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지붕 11가족의 특이한 절집이자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이색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
주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5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지붕의 좌우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의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걸어 이곳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오르면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잔뜩 건물을 지어놓은 인왕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각 건물
마다 다른 종단과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며 따로 놀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인왕사가 지닌 개성이자 결점이
다.
인왕사는 5개 종단에 무려 11개의 절이 가람을 이룬 독특한 형태의 절이다. 그러니까 인왕사
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형성하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
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달라 따로 놀고 있는데, 다행히 4년에 1번씩 인왕
사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이곳의 전반적인 살림을 맡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한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
락전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와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외에는 지붕과 이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될 것이다. |
▲ 인왕사 경내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경내 건물은 모두 근래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향기는 누리기
힘들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원래부터 인왕사와 관
련이 없는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지어진 인왕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관
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몇몇 자료에는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
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開京)에서 한양(서울)으로 국도(國都)
를 옮겼는데,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있던 승려 조생
(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다.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
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불렀고, 산
의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이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태조가 세운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
도 가끔씩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은 인왕사를 비롯해 인왕산에 있던 복세암(福世庵)과 금강굴(金剛窟)이 경복궁
(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들과 함께
부
셔버렸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군주라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지금의 자리에 선암정사(禪巖精舍)를 세웠다, 아마도 선바위
의 덕을 보고자 그 자리를 택한 듯 싶은데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쓰지
않았다.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大願庵)을 지으니 그때부터 인왕사의 한 지붕 다
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 극락전(極樂殿)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인왕사 윗쪽으로 넘어와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 극락
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리고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
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었다. 하여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그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
터 산악신앙(山岳信仰)과 기자신앙(祈子信仰)이 어우러진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地)였
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무속의 중심지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에는 대자연이 빚은 개성파 바위들이 즐비하며, 선바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골짜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좋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산악신앙이 거리낌없이
어우
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 국사당(國師堂) - 국가 민속문화재
28호 |
선바위를 향해 오르다보면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늙은 티가 그리 와
닿지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기부터
있던 신당(
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러 무속신(巫俗神)을 봉안하고 있
으며, 무학대사를 봉안한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 꼭대기의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1396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여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여겼는데
,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
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살아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때 강제로 정
든 곳을 떠나야 했다. 1925년 왜정이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었는데, 국
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하여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며 명당(明堂) 자리에 속하는 현 자리로
둥지를 옮겼다.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하 기초
는 없다.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치
큰
새
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하러 온 이들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의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하여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
드러나있으며, 당시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
▲ 위에서 바라본 국사당 |
국사당은 자주 굿이 열리는 편이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와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며, 김명권이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라고 한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과 10
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
는데, 이때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국가 민속문화재 17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그림에 담긴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
부인, 호구아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
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
신(軍雄大神), 금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무신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
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
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인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
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
|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
무신도 중 태조
이성계를 머금은 아태조(우리의 태조라는 뜻)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고 전한다.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란 설도 있다. 허
나 태조의 그림이 있고 그림의 주인공이 강씨이니 그 마누라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사당 안에서는 마침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문은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
지 못했으며, 기분 같아서는 흔쾌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무신도를 사진과 나의 망막에
싹 담고 싶었으나 외부인에게는 거의 인색한 곳이라 그만두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 30번 넘
게
왔음에도 내부 구경도 제대로 못했고, 무신도도 아직 사진에 담지도 못했다. (굳이 공개하
지
않는 것을 결례를 무릅쓰고까지 봐야될 이유는 없음, 관람에는 예의가 필요함)
* 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12 (통일로18가길 20) |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있는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