚伯評)을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최영이 개경으로 개선하자 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영접했는데, 그 의장 행렬이 실로 대단했다.
왕은 그에게 시중(侍中)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최영은 시중이 되면 자유롭게 지방으로 나갈
수 없으니 왜구가 평정된 후에 받겠다고 거절했다. 이에 그를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
하고 전쟁에 나선 장졸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1377년 왜구가 남해바다를 넘어 강화도, 김포까지 쳐들어와 소란을 피웠는데, 최영은 강화도
와 교동도가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권세가들이 토지를 점유해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한다면서
사전(私田) 혁파를 건의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사전을 몰수하여 장정을 남겨 농업에 종사하
게 했다. 그리고 지역 수비를 소홀히 한 장수와 관리들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우왕은 받아들이
지 않았다.
우왕은 왜구의 침입을 우려하며 내륙지역으로 천도를 하려는 엉뚱한 계획을 했다. 이에 최영
은 반대했으나 왕은 똥고집을 부리며 철원에 궁성을 축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태후(太
后)의 거처만 철원으로 옮기자고 건의하니 왕은 이를 받아들여 천도 해프닝은 마무리 되었다.

1378년 왜구가 다시 쳐들어 승천부(昇天府, 개경 인근)를 점령하며 장차 개경까지 쳐들어가겠
다고 위협을 했다. 최영은 이성계와 전략을 짜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는데, 왜구는 오로지 최영
만 격파하면 개경을 점령할 수 있다 여기고 고려군이 진을 친 곳을 죄다 지나쳐 최영이 지휘
하는 중군(中軍)이 머물던 해풍군(海豊郡, 개경 인근)으로 진격했다.
최영은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맞서 싸우다가 뒤로 빠졌는데, 그 틈에 이성계
가 기병을 이끌고 협공했다. 그때 최영이 측면에 나타나 왜구를 후려치니 왜구는 거의 전멸을
당했다. 왕은 최영의 전공을 기려 안사공신(安社公臣)으로 봉했다.
그리고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되었고, 1381년 수시중(守侍中)으로 승진되
었다.


▲  약간 옆에서 바라본 최영장군묘

1381년 잠시 한양(漢陽, 서울) 천도가 논의되었는데, 최영은 서울을 빨리 옮기자며 성문도감
(城 門都監)을 설치해 5부(五部)의 정남(丁男)들을 동원해 한양 성곽을 수리했다. 허나 얼마
안가 무너지나 도감 일을 맡은 윤순(尹順) 등을 탄핵하고 성곽 수리를 중지시킨 후 귀가 조치
시켰다.
우왕은 교서를 내려 최영을 찬양하면서 최영의 아버지 묘소 주변 토지 230결과 장원정(長源亭
, 개경 근처)의 토지 50여 결을 내렸다.

계속 되는 왜구의 침략의 경상도와 강릉도(江陵道, 강원도), 전라도 지역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해졌다. 최영은 이들 3도에 시여장(施與場)을 설치해 선량한 사람을 선발하여 관리하도록
하고, 관청의 쌀로 미음과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함선 건조를 위해 군사와
승려를 동원하여 1년 안에 130여 척을 건조했다. 함선 건조에 동원된 사람과 승려들은 불만이
대단했으나 그 배를 요충지에 분산 배치하면서 수군 군사력이 증대되었고, 그로 인해 왜구의
침입이 크게 줄었다.

1384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우왕은 토지를 내렸으나 최영은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쌀 200석을 군량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퇴직을 청했으나 우왕이 도리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하자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도통사(都統使)의 직인을
반납하려고 했으나 우왕이 계속 곁에 있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궁궐로 나가 왕에게 재상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하는 폐해를 극렬히 성토한 후, 겸
병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만들어 다 함께 서명하게 하고는 재상들을 둘러보며
'이후로는 다시 과거처럼 겸병할 자가 있겠소?'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늙어서 사리(事理)에 어두우니 내 행동이 의에 합당하지 않거든, 입을 다물지 말고 이
늙은이에게 충고해 주시오'
하였다.

