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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서촌 산책



~~~ 인왕산과 북악산 그늘에 깃든 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들 ~~~

백운동천 바위글씨

▲  백운동천 바위글씨 (백운동계곡)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경기상고와 북악산(백악산)

▲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  경기상고와 북악산(백악산)

 



 

경복궁 서쪽에 넓게 자리한 서촌(西村, 웃대)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다. 10년 넘
게 그 일대를 구석구석 많이도 돌아다녔지만 그럼에도 나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사각지대
가 일부 고개를 들며 내 심기를 은근히 건드린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서촌 등 서울의 미
답처(未踏處)는 도저히 못참는 성격이라 늦가을의 한복판인 10월의 끝 무렵, 서촌의 미답
처를 잡으러 출동했다.



 

♠  경기상고(京畿商高)와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  경기상고 본관과 그 뒤로 보이는 북악산(백악산)

서촌의 북부(北部)를 이루고 있는 청운동(淸雲洞)에는 100년 역사를 지닌 경기상고(경기상업
고등학교)가 있다. 이곳은 서촌의 북쪽 끝으로 북악산(백악산) 서남쪽 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학교 바로 뒤에 북악산이 우뚝 솟아 있어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경기상고는 1923년 5월 14일, 종로구 동숭동(東崇洞)에서 '경기공립갑종상업학교(京畿公立甲
種商業學校)'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경기도에서 세운 최초의 도립학교로 경기도상(京畿道
商 )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서울 도심에 왠 경기도립학교인가? 고개가 갸우뚱하겠지만 왜정(
倭政) 시절 서울은 경기도의 일원이었다. <경기도 경성부(京城府)라 불림>
그 시절 시범적으로 조선 학생과 왜열도 학생을 한 교실에 두어 가르친 한일공학 중학교로 학
교 자리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이 들어서면서 1926년 4월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다.

1927년 제1회 졸업생 85명을 배출했고, 1946년 경기공립상업중학교로 이름을 갈았으며, 서울
이 경기도에서 분리되자 서울시로 운영권을 넘겼다. 1950년 5월, 서울상업고등학교로 이름을
갈고 경기상업중학교를 세웠으며, 경기상업중교는 청운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분리되었다.
1968년 경기상고로 이름을 갈았고 1984년에 학교의 역사를 집대성한 백악기념관(白岳紀念館)
을 세웠다. 그리고 2007년 중소기업청 지정 특성화 전문계고교로 선정되는 등, 장안 제일의
명문 상고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교내에는 1926년에 지어진 붉은 피부의 2층짜리 본관(本館)과 청송당(聽松堂)이 있어 학교의
깊은 역사를 속삭이고 있으며, 본관 앞에는 80~90년 묵은 소나무들이 숲길을 이루고 있어 학
교의 명물이 되어준다.
본관과 청송당, 본관 앞 화단은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 본관 및 청송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 584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본관 앞에 펼쳐진 소나무 숲길
80~90년 묵은 소나무들이 길게 가로수를 이룬다.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그윽하니 공부는 정말 잘될 것 같다.

▲  강당으로 쓰이고 있는 청송당과 백악의 정기 표석
여기서 백악(白岳)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그의 품에 안겨져 있으니
그의 정기를 듬뿍 누리고 싶은 학교의 마음은 당연하다.

▲  학교 발전에 이바지한 화정 이상덕의 흉상

▲  이상덕 흉상 뒤에 자리한 연못


▲  학교 뒷쪽에 숨겨진 청송당(聽松堂)터 표석

▲  바위에 새겨진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바위글씨

내가 경기상고를 찾은 것은 여기가 내 모교도 아니요. 그렇다고 학교를 조사하러 온 것도 아
니다. 바로 교내 뒷쪽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청송당유지 바위글씨'를 보기 위함이다.
요즘 오래된 바위글씨<어려운 말로 각자(刻字)>에도 퐁당퐁당 빠져 그를 찾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는데, 서울 땅에는 수많은 바위글씨가 전하고 있어 나를 격하게 설레게 한다. 청송당유지
역시 그 글씨의 하나로 그가 있을 것 같은 교내 뒷쪽을 뒤적거리며 숨바꼭질을 벌이다가 교내
제일 북쪽 구석에서 그를 찾아 술래 신세에서 벗어났다.
이 바위글씨는 검게 때를 탄 바위 피부에 깃들여져 있다. 네모나게 홈을 파고 5자를 새겼는데
글씨는 여전히 선명하다. 비록 외진 곳에 있어도 경기상고의 뜨거운 심장과 같은 존재로 교내
앞쪽에 1961년 9월 당시 교장인 맹주천이 청송당유지의 역사를 적은 표석을 세웠다. 그렇다면
청송당은 무엇이고 왜 이곳에 바위글씨가 덩그러니 있는 것일까?


