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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문묘) 늦가을 나들이



'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 성균관(문묘) 늦가을 나들이 '

성균관의 자랑, 문묘 은행나무

▲  성균관의 자랑, 문묘 은행나무

성균관 명륜당 성균관 대성전(문묘)

▲  성균관 명륜당

▲  성균관 대성전(문묘)

 



 

대자연이 우리에게 내린 4계절 가운데 오색 단풍과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늦가을 풍
경이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4~5월 봄 풍경;)
마치 불고기가 불을 만난 듯 아주 맛있게 익어가는 늦가을은 그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
내기가 정말로 아깝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
장안 곳곳과 즐겨찾기 명소, 산을 찾아다니며 늦가을의 짧기만 한 바지 가랑이를 붙잡는
다. 늦가을은 10월 말에서 11월 중순, 길어봐야 11월 말이 고작이라 정말 후딱 간다.

이번에 찾은 늦가을 명소는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인 성균관(문묘)이다. 이곳은 부근의
여러 즐겨찾기 명소(낙산, 북촌, 성북동 등)가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손과 발, 마음이 잘
가지 않아서 찾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번에 확실히 그곳을 익히고자 성균관으
로 출동했다.



 

♠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서울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 - 사적 143호

▲  성균관 내부로 인도하는 명륜당 서쪽 문

성균관대학교 교내 동남부에 넓게 자리한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오늘
날의 국립 서울대와 같은 존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성균관은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 충렬왕(
忠烈王) 시절인 1289년 성균감(成均監)으로 이름을 갈았다. 여기서 성균(成均)은 음악의 조율
(調律)을 맞춘다는 의미로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것
이다. 즉 쉽게 풀이하면 어느 누구도 편중됨이 없이 모두 균형에 맞게 가르치겠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의미만큼은 참으로 아름답다.

1308년 성균관으로 이름이 갈렸으며, 1356년 다시 국자감으로 바뀌었다가, 1362년 성균관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에도 그 이름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국도
(國都)를 개경(開京)에서 서울(한양)로 옮긴 이후, 1395년부터 숭교방(崇敎坊, 지금의 명륜동
)에 새로운 성균관을 닦았다. 이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양현고(養賢庫
) 등 96칸을 지었으며, 1398년에 완성을 보았는데, 성균관대는 바로 1398년을 학교 창립 연도
로 삼으며 장대한 역사를 내세우고 있다.

성균관은 유교식 교육기관이라 유교의 성현(聖賢)을 봉안하는 제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
래서 문묘(文廟)라 불리기도 한다. (대성전만 따로 문묘라 부르기도 함;) 그러다보니 성균관
또는 문묘라 섞어 부르기도 하는데, 어느 것이든 모두 정답이다.
또한 최고의 교육기관이란 뜻에서 태학(太學)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고구려(高句麗) 제
일의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으며, 주(周)나라 때 제후(諸侯)가 다스리던
도시에 설치했던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보인다. 즉 조선 제일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일개 제후
국의 학교로 낮춘 것이다.

성균관 최고 책임자는 정3품인 대사성(大司成)이다. 물론 그보다 높은 정2품 지사(知事)와 종
2품 동지사(同知事)도 있으나 이들은 다른 관직을 겸하는 겸관(兼官)이었으며, 어디까지나 대
표는 대사성이었다. 그 밑에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정5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과 학유(學諭) 3명
, 정9품 학록(學錄) 3명을 두었으며(인원은 시기마다 조금씩 틀림) 유생을 가르키는 교수직은
22명에서 나중에 38명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는 정3품 제주(祭酒)가 신설되어 1,2품관을 겸직하도록 했으며, 정조(正祖) 때
는 대제학(大提學)이 지사를 겸직했다.

그렇다면 성균관 입학 자격은 어떠했을까?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등, 사마시(司馬
試)에 붙은 사람에게 우선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을 본과생(本科生)이라고 하며, 상재생
(上齋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입학 정원은 처음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에 200명으로 늘어났으며, 조선 후기에 100명으로
축소되었다. 입학 연령은 15세 이상이나 나이 상한을 따로 두지 않아서 50살 먹은 사람도 들
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성균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붙은 사람만 들어간 것일까? 그건 아니다. 늘 예외는 존
재하기 때문이다. 사학(四學)을 배운 유생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를 배우
고 5경(五經) 가운데 1경 이상 익힌 사람은 입학 시험인 승보(升補)를 통해 입학하기도 했으
며, 공신(功臣)과 3품 이상의 고위 관료, 왕족 중에 소학에 능통하거나 문과(文科) 및 생원/
진사시의 초시(初試)에 붙은 사람은 음서(蔭敍)로 쉽게 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이미 관직에
진출한 사람 중에 입학을 원하는 자도 상황에 따라 입학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승보나 음서로 들어간 사람을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불렀으며, 왕
세자(王世子)나 성균관 입학을 원하는 왕자는 음서제의 극치를 보이며 그냥 들어왔다. 물론
그들은 궁궐에서 기본적인 유교 교육을 받고 오기 때문에 입학 자격은 충분했다.

▲  성균관 신삼문(神三門)

▲  성균관 사람들의 시계, 북

성균관 유생은 명륜당 좌우에 설치된 동재와 서재에서 기숙 생활을 했는데, 매월 1일에는 관
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가 4배례(拜禮)를 했다.
매일 동트기 전에 북소리가 1번 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해 북소리가 2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는다. 한겨울 같은 경우에는 대략 새벽 5~6시에 첫 북이 울리고,
일출이 시작되는 7시에 2번째 북이 울린다.

