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  백인제가옥 안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추
앙받고 있는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이 있다.

북촌은 안국역 이북이자(원래는 청계천 이북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 1,000채가 넘는
한옥들이 널려있으나 정작 속시원히 개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북촌
제일의 고래등 기와집으로 꼽히는 가회동 백인제가옥이 2015년 11월, 세상을 향해 그 대
문을 활짝 열었다.
북촌한옥마을에서 고래등급 한옥으로써는 사상 최초로 빗장을 연 의미 깊은 현장으로 이
런 좋은 곳은 미리미리 발자국을 찍어 둬야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법이
다. 하여 고래등 기와집의 좋은 기운도 훔칠 겸, 늦가을 평일을 이용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자유관람으로 30분 동안 예습 차원에서 1바퀴 둘러보고 바로 가이드투어로 50분 동
안 가옥 내부(안채, 사랑채, 별당 내부까지)까지 말끔히 둘러보았다.


▲  있는 자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새로 거듭난
백인제 가옥 입구 (오른쪽 한옥은 관리사무소로 예전 바깥채)


 

♠  20세기 초반 상류층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가회동 백인제 가옥(白麟濟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백인제가옥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백인제가옥 입구를 들어서면 한옥으로 된 관리사무소와 공터, 그리고 솟을대문이 차례대로 펼
쳐진다.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한옥은 원래 가옥 바깥채로 세월의 고된 때를 간직한 채, 우중층하게 있
던 것을 손질하여 사무실과 화장실을 두었다. 바깥채 동쪽에는 차량들을 위한 검은 철제 대문
이 있었고 서쪽은 담장과 골목으로 막혀있었으나 바깥채 동쪽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서 대문
을 밀어버리고 돌담을 둘렀으며, 대신 서쪽을 뚫어서 가옥 입구로 삼았다.

솟을대문 앞 공터 동쪽에는 쉼터가 조촐히 닦여져 있는데, 가이드투어를 신청했을 경우 지정
시간까지 그 쉼터로 와서 대기하면 된다.


▲  예전 백인제 가옥 바깥채 (2011년)

▲  남남이 되버린 바깥채 동쪽 한옥과 담장

바깥채 동쪽 담장 너머에는 깔끔한 모습의 한옥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
대 한옥처럼 보이지만 그 집도 엄연한 백인제가옥의 일원으로 그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매각
했다.
현재는 친일 성향을 보이는 롯데 회장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도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한옥 별장까지 둔 그것들이 몹시 부러울 따름이다. 백인제가옥의 태생
도 그리 좋지는 못한 편인데 (친일파 한상룡이 지었음) 그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친
일 성향 기업이 바로 옆에까지 들어와 북촌의 꿀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  솟을대문에 걸린 백인제가옥 현판의 위엄

▲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서쪽 부분, 중문간채

가옥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솟을대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대문도 주인을 닮는다고 졸부
들의 부질없는 자존심이 아직까지 깃들여진 탓일까? 그렇다고 문짝이 사용 불가일 정도로 부
실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정면에 보이는 대문이 빳빳하게 닫혀 있으니 처음 온 사람
은 '이거 개방된거 맞어?' 당황할 터,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문 옆에 난 조그만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니까.
솟을대문에는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한글 현판이 높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개방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한글로 점잖게 쓰인 점이 이채롭다.

솟을대문을 지닌 건물을 대문간채라고 한다. 대문을 중심으로 5개의 방을 지니고 있는데, 이
들은 궂은 일을 담당하던 아랫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지금은 3개의 방을 활용하여 백인제가
옥의 100년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4명의 인물(한상용, 최선익, 백인제, 최경진)을 다루는 공
간으로 쓰이고 있다. 가옥과 인물에 대한 설명과 사진, 시청각 자료가 있으며,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 된다. 또한 일반 관람시 가옥에서 유일하게 발을 들일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가옥의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솟을대문 안쪽 모습과 대문간채

① 시작이 좋지 못했던 백인제 가옥, 가옥의 1대 주인, 친일파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이 가옥을 지은 한상룡은 돈 꽤나 주무르던 친일파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인근 재동(齋洞)
에서 태어났다. 그 부친도 더러운 친일파지만 아들도 그 못지 않은 친일파로 악질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이완용(李完用) 또한 그의 외삼촌이다. 아주 집안과 외가까지 쌍으로 더러운
존재들인 셈이다.