▲  가까이서 본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청송당은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이 세운 집이다. 그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
는 청송, 죽우당(竹雨堂),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글씨를 매우 잘썼다. 죽은 이후 좌의정(左
議政)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서적을 정리한 '청송집'이 전하고 있다.

성수침(이하 청송)은 스승인 조광조(趙光祖)와 친분이 있던 사림(士林) 패거리들이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년)로 무더기로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북악산 서남쪽인 유란동(幽蘭洞,
경기상고 일대)에 집을 짓고 유학 공부와 후학을 양성하며 팔자 좋게 살았다. 당시 유란동은
백악의 2번째 기슭(第二麓)으로도 불렸는데, 그 윗쪽을 대은암동(大隱巖洞) 또는 도화동(桃花
洞)이라 불렀다.

청송당은 경복궁 바로 코 앞이자 도성(都城) 안으로 굳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은 그의 아버지
인 성세순(成世純, 1463~1514년)이 북악산 밑에 집을 짓고 살았던 인연 때문으로 보인다. 청
송의 아들인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년)이 쓴 '성세순 행장(行狀)'에
'백악산 밑에 집을 정했는데 숲이 깊고 땅이 외져 자못 산수의 멋이 있었다. 공무를 마치면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끌며 왕래했다. 계곡마다 두루 찾아다니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갈줄 몰
랐다'
는 기록이 이를 알려준다. 아마도 청송은 아버지의 별장 자리에 새로 집을 지었던 모양
이다.

청송은 집을 짓자 그와 가깝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에게 집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에 눌재는
'서당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모두 소나무이니 곧 그 색이 볼만하고 그 절개가 가상하오'
답을 하여 집 이름을 청송이라 했고, 호까지 '청송'이라 했다. (그때가 1526년임)

청송의 청송당 생활은 정치와 불의를 멀리하며 정말 은자(隱者)처럼 한가롭게 살았다. 임억령
(林億齡, 1496~1568)의 '청송당기'에 따르면
'청송은 새둥지 같은 집에서 약초를 캐어 달이면서 몸을 보양했다. 의롭지 않은 명성과 공명,
부귀 따위는 썩은 쥐나 똥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하였다. 고고하게 누워 몸을 일으키지 않고
서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청송당 구조에 대해서도 임억령은 그의 청송당기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낮은 담을 두르고 소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국화, 두충 등을 심었다.
담 밑에 구멍을 내어 산속의 샘과 통하게 하고 앞뒤에서 굽이돌아 버드나무가 있는 개울로
흘러들게 했다. 그 위에 다리를 놓아 청송당으로 가는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눌재 박상도 한 자 남겼다.
'북악산을 등에 지고 남산을 바라보는데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시냇물이 구비쳐서 흐르
니 암자와 같이 그윽하고 외지기가 형용하기 어렵다. 앞으로는 돌아가신 상공댁을 굽어보게
되는데 곧 청송(성수침)이 병을 고치며 공부하는 곳이다'

지금은 생매장을 당했지만 경기상고 일대에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이를 청송당계곡이라 불렀
는데, 계곡에 다리를 놓고 온갖 나무를 심어 집 주변을 꾸몄으니 비록 규모는 조촐하여도 담
양 소쇄원(瀟灑園) 못지 않은 아름다운 별서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1564년 청송이 죽자, 청송당은 슬슬 거미줄이 끼고 거의 폐가가 되어갔다. 그의 아들인 성혼
도 부친의 별장을 그리 신경쓰지 못한 모양이다.
이를 보다 못한 청송의 후학들이 뜻을 모아 청송당을 중건하려고 했으나 남명 조식(曹植)의
제자였던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청송당 중건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자 중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청송당은 더욱 폐허가 되었고,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갔다가 1668년 청송의 외손인 윤
순거(尹舜擧, 1596~1668)와 윤선거(尹宣擧, 1610~1669)가 중건했다. 이때 송시열(宋時烈)이
기문을 지었고, 송시열과 윤순거, 윤선거,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등은 이를 기념하는 시
회를 열었다. 이처럼 청송당은 단순히 청송의 별장이 아닌 율곡 이이와 성수침, 성혼의 학풍
을 이은 후학들과 서인(西人) 패거리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조촐한 성지 같은 곳이었다.