북소리가 3번 나면 다들 진사식당으로 우루루 달려가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는데, 식사 때
마다 원점(圓點)을 하나씩 찍어주었다. 이것이 일종의 출석 체크로 원점 300점을 넘어야 과거
시험 대과(大科)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퇴장하면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또 나면 입정(入庭)하여 상읍
례(相揖禮)를 하고 자기 방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유생이 교수에게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
의를 행한다. 북소리가 2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란(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
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와 '맹자'는 각각 4개월, '시경','서경
','춘추'는 각각 5개월, '주역'과 '예기'는 각각 7개월이다.

그렇다고 유생들이 무조건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치적인 활동 단체인 재회(齋會
)를 두었으며, 나라의 일에 적극 나서 집단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
면 권당(捲堂. 집단 수업 거부),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벌여 제왕을 피곤하게 만들기
도 했다. 그래서 절대왕권을 추구하던 연산군(燕山君)은 성균관 유생들이 건방지다며 성균관
을 일시 폐쇄시키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라에서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지급 받았다. 그러니 성균관에 머무는 동안은 학비 걱정, 생활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교
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으며, 유생 상당수가 잘사는 양반들
이라 찬이 매우 호화로웠다고 한다. 특히 소고기 소비가 많았다고 하며, 성균관 부근 명륜동
사람들이 성균관에 필요한 고기와 채소, 쌀을 납품하여 돈을 벌었다.

▲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  하연대

성균관 교과 과정은 사서와 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가르쳤다. 그 밖에 과문(科文)의 제
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하지만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경(佛經),
기술과 온갖 잡류(雜流), 백가자집(百家子集)은 가르치지 않았다. 오로지 고리타분한 유학만
취급한 것이다.

수업 방식은 먼저 구재 중 1단계인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大諫,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관원이
각각 1명씩 나와서 성균관 교관과 함께 해당 학생에게 질문을 하여 얼마나 이해했는지 따져본
다. 그것을 통과하면 2단계 논어재(論語齋)로 올라가며, 떨어지면 통과할 때까지 대학재에서
나머지 공부를 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논어재, 맹자재(孟子齋), 중용재(中庸齋), 시재(
詩齋), 서재(書齋), 역재(易齋)로 진재(進齋)하도록 했다.
이렇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모두 통과하면 명부에 기재하여 성균관에 보관했다가 과거가 열
리는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해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했다.
즉 과거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수와 유생 사이에는 질의응답식의 토론 수업 방식과 개별 지도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교수
1인당 학생 수를 절대로 10명을 넘지 않게 했다.

성균관은 1398년에 완성되었으나 1400년에 화재로 거의 앉은뱅이가 된 것을 1407년에 다시 지
었다. 이후 계속 증축하여 몸집을 불려갔으나 임진왜란 때 죄다 잿더미가 되고 만다.
1601년 성균관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재정도 여의치 못했고 성균관이 워낙 넓은 탓에 명륜
당 등 우선 급한 건물부터 공사에 들어가 1607년에 상당수 완공을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주
변 건물을 계속 재건하여 17세기 중반에 비로소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1869년에 크게 중건하
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허나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 재정이 늘 바닥을 보였고, 안동김씨 세력이 나라를 말아먹으면서
과거제도 또한 불공정하게 운영되어 성균관의 기능은 차차 약화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이 발표되어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1895년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칙령(勅令) 제136호에 따라 전국의 향교(鄕校)와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지우면서 제사 기능만
수행토록 했다. (그래도 교육 기능은 조금 남아 있었음) 그로 인해 지체 높은 성균관도 국가
최고의 교육 기관의 자리에서 떨려나 유교 성현에게 제삿밥이나 올리며 유교 전통이나 지키는
공간으로 크게 축소되고 만다.
이때부터 성균관 교육은 1887년에 부설된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되었으며, 1910년 이
후 왜정(倭政)은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여 그나마 남은 교육 마저 못하게 하는
한편, 성균관의 명칭을 경학원(經學院)으로 멋대로 바꾸어 버렸다.
이에 전국 유림들은 성균관을 살리고자 여러 활동을 전개하여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했으며, 1933년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성균관의 전통
을 이어나갔다. 허나 왜정의 방해로 1943년 폐교 조치가 되자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간판
을 바꾸었다.

1945년 이후, 명륜전문학교를 다시 열었으며,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
리고 1953년 성균관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종합대학이 되었는데, 이때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초대 학장 및 총장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과 성균관대는 늘 한 몸처럼 지내다가 분리되었으며, (그래도 여전히 한 몸) 전국
에 남아있는 234개의 향교를 관리하고 그들과 함께 유교 사상과 전통문화를 이어가는데 그 역
할을 하고 있다.

▲  묘정비각과 대성전 은행나무

▲  좌측에서 바라본 명륜당

드넓은 성균관은 유교 성현을 봉안하며 제를 지내는 대성전을 앞쪽에 두고, 교육 공간인 명륜
당을 뒷쪽에 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로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존경각, 육일각,
서월랑, 동월랑, 향관청, 서리청, 정록청, 서벽고, 직방, 진사식당, 서재, 동재, 서무, 동무,
제기고, 삼문, 수복청, 전사청, 비천당, 탕평비각, 묘정비각, 숭보사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다. <계성사(啓聖祠) 등 일부 건물은 성균관대 확장 과정에서 사라짐>
경내를 명륜당 구역과 대성전 구역, 성균관의 온갖 일을 돌보던 명륜당 동북 구역 등 3개 구
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비천당과 숭보사는 경내 바깥에 깨알처럼 따로 있다.