최영은 이성림(李成林), 이자송(李子松) 등과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
昌 宮)을 축조하여 5년 만인 1384년에 완성을 보자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그러자 왕이 무엇
으로 보답할지 물어보니 최영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하지 않고 소인배와 어울리며 사냥을 일삼으시니 소신들이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신하의 직분을 다하겠습니까?'
답을 하니 우왕은 부끄러워하며 최영을 판문하부사
(判門下府事)로 삼았다.

1386년 우왕이 서해도(西海道)로 사냥을 가자, 지봉주사(知鳳州事) 유반(柳蟠)이 왕에게 필요
한 물자를 공급한다며 백성들의 재물을 많이 뜯었다. 그러자 최영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위
라며 그에게 장형(杖刑)을 가했다.

1387년 장방평(張方平) 등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명나라가 거절하여 요동에서 되돌아왔
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고려를 심히 두려워하며 경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병이 발
작 수준으로 심해져 고려를 더욱 자극시켰다.
좌시중(左侍中) 반익순(潘益淳)이 최영에게
'공께서는 선왕(先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온 나라의 신망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나라
가 위태로운데, 어찌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까?'
이에 최영은
'집권자가 이익만 밝히고 악생을 거듭해 패망을 스스로 속히 불러들이고 있으니 이 늙은이가
장차 무엇을 하겠소?'
탄식했다. 그때 요동에서 넘어온 어떤 사람이 명나라가 장차 처녀와 수
재(秀才) 및 환관 각 1,000명과 소와 말 각 1,000 마리를 요구할 거라며 제보를 했다. 그 말
을 들은 최영은 '명나라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것들을 쳐야 된다'
주장했다.

1388년 임견미, 염흥방 등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진압되었다. 최영은 다시
시중에 임명되었는데,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했으나 이성계
가 덕과 은혜를 베풀어야 된다고 반대했으나 듣지 않았다.

우왕은 최영을 더욱 신뢰하고자 그의 늦둥이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소신의 딸은 인물도 누추하고 측실 소생이라 제왕의 배필이 안됩니다. 만약 왕비로 삼으려고
하신다면 소신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허나 우왕이 또 고집을 부리며 최영 집까지 찾아가 말을 하사하자 왕에게 안마와 의대를 바치
며 결국 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우왕은 예전에는 최영의 곧은 성품이 싫어서 그의 집은 찾아
가지도 않았으나 이후로는 영비(寧妃, 최영의 딸)를 총애하여 자주 들렸다.

▲  최영장군묘 서쪽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 묘표(墓表)

▲  최영장군묘 동쪽 문인석과
망주석, 무민공충혼비


한편 명나라는 고려의 기를 더욱 누르고자 1387년 12월, 예전 원나라가 점령했던 철령<鐵嶺,
요동반도 심양(瀋陽) 남쪽> 이북 땅에 멋대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했다. 그리고 1388년 3월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고려로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했다.
이때 명나라는 철령위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봉집현(奉集縣)에 설치하고 승차(承差) 이
사경(李思敬)을 보내 철령 이북과 동쪽, 서쪽 지역은 원래 원나라(몽골) 땅이므로 그곳에 사
는 여진, 몽골, 고려, 한인(漢人)의 모든 군인은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방을 부쳤다.

명나라의 도발에 발끈한 최영은 조정 회의를 열어 명나라 공격과 화친을 두고 의논하니 대신
들 상당수는 화친을 지지했다. 하여 일단 조림(趙琳)을 명나라에 보냈으나 명나라에서 입국을
거절하자 최영은 철령 이북 땅을 줘야 되는가 가부를 물으니 대신들 모두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 우왕은 최영과 독대하여 요동 공격이 어떠냐고 묻자 최영은 찬성했다. 그러자 이자송이
최영을 찾아가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최영은 그가 임견미 패거리라 하여 곤장을 쳐
서 유배를 보냈다가 곧 죽여버렸다.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요동도사 소속 지휘(指揮) 2명과 군사 1천을 파견
해 방을 붙이고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여 최영은 전국의 군사를 징발하고 개경 동쪽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했으며, 얼마 뒤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
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했다.
이에 최영은 우왕에게 보고하여 방문(榜文)을 가지고 북쪽 양계(兩界)에 온 요동기군(遼東旗
軍) 21명을 죽이고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을 구금시켜 감시했다. 우왕은 사냥을 내세우며 봉
주(鳳州, 황해도 봉산군)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이성
계가 4가지의 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으나 최영과 우왕은 정벌을 강행했다. 드디어 고려의 대
륙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 일어난 것이다.