1898년 왜열도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1903년에 왜국(倭國)이
친일파 왕족인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의 조카)을 앞세워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세울 때,
총무가 되어 실질적인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친일파 집안의 배경이 컸을
것이다.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위원으로 참가해 적지 않은 돈을 쥐기도 했으며, 1923년
한성은행 두취(頭取)로 취임했다. 그리고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評
議長)을 지냈으며, 그것도 모자라 데라우치 총독의 동상을 세우고, 안중근(安重根)에게 처단
된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심지어는 1919년 왜정(倭政)에게 조선 사람들 모두 왜식으로 창씨개명을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각종 친일 단체에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며 많은 돈을 전쟁에 내놓았으며, 관동
군(關東軍)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기도 했다. 이런 더러운 공로로 왜정에게 많은 훈장을 받
았고, 중추원(中樞院) 참의,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1935
년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하나로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부부가 쌍으로 왜정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넘겨졌으나 이승만의 농간으로 풀려났으며, 1947년 그 더러
운 목숨을 강제로 놓으며 지옥으로 떨어졌다.

한상룡은 가회동 이곳을 점찍어두고 1906년부터 이 일대를 매입했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 압
록강 흑송(黑松)이 소개되자 그 나무를 대량으로 구입해 7년 동안 터를 다지고 공사를 벌여
1913년 7월 완성을 보았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친분이 있는 왜인 사업가와 왜정
관료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왜정 총독도 초청하여 술을 대접했다. 또한 미국인 석유
사업가인 록펠러2세도 다녀가는 등, 집의 위세가 대단했다.
허나 한상룡이 은행을 잘못 굴려 적자가 커지자 1928년 6월 한성은행에 집을 넘겼다. 은행 소
유로 바뀌자 천도교 단체가 손병희(孫秉熙) 집과 가까운 이곳을 종종 빌려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및 회합 장소로 사용했다.


▲  중문간채 앞에서 바라본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대문간채 동쪽 방에는 백인제 가옥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백인제가옥의 잃어버린 부분이다.


가옥의 2대 주인,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언론인, 최선익(崔善益, 1905~?)
최선익은 개성 출신 부유층으로 불과 19세인 1924년 조선일보사에 주주이자 기자로 언론 활동
을 시작했다. 1932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했는데, 여운형(呂運亨)을 사
장으로 두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한성은행에서 매물로 나온 가회동 한옥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1935년 1월 29일 인수했다. 친
일파로 더러운 발자국을 남겼던 1대 주인과 달리 오랜 시간 민족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집에
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솟을대문의 위치를 지금처럼 변경하고 필지 정리를 했다.
허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1944년 백인제에게 매각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를 알 수 없다.

③ 가옥의 3대 주인, 집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백인제(白麟濟, 1898~?)
백병원 창립자로 유명한 백인제는 왜정 시절 외과 의사의 1인자이다. 1915년 평북 정주의 오
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 투옥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나 1921년 복교하여 졸업을 했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수(조교), 총독부의원으로 일하다가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게 된다.

1928년 왜열도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바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5년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그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에 1년 6
개월간 프랑스와 독일, 미국에 유학을 갔었고,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백
외과(현재 백병원)를 세워 병원 원장이 된다.

