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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

▲  길상사를 키운 법정의 사진과 유품들



 

봄이 막바지 절정에 치닫던 5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城北洞)
길상사를 찾았다.
내가 늙은 절을 좋아하다보니 법등(法燈)의 끈이 짧은 절은 문화유산이 없는 이상은 별로
찾지 않는 편인데, 길상사는 예외로 내 즐겨찾기의 일원이 되어 이미 5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다. 이는 이곳이 지닌 상큼한 풍경과 포근하고 편한 분위기가 서로 어우러져 나를 이
곳의 충성 단골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데 성북초교 직전 선잠단(先蠶壇)터에서 선잠
로를 따라 12분 정도 들어가면 절이 모습을 비춘다. 그 짧은 구간은 부자들의 으리으리한
금입택(金入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장으로 우리 같은 서민들은 보기만 해도 주눅
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사라지는 기분이다. 
이 땅에서 나날이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衝
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또한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하여 지나가는 나그네를 항시 응시한다.
저택과 고급빌라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과 얼굴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며 도심과 가까
움에도 분위기도 차분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다. 하여 나는 서울에서 가을이 가장 아
름다운 곳으로 성북동을 1순위로 꼽는다. 비록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그런 곳이긴 하지
만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괜히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을 피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
에 우리나라의 0.1%가 산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明堂)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나 상류층 따위가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
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산사,
북한산 길상사(吉詳寺)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주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山寺)인 길상사는 저택과 고급 빌라가 쓸데없이 홍수
를 이루는 성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삼
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포근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
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늙은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을 품은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 나
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
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
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곳을 키운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
날 순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길상사의 과거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함께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력자들과 대기업 고위간부들, 부유층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
고 놀던 요정(料亭)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은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는 바다 건너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
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
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하여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
으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서울 주변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상사
자리에 좋은 예감을 얻어 이 일대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
린 완사명월형의 명당 기운을 받으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다가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
으며,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자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대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
달았고 그 와중에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을 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
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사의 말사(末
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바로 그해 12월 14일 개
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
처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法名)과 함께 염
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
다.

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말년을 보내다가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했
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
막 밤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중생의 애도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얗게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
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의 상당수 졸부들과 상류층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
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
여져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 등 일부를 제외하고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
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딱히 문화유산은 없
고, 다만 200년 정도를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
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
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
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다음급 정도는 될 것이다. (조계사가 방문객 수
는 단연 1등일 듯, 그 다음은 봉은사 정도)

* 길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아래 법정 진영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길상사로 들어서려면 '三角山 吉詳寺' 현판을 내민 일주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
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을 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사 경내가 1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경내
늦가을이 길상사와 이곳을 빛낸 인물들을 깊이 흠모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봉숭아물처럼 곱게 채색을 들였다.

▲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를 섞은 길상사 관세음보살상

정문에서 설법전으로 가면 늘씬한 자태의 특이
한 석상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바로 관세
음보살상이다.
그런데 그 흔한 관세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어루만지는 어진 성모(聖母)와 같은 존
재라 아름답게 꾸며지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부
분은 거기서 거기이다. 허나 이곳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고 그 위에 소박
하고 날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천주교
의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이미지로 지어졌다.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
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로 관세음보
살을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년 4월 28일에 봉
안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보살상의
면모는 떨어지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다.

머리에는 관세음보살이 필수로 쓰는 보관(寶冠)을 썼지만 그 모습은 서양식 왕관과 비슷하다.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갔으며,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이다.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
인(施無畏印)을 취했으며, 왼손에는 감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고 있다. 그리고 손 아래쪽
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
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범종각 밑에 자리한 샘터

절을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가뭄과 겨울을 제외하고 늘 물로 가득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한모금 들이키니 몸과 마음에 낀 때와 번뇌가 싹
씻겨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  길상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늙은 느티나무가 있는데,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세음보살 부근에 자리
한 것으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 선선한 그늘을 드
리우며 여름 제국도 나무의 기세 앞에 고개를 숙인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거의 2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는 12m, 둘레 2.5m이다.


▲  관세음보살 옆에 자리한 일그러진 표정의 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線刻磨崖像)이 꽤 이채롭다.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름 그대로 범종(梵鍾)의 보금자리로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에 새 종을 만들어 달았다.