성균관 전체는 '서울 문묘와 성균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성전과 동무, 서무, 삼문, 명륜당을 따로 분리해서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이란 어정쩡한 명
칭으로 국가 보물 141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니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삼문은
사적 등급 외에 보물 등급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숭보사는 따로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
위를 누리고 있으며, (현재 성균관과 분리된 상태) 명륜당 뜨락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대성전 뜨락의 은행나무는 서울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부에서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2개가 있다. 명륜당 서쪽 문을 이용하는 것과 동재
동쪽 향문을 통해 들어서면 되며, 그밖에 문은 굳게 봉해져 있다. 그리고 신삼문은 석전대제
가 열리는 날에만 잠깐씩 입을 연다.
지금은 없지만 성균관 서쪽과 남쪽, 동쪽에 조그만 물줄기가 흘렀는데, 바로 북악산(백악산)
동쪽 종점인 와룡공원 부근에서 흘러내려온 것으로 지금은 생매장당해 흔적 조차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일대 (성균관로 25-1, ☎ 02-760-1472)
* 성균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살짝 월담을 한 성균관 뒷쪽 돌담



 

♠  성균관 명륜당 동북쪽 구역

▲  존경각(尊經閣)

세상을 향해 활짝 입을 연 명륜당 서쪽 문을 들어서니 바로 명륜당의 육중한 뒷통수가 위압적
으로 다가온다. 그 뒷쪽에는 석축을 쌓고 대나무와 소나무 등 온갖 꽃과 나무를 심어 조촐히
숲을 닦았는데, 그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존경각이 별도의 돌담을
들이밀며 자리해 있다.

존경각은 지금의 도서관으로 성종(成宗) 시절 성균관에 책이 부족하자 한명회(韓明澮) 등의
건의로 1475년에 지어졌다. 보통 장서각(藏書閣)이란 이름을 많이 쓰지만 성종은 유교 경서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존경각'이란 이름을 내리고 많은 책을 하사했다.
책은 보통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인출되는 것을 받았는데, 책이 부족할 때는 지방에서 인출
되는 책을 납본하게 했으며, 명/청나라에서 수입하기도 했다. 소장 도서는 모두 유교, 성리학
에 관한 것으로 기타 사상과 기술 관련 책은 일절 없었다.

1514년 소실된 것을 재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책 태반이 잿가루가 되버려 남은 책은 1,2종에
불과했다. 하여 급한데로 더러워지거나 낡은 책이라도 비치해 사용하다가 1626년 건물을 중건
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소장 서적을 불려가다가, 1895년 이후 경학과가 설치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변화했다.
허나 왜정과 6.25를 겪으면서 소장 서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건물만 남아있으며, 유교의 폐쇄
적인 본능이 깃들여진 듯, 굳게 봉해져 있어 내부 접근은 불가능하다.


▲  명륜당 뒷쪽 (오른쪽 건물이 존경각)

▲  육일각(六一閣)

존경각 동쪽에는 역시나 굳게 닫힌 육일각이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겉으로 봐도
딱 창고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니 활과 관련된 도구를 보관하던 일종의 무기고였다.
이곳은 대사례(大射禮) 때 사용된 활과 화살, 웅후(熊候, 곰이 그려진 과녁), 미후(麋侯, 사
슴이 그려진 과녁) 등을 보관했다. 대사례란 제왕이 큰 행사의 뒷풀이 차원에서 신하들에게
베풀던 활쏘기 대회로 성적이 좋으면 상을 내리고, 과녁을 맞추지 못하면 벌주(罰酒)를 내리
거나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성균관 대사례는 세종 때 시작되어 성종 때까지 종종 행해졌으나 이후 중지된 것을 영조 시절
에 다시 시행했는데, 제왕이 성균관에 나가 제를 지내면서 대사례를 실시할 때 육일각에 보관
된 무기를 가져와 행사에 사용했고 행사가 끝나면 다시 이곳에 넣었다.
활쏘기는 사대부들이 익혀야되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예(禮)와 악(樂). 사(射, 활쏘기), 어
(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고 하며, 육예중 하나인 활을 보관하는 곳이라 하여 육일각이
라 했다.

현재는 존경각과 마찬가지로 껍데기로 남아있으며, 그 앞에 덥수룩하게 자란 잡초들이 현재의
처지를 말해준다.


▲  팔작지붕의 정록청(正錄廳)

명륜당 동북쪽 협문을 들어서면 말쑥한 모습의 정록청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성균관 참하관(
參下官)이 성균관 관련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곳으로 여기서 기록된 문건은 현책(玄冊)이라
불려 따로 독(櫝) 안에 비장해 출납을 금했다.

1398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6년에 재건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참하관들
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석전대제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제사를 준비하던 장소로도 이
용되었다. 1945년 이후 성균관 유도회의 중앙사무실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비어있다.


▲  향관청(享官廳)

성균관 가장 뒷쪽에는 향관청이 동/서월랑을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대청은 석전대제 때 쓸 향축(香祝)을 봉안했으며, 좌우 방은 제사에 임
하는 향관(享官)들이 향사 전날 재계(齋戒)하며 잠시 머물거나 제사 업무를 담당한 관리들이
머물렀다.