그는 의술, 특히 외과술이 뛰어나 고위층들이 그의 진료를 받고자 줄을 길게 섰다고 하며, 그
로 인해 적지 않게 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1944년 9월 최선익에게서 이 집을 매입해 자
신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1945년 9월 서울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 겸 부속병원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46년 12월 서울대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다음달 그만두
었다.
1948년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미처 피신을 가지 못해 2대 주인,
최선익처럼 북한으로 납치되어 아직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는 이 땅의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사냥을 좋아하여 종종 북한산(삼각산)으로 사냥
을 나가 맷돼지나 토끼 등을 뜨락에 던져놓고는 구워먹기도 했다. 장인과 장모를 위해 집 서
쪽에 별채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서재필 박사를 초청해 연회를 열기도 했다.

④ 가옥의 4대 주인,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崔炅珍, 1908~2011) 그리고 그 이후
백인제가 납북되자 집의 안주인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되었다. 소유기간이 1968년부터라고 하
니 이때부터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한 듯 싶다.
그는 1928년 백인제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으며, 백병원의 2대 이사장으로 병원을 재건하
는데 노력했다. 1988년 8월까지 집을 소유하면서 일부만 손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에 가
까운 모습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1977년 3월 서울시 지방민속자료(현 지방민속문화재)
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1988년 아들인 백낙훤에게 소유권을 넘겼으며, 2009년 11월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서울시 소유
가 되었다. 2012년 혜화동(惠化洞)에 있는 시장 공관(公館)이 한양도성 복원과 유네스코 등재
사업으로 인해 개방이 결정되자 공관 대체 장소로 백인제가옥을 정했다. 허나 문화유산 훼손
과 친일파 한상룡이 매국노 행위를 했던 현장이라며 비난이 쏟아지자 2013년 5월 그 야심을
버렸으며, 이곳을 속세에 열기로 결정하고 2015년 10월 부분 개방을 거쳐 11월 완전 개방되었
다.

⑤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백인제가옥의 구조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가회동 언덕 2,460㎡에 닦여진 이 집은 장대한 규모의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에 두고 대문간채, 중문간채, 별채를 지었으며,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별당을 두었다.
정원을 넓게 닦고 갖은 화초를 심었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던 기존의 전통 한옥과 달리
왜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어 서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굳이 바깥을 나갈 필요가 없이 사랑채
와 안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도 안에 있었음)
또한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했으니 이는 당시로는 생소한 건축 자재로 부를 과시하
고자 함이며, 안채 일부가 2층으로 되어있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20세기 초반 근대 개량한옥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북촌 제일의 한옥인 안국동 윤보선
가(尹潽善家, 사적 438호)와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으로 윤보선가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
랑한다. (윤보선가는 아직도 비공개임)

끝으로 가옥 이름을 백인제가옥으로 한 것은 별 이유 없다. 백인제와 그의 부인, 자녀들이 60
여 년을 살던 집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상룡의 더러운 이름을 붙일 수
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시작은 영 좋지 않았으나 그 다음 인수한 사람들로 인해 일종의 면죄
부를 받게 되어 북촌 제2의 한옥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100년 이상 묵은 잘 남아있는 근
대한옥이니 지방문화재보다는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승급시켜도 손색은 없다고 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93-1 (북촌로7길16, ☎ 02-724-0232)


 

♠  백인제가옥 바깥 둘러보기

▲  사랑채 (대청마루와 사랑방)

대문간채에서 붉은 벽돌문을 지나면 바로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사랑채가 마중한다. 사랑
채는 집 주인과 아들 등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책을 보는 서재의
기능도 같이 했는데, 넓직한 대청으로 이루어진 사랑방은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
는 규모이며, 방의 4면이 마루로 둘러싸인 특이한 구조이다. 사랑 대청은 전통 한옥의 우물마
루 대신 장마루를 깔았으며, 사랑채 내부는 가이드 투어 시에만 진입이 가능하다.

▲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로 이어지는
붉은 벽돌문

▲  동쪽 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  바깥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마루 (왼쪽은 사랑방)
집 안에 둔 물건 상당수는 백인제 가족이 쓴 것이 아닌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다.

