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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수성동계곡



'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쉼터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기린교 주변)



 

늦가을이 절정에 이르던 11월 첫 무렵 주말에 일행들과 수성동계곡을 찾았다. 햇님이 하
늘 높이 걸린 14시에 그들을 만나 내 즐겨찾기 명소인 백사실계곡(백사골)과 부암동산복
길(백석동길), 인왕산자락길을 거쳐 16시 넘어서 수성동계곡에 이르렀다.
이곳도 즐겨찾기의 하나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라 계곡 윗도리만 주마등처럼 통과하
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기린교가 있는 계곡 밑도리까지 싹 복습
을 하였다.



 

♠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현장, 서울의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던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웃대) 한복판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한양도성(漢陽都城)에
오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의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기린교와 공원 일대)을 예로부터 수성동이
라 불렀는데, 이는 계곡에 걸린 기린교 밑의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물소
리가 좋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仁王山)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제법 있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운동), 청계동천(淸溪洞天, 부암동) 등이 명소로 꼽혔으나 개발의 칼질로 죄다
쓰러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것을 2012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그 외에 환희사계곡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죄다
볼품은 없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8)이 그린 장
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인왕산
자락인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淸雲洞) 일대를 말하며, 북촌(北村)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집과 별장을 짓고 살던 금싸라기 땅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
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만 살아남았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사람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문무(文
武)를 겸비하고 풍류의 1인자였던 안평대군은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으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을 지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림을 보면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
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
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골짜기가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서 접근성도 아주 착
하다. 하여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
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
활동)의 성지(聖地)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으며 장안의 경승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과 장동8
경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이 개발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오로지 개발 밖에 모르던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은 장동8경의 태반을 가루로 만든 것이다. 대은암 같은 경우는 그 칼질에 희
생되지는 않았으나 엉뚱하게 군사작전지역에 묶이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수성
동도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계곡 중류 일대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아름답던 그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인근 청풍계나 청계동천처럼 계곡이 대부분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
트로 인해 계곡의 폭도 줄어들었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
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또한 옥인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
하를 거쳐 역시나 생매장 신세가 되버린 청계천(淸溪川)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가는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을 정도로 명성은 크게 하락했다.

▲  수성동계곡 사모정

▲  기린교 돌다리

개발의 난도질로 태어난 옥인시범아파트가 계곡을 건방지게 깔고 앉으면서 수성동계곡은 40년
가까이 어둠에 묻혀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원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은 오는가? 수성동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이, 수성동에게도 끝내 좋은 소식이 날라왔
다. 계곡을 깔고 앉던 옥인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
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발일변도(一邊倒)로 일관하던 세상도 조금은 변하면서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가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되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여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으면서 뒤
늦게나마 문화유산의 대우를 받게 된다. (서울의 계곡 중 최초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이후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모두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두 철거되었다. 그
리고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여 그해 여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 1년 동안 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완성을 보면서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개발의 칼질에 날라간 계곡을 살리고자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으며, 옛 경
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와 참나무, 산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다.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그 외에 돌단풍, 띠,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
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인 사모정을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게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
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늙은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
성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비록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
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이 계곡은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좋겠지
만 이미 회색빛 시가지가 가득 들어차 지금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계곡이 생매장
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로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으며,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
하다.
그래도 수성동의 혜성(彗星)과 같은 재등장으로 서울 도심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늘었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
니 어설프게 재현된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의 범위는 보통 공원 일대 계곡과 기린교를 일컫지만 인왕산길에서 공원으로 내려
가는 계곡도 수성동 범위에 들어간다. 그 계곡이 있기에 수성동계곡도 있는 것이다. 비록 재
현된 폼이 낯설기는 하나 그것은 장차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옛날의 경치도
슬슬 피어오를 것이요. 도심 속의 상큼한 피서의 성지(聖地)로 잃어버린 왕년의 명성도 되찾
을 것이다.

* 수성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麒麟橋)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반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성되
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다리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적
어도 17세기 이전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계곡을 찾은 귀족과 사대부들의 편의를 위해 닦은 것으로 보이는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
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는 광통교(廣
通橋)이다. 그리고 수표교(水標橋)와 창경궁(
昌慶宮) 옥천교(玉川橋)가 2위, 3위에 들어간
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  정면에서 본 기린교의 위엄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잘 닦여진 수성동계곡 북쪽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으련만 길을 현대식으로 닦은 것이 상당히 아쉽다.

▲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옛 옥인시범아파트의 잔해

수성동계곡 북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
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도질에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난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하다.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말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인
정되어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계곡을 유린하던 인간의 창조물은 그 자리를 원주인인 계곡과 자연에게 내주고 이제는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
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귀여운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이는데, 그렇
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에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옛 옥인아파트의 초라한 잔해

▲  계곡 북쪽 산책로 (인왕산길 방향)
지나가던 늦가을도 이곳이 좋았는지 알록달록 봉숭아물을 입혔다.

▲  계곡 북쪽 산책로 (하류 방향, 사모정 옆)

▲  수성동계곡의 구수한 양념, 사모정

사모정은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2012년에 지어졌다. 사모정이란 이름은 네
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는 이곳
을 스쳐갔던 옛날 정자를 재현한 것이 아닌 수성동계곡 수식용으로 세운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
아나는 것 같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
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계곡 상류와 인왕산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나무와 꽃들이 산듯하게 가을옷을 입으며 막바지 처절한 아름다움을 불사른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인왕산 품과 맞닿은 수성동계곡 서쪽 산책로

▲  수성동계곡 상류 -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계곡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석굴암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산에서 꽤 유명했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까지 서로가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슬금슬금 내려온다. 특히 인왕천약수터에서 온 계곡은 거의 90도 각도의
암벽 사이로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룬다. 그리고 작은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모래 옆과 공원 쪽에는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있어 조금은 어색하지만 이는 계곡을 복원하
면서 끼워놓은 것으로 2012년 복원 이전에는 폭포와 주변 암벽, 모래밭까지만 원래 모습이었
다.


▲  수성동계곡 남쪽 산책로

▲  계곡 남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사모정

▲  슬럼프에 빠진 사모정 앞 수성동계곡

한때는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허나 늦가을 비가 적었던 탓에 상류
에서 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사모정 앞 계곡은 수풀만 무성한 늪지대처럼 변해버렸다.


▲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방향)

▲  잠시 흙길로 돌아선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부근)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에서 바라본 계곡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넓게 다져진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
겨지는 자리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을 한 덩
어리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바라보
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거꾸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두었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도리를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
간 밑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칠흙같은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
다고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웃대)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
쪽을 거쳐 청계천까지 흘러가는데,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들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밀어야 되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
긴 서울 도심에서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 등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베푼 수많은 물줄기들이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두운 저녁을 대비한다.

계곡을 1바퀴 둘러보고 동쪽 관람공간으로 내려가니 시간은 어언 17시가 넘었다. 햇님이 커튼
을 치고 꽁무니를 빼면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은 검게 익고, 계곡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둠에
대항한다. 허나 가로등의 패기가 미약하고 이곳도 엄연한 자연 공간이라 그 어둠을 제대로 극
복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수성동계곡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그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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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8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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