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서울 구산동 수국사


' 서울 수국사 봄나들이 '
수국사 대웅전과 오색연등
▲  하늘을 가득 메운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살짝
보이는 수국사 황금법당(대웅전)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구산동(龜
山洞) 수국사를 찾았다. 그곳은 2009년 석가탄신일에 처음 인연을 지은 이래 여러 번 발
걸음을 했던 곳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들을 아직 못나지 못했다. 하여 그들과 어
떻게든 인연을 지을 겸, 미답지로 남은 봉산까지 싹 처리하고자 겸사겸사 찾았다. (봉산
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 경, 구산동 종점에서 그를 만나 국민의 대표 간식인 떡볶이
와 순대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봉산 자락에 묻힌 수국사로 들어섰다.



 

♠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 둘러보기

▲  수국사를 들어서다.
석가탄신일의 슬로건인 '차별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 말은 참 좋다만
그런 세상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법 앞에 평등 어쩌구
강조하지만 거기서부터 벌써 오류가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에 벌써부터 흥겨움에 달아오른 수국사는 태화산(봉산) 자락에
둥지를 튼 절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법당(法堂, 대웅전)을 금으로 거의 도배하여 이 땅 유
일의 황금사원이자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황금절, 황금사
원이란 근사한 별명을 지니고 있다.
법당에 사용된 재료부터가 다른 절과 확연히 틀려 두 눈을 제대로 휘둥그레지게 하지만 아직
은 은평구(恩平區)의 오래된 절 정도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게다가 봉산 자락이라 봉산 또
는 태화산 수국사를 칭해야 되나 산세가 부실하여 믿음이 떨어지는지 거리가 좀 떨어진 삼각
산(북한산) 수국사를 칭하고 있다.

이곳은 겉으로 보면 현대 사찰로 보이겠지만 나름 역사가 있는 절로 1459년 세조(世祖)가 그
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명복을 빌고자 그의 묘인 경릉(敬陵) 동쪽에 세운 정인사
(正因寺)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승려 설준(雪峻)이 절을 지으면서 설계까지 모두 도맡았다.
 
1471년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어머니)는
'절을 처음 지었을 때 급하게 만들어 재목이 좋지 않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
이르며 판
내시부사 이효지(李孝智)로 하여금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중창된 절의 규모는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광릉(光陵)의 원찰(願刹)인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하며, 1472년 석가
탄신일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화려하게 베풀자 법회에 참관한 승려 수백 명이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인수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그의 남편인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됨>의 원찰이
기 때문이다. 이후 예종(睿宗)의 원찰까지 겸하게 되었고 성종은 봉선사와 비슷하게 쌀 30섬, 면포와 정포를 각각 50필씩 지원했다.

1504년 절에 불이 나자 연산군(燕山君)은 경기감사와 형조참판를 소환하여 불을 낸 이를 국문
하게 하고 놀란 영혼을 위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했다.

▲  온갖 연등으로 가득한 대웅전 내부

▲  용왕상(龍王像)과 연못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다시 중건되어 법등을 이어오다가 1721년 숙종
(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인 명릉(明陵)의 원찰이 되면서 나라를 지키는 뜻의 수국사
로 이름을 갈게 된다. 허나 다시 지원이 끊기면서 절은 폐허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잠시 속
세의 뇌리 속에서 두리뭉실 잊혀져 갔다.