▲  상류층 한옥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사랑채 뜨락
뜨락의 구석 가장자리에는 온갖 화초를 심어 뜨락을 아름답게 수식했고
뜨락 한복판에는 잔디를 입혀 부잣집 뜨락의 위엄을 보이게 했다.

▲  뜨락 동쪽에 심어진 키 작은 소나무
백인제가 심은 나무로 여겨진다. 주인은 오래전에 가고 없지만
나무만은 잘 살아남아 주인의 빈자리를 보듬는다.

▲  뜨락 구석에 조촐히 닦여진 산책로

뜨락 구석에 약간 높게 터를 다져 박석을 깔고 조촐히 산책로를 내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화
초와 소나무를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니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뜨락이 너무 넓어서
박석 산책로까지 냈을 정도이니 왠만한 졸부집 이상급임을 보여준다.
산책로는 사색의 역할도 한다.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생각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
다. 집을 지은 한상룡은 이 길을 거닐면서 어찌하면 왜정에 잘보여 부귀영화를 누릴까? 그 생
각을 했을 것이고, 백인제는 어떻게 하면 병원이 잘되고 외과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
을 했을 것이며, 최경진 여사는 납북(拉北)된 남편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  뜨락 구석 산책로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단풍나무 밑에 자리한 사랑채 뒷쪽 벽돌문
벽돌문에서 사랑채 굴뚝까지 벽돌담이 있었다. 그렇게하여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를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완전 가린 것이다. 허나 돌담은 무너져
흔적만 화석처럼 남아있고, 반쯤 열린 벽돌문만 전하고 있다.

▲  사랑채(왼쪽)와 2층 부분(오른쪽)

백인제가옥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채 뒷쪽에 달린 2층 공간이다. 한상룡 시
절에 귀빈 접대용으로 주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기생까지 소환해 질탕나게 술마시고
놀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왜정 고위층과 친일파가 저곳을 들락거렸을까?
현재는 2층 보호와 계단 부실을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사랑채 위에 덧씌운 2층 부분
집 주인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뒷쪽 벽돌문과
벽돌담의 흔적

▲  툇마루를 갖춘 안채 뒷쪽 부분


▲  백인제가옥의 뒷쪽, 안채 뒷쪽 주변
뜨락 북쪽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나무를 심고 돌을 다져 조촐하게 동산을 자아냈다.

▲  별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안채 뒷쪽 부분

▲  안채 서쪽에 있는 부엌

식구도 많고, 부리는 사람도 많고, 거기에 손님도 늘 많았기에 부엌 또한 넓게 닦았다. 안방
쪽으로 부뚜막을 만들어 솥을 달고 장작을 이용해 불을 피웠는데, 이는 음식도 만들고 안채
난방도 고려한 기능이다. 부엌 바닥은 지표면보다 낮고 거의 흙바닥이며, 옆에는 부엌 살림살
이를 담당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찬방(饌房)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들의 거처이기도 하
다.


▲  완전 박제된 부엌처럼 되버린 안채 부엌 내부

왕년에는 부뚜막에서 연기가 꺼질 일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언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는지
가물가물할 정도. 더군다나 이제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고 지체 높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더욱 손대기가 그럴 것이다.
이렇게 박제된 모습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가끔은 부뚜막을 깨워서 체험 이벤트를 해보는 것
은 어떨까 싶다. 부뚜막에서 지은 밥과 누룽지, 숭늉, 국 등을 먹어보는 도심 속에서 즐기는
옛 맛 체험 말이다. 아니면 저렴한 가격에 포장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그만큼 이렇
게 놀려두기가 아깝다는 뜻이다. (영화 '암살'의 촬영장소로 잠시 쓰인 적이 있음)


▲  안채 서쪽에 자리한 별채

별채는 백인제가 그의 장인, 장모를 위해 지은 공간이다. 별도로 대문을 내어 가옥의 서쪽 문
으로 삼았는데, 처가 어른까지 모두 끌어안고 살 정도로 처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며, 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집은 빈 공간이 되었다가 현재는 남쪽의 'ㄷ'자형 한옥과 함께
운영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문은 굳게 닫힌 채 무늬만 남아있다.


