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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사정 서쪽 산책로 (심훈 문학길)
흑석동 효사정 정류장에서 효사정 서쪽 밑으로 이어지는 도보길이다. 길 북쪽에는 한강이

푸른 빛깔을 띄며 흐르고 있고, 남쪽에는 노량진과 국립서울현충원을 잇는 현충로가 펼쳐
져 차량들의 굉음이 두 귀를 끊임없이 때려댄다.
이 산책로에는 흑석동 출신의 문학가 심훈의 문학비와 학도의용군 현충비, 효사정 등의 명
소들이 있으며, 효사정은 산책로 동쪽에 솟은 강변 언덕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2. 학도의용군현충비

효사정 서쪽 밑에 학도의용군현충비가 자리하여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6.25

시절 나라를 지키고자 책을 버리고 전쟁에 참가한 학도 의용군은 30만 명, 그중 직접 총을
들고 전방에서 싸운 사람은 5만 명 정도 된다. 전쟁에서 호국신으로 산화한 그들의 충혼과 
전쟁에 참여해 많은 고생을 했던 그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 학도호국단 및 관계자들의 협조를 얻어 1955년 6월 25일에 세웠다.
현충비 상단에 추모비명과 6.25시절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군의 일부 이름이 새겨져 있
다.

3. 한강과 서쪽을 굽어보고 있는 학도의용군현충비

4. 학도의용군현충비에서 바라본 한강과 동작대교 (동쪽 방향)

효사정과 학도의용군현충비는 한강 조망 명소로 명성이 높다. 서쪽과 동쪽으로 한강은 물

론 한강에 떠있는 노들섬, 한강에 접한 여의도, 용산구 남부 지역, 서초구, 강남구 강변 지

역이 바라보이며, 남산은 물론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5. 학도의용군현충비에서 바라본 한강과 노들섬, 한강대교, 용산 지역

6. 효사정으로 인도하는 서쪽 산책로 (효사정 서쪽)

7. 의자에 앉아있는 심훈 동상

효사정과 학도의용군현충비 사이에는 심훈 동상과 문학비가 있다. 심훈(1901~1936)은 20

세기 초기의 대표적인 문학가로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교과서에서 절찬리에 등장하는 인

물이다. 허나 그의 고향이 동작구 흑석동이라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심훈의 생가는 현재 천주교흑석동성당 자리로 그의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

고 근래 마련된 '심훈생가터' 표석이 사라진 생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현재 동작구 흑석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심상정, 어머니는 해평윤씨로 3남1녀 중 막내였으며, 본명은 심대섭, 호는 해풍

이다.

부친 심상정은 은로보통학교 교장과 신북면장을 역임했던 교육가 및 행정 관리였고, 외조

부인 윤현구는 조선 후기 3대 문장가의 하나인 윤희구의 막내 아들로 시,문,그림에 능했다.
그리고 큰형인 심우섭은 희문의숙 1회 졸업생으로 매일신보 기자와 경성방송국 과장을 역
임했으며 작은형인 심명섭은 동경 청신학원을 졸업, 심훈이 완성하지 못한 소설 '불사조'와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하여 동생의 한을 풀어주었다.

1915년 심훈은 교동보통학교(교동초교)를 졸업하여 경성고보(경기도)에 진학했으며 1917

년 3월 왕족 출신인 이해영과 혼인했다.
경성고보 시절, 왜인 수학선생이 민족 차별의 꼰대질을 더럽게 부리자 그에 대한 저항으로

시험 때 백지를 내어 과목낙제로 유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고보 4학년 시절) 3.1운

동에 참여, 3월 5일 투옥되었다가 11월에 출감했다. 이때 '감옥에서 어머니께 올린 글월'을

썼는데, 이 편지는 심훈의 민족의식을 드러낸 첫 작품이었다.

 

1920년 중원대륙으로 망명 유학길을 떠나 여러 애국지사들과 교우했으며, 1921년 북경과

상해, 남경 등을 거쳐 항주의 지강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했다. 특히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

회영의 집에서 2개월여를 지냈는데, 비록 잠깐의 인연이었으나 그때 그들의 만남은 훗날

심훈이 애국주의 시와 농민소설을 쓰는데 중요한 사상적 토양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1923년 지강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와 학예부장을 지

냈다. 이때 이해영과 이혼하고 '미인의 한'이란 외국 장편소설의 후반부를 번역해 연재했으

며, 영화 '장한몽'의 주역인 이수일역의 후반부를 대역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동아일보에 34회에 걸쳐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

으며, 1927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원작,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 개봉했는데, 이 영
화는 나운규의 '아리랑'에 이어 우리나라 영화 개척기의 명작으로 추앙을 받는다.
'먼동이 틀 때'는 매우 사실적이고 인물 묘사가 극명하여 무성영화시대 한국영화의 대표 작

품으로 꼽히며 이것 외에도 수많은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을 썼으나 감독한 작품은 '먼통이

틀 때'가 전부이다.

 

1927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일활촬영소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6개월 만에 돌아왔으며,

1928년 기자로 입사해 여러 편의 영화논평을 작성했다. 1930년에는 시 '그날이 오면'을 발

표했고, 이때쯤 안정옥과 재혼하여 다시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1931년 장편소설 '불사조'

를 발표했다. 

1932년 첫 아들인 심재건이 태어났으며, 왜정의 탄압으로 부득이 부모가 살고 있는 충남 

당진으로 이사갔다.
1933년 봄의 서곡 '영원의 미소'를 발표했고, 1934년 '직녀성'을 조선일보에 연재, 그 고료

로 당진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라 했으며, 힘든 농촌생활을 통해 희망을 찾는 노력을 

하였다.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숭을 하자 크게 감격하여 '오오, 조

선의 남아여!'란 즉흥시를 남기니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다.

이후 상록수 출판 관계로 서울로 올라왔다가 그 시절 크게 유행했던 장티푸스에 걸려 그해

9월 16일 겨우 35세에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8. 심훈 동상 주변에서 바라본 한강과 동작대교 (동쪽 방향)

9. 심훈 동상 주변에서 바라본 한강과 노들섬, 용산

바로 밑에 보이는 올림픽대교 노량대교 구간은 차량들로 늘 정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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