우왕은 서경(西京, 평양)으로 왕림하여 군사들을 독려하고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에게 압
록강에 부교 설치를 맡겼다. 몰수한 임견미와 염흥방의 재산을 배에 실어 군수물자와 상금으
로 쓰게 했으며, 승려도 징발했다.
또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의 총대장으로 삼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마침 명나라의 영향력
이 조금 미치던 요동 북부 지역에는 명나라군은 거의 없고 성 안에는 지휘 등 일부만 있었다.

최영은 왕에게 자신이 직접 출진하겠다고 했으나 왕은
'선왕께서 장군이 부재 중일 때 시해되셨소. 장군께서 가신다면 누가 짐을 지켜줄 것이고 누
구와 국정을 다스린단 말이오!'
하소연 했다.
하여 최영은 자신은 평양에서 장수들을 지휘할테니 왕에게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허
나 우왕이 또 똥고집을 피우자 결국 우왕 곁에 남기로 했으니 그것이 바로 화근이었다. 최영
이 총대장이라 직접 군을 이끌고 가야 하건만 왕이 걱정되어 차마 가지 못했던 것이다.

정벌군은 군사 10만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좌,우군 38,830명 그에 딸린 인원이 11,634명, 말은
21,682필이다. 즉 5만 정도의 병력이었다. 한때 광군(光軍) 30만을 육성하고 17만의 별무반(
別武班)으로 동북쪽의 너른 땅을 종횡무진했던 고려건만 그 고려의 위엄이 그새 많이 낡았던
것이다.
또한 정벌군 출진 직후 잠시 사용했던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를 폐하고 백성 일부에게 원
나라 의복을 입게 하니 이는 명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켜 명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강한 의
지의 표현이었다.

정벌군은 압록강을 건너 현재 단동(丹東) 북쪽의 위화도(威化島)란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3
면이 강에 접하고 1면만 땅으로 이어진 지형인데, (신의주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여름 홍수와 군량 부족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회군을 청하자 최영은 직접 위화
도로 가려고 했다.
허나 우왕이 또 반대하여 가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진군을 독촉했다. 또한 최영은 몽골초원으
로 도망친 원나라의 잔여 세력과 함께 요동과 명나라를 치기로 했으나 그 세력이 완전 털린
상태라 신뢰하기 어렵고, 출진한 장수들이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끔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
으려고 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위화도에 머물던 정벌군의 불만이 늘어나자 그윽하게 딴 마음을 품었던 이성계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돌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하고도 한스러운 위화도회군으로 칼
의 방향을 명나라에서 개경으로 돌렸다.

갑자기 반란군이 되어 돌아온 5만의 군사가 개경으로 들이닥치자. 나라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
신 듯 난리가 났다. 최영와 우왕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왔고, 반란군은 최영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으나 우왕은 거절했다. 그러자 반란군은 성문을 뚫고 개경에 칩입했고, 최영은 안소(安
沼)와 함께 개경을 수비했으나 군사가 얼마 없어 결국 개경은 함락되고 만다.


▲  무민공충혼비(武愍公忠魂碑)

최영과 우왕은 화원(花園)으로 피했으나 반란군이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난입하자 급히 팔각
전(八角殿)으로 피했고 결국 포위되고 만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우니 최영이 2번 절을
하고 미련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이성계가
'이번 일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요동을 공격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나라를 위태
롭게 하고 백성을 괴롭혀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최영을 바라보며 울었다.