▲  부연이 쳐진 운영사무실 한옥과 별채(뒷쪽)

▲  안채 정면과 뜨락 (태극무늬 마크가 달린 부분은 사랑채 복도)

안채는 집의 안주인, 즉 가옥 주인 부인의 생활 공간이다. 부인 뿐 아니라 어머니와 며느리,
딸 등 집안 여인들의 공간으로 안채의 중심인 안방은 오로지 집안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백인제가 이북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그의 부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된 이후, 안채 안방과 대
청이 집의 중심이 되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가이드투어 때도 바로 안채에서 안으로 들어선다.
(사랑채로 들어가지 않음)


▲  흑백과 칼라의 조화, 사랑채와 안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 복도 바깥 벽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벽 한복판에 태극무늬 마크가 또렷히 새겨져 있다. 그냥 흑백TV 같은
다른 벽무늬 보다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부분이 마치 칼라TV처럼 더욱 돋보인다.


▲  안채 서남쪽 부분과 늦가을이 곱게 깃든 단풍나무
가을도 이곳의 공개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이렇게 곱게 다녀간
흔적을 남겨놓고 갔네. 안채 서남쪽 끝부분에는 집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이 있다.

▲  지붕의 추녀 곡선이 아름다운 중문간채 (가운데가 안채로 인도하는 중문)

▲  뚜껑이 닫힌 술 수장고 (중문 안쪽에 있음)
수장고에는 집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온갖 귀한 술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망라한 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괜히
열어보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인생만큼이나 허무한 짓이니까.


 

♠  백인제가옥 내부, 별당 둘러보기

▲  별당으로 인도하는 산책길

가이드투어 시간까지 백인제가옥을 살랑살랑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솟을대문 밑 쉼터로 내려
갔다. 지금까지는 예습 차원에서 가옥 바깥을 자유롭게 둘러보았지만 이제는 급을 높여 심화
학습 및 복습 차원에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가옥 내부까지 투어를 하게 된다. 투어 시간이
되자 곱게 개량 한복을 차려 입은 아줌마 가이드가 나와서 인사를 하며 안내를 해준다.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벽돌담, 사랑채 뜨락을 둘러보고 가옥 북쪽 돌담을 따라 이어진 약간
오르막의 산책로를 오른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나무와 화초가 무성해 산속 별장으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왼쪽 나무 너머로 안채와 사랑채 2층 부분이 보이며 오른쪽은 돌담으
로 그 너머로 북촌 일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별당이 손짓한다.


▲  돌담과 함께 이어진 별당 산책길

▲  돌담 너머로 북촌 북부가 바라보인다. (계동, 가회동 지역)

▲  백인제가옥의 조촐한 피서지, 별당(別堂)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북쪽이자 하늘과 맞닿은 곳에 시원스레 팔작지붕을 휘날리고 있는 별당
이 있다. 누마루 형식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1층에는 돌기둥과 계단을 세워 건물의 키를 높였
고 그 2층에 방을 두었는데, 정면에 유리창을 내고, 돌담도 1층 높이 밖에 되지 않아서 정면
이 훤히 트여있다. 북촌 북부는 물론 북악산(백악산)까지 시야에 잡히나 시야의 범위는 그렇
게 넓지는 못하다.
집 주인과 가족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거나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으며,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
람이 솔솔 들어오는 피서철 명당으로 백인제는 여기서 온갖 상념을 즐겼다고 전한다.