원래 향관청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나 석전대제 때만 되면 준비 공간이 늘 부족해 제사를 준
비하는 관리들이 동재와 서재를 빌려 머물렀다. 그때 쫓겨난 동/서재 유생들은 성균관 관노(
官奴)의 방을 빌려 거처하니 그 폐단을 고치고자 별도의 향관재(享官齋)를 지어줄 것을 청원
하여 1474년에 부랴부랴 지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53년에 중건했으며, 1740년에 영조가 석전대제에 참여하여 향관청
현판을 내렸다.

▲  서월랑(西月廊)

▲  동월랑(東月廊)

향관청 앞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월랑 2채가 있다. 서쪽에 자리한 월랑은 서월랑, 동쪽 월
랑은 동월랑이라 하는데, 이들은 서로 벽을 보이며 마치 원수를 대하듯 등지고 있는 점이 이
채롭다. 그래서 툇마루와 방문은 뒷쪽에 가야 있다.

월랑은 석전대제 등 성균관의 주요 행사 때 감찰 집사(執事)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하지만 그
들이 머무는 기간은 행사 때 며칠이 전부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동
재와 서재의 수용 능력이 늘 부족했던 탓이다.
1966년 동/서월랑과 남쪽에 있던 포주(庖廚)가 무너진 것을 1986년에 동/서월랑만 복원했으며,
동월랑 담장 너머에 지금은 성균관에서 분리된 숭보사가 있다.

▲  정록청 동쪽 창고

▲  서리청(書吏廳)과 비복청(婢僕廳)

정록청 동쪽에는 창고를 비롯해 직방(直房), 서리청, 비복청, 서벽고(西壁庫), 주소 등의 조
그만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서리청은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담당하던 서리(書吏)들이 일을 보던 곳이고, 비복청은 음식을
만드는 여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들 공간은 문이 닫혀 있으며, 서벽고에는 오래된 회화나
무가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  비복청과 서벽고, 회화나무

▲  성균관 유생들이 제일 좋아했던 곳, 진사식당(進士食堂)

직방 남쪽에는 성균관 사람들의 밥을 책임지던 진사식당이 길게 자리해 있다. 여기서 진사는
유생을 뜻하는데, 성균관 식구들이 유생부터 교수, 관원까지 워낙 많다보니 33칸 규모로 길쭉
하고 넓게 만들었다. 허나 칸을 두지 않고 오늘날 단체를 취급하는 대형 식당처럼 길게 터서
수백 명이 동시에 숟가락을 들 수 있게 했으며, 음식은 비복청 여인들이 만들어서 가져왔다.

세상에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유생도 그 예외는 아니지. 어쩌면 그들이 제일 좋아했
던 공간이 진사식당이 아닐까 싶다. 서로 마주 앉아서 비록 시끄럽게 떠들지는 못해도 온갖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요. 거의 금수저들의 공간이다보니 찬도 호화로워 디룩디룩 살만 찌는
유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는데, 3번을 치면 식당으로 모여 식사를 했다. 지금과 달
리 아침과 저녁만 먹었으며, 밥을 먹을 때마다 원점을 하나씩 찍어주어 출석을 점검했다.

식당 내부는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관람하지 못했으며, 유생과 교수, 관원들이 먹다 남은 음
식들은 노비. 비복청 여인 등 소위 아랫 사람들이 섭취했다.



 

♠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주변

▲  성균관 명륜당 - 보물 141호

명륜당은 유생들을 교육하던 강당(강의실)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는 뜻'으로 성균관과 향교의 교육 공간은 모두 명륜당을 칭했다.
이 건물은 13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 교육 외에 과거시
험 장소로도 종종 쓰였으며, 나라 제일의 교육기관이다보니 건물 크기도 장대하다. 게다가 지
붕 추녀에는 무려 잡상(雜像)까지 갖추어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건물 구조는 중앙에 맞배지붕을 지닌 명륜당을 두고 좌우에 날개채를 덧붙여서 마치 새가 날
개짓을 하는 모습 같다. 이렇게 3동의 건물이 합심하여 하나의 명륜당을 이루고 있는데, 그
크기가 정면 9칸, 측면 2칸이다. 허나 보통 한옥의 1칸보다 길이가 길기 때문에 왠만한 한옥
25칸 규모 정도는 된다.

명륜당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유생들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했다.
건물 정면이 뻥뚫려있어 늦봄이나 여름, 초가을에는 공부하기 좋겠지만 늦가을과 겨울, 초봄
에는 추위 때문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여 그때는 동/서재에 각자 배속된 방에서 공부를
했을 것이다.
좌우에 달린 날개채는 팔작지붕을 띄고 있는데, 이들은 교수(선생)들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온
돌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  명륜당의 육중한 뒷모습

▲  명륜당 동쪽 날개채


▲  명나라 사신이 휘갈긴 명륜당 현판의 위엄

명륜당이 워낙 장대한 규모라서 그 건물의 정체를 알리는 현판 또한 몇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
을 정도로 대단한 크기를 자랑해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을 들게 한다.