반란군은 최영을 고봉(高峯, 고양시)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합포(合浦, 마산)로 보냈다. 그
리고 그와 가깝던 이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그의 어린 아들 왕창(王昌)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고려 33대 군주인 창왕(昌王)이다.

창왕이 즉위하자 최영을 순군(巡軍)에 가두어 신문하고 다시 충주로 유배를 보냈다. 최영을
싫어하던 사람들과 반란파들은 최영의 처형을 주장했고, 반란파와 이성계 입장에서는 그의 존
재 자체가 이롭지가 않기 때문에 서둘러 개경으로 압송하여 처형시켰다.

최영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날, 개경 사람들은 자진해서 모두 철시(撤市)했으며, 개경 사
람들은 어린 아이부터 부녀자, 노인, 청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그에 대
한 민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망나니의 칼을 받는 순간까지 최영의 말씨나 얼굴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아 마지막까지 역전 노장의 위엄을 보여주었으며, 망나니의 칼이 볼일을 끝내자
백성들의 통곡 소리는 더해 갔다.
이렇게 하여 그는 72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이 길가에 버려
지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으며, 조정에서는 쌀과 콩, 베, 종이를 부의로 보냈
다.

이성계는 그와의 옛정 때문인지 최영의 부모가 묻힌 이곳에 그를 안장했으며, 무민(武民)이란
시호(諡號)를 올렸다. 무덤을 만들고 풀을 심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풀은 자라지 않아 풀이 돋
지 않은 무덤으로 유명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이성계 패거리가 최영에게 부정한 짓으로 재물을 모았다고 몰아세우자, 최영은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부정을 저지른 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며, 그
렇지 않으면 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는 풀이 돋아나지 않았다. 아무리
흙을 덮고 금잔디를 심어도 잔디는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아나
지금은 무성한데, 이를 두고 억울하게 죽은 최영의 한이 풀린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최영은 고려를 지킨 마지막 방패로 일생 동안 80여 회의 전쟁을 치루면서 통한의 위화도회군
을 제외하고 모두 이긴 불패(不敗)의 장수였다. (80승1패) 북쪽으로는 요동과 요서, 서쪽으로
중원대륙(서토), 동쪽은 함경도, 남쪽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몽골)와 홍건적, 왜구
등 다양한 적과 싸워 무용(武勇)을 떨쳤으며, 조금도 두려움 없어 늘 앞장서서 적들을 때려잡
았다.
또한 청렴결백한 인물로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그에 맞춰 편안하
게 살았다. 의복과 음식은 검소했으며,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뇌물
과 청탁을 받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그의 청렴함에 탄복했다. 항상 큰일에 주로 신경을 써 사
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전쟁터에 나가서 종종 시를 짓기도 했다.
남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보면 배척하고 질타했으며, 어떤 사람이 최영에게 벼슬을 구하자 '
너가 공장(工匠)이나 장사꾼의 일을 배웠다면 절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 했다. 이
는 권력을 잡은 자들이 뇌물이나 받아먹는 족속들이라 비꼰 것이다.

그는 공로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천거할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은 모두 물리쳤
다.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 중 재산을 늘리고 사사로운 정으로 공직 기강을 해치는 사람이 있
으면 반드시 바로 잡고자 했는데, 이인임(李仁任)도 그에게 한마디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고지식하고 학문이 좀 부족했으며, 독단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
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최영을 두고
'공은 한 나라를 뒤덮었으나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 논평하니 세상 사람들이 명언이라 했다.