▲  별당 주변에 둘러진 정겨운 토담

집 주인이 별당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별당의 갑옷인 주변 돌담까지 적지 않은 정성을 들였다.
흙과 자연막돌로 담을 쌓아 그 위에 암키와를 올렸는데, 담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얀 피부
의 수막새를 엇갈리게 배치해 담장의 아름다움을 고려했다.
담장의 미(美)도 고려하여 아무리 밤손님이라도 저 담장만큼은 아껴줄 것 같다. 비록 무지 오
래된 존재는 아니나 20세기 근대 고래등 한옥의 생활상과 상류층의 팔자 좋던 인생을 보여주
는 현장으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다행히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되었으니 망정이지 계
속 졸부들의 전용 공간으로 남아있었더라면 그 미움은 더했을지도 모른다.


▲  별당 방에 홀로 자리한 병풍 (내용은 모름, 이곳과는 관련 없는 존재)

▲  고래등 기와집 속의 별천지, 별당 누마루

별당 내부는 오로지 가이드 투어 때만 들어갈 수 있다. 즉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비싼 구역이
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 마루를 들어서면 바로 방인데 방 동쪽에는 별
당의 백미인 누마루가 펼쳐져 있다.
누마루는 누각 형태로 이루어진 마루방으로 집 주인은 여기서 손님과 곡차 1잔 하거나 가족들
또는 혼자 휴식을 취했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솔솔 들어와 몸을 간지럽히니 여름 제국(
帝國) 시절에도 이곳만큼은 여름을 잊어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가옥 내부에서 조망이 제일
괜찮은 곳으로 담장 너머로 가회동과 계동, 북악산(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아무리 언덕에 지었다고 해도 높이가 낮기 때문이다.


▲  별당 누마루에서 바라본 북촌 북부 (가회동, 계동)

▲  남쪽에서 바라본 별당과 별당으로 인도하는 날씬한 기와문
집 속에 다른 집이 들어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이곳은 넓고 크다.

▲  왕비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안채 대청

별당을 둘러보고 안채로 이동했다. 안채 역시 실내화로 갈아타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루
로 이루어진 대청은 안주인의 생활공간으로 그가 앉던 평상(平床) 모습의 높은 의자와 탁자,
방석 등이 놓여져 그들의 높은 위치를 보여준다. 허나 이들은 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닌 서울시에서 구한 늙은 생활 유물로 가옥의 품격에 맞추고자 이런 것을 갖다놓은 것이다.
어쨌든 집 규모부터가 으리으리하니 서민 스타일의 내 눈이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한다.


▲  백인제와 최경진의 빛바랜 혼인 사진 (1928년)
가옥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이곳과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 사진만큼은
이곳을 거쳐간 사람(최경진)이 남기고 간 몇 안되는 진품의 하나이다.

▲  안채 대청과 안방

▲  안채 안방
대청마루 옆에 안주인이 머물던 안방이 있다. 지금은 바깥에서 수집한 생활유물이
안방을 채우고 있어 마치 민속마을 한옥 방을 보는 듯 하다.

▲  안채 윗방
안방 바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방으로
안주인의 옷과 살림살이, 귀중품을
보관하던 장과 농, 반닫이 등을 두었다.

  ▲  안채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할머니방
대청 (오른쪽이 할머니방)


▲  안채 할머니방
안살림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시어미가 생활하는 방이다. 문 앞에 별도의 대청과
복도를 두었으며, 안방에서 복도로 연결은 되지만 중간에 양식문이 있어
안방 영역과는 분리된다. 이곳에 있는 물건 역시 서울시에서 수집한
민속 유물이다.

▲  부엌과 연결되던 안방 서쪽의 조그만 방

▲  안방 서쪽에 숨겨진 다락방 (부엌 바로 윗쪽임)
지금은 허공처럼 비어있지만 왕년에는 부엌에서 쓰던 식재료와 생활도구 등을
잔뜩 머금은 창고였다.