명륜당 현판은 이웃에 자리한 대성전 현판과 더불어 글씨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한석봉(韓石
峯)이 썼다. 대성전의 그것은 남아있으나 명륜당 현판은 다른 사람의 것으로 교체되고 말았으
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1606년 명나라에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놀러 왔다. 조선은 초
기부터 명나라에 대해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보이며 그들의 속국을 자처했다. 심지어 명나라를
표현할 때는 '황명(皇明)','대명(大明)'이라 높여 부르기도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해괴한 4자까지 더해져 간과 쓸개, 심지어 영혼까지 내줄 정
도로 지극의 정도는 가히 암을 유발할 정도로 심해졌다. 하여 명나라의 사신이 떴다하면 조선
조정과 관리들, 유생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쨌든 사신이 온다는 말에 선조(宣祖) 임금은 서경 유근(西坰 柳根)을 원접사(遠接使)로 보
내 의주(義州)에서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유근은 명나라 사신에게 잘보이려고 온갖 대접을 아끼지 않았고, 서로 시문(詩文)을 주고받으
며 긴 거리의 지루함을 달랬는데, 충북 괴산(槐山)에 있는 자신의 별장, 고산정<孤山亭, 만송
정(萬松亭)>을 은연중 자랑하니 주지번이
'그렇게 절경이요?'
하면서 화공을 시켜 그려오게 했다. 물론 유근이 그리 하라고 허락했거나
유근이 사람을 보내서 그렸을 것이다.
어쨌든 별장 그림을 보자 주지번은 크게 감탄을 먹고 그림 위에 '호산승집(湖山勝集)' 4자를
써서 정자에 걸어달라고 청했다. 이에 유근은 매우 좋아라하며 가보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지번이 서울에 도착해 성균관을 둘러봤는데, 명륜당에 걸린 한석봉의 현판이 너무 탐이 나
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달라고 징징거리자 조정 관리들은 그 현판을 내주고 대신 새로 하
나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신이 난 주지번은 현판을 써주었다. 그 역시 서화(書畵)에 뛰어나다고 명나라에서 명
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지금의 명륜당 현판이다.

현판 좌측에는 '大明萬曆 丙午年 孟夏(맹하, 초여름)'라 쓰여 있는데, 이는 1606년 초여름에
썼다는 뜻이며, 만력(萬曆)은 당시 명나라의 군주이자 임진왜란 때 국고가 바닥날 정도로 조
선에 너무 퍼줘서 조선천자, 고려천자로 조롱을 받던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명나라 사신이
휘갈긴 현판이라 자신의 나라를 '대명'이라 표현했는데, 그 시절 조선 위정자들 역시 명을 '
대명'으로 극존칭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로서는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  온갖 현판(현액)들이 시커멓게 걸려있는 명륜당 내부

명륜당 내부에는 한자로 쓰인 온갖 현판들이 천정을 번잡하게 메우며 나의 침침한 두 눈을 희
롱한다. 조선 중/후기에 작성된 현판부터 20세기 현판까지 시대도 다양하며, 현판에 실린 글
은 죄다 유교와 관련된 재미없는 것들이다.

▲  박문약례(博文約禮)
널리 경을 배워 예를 지키자는 뜻이다.

▲  덕화만방(德化萬邦)
덕이 만방에 펼쳐지라는 뜻으로 1984년
바다 건너 대만에서 보내온 것이다.

▲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이 뭐냐고
묻자 공자의 답을 담은 현판
(내용은 모르겠음)

▲  내배성묘서독노론(來拜聖廟書讀魯論)
성묘(문묘)에 와서 절을 하고 글을 읽으며
공자를 논하라는 뜻이다. (고종의 친필)

◀  명륜당 안쪽에 걸린 또 다른 명륜당 현판
이 현판은 송나라 주희(朱熹, 주자)가 쓴 것으
로 명나라에서 넘어온 것이다.


▲  명륜당 월대(月臺)에 세워진 비석

명륜당 앞에 넓게 닦여진 석축을 월대라고 한다. 돌로 4줄의 기단을 쌓고 정면과 좌우에 돌계
단을 두었는데, 보통은 좌우 계단으로 출입했으며, 정면 계단은 제왕 등 높은 사람들이 이용
했다.
월대에는 네모나게 다진 검은 전돌을 깔아 엄숙함을 더했는데, 이곳 역시 유생들이 돗자리를
피고 공부를 하거나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명륜당이 넓다고 해도 그 많은 유생과 교수를
모두 수용하기에는 벅차기 때문이다.

월대 서남쪽 끝에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늙은 비석이 멀뚱히 서있다. 그에 대한 안내문도
전혀 없고, 피부가 거칠어 글씨 확인도 여의치 않아 나중에 인터넷에서 조사해보니 고종 시절
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웃기는 것은 오랫동안 그의 정체를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균관 관계자도 몰랐다
고 한다. 비석은 150년 동안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성균관 유일의 수수께
기 존재로 비석 피부가 뭉개져 글씨 확인이 매우 어려웠던 탓에 그의 오리무중(五里霧中)을
더욱 부추겼다. 근래 비문 일부를 확인하여 역사 기록과 대조하니 1871년 3월 12일 고종실록
에서 40여 자의 글자와 그런데로 일치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그때 고종이 성균관을 찾아와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했다. 그런 다음 동/서재와 사재(四齋
)의 장의(掌議)를 만나고 유생들에게 말하기를
'서원을 설치하는 것을 말하면, 도학에 대한 학문이나 충성,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백세 후
에도 바뀌지 않을 공의가 있어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못
하니 이것이 어떻게 서원을 설치한 본의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서원이 4~5군데에 달하기도
하니 이 또한 매우 의미가 없다.
이제부터는 도학의 학문이 깊고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공론에 부합되는 사람 이외에
는 일체 설치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설사 서원을 설치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에 한해서 한 서
원 외에 중첩하여 세우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도학에 대한 학문과 충성과 절개를 갖춘 사람
을 제외하고는 또한 함부로 서원 설립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야심작인 서원 철폐에 대해 유생들이 강한 불만을 제기하자 고종이 이렇게
답을 하고 그 내용을 담아 이 비석을 세우게 했다. 허나 유생들의 불만은 그치지 않았고, 제
왕의 이런 하교에도 건방지게도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르자 어리석은 유
생들이 비석에 해코지를 하면서 비석 피부를 마모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왕이 세운 비석에 그
런 망나니짓을 할 정도면 서원철폐에 대한 유생 패거리들의 불만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동재(東齋) 바깥쪽