1897년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이하 월초)은 진관사(津寬寺)에 들
렸다. 진관사는 북한산(삼각산) 서부를 대표하는 절로 왕실의 지원이 각별했던 곳이다.
그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다가 문득 구석에 처박혀있던 아미타불상 앞에 불기(佛器)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진관사 승려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퉁명스럽게
'그 불상은 수국사가 망해서 부득이 우리 절로 가져온 겁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서 차나 향을
공양한 적이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월초는 발끈하여 아미타불 앞에 예불을 올리면서 수국사를 반드시 일으켜 세울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1900년 황태자(皇太子, 훗날 순종)가 중한 병에 걸리자. 다급한 고종이 월초에게 태자의 쾌차
를 기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월초는 청도 운문사 부근 사리암(邪離庵)에서 100일 동안 나
반존자(那畔尊者) 기도를 올렸는데, 80여 일 되는 날에 늙은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금침(金針
)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은 월초에게 소망을 물으니 그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을 올렸다. 그
러자 황제가 관직과 녹봉을 제의하자 월초는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어찌 출가한 승려가 나라의 녹을 받겠습니까? 다만 서오릉 부근에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긴 것이 애석하오니, 그 절의 중창을 소망합니다'

이에 황제가 '효심과 신심(信心)은 원래 하나다'라 치하하며 어용(御用)목수를 보내 절을 지
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게 했다. 또한 황실에서 내린 돈과 관리들이 모금한 26만 8천냥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2곳에 땅을 구입하여 절에 제공했으며, 1907년에 황실에
서 하사한 금 1,500원으로 개금, 탱화 불사를 하였다. 이때 진관사에 얹혀 살며 굴욕의 시간
을 보냈던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와 봉안했다. (현재 대웅전에 있음)

1908년 석가탄신일에는 월초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러 승려의 도움으로 괘불탱과 금강번(
金剛幡) 31위를 조성했으며,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금 1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금 4
백을 지원했다.

▲  초전법륜상

▲  수국사 십육나한도

6.25전쟁 때 말끔히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2005년 이후 주지 토진과 원담의 노력으로 지
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이 땅 유일의 황금사원이란 이미지를 진하게 내걸며 절을 꾸리고
있으며, 초전법륜상과 특이하게 'V'수인(手印)을 취한 성취여래불<成就如來佛>, 여름에만 있
다는 목탁새 등 독특한 명물로 속세에 강하게 손짓한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녹슬었고 구산동 주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고즈넉한 산사(
山寺)의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또한 많은 절집들이 앞다투어 외형을 불리다보니 그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은 편으로 수국사는 사치품인 금으로 법당을 꾸며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참고로 금은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고 하며, 불상에 금을 입히는 이유도 바로 그때
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좋아하는 광물과 색깔이 바로 금과 금색임)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삼성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이 있다. 그리
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 6점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불교중앙박물
관에 가 있다.

* 수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5-1 (서오릉로23길 8-5, ☎ 02-356-2001)
* 수국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十'자형의 지장전(地藏殿)

수국사 경내를 들어서면 3층 규모의 문화센터가 마중을 한다. 그를 지나면 오른쪽(북쪽)에 너
른 뜨락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이 있고, 정면으로 가면 용왕상이 있는 연못과 삼성각, 대웅전,
봉산 산길이 차례로 이어진다.

문화센터 옆에 자리하여 속세(俗世)를 굽어보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종의 보금자리인 종각(鐘
閣)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대웅전으로 쓰였고 황금 법당이 지어지자 지장전으로 바뀌었다. 원
래는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내부를 확장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이 땅 유일의 '十'자
형 지장전임) 칠성과 산신 등도 같이 있었으나 삼성각이 생기면서 그들은 싹 방을 빼고 지장
보살과 그 식구들만 남아있다.


▲  봄꽃에 감싸인 삼성각 계단

세상에 이보다 고운 계단길이 또 있을까? 계단 좌우로 봄이 곱게 붓질을 한 봄꽃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어 속세에서 오염된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금색으로 도배된 대웅전보다
여기가 더 화려해 보이고 더 정감이 가니 역시 사람은 자연 속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  새로 지어진 8각형의 삼성각(三聖閣)
지장전의 신세를 졌던 독성과 산신, 칠성의
보금자리로 아직 단청도 입히지 않은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60년에 그려진 것으로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삼성각 산신탱
1960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100년 이상
묵은 것처럼 꽤 늙어 보인다.