▲  안채 건넌방

안채 건넌방은 며느리가 머물던 공간으로 사랑방과 안방 중간에 자리한다. 시아비가 며느리를
이뻐해주니 시아비의 소환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자리를 잡은 듯 싶고, 바로 남
쪽으로 집주인 아들방과도 이어지니 아들 부부를 가까이에 있게 하려는 배려도 은근 엿보인다.
방 북쪽에는 별당처럼 시원한 누마루를 만들어 조촐한 피서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바깥 외
출이 쉽지 않았던 며느리를 배려하고자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  안채 건넌방의 특별함, 누마루
여인들의 공간이라 발을 쳐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했다. 한여름에 저기서
자는 잠은 그야말로 꿀잠이겠지~!

▲  안채에서 사랑채(사랑방, 작은 사랑방,
사랑 대청마루)를 이어주는 복도
복도 끝에는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데,
이는 최경진이 설치한 것이다.


▲  건넌방 주변 방에서 만난 고풍스런 가구와 동그란 그림
서울시에서 구입한 생활 유물로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다.

 ◀  사랑채 뒷쪽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서로 이어져 있고, 그
복도로 경계를 삼고 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구역인데, 왼쪽에 삐
죽 나온 대각선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2층은 한상룡이 왜정의 고위층을 불러 배때기
늘어지게 놀던 현장으로 이후 다락방으로 쓰이
다가 지금은 금지 구역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
다. 계단이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다소 위험하
고, 2층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다.


▲  사랑채 사랑방

사랑채 사랑방은 집 주인의 거처로 서울시에서 수집한 여러 가구와 병풍 등이 주인이 없는 방
을 채워주고 있다. 서랍이 많이 달린 가구 위에는 이곳을 거쳐간 백인제의 흑백 사진 3점이
놓여져 있어 생전의 잘나갔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사랑방에 놓인 백인제의 빛바랜 사진들

▲  고급진 모습의 사랑채 대청
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다. 개인적인 친분의
사람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여기서 대접을 받았으며,
창 밖으로 사랑채 뜨락이 훤히 바라보여 시야도 좋다.

▲  정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 탁자와 의자들

▲  빛바랜 사진 1장

사랑채 대청에는 백인제 가족이 남긴 흑백사진이 하나 놓여져 있다. 백인제가 서재필(徐載弼)
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고 사랑채 뜨락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으로 순 남자들만 있는 가
운데 여자 1명이 사진 중앙에 홍일점이자 옥의티처럼 자리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일까? 그는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으로 서재필이 사진 중앙에 있어
야 되지만 사람들의 양보로 부인을 중앙에 앉힌 모양이다.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긴
머리에 꽃잎으로 보이는 머리 장식을 달고 있는데, 얼굴 또한 괜찮게 생겼다. 남자들 속에 있
어서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향하며 시선 일탈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부인의 왼손 쪽에 앉은 이가 서재필이다. (백인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음)


▲  중문간채 중문

사랑채를 둘러보고 안채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채 뜨락에서 중문까지 나머지 설명을 들
으면서 40여 분에 걸친 가이드투어는 쿨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이드는 관리사무소로 내려갔고, 나는 그냥 사라지기 아쉬워 중문 주변에서 두 발을 멈추었
다. 이렇게 백인제가옥을 최대한 갈 수 있는 범위까지 모두 가본 것이다. 자유관람과 가이드
투어를 포함한 관람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서울시는 이곳을 일종의 민속박물관으로 삼으려
고 오래된 생활유물을 수집해 비어있는 방과 부엌에 배치하고 있다. 그들 덕에 방의 허전함은
많이 가셔진 상태. 그들도 없었다면 무척 허전했을 것이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에는 방이 무
지 많아 숨바꼭질을 벌여도 될 정도이다. 사랑채 지붕 위에 만든 2층 방과 부엌 위에 만든 반
2층짜리 방 등 숨겨진 방도 많으니 말이다.

10여 분 정도 사랑채 뜨락과 솟을대문 주변에 머물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고래등 기와
집 대문을 나섰다. 이렇게 하여 백인제 가옥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다음에는 윤보
선가옥도 꼭 개방되어 이렇게 글을 남겼으면 좋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1월 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