▲  동재(東齋) 안쪽

명륜당 뜨락 좌우 끝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길게 늘어서 있다. 각각 20칸 규모
로 명륜당 뜨락을 향해 벽을 보이고 있으며, 안쪽(동재는 동쪽, 서재는 서쪽)에 방과 툇마루
가 있다.
방은 은근히 좁은 편인데, 이들 공간에 100~200명의 유생이 머물렀다. 특히 동재 일부는 교수
들이 사용하기도 하여 유생을 수용할 방이 부족해 부득이 동/서월랑에 수용하기도 했다.

동재에서 진사식당으로 넘어가는 문에는 방화수(防火水)를 담은 대포 모양의 통을 두어 심술
궂은 화마(火魔)의 습격에 대비했으나 그 통이 작아서 과연 효과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허나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성균관에 이렇다 할 화재는 없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한가하게 있었을 것
이다. 솔직히 방화수가 쓰일 일이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니던가.

▲  서재(西齋) 바깥쪽

▲  서재 바깥쪽 통로


▲  성균관 황엽(黃葉)인가? 누렇게 뜬 붉은 단풍나무
150~200년 정도 되어보이는 단풍나무가 늦가을 향연을 거두고 슬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천하를 불태우며 붉은 입술을 드러낸 단풍잎은 이제
누렇게 뜬 모습으로 그 이름도 우울한 낙엽이 되어
명륜당 뜨락을 어루만진다.

▲  문묘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59호

명륜당 뜨락에는 성균관의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추앙받는 거대한 은행나무 2그루가 아낌없
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은행나무는 유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로 성균관과 향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동이족
출신인 공자<孔子, 이름은 공구(孔丘)>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했다는 행단(杏壇) 설화 때
문이다. 성균관 역시 그 상징인 은행나무를 경내 곳곳에 심었는데, 중종(中宗) 때 윤탁(尹倬)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나무는 임진왜란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
으로 보이며, 명륜당을 다시 짓던 1602년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추정 나이는 420
년 정도이다.

나무 높이는 26m, 가슴 높이 둘레 12.09m, 가지의 길이 동서 약 26.8m, 남북 27.2m로 서울에
서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와 더불어 늙고 장대한 은행나무로 꼽힌다. 실제 와서 보니 정말
웅장하기 그지 없는데, 화재의 흔적이 약간 있긴 하지만, 성장력이 왕성하며, 줄기에 양분을
부여하는 유주(乳柱)가 잘 발달된 흔치 않은 나무로 가치가 높다.

성균관에는 명륜당과 대성전 뜨락에 늙은 은행나무 4그루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황금빛 절정
을 이루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다. 나무들이 하나 같이 장대하여 성균관을 모두 커버하
고도 남음이 있으며, 은행나무 만큼 늦가을에 민감한 나무도 없다. 은행잎이 낙엽이란 이름으
로 내려앉은 10~11월 풍경은 가히 선경(仙境)이 부럽지 않다.


▲  문묘 은행나무의 밑도리
무한리필이 가능한 장대한 세월과 성균관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 제일의
은행나무로 성장했다. 나무의 건강과 은행잎이 마음 놓고 떨어질 수 있도록
밑도리 주변에 넓게 보호 난간을 둘렀다.

▲  서재에서 바라본 문묘 은행나무의 위엄

▲  왕년을 그리워하며 우수에 잠긴 태극무늬 북

동재 남쪽 끝에는 성균관 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했던 태극무늬 북이 걸려있다. 그가 1번 울리
면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2번 울리면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었으며, 3번 울리면 진사식당으로
우루루 달려가 밥을 섭취했다. 그만큼 성균관 사람들은 그의 북소리에 충실했던 것이다.
한때는 북에 불이 날 정도로 소리를 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북을 칠 이유도, 울릴 이유도 없
다. 성균관이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북 또한 강제 은퇴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북을 치는 방
망이라도 갖다두어 누구든 칠 수 있게 하거나, 관람 종료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하면 좋
으련만 그저 허공이나 축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  성균관 마무리

▲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 보물 141호

명륜당 남쪽에는 유교의 성현이 봉안된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앞서 명륜당과 비슷하게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역시 지붕 추녀에 무
려 잡상을 갖추고 있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대성전은 13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는데 대성전 현판은 한
석봉<한호(韓濩)>이 썼다고 전한다. 내부에는 공자와 증자(曾子) 등의 4성, 공문십철(孔門十
哲), 송나라 6현 등이 봉안되어 있었고, 좌우에 자리한 동무와 서무에 서토(西土, 중원대륙)
인물 94위와 신라와 고려, 조선 인물 18위 등 총 133위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해방 이후 중원
대륙 94위는 모두 추방했으며<이를 출향(黜享)이라고 함>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으로 옮겨
총 35위가 봉안되어 있다. (동/서무는 비어있음) 

대성전과 동/서무를 흔히 문묘라 부르며, 정면에 신삼문을 두었고, 서쪽에 수복청과 전사청,
제기고 등의 부속 시설을 두었다. 동무 옆에는 동삼문을 두었는데, 신삼문과 더불어 현재는
굳게 닫혀 있다. 그리고 명륜당 구역과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들 사이에 만든 문 2
개를 북장문이라 부른다.