또한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에게서 아낌없는 지지를 누리며 나라를 지킨 무인으로 진정한 무인
의 도(道)를 실천한 위인이다. 비록 반란파에게 목숨을 내주고 말았지만 백성들에게 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으며 우리나라 토속신(土俗神)의 일원이 되었다. 무당(巫堂)이 모시는 신 중
에 최영장군은 거의 꼭 있으며, 오래된 당집을 보면 그의 그림이 있다.
또한 연평도(延坪島)를 비롯하여 부산, 남해, 추자도(楸子島) 등 해안 지역에는 그를 봉안한
사당이 많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최영이 왜구를 토벌하면서 그 지역 백성을 살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를 신으로 높여 사당을 짓고 마을과 바다의 수호신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후손의 지극정성 관리로 정갈하게 손질된 묘역
은 야트막한 오르막에 석축을 쌓아 터를 다지
고 그 위에 네모난 호석(護石)을 만들어 봉분
을 올렸다. 이는 고려시대 무덤 양식으로 조선
초기까지 나타나는 양식이다.

무덤의 크기는 검소하게 살았던 최영 부자에
걸맞게 작고 조촐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누
워있고, 무덤 서쪽에는 오래된 묘표가, 동쪽에
는 근래에 만든 충혼비가 자리한다.
그 앞에는 홀을 쥐어든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
쌍이 자리해 있는데, 문인석은 근래 것으로 옛
날 스타일이 아닌 훤칠한 키의 듬직한 어깨,
경직된 표정, 그리고 어색하게 자라난 수염 등
은 최영장군묘와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조상의 묘를 관리하고 꾸미고 싶은 후손의 마
음이야 이해는 하지만 그런 욕심이 너무 앞선
나머지 구두를 신은 고려시대 장군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옛날 묘는 어지간해서는 있는 그
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하는 것이 더 가치가 클
텐데 말이다.

▲  최영장군 묘표(墓表)


▲  아들 묘역을 굽어보는 최원직 묘

묘역 윗쪽에는 최영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모습은 아들묘와 비슷하며, 봉
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香爐石)을 세우고, 그 옆에 지붕돌 묘표(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하며, 무덤 뒤로는 곡장이란 담장을 둘렀고, 주변으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묘
역에 그늘을 드리운다.

최원직(?~1332)은 사헌규정까지 지냈으나 아들의 명성에 너무 가려 인지도가 거의 없다. 죽음
에 임하면서 아들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긴 인물로 아들과 아비 모두 재
물과는 담을 쌓으며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오늘날 이 땅의 위정자들이 그들 부자(父子)의 청
렴함과 공명함을 좀 배워야될텐데 그딴 것은 애시당초 관심도 없으니 참 나라의 앞날이 오리
무중(五里霧中) 그 자체로다.

* 최영장군묘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  최영장군묘 주변에서 만난 후식거리들
(경안군 및 임창군묘역, 성녕대군묘역)

▲  경안군(慶安君) 묘

최영장군묘 입구 남쪽에는 높은 신분이 느껴지는 늙은 무덤이 있다. 경사가 급한 높은 언덕에
자리한 묘는 경안군의 무덤이고 그 밑에 누운 것은 그의 아들인 임창군(臨昌君)묘이다. 그리
고 경안군 무덤 뒷쪽 숲속에는 아들인 임성군(臨城君)의 묘가 숨겨져 있다. 즉 최영장군 묘역
처럼 부자의 묘가 한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경안군 묘의 우측 석물들

▲  경안군 묘의 좌측 석물들

경안군(1644~1665)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회(李檜)이다.
그는 태어난 이듬해(1645년)에 아비를 잃고, 그 다음해(1646년)에 어머니 강빈(姜嬪)까지 사
사(賜死)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버렸다. 이는 병자호란 삼전도(三田渡) 굴욕으로 머리가 이
상해진 인조가 청나라를 멀리하고 망한 명나라에 쓸데없이 사대(事大)의 미련을 둔 자신에게
반했다는 이유로 아들 소현세자 내외를 죽였기 때문이다. 특히 소현세자의 사망 원인은 아직
까지도 미스테리이다.
인조는 아들 내외를 처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모가 지은 죄를 갚으라며 1647년에 경안군 3형
제를 자비 없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들 형제의 귀양살이가 혹독하여 큰 형과 2째 형은
일찍 죽고 만다.

