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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흥4동 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 (남쪽 산자락 묘역)

호암산 북쪽 자락에는 순흥안씨 양도공파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개국공
신인 양도공 안경공을 비롯해 그의 아들과 손자 등 3대의 묘와 양도공의 부조묘가 자리해
있는데, 안경공 3대가 묻힌 중심 묘역의 남쪽과 동쪽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20세기에 조
성된 후손들의 무덤이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양도공 안경공(1347~1421)과 안순(1371~1440), 안숭선(1392~1452), 안숭신(1395~1441)
, 안숭효(1400전후~1460) 등 5기의 무덤과 이들 무덤에 딸린 신도비와 석물 32기, 그리고
그에 딸린 토지 2,247.1㎡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부조묘는 1992년에 이전 중건
했다.


이들 무덤 5기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무덤 석물과 봉분 스타일
을 통해 조선 초기 무덤 양식과 변천사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어준다. 

2. 양도공파묘역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무덤들

양도공파묘역의 동쪽과 남쪽 산자락에는 조선 후기, 20세기에 조성된 후손들의 무덤이 꽤
자리하고 있다. 허나 이들은 지방문화재가 아니고 중심 묘역보다 무게감이 적어서 현대식
으로 성형이 된 무덤들이 많다.

3. 순흥안씨양도공파 묘역의 중심, 안경공묘와 안숭선묘
뒷쪽에 자리한 무덤이 이곳 묘역의 중심인 양도공 안경공의 무덤이고, 앞쪽 묘가 그의 손
자인 문숙공 안숭선의 묘이다.


안경공(1347~1421)은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흥령부원군 우문관대제학을 지낸 근제 문
정공 안축의 손자이자 보국숭록대부 판문하부사 흥령부원군 집현전태학사를 지낸 쌍청당
문간공 안종원의 아들이다.

1376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고, 조선으로 세상이 엎어진 이후에는 도승지,판한성부
사가 되었으며,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이 커서 개국공신에 녹훈되었다. 보국숭록대부 흥령
부원군 집현전대제학을 역임했으며, 1421년 사망하자 '양도'란 시호를 받고 나라로부터 부
조묘 설립의 예우를 받았다. 부인인 오천정씨(문정공 정사도의 딸)와 합장되어 있는데, 부
인은 의정택주로 봉해졌다.

안숭선(1392~1452)은 안순의 2남으로 1420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이후 형조판서와 정
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의정부좌참판 겸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1431년부터 4년간 도승지
를 하면서 왕명을 출납함이 공명 진실하여 크게 총애를 받았다. 1435년에 마련된 양도공
신도비문과 그 전자를 직접 썼으며, 1452년에 사망하자 '문숙'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들 무덤 옆에는 고위 관료만 장만할 수 있던 신도비(양도공 안경공 신도비, 안숭선 신도
비)가 있으며, 안숭선 묘 앞쪽에는 나라에서 안경공에게 이곳 땅을 하사한 것을 기록, 기념
하고자 세운 사패기지비가 있다.
안경공은 이곳에 별서(금천별서)를 지어 머물렀으며, 사망하자 이곳에 묻혔다.

4. 안숭선묘(오른쪽)와 왼쪽 끝에 보이는 사패기지비

안경공과 안숭선묘 등 양도공파의 중심 묘역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물론 관계자에게 허
가를 요청하면 내부 관람도 가능하나 담장과 철책 밖에서도 보일 것은 거의 다 보인다. 그
래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까치발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5. 하얀 피부를 지닌 순흥안씨양도공삼대 영원 비석

이곳은 순흥안씨 양도공파의 성역과 같은 곳으로 특별히 그들만의 영원으로 삼아 애지중
지하고 있다.

6. 앞쪽에서 바라본 안숭선과 안경공의 묘
오른쪽에 보이는 비석은 근래 새로 마련된 안숭선의 신도비이다. 안경공과 안숭선은 신도
비를 지니고 있으나 모두 늙어서 근래에 새 신도비를 마련해 그 옆에 두었다. 하여 이들은
각각 늙은 비석과 어린 비석 등 이렇게 2기의 신도비를 지니게 되었다.

7. 최대한 줌을 땡겨서 담아온 안숭선묘와 안경공묘

안경공묘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 많이 나타나는 네모난 봉분으로 밑도리에 호석을 지니고
있다. 봉분 주위로 장명등, 상석, 작은 묘표를 지니고 있으며, 남쪽 밑에 신도비가 있다. 그
리고 안숭선 묘는 호석이 없는 동그란 봉분으로 문인석 2쌍과 묘표, 상석을 지니고 있고,
남쪽 밑에 신도비를 두었다.

8. 사패기지비
안경공의 공을 기리고자 나라에서 이곳 일대를 그에게 주었는데, 그런 사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사패기지비이다. 비석이 조금 젊은 것으로 봐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9. 푸른 철책 너머로 바라본 사패기지비와 안숭선묘, 안경공묘

10. 안순묘(오른쪽)와 안숭효묘(왼쪽)

양도공 안경공의 부조묘를 중심으로 남쪽에 안경공묘와 안숭선묘, 북쪽에 안순묘와 안숭
효묘, 그리고 그 뒷쪽(동쪽)에 안숭신묘가 있다. 안경공과 안숭선, 안순, 안숭효묘는 바깥
에서도 바라보이나 안숭신묘는 묘역 안쪽에 있어서 바깥에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안순(1371~1440)은 안경공의 아들로 1389년 문과에 급제했다.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수
문전대제학 겸 호조판서, 의정부찬성을 지냈으며, 봉조하에 올랐고, 시호는 정숙이다.
1424년부터 1436년까지 12년 동안 호조판서를 겸직하면서 왕명 출납이 정명했고, 정책
입안에 공헌한 바가 컸으며,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은 즉 나는
죽어서 산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자 선영 곁에서 생을 마치리라' 이야기하고 부친의 금
천별서에서 살다가 1440년 사망했다. 


안숭효(1400전후~1460)는 안순의 4남으로 호조와 형조, 공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가
정대부에 올랐다. 경기도와 전라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던
1460년 충청도 백성들의 기근을 구휼하다가 충청감영에서 병사했다.

11. 부조묘 앞 연못

누렇게 뜬 연꽃 등 수중식물이 가득해 겨울 제국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12. 양도공 안경공의 부조묘

보통 사망하고 4대가 지나면 그 위패는 땅에 묻거나 태운다. 즉 더 이상 후손들에게 제사
밥을 받지 못한다. 허나 나라에서 부조묘를 받으면 세세손손 제사밥을 받는다. 즉 이곳은
나라에서 세우고 공인한 안경공의 사당이다.

13. 안순묘(오른쪽)와 안숭효묘(왼쪽), 그리고 안순의 신도비들

왼쪽에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비석이 안순의 새 신도비, 그 오른쪽에 보이는 지
붕돌 비석이 안순의 옛 신도비이다. 안순 역시 안경공과 안숭선처럼 늙은 신도비와 새 신도
비를 모두 지니고 있으나 안숭효는 신도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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