성균관의 정문이자 남문인 신삼문에서 대성전까지는 일종의 참도가 닦여져 있다. 네모난 검은
피부의 전돌이 깔린 참도는 폭이 좁은데, 대성전까지 곧게 가다가 그 직전 월대에서 서쪽으로
꺾어서 월대 서쪽 계단으로 이어진다.
대성전은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해 있는데, 명륜당처럼 석축 위를 월대라고 한다. 정면에 돌계
단 2개, 좌우에도 돌계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삼문에서 전돌이 깔린 참도가 월대 돌계단과 이
어지니 이 길은 제왕이 주로 이용했다.


▲  동삼문(東三門)과 동무(東廡) - 보물 141호

대성전 동쪽에는 동삼문이 자리해 있다. 말 그대로 동쪽 삼문으로 오직 제왕만 드나들 수 있
던 콧대 높은 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닫아두었으며 문의 규모는 신삼문보다 작다. 아무리
제왕이라 해도 조선은 엄연한 유교 국가이라 대성전에 봉안된 유교 성현을 1단계 높이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균관 만큼은 제왕도 유교 성현에게 양보를 하였다.

동무는 서무와 마찬가지로 이 땅과 서토(중원대륙)의 성현을 봉안하던 공간이었는데, 1945년
이후 모두 방을 빼고, 이 땅의 성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옮기면서 현재는 빈 방으로 있다. 동
재와 서재만큼은 아니지만 길쭉한 건물로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동무의 바깥 부분 (성균관 주차장에서 바라본 모습)

▲  묘정비각(廟庭碑閣)

대성전 뜨락에는 묘정비(廟庭碑)를 머금은 묘정비각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정비는 성균
관(문묘)의 역사를 담은 비석으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글이 적힌 비신(碑身), 머리 장
식인 이수(螭首)로 이루어진 제법 당당한 모습이다.

이 비석은 1410년에 처음 세워졌다. 그러다가 1511년 중종이 성균관을 수리하면서 비각을 씌
웠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6년에 새로 세웠다. 이때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문장을 짓고, 이홍주(李弘胄, 1562~1638)가 글을 썼으며,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
다.
묘정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碑閣)을 씌웠지만 붉은 창살이 너무 촘촘하여 비석의 모습을 온전
히 보기도, 담기도 어렵다. 그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게 보일 따름이다.

▲  답답하게 갇혀있는 성균관 묘정비

▲  성균관 대성전 동쪽 은행나무
- 서울 지방기념물 37호


▲  성균관 대성전 서쪽 은행나무 - 서울 지방기념물 37호

대성전 신삼문 좌우에는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 2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비록 명륜
당 은행나무 만큼의 덩치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숙성된 450~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중종 때
윤탁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시기가 대략 비슷해 어쩌면 그 나무가 아닐까 여겨진다. 하지만
나무가 야속하게도 말을 해주지 않으니 우리로써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비밀을 지킬 곳이
니 나에게만 살짝 속삭여주면 안될까?

나무의 높이는 약 25m 정도로 가지가 부러져 성균관 건물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나라에서 위
안제를 지내고 건물을 보수했다고 전한다. 일부 외과 수술이 이루어졌으나 원형은 이상이 없
으며, 성균관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알려주는 존재로 뒤늦게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
었다. 성균관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기도 하며, 명륜당 은행나무와 더불어 성균관의 가을 정취
를 크게 돋군다.

▲  굳게 닫힌 신삼문 안쪽

▲  바깥에서 바라본 신삼문


▲  신삼문(神三門)과 대성전 은행나무

대성전 남쪽에 자리한 신삼문은 성균관의 남문이자 정문이다. 석전대제 등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닫혀 있으며,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문이라 하여 신삼문이라 불린다.
성균관의 정문이다보니 추녀에 잡상까지 주렁주렁 달아놓아 건물의 위엄을 높였다.

▲  제기고(祭器庫)

▲  수복청(守僕廳)

대성전 서쪽에는 제기고와 수복청, 전사청 등의 조그만 부속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중
제기고는 제사용 그릇과 여러 도구를 보관하던 창고로 건물에 빛바랜 모습이 역력하며, 수복
청은 성균관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노비와 하급 관리들이 머무는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재학당(載學堂)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온돌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
다.


▲  전사청(典祀廳)과 무늬만 남은 굴뚝

수복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사청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제사와 석전을 준비하는 공
간으로 제물로 올려질 고기를 살생하고 다듬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을 1986년에 복원했으며, 수복청, 제기고와 더불
어 현역에서 물러나 쓸쓸한 모습을 보인다.


▲  전사청과 명륜당, 서재를 이어주는 문

▲  비천당(丕闡堂)

성균관 경내 바깥에는 비천당과 탕평비각, 하연대, 숭보사 등이 있다. 이들도 엄연한 성균관
식구로 비천당 같은 경우 그 테두리 안에 완벽히 있었으나 현재는 경내 바깥에 있어 별도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명륜당으로 들어서는 서쪽 문 서북쪽이자 국제관 서쪽에 자리함)

비천당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64년에 지어졌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
비천당기'에 따르면 1661년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仁壽院). 자수원(慈壽院) 등 왕실에서 관
리하던 비구니 절 2곳을 밀어버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를 송준길(宋浚吉)의 제안으로 북학(北
學) 진흥사업에 쓰려고 했다. 허나 그게 여의치 않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비천당
을 세웠다.
비천당이란 이름은 주자가 성인(聖人)을 찬양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라는 글귀에서 따
온 것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곳이다. 또한 제왕이 성균관에 왕림해 과거시험을 시
행할 때 비천당 뜨락을 난장(시험 장소)으로 쓰기도 했다.