1751년경 겸재 정선(鄭敾)은 서촌의 명소를 담은 장동8경첩을 그렸는데, 여기에 청송당이 나
온다. 허나 19세기경 감쪽 같이 사라졌고 세월의 저편으로 납치당한 청송당을 그리던 이들이
새긴 청송당유지 바위글씨만이 남아 청송의 흔적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바위글씨는 현재 경기상고 뒷쪽 구석에 있지만 청송당은 그 동쪽인 청운중교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바위글씨가 경기상고 안에 있으니 그곳에 청송당터 표석을 세웠다. 비록 이곳에
서린 멋드러진 운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크게 헝클어졌지만
천하에 어느 누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저 바위글
씨라도 남아있는 것도 다행인 것 같다. 특히 모든 것이 거칠게 변해가는 이 땅의 현실에선 말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89-3 (자하문로 136 경기상고 ☎ 02-737-6490)



 

♠  자하문터널 부근에 숨겨진 오랜 경승지
인왕산 백운동계곡(白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40호

▲  백운동천(白雲洞天) 바위글씨

경기상고 정문에서 자하문터널 쪽으로 가면 터널 바로 직전 오른쪽(동쪽)에 오르막길이 있다,
그 길을 오르면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를 지나면 숲이 나오고, 숲으
로 들어서면 건물터와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천 바위글씨를
만나게 되니 그곳이 바로 인왕산 비장의 계곡인 백운동계곡이다.


▲  백운동천에 말뚝을 박았던 옛 백운장(白雲莊)터

백운동천 바위글씨 남쪽에 둥지를 틀었던 현대식 건물터는 서울 장안의 이름난 고급요정이었
던 백운장과 그 뒤를 이은 요정 건물의 흔적이다.
백운장은 1915년 왜인(倭人)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세운 식당으로 원래 이름은 청
향원(淸香園)이었다. 1929년 백운장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945년 이후 폐결핵요양소로 쓰이
다가 요정으로 변경되어 화남장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허나 요정 사업의 쇠퇴로 문을 닫았고,
건물도 싹 철거되어 황량하게 터만 남게 되었다.


▲  바위에 화석처럼 깃든 백운동천 바위글씨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자하문터널 주변을 백운동(白雲洞)이라 불렀다. 서울의 4
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의 바로 남쪽 밑으로 백운동계곡, 백운동천이라 불리
기도 했는데, 이는 흰 구름이 떠있는 고운 계곡이란 의미이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도 아리송
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으나 조선 초부터 서울 제일의 경승지로 존재감이 북한산(삼각산)만큼
이나 컸다.
조선 초기 사대가(四大家)로 꼽혔던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 1410~1481)과 삼탄 이승소(三
灘 李承召, 1422~1484),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
宗直, 1431~1492) 등이 이곳에 퐁당 빠져 시를 남겼으며, 용재 성현(傭齋 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서울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은 삼청동(三淸洞), 그 다음은 인
왕동(仁王洞), 그 다음은 쌍계동(雙溪洞)과 백운동, 청학동이라 찬양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던 이염의(李念義. ?-1492)는 아예 계곡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에도 백운동 그림이 전한다.

1770년에 제작된 한양도성도, 19세기에 제작된 동여도(東輿圖)에 백운동 지명이 나오며,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준천사실(濬川事實)','한경지략(漢京識略)','육전조례(
六典條例)'에는 개천(開川, 청계천)의 발원지 중 백운동천 계곡이 가장 길고 멀다고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지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이 이곳
에 백운장을 지어 머물렀는데, 백운동천 바위글씨는 바로 그가 남긴 것으로 글씨 서쪽에 아주
작게 '光武七年 東農(광무7년 동농)'이라 쓰여 있어 1903년 동농이 썼음을 알려준다.
독립운동에도 나섰던 동농 김가진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여기서 가까운 신교동(新橋洞)에서 태
어났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 과거에 나갈 수가 없어 1877년 적서차별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인연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되었으며, 1883년 통
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신설되자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
었고,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
다.

나라의 개화 필요성과 방법론을 다룬 봉서(封書)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후 개화정책을 주도하
게 되었다. 특히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반발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했다가 발각되어 유배형을
받기도 했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시찰했다. 그리고 주차일본공
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이 되어 왜열도 동경(東京)에 머물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
대신(駐日本辦事大臣)이 되었다.
왜에 호의적이고 청나라를 멀리하는 태도 때문에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직으로 물러났다
가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어 박영효(朴泳孝)가 추진했던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허나 바로 그해 박영효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며 제4차 김홍
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獨立門)과 독립공원을 조
성하는데 크게 나섰다. 또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적극 가담해 헌의6조의 실행을 촉구하
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06년 스스로
충청남도 관찰사를 자청해 지방에 내려갔다.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1910년 이후 왜정으로부터 남작(男爵) 작위를 받자 9년 동안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거의 잠수를 탔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나섰고, 대동단(大同團)을 창설해 초대 총재로 선출
되었다.