▲  삼성각 천정에 걸린 동그란 장엄등
장엄등에 동자승이 입혀져 있다.

▲  석조미륵불입상
2002년에 조성된 석불로 자비로운 인상이
중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꽃으로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가 기쁨을 가득 드러낸 채, 며칠 앞으
로 다가온 그날을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1년 같겠지만 정작 석가탄신일 당일은
1시간도 안될 정도로 체감 시간이 짧을 것이다.
혹시 모를 비와 강렬한 햇살의 태클에 대비해 그의 허공에 우산까지 설치했고, 그 앞에는 깨
알같이 불전함을 두어 석가탄신일 특수를 애타게 고대한다.


▲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오비구상(五比丘像)

대웅전 우측으로 부처가 5명의 승려와 야외학습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잡아 맨다. 다
들 진지하게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승려들, 오른쪽 어깨를 훤하게 드러낸 법의를 입은 그
들은 부처의 설법에 기뻐하며, 어떤 이는 합장(合掌)으로 예를 올린다.
이들은 초전법륜상으로 오비구상이라 하는데 부처가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
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 땅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합성수지로 조성
된 것으로 그들의 뜨거운 학습 현장을 인자한 모습의 관세음보살 누님이 묵묵히 지켜본다.


▲  수국사의 상징이자 대표 감성, 황금법당 대웅전(大雄殿)의 위엄

▲  수국사의 하늘을 훔친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보이는 대웅전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수국사의 감성을 자아내고 있는 대웅전이 금빛을 드러내며 웅장하게
자리해 있다. 계단 위쪽에 높이 들어앉은 탓에 그 위엄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돋보여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이다.
그는 정면 3칸, 측면 7칸, 면적 108평에 이르는 팔작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제외
하고는 기둥과 문짝, 벽, 평방(平枋), 공포(空包) 등 건물 안팎을 99.9%의 순금으로 싹 도배
하여 호화로움을 마음껏 뽐낸다. 그래서 고운 빛깔의 단청은 없으며 건물이 상처가 생기지 않
도록 절에서 꽤나 애지중지한다.
해가 질 무렵이나 어둑어둑한 저녁, 연등 빛에 비친 대웅전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으
며 그 내부 역시 질식할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온통 도금이 입혀진 기둥과 벽,
천정을 희롱하는 연등은 중생의 눈을 잔뜩 흥분시키며 그 황홀한 빛에 두 눈이 머는 것은 아
닌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불단에는 각각의 표정과 제스처를 취한 5개의 큰 금동불상을 두었고, 그 사이로 작은 보살상
과 불상 4개를 배치해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  대웅전의 허공을 가득 채운 장엄등의 찬란한 물결

▲  대웅전의 주연과 조연들 (큰 불상 5기와 작은 불상/보살상 4기)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580호

대웅전 불단이 가히 무너질 정도로 들어앉은 불상/보살상 가운데 특별히 눈여겨 볼 존재가 하
나 있다. 바로 아미타여래좌상이다.
그는 수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제외>로 나무로 다져 금을
입혔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앉은 키 104cm
, 무릎 폭 72cm이다. 원래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었으나 수국사로 넘어왔으며, 조선 후
기에 절이 망하면서 진관사에서 샛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허나 다른 절의 불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공양도 받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굴욕을 당하다
가 그것을 발견한 월초가 발끈하여 그에게 예불을 표하며 수국사 중창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의 지원으로 절을 중건하고 그를 다시 가져와 법당에 두었다. 진관사에서의 안좋은
추억 때문인지 약간 인상은 쓰고 있지만 중후하고 넉넉한 얼굴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하며, 예전에는 신변보호를 위해 유리막으로 감쌌으나 지금은 거추장스러운 유리
막을 치우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수국사 경내 (오른쪽 3층 건물이 문화센터)
오색 연등이 낮게 하늘을 가리며 석가탄신일 분위기를 드높이고 그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보물들