건물 중앙을 정청(正廳)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협실을 두어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라 했는데, 이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벽입재는 1784년에 소실되어 그해 9월에 중건했으나
구한말에 일량재와 함께 파괴되었으며, 비천당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1946년 9월 이후에
는 성균관대 대학본부로 쓰이기도 했다. 허나 6.25때 모두 박살이 났으며, 1988년 8월 기존보
다 조금은 작은 184.4㎡의 규모로 복원되어 제법 새 건물티가 물씬 풍긴다.

비천당 동쪽인 국제관 자리에는 공자의 부친인 제국공 공숙량흘(齊國公 孔叔樑紇), 안자의 부
친 곡부후 안무유(曲阜侯 顔無繇), 증자의 부친 내무후 증점(萊蕪侯 曾點), 자사의 부친 사수
후 공리(泗水侯孔鯉), 맹자의 부친 주국공 맹격(邾國公 孟激)을 봉안한 계성사가 있었으나 해
방 이후 성균관대 건물을 짓고자 부셔버렸다. 그러다가 근래 터 일부를 손질해 계성사 삼문(
三門)과 돌계단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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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의 위엄을 드러내던 하마비(下馬碑)

성균관대 정문이자 탕평비각 옆에 단촐하게 생
긴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란 궁궐과 관청, 왕릉, 서원, 향교, 높
은 사람의 사당 앞에 세우던 비싼 비석으로 말
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이다.
그의 피부에는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높고
낮은 사람은 여기를 지날 때 모두 닥치고 말에
서 내려!)라 쓰여 있는데, 그만큼 성균관의 위
엄은 대단했고, 그 위엄을 등에 업고 하마비도
오랜 세월 가슴을 피며 건방을 떨 수 있었다.
그 앞에서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
으니 말이다. 허나 성균관의 기능과 위엄이 추
락하면서 하마비는 그야말로 일개 돌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이 비석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졌던 1519
년 4월에 세워졌으며, 성균관에서 은행나무를
제외한 인공물 가운데 가장 늙은 존재이다. 또
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하마비이기도 하다.

▲  검은 주근깨가 많이 피어난
하마비의 뒷면


▲  탕평비(蕩平碑)를 머금은 탕평비각

하마비 옆에는 1742년에 세워진 탕평비를 머금은 비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영조 임금은
지나친 당파 싸움을 막고자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했는데,
인재 요람이나 다름 없던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개혁 의지를 널리 알렸다. 비석
내용도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두루 사귀어 편당(偏黨)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
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
하였다. 그만큼 그 시절에는 당쟁(黨爭)이 심했다.

비석의 구조는 비좌(碑座)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촐
한 모습이다. 그 역시 묘정비처럼 비각에 굳게 봉해져 있어 온전하게 담기가 어려웠다.


▲  영조의 개혁 의지가 깃든 탕평비

▲  하연대(下輦臺)

제왕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는 연(輦)이라 불리는 제왕 전용 가마를 타고 편하게 이동을 했다.
동삼문 동쪽에 돌로 터를 다지고 가마를 내려놓는 하연대를 닦았는데, 제왕은 거기서 연에서
내려 동삼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섰다.
하연대 북쪽에는 소나무 3그루가 운치있게 들어서 있으며, 바로 북쪽 한옥은 진사식당이다.


▲  성균관과 남남이 되버린 숭보사(崇報祠)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1호

이렇게 보면 성균관은 이제 다 본 것 같다. 접근이 통제된 진사식당의 속살과 서벽고, 서리청
일대를 제외하면 말이다. 허나 이들 말고도 빠뜨린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숭보사이다.

숭보사는 동월랑 동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건물로 그렇게 비중이 있는 존재는 아니다. 예전에
는 성균관의 일원이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완전 갈라져 개인 소유가 되어버렸는데, 한때는
집 소유자 이름<명륜동 김종국가(家)>을 따서 문화재 명칭을 삼기도 했다.
엄연한 개인 집이라 내부 관람은 어려운 실정이며, 그저 굳게 닫힌 빛바랜 대문과 돌담, 돌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의 지붕만 바라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이름에서 보이듯 원래 문묘 사당의 일원으로 2채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집은 살림
채로 사당 관리인이 살던 공간이며, 북쪽 집은 사당을 지닌 사당채이다. 살림채는 'ㅡ' 구조
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 동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 앞에는 부뚜막이 있고, 대청 앞은 전면이 개방된 토방이 있으며, 건넌방 앞에는 부엌이
있는데, 원래 골방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뒷쪽에 신주단을 두어 위패를 봉안했는데, 단 위에 닫집
이 있다. 사당 전면에는 모두 열 수 있는 4짝 문이 있고, 좌우와 뒤쪽은 막혀있다. 사당 안에
닫집과 위패가 그대로 남아있는 점과 옛날에 성균관의 부속 건물이었던 점 때문에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숭보사를 끝으로 성균관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숭보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15-1 (성균관로 7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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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1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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