▲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설법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은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
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불전(佛殿)의 이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
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년 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설법전

▲  설법전 내부


▲  저보다 밝은 표정이 있을까? 미소를 한가득 품은 금동석가여래좌상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리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두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여래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
백 개의 작은 옥불(玉佛)이 석가여래를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년 11월에 장만한 길상보탑이 길상사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고 있다. 4마
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塔身)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
는 길상사에 그 흔한 석탑도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
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탑
을 기증하였고 탑 안에 복장봉안품을 넣었다. 이후 2013년 8월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묵
은 늙은 탑을 해체하면서 나온 석가여래의 오색정골사리와 옹혈사리, 나한사리를 입수하여 탑
에 넣어두었다.
 
탑이 있는 이 자리는 '바람 속 향기'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수, 조촐한 평
상이 있었는데, 탑에게 밀려나 2012년 10월 정랑 서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
에 세우기 마련인데, 이곳은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
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결코 아닌데, 아마도 다른 탑을 염두에 두고 그러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  길상사 극락전, 지장전

▲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고, 우측 칸에
는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측 칸은 중생들
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좌측 칸에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시 잊으며 쉬어가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
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이나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상

극락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상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월에 조성되
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존재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으로 중
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이 있으며, 왼쪽에는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두 협시불(夾侍佛)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으며, 그들 뒤로 비슷한 시기에 제
작된 금니(金泥)후불탱화가 있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극락전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7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로 대원각 초창기나 그 이전에 싹을 틔운 것으로 보인다.
계림황엽(鷄林黃葉)처럼 누렇게 뜬 낙엽을 하나, 둘 떨어뜨리며, 허전한
극락전 뜨락을 덮어준다.

▲  코스모스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명랑하기만 하다. 마지막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치 길상화 공덕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 하다.

▲  길상사의 또 다른 늙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느티나무가 둥지를 틀었다.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0~31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는 12m, 둘레
3.2m 규모이다.


▲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과 극락전이 기존 요정 건물
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장만한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에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놓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든 지장보살상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협시하
고 있으며, 붉은 색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잔잔히 울려퍼지는 지장
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
물이 묻힌 비밀의 석실(石室)처럼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준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3존상 벽
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보
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 나오는 아
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여래와 아리따운 모습의 관세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
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
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나누는 기쁨' 찻집

지장전 좌측에 자리한 '나누는 기쁨' 찻집은 녹차와 매실차, 국화차 등 두 귀에 익은 전통차
를 팔고 있다. 길상사 찻집으로도 불리며 보통 16~17시까지 운영하는데, 차의 가격은 인사동
이나 삼청동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예전에는 리필이 가능했으나 요즘에는 거의 안해주는 편
이며, 가격도 괜찮은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다.


▲  계곡 건너 숲속에 묻힌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다.
김영한이 마지막 밤을 지내며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며,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귀뜀해준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꽤 높다. 나무들
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길상사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간다.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
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로 지금은 승려 참선 및 처소로 쓰인
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3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가 머
무는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그 다음 다리는 나무그늘과
조그만 집들로 이어진다. 경내 북부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과 승려의 생활공간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유마선방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길상사 마무리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웠다. 비석을 칭하고 있
지만 앞서 관세음보살상처럼 이형(異形)적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나도 나중에 졸부들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
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보
다는 우선 돈좀 왕창 벌어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이가 절단나는
법이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貞陵)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
을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해 대원각을 지었다고 전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神仙)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한다. 조그만 폭포도
2개 정도 있는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가늘어 속세의 삶처럼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  경내 북서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  경내 북쪽 산책로

경내 북서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길,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는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길상사 진영각(眞影閣)

경내 북쪽 구석이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의 유품이 전시되어있다.
이 집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년 7월부터 법정
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수류
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았고, 개방을 하지 않고 보
류하다가 그의 3주기인 2013년 3월 7일(음력 1월 26일)에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로 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
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워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길상사 자체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
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법정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년 3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린 것이다. 전 문
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같다고 평
가를 했는데, 서예가로 유명한 여초 김응현의 제자인 승려 기현(奇玄)이 진영의 글씨와 진영
각 현판을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서적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 부도탑)도 두지 않고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알려
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 부근에서 만난 법정의 어록

▲  여염집 분위기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 작업 등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  적묵당 앞 동그란 연못 (가을)
물이 태산처럼 고인 연못에는 한 세상 진하게 살다간 연들이
쓸쓸히 잎을 접고 있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동네 골목길 같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
부터 17시(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인원이 찼
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 된다.

길상화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았던 석가여래
와 관세음보살 누님, 지장보살 형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
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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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4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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