그렇게 개쪼잔했던 인조가 1649년에 골로 가자 그의 2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효종(孝宗)이다. 그는 1650년 경안군을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강화도로 옮기고
바로 교동도로 옮겼는데,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김집(金集) 등 많은 이들이 강빈의 복권
과 경안군의 석방을 줄기차게 건의하면서 1656년 악몽 같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된다.
1659년 경안군에 봉해져 팔자가 좀 좋아지나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겪은 귀양살이의 휴유증
때문에 1665년 불과 21살의 창창한 나이에 인생의 휘장을 거뒀다. 그의 부인은 분성군부인(盆
城郡夫人) 김해허씨로 슬하에 임창군과 임성군의 아들을 두었다.

경안군 묘는 부인과 합장된 합장분(合葬墳)으로 봉분 뒤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곡장을 둘렀
는데, 이는 근래에 만든 것이다. 묘 앞에는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있고, 상석과 향로
석(香爐石)을 두고, 좌우로 망주석과 조그만 동자석, 문인석을 1쌍씩 배치했다.
묘 좌측에 서 있는 검은 돌의 신도비(神道碑)는 1704년 아들 임창군이 세운 것으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를 갖추었다. 비석 높이는 196cm이며, 신
도비와 석물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연출한다.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망주석과 문인석 사이에 자리한 키 작은 동자석의 모습에는 귀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  현란한 이수와 고된 세월의 때를
듬뿍 간직한 경안군 신도비

▲  이수 대신 지붕돌을 지닌
임창군 신도비


임창군(1663~1724)은 경안군의 아들로 이름은 이혼(李焜)이다. 부인은 응천군(凝川君) 부인
박씨로 경안군과 마찬가지로 부부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주변으로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
주석, 문인석 등을 갖추었으며, 지붕돌을 갖춘 묘비가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준다. 묘비
는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박사수(朴師洙)가 짓고 글씨는 임창군의 아들인 이감(李堪)
이 썼다.


▲  경안군묘 좌측에 자리한 임성군묘

임성군(1665~1690)은 경안군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황(李滉)이다. 부인인 익성현부인(益城縣
夫人) 남양홍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었다.
문인석은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세상에 훤히 모습을 드러낸 경안군과 임창군
의 묘와 달리 숲에 묻혀 있어 조금은 초라하게 다가온다. 앞의 두 묘와 달리 묘비가 봉분 앞
에 있으며, 비석의 높이는 163cm으로 앞의 묘비보다는 작다.
경안군 부자의 묘역은 경안군 및 임창군 묘역이란 이름으로 고양시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었
다.

* 경안군, 임창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5-2


▲  성녕대군(誠寧大君) 묘역 - 고양시 향토유적 2호

경안군 묘역을 둘러보고 다시 나오면 길이 남북으로 갈라진 3거리이다. 여기서 북쪽 길(성녕
길)로 들어서면 기와집 하나가 마중을 나오는데, 그는 성녕대군묘의 재실(齋室)이다. 그 재실
을 지나 동쪽 언덕을 오르면 대자동에서 최영장군묘 다음으로 늙은 성녕대군 묘역이 활짝 모
습을 비춘다.

성녕대군(1405~1418)은 조선 태종(太宗)의 4째 아들로 이름은 이종(李種)이다. 그 유명한 양
녕대군(讓寧大君)과 효녕대군(孝寧大君),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의 친동생으로 모후는 원
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인데, 세상에 너무 크게 알려진 친형(양녕, 효녕, 충녕대군)들에 비해
인지도는 거의 없다. 워낙 잘난 형들이라 그 그늘에 가리기도 했지만 너무 일찍 죽은 것도 큰
원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행동이 의젓했으며, 글씨를 잘썼다. 하여 태종과 원경왕후가 금지
옥엽처럼 아꼈으나 그만 13살에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고 만다. 태종 내외는 매우 비통
해하며 무덤 주변에 대자암이란 절을 세워 아들의 명복을 빌었으니 대자동이란 지명은 바로
대자암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녕은 창녕성씨인 성억(成抑)의 딸과 혼인을 했으며,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1414년 대군(大君
)에 봉해졌다. 대광보국대부(大匡輔國大夫)의 위계까지 오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일찍 죽
지 않았다면 충녕대군과 좋은 라이벌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태종 부부의 관심이
컸던 인물이다.