1919년 11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뜻에 따라 그를 중원대륙 상해로 망명시켜 독립선언
서 발표를 시도했으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자마자 왜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하여 동농
혼자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했고, 대동단을 통해 무장투쟁을 계획하
다가 1922년 7월,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대한제국)이 아주 허무하게 망하자 많은 고위 귀족과 황족들은 왜정에 붙었다. 허나 동
농은 협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왜정이 상해임시정부를 우습게 보았으나 김가
진이 가세하자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허나 남작 작위를 받은 것 때문에 한때 친일 행적 논란
이 나오기도 했다.

동농의 집은 장안 제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 위엄이 대단했는데, 백운동계곡의 풍경을 너무
좋아하여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래서 1903년 백운동천 글씨를 남겼으며, 백운장이란 별장까
지 지어 이곳의 일원을 꿈꾸었다.
백운장 부근에 왜인이 세운 청향원이 들어섰고, 동농이 중원대륙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백운장
을 모두 매입해 고급식당을 굴렸다. 1961년까지 요정과 호텔로 쓰이면서 요정 정치의 현장으
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면서 결국 집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터만 남
은 상태이다.


▲  백운동계곡 바위굴
백운동천 주변을 더듬다가 바위굴을 발견했다. 비록 깊이는 얕으나 서울 도심에서
자연산 바위굴은 정말 흔치 않은 존재라 이곳이 정녕 도심 한복판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  백운동천(백운동계곡) 상류

백운동계곡은 인왕산의 주요 계곡으로 서울 도심에 몇 안되는 자연산 계곡이다. 웃대를 가로
질러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면서 동쪽과
남쪽에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서쪽에는 자하문터널까지 생겨 백운동의 아름다운 풍경은 크게
망가졌다.
서촌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흘러가던 백운동계곡 대부분은 생매장을 당했고, 그나마 백운동천
바위글씨 주변에 간신히 실날처럼 남아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곳만 지나면 계곡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이곳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고 2014년 10월 지방문화재로 지
정하여 세월의 뒷편으로 넘어갈뻔한 그곳을 겨우 붙잡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왔지만 이곳 풍경은 그때와 비슷하고 이곳을 알리는 이정표나 안내문도 부실하
여 그야말로 아는 사람들만 살짝 찾는 숨겨진 명소로 머물러 있다. 이 계곡을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 수성동계곡처럼 지나치게 인공티를 내지 말고 주변을 좀 손질하여 역사공원
으로 삼는 선에서 깔끔하게 끝냈으면 좋겠다. 계곡도 청계천까지 싹 복원하면 좋겠으나 이미
시가지가 터질 정도로 들어차있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백운장터의 서쪽 끝 계단

서쪽 계단의 끝에는 건물터가 있다. (백운장이나 그 이후에 지어진 부속건물) 그 너머에는 청
운공원이 있으나 담장이 민통선처럼 꽁꽁 둘러져 있어 넘어갈 수는 없다. 하여 여기서 무조건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나중에 이곳에 사적공원이 꾸며지면 청운공원을 잇는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인왕산자
락길과 인왕산길, 인왕산, 윤동주시인의언덕, 부암동, 북악산(백악산)과 바로 연계가 가능해
져 인왕산과 서촌(웃대), 부암동, 북악산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답사 코스가 태어나게 된다.


▲  백운장터를 지키는 외로운 석등 하나

백운동천 바위글씨를 제외하고 백운장터에 제대로 남은 인공 유물은 석등이 유일하다. 생김새
를 보니 멀리 잡아도 김가진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머물던 1900~1910년대, 가깝게 잡으면 왜
정 때 세워진 것으로 탑 스타일이 왜식(倭式)에 가깝다.
그에 대한 정보는 딱히 전해오는 것도 없고, 자신을 보듬던 백운장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된
충격에 벙어리까지 되어 아무에게도 속삭여주지 않는다. 석등 주변에는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
엽이 수북하게 쌓여 서로 동변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 백운동계곡은 사실상 막다른 외로운 곳으로 북쪽 높은 곳에 청운문학도서관이 있고, 동
쪽 높은 곳에는 붉은 피부의 빌라로 이루어진 청운벽산빌리지가 있다. 서쪽은 길이 막혀있고,
오로지 남쪽만 입을 벌리고 있다. 청운동에 가해진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수려한 풍경을 제대
로 난도질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창의문에서 서울 중심부로 들어설 때 창의문로로 가지 않고 백운동 옆인 청운벽산빌
리지를 거쳐 경기상고로 내려갔다. 그 옛길도 도시화로 사라져 온전하게 더듬기는 어렵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서촌(웃대) 나들이는 백운동계곡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6-6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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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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