▲  성녕대군의 사당인 대자사(大慈祠)

▲  성녕대군 신도비가 담긴 비각

재실을 지나면 성녕의 사당인 대자사가 나온다.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 앞에는 삼문(三門)
이 있고 사당의 이름을 알리는 큼지막한 표석
이 있다.

사당 좌측에는 3개의 비석이 담긴 비각이 있는
데, 가장 우측 비석이 성녕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왕족과 3품 이상의 고위 관리의 무덤
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
道)로 통한다는 무덤의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
역시 성녕대군의 유택(幽宅)을 기준으로 동남
쪽에 자리하여 그 법칙을 따랐다.

신도비는 보통 용머리의 귀부와 이무기가 여의
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를 갖추기 마련이나 여
기는 이수 대신 지붕돌로 비석 머리를 마무리
했다. 비신(碑身)은 경안군의 묘비처럼 검은
돌로 만들었는데, 양 옆으로 만든 화강암 우주
석에 비신을 끼워 넣은 것이 특이하다.

▲  성녕대군 신도비

이 신도비는 묘를 만들던 1418년 4월에 세운 것으로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장인인 성개
가 글씨를 썼다. 비석의 높이는 3m로 큰 편이다.


▲  원천군(原川君) 묘역 (앞쪽 무덤이 부인 한양조씨, 뒷쪽 무덤이
원천군과 백천조씨 합장묘)


대자사 뒤쪽 언덕에는 성녕대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보통 일반에 개방되어 있으며,
사당 옆에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묘역에는 3기의 무덤이 있는데, 모두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 가장 위쪽에는 성녕대군의
무덤이 있고, 아래쪽에는 그의 양자인 원천군 내외의 무덤이 있는데, 원천군은 원래 효령대군
의 6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선(李宣)이다. 성녕이 어린 나이에 죽자 원천군을 그의 양자로 삼
아 후사를 잇게 하면서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이다.

원천군 내외 묘는 근래 크게 손질되어 꽤 젊어졌는데, 그로 인해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라졌
다. 무덤은 좌우로 배치된 것이 아닌 앞뒤로 자리한 부후묘(附後墓) 형태라 각 무덤마다 묘비
와 문인석, 장명등을 따로 갖추고 있는데, 앞쪽 묘는 그의 2번째 부인인 한양조씨의 무덤이며,
뒷쪽은 원천군과 부인 백천조씨의 합장묘이다. 백천조씨가 죽자 한양조씨를 새로 부인으로 맞
아들여 묘가 2개가 된 것이다.


▲  성녕대군과 부인 성씨의 합장묘

▲  뒷쪽에서 바라본 성녕대군묘

묘역의 가장 뒷쪽이자 높은 곳에는 묘역의 주인공인 성녕대군 내외의 무덤이 자리해 있다. 앞
서 최영장군묘처럼 4각의 호석(護石)을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다졌는데, 봉분 주위로 작은 석
호(石虎)와 석양(石羊)을 1쌍씩 배치했고, 묘 앞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1상을 두었다. 좌측에
는 근래에 세운 때깔이 고운 묘비를 세웠으며, 무덤 뒤쪽에는 'ㄷ' 모양의 곡장을 둘렀다.

석호와 석양은 무려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여기저기 상처도 많이 생겼
지만 그 모습을 알아보기에는 별 무리는 없으며, 조그만 양의 새끼와 호랑이 새끼를 보듯, 귀
여움마저 묻어나 손으로 쓱쓱 쓰다듬고 싶다. 곡장에 둘러진 석축에는 오랜 세월의 때가 수북
히 끼여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풍긴다.

성녕대군묘를 끝으로 최영장군묘를 중심으로 한 대자동 무덤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성녕대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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