▲  수국사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2호

수국사의 지방문화재 탱화를 보러 간만에 왔건만 결국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
이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외출을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지금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음)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여래좌상을 제외한 지방문화재 탱화 6점과 아미타불 복장유물이 나들이
를 나왔는데 그들이 속시원히 공개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여 이런 상큼한 기회를 놓치면 그
들과의 술래 관계를 영영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탱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관계로 문화
재청 정보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음)

불교중앙박물관에 들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수국사 탱화는 아미타불도이다. 그는 1907년
에 편수 보암긍법(普庵肯法), 두흠(斗欽), 금어 봉감(奉鑑), 법연(法沿), 범천(梵天) 등이 그
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대시주인 강문환과 강재희가 황명에 따라 고종 황제 성수만세(聖壽萬歲),
황태자(순종) 경수천세(慶壽千歲), 황태자비 윤씨 보령천추(寶齡千秋), 황귀비 엄비 보수제년
(寶壽齊年), 의친왕 보수무강(寶壽無疆), 의친왕비 보록장춘(寶籙長春), 영친왕 보소여해(寶
笑如海)를 기원하고자 제작했다.
존칭 뒤에 붙은 성수만세, 경수천세, 보록장춘 등은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만수무강을 기원한
다는 뜻으로 성수만세는 황제에게만 쓸 수 있었고, 경수천세는 황태자(태자), 그 외에는 황족
에게만 사용했다.

그림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천인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갸름한 얼굴에 가는 눈썹과 눈, 작은 입, 높이 솟은 육계를 지닌 아미타불은 수미좌(
須彌座) 위 청련의 연꽃대좌 위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보이며 결가부좌를 했다. 신광(
身光)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마치 빛이 발산되는 듯 하며, 그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그림 밑 중앙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보살
은 아미타불을 향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않는다.

보살들 위에는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 등 10대 제자가 있으며 윤곽선 주변
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들 좌우에는 용의 뿔을 들고 있
는 용왕과 공양물이 든 과반을 든 용녀(龍女), 사자관과 코끼리관을 쓴 팔부중, 금강신 등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화면의 하단에는 사천왕들이 각자의 연장과 갑옷 등을 갖추며 서 있다.

탱화의 정보를 담은 화기(畵記)는 그림 좌우 가장자리에 있다. 왼쪽에 황제 가족의 성수만세
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으며 오른쪽에 연화질과 시주질을 적었다. 화기에 의하면 1907년 2월 7
일, 13점의 탱화<대웅전 상단탱, 대료(大寮)의 상단탱, 영산탱, 독성탱, 칠성탱, 구품탱, 중
단탱, 감로탱, 산신탱, 신중탱 2점, 현왕탱, 조왕탱>을 조성해 봉안했다고 나와있으나 지금은
6점만 겨우 남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 아미타불도는 대료의 상단탱으로 여겨
진다.

구한말에 황실 발원 탱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와 다양하고 화려
한 문양, 능숙하고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구한말 서울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암긍법과 두흠
, 봉감 등이 참여하여 그린 작품이다.


▲  수국사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3호

16나한도는 1907년에 보암긍법, 두흠, 금어 봉감, 법연 등이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의 일원으로
조성 목적은 앞서 아미타불도와 비슷하다. (이후에 나올 4개의 탱화도 같음)

그림 중앙의 큰 광배에 들어있는 석가3존상은 결가부좌했는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
고 가부좌를 취한 석가여래의 모습은 가는 눈썹과 눈, 좁은 입술, 높게 솟은 육계 등이 수국
사 아미타불도의 본존불과 매우 비슷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대의(大衣)에는
아미타불의 대의와 유사한 색 문양과 금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석가여래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청련의 연화대좌에 편안한 자세로 결가부좌했는데, 이중 왼쪽
협시보살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나 오른쪽 것은 두 손으로 흰 백련을 받들고 있다. 이들
은 16나한과 함께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왼쪽은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등 수기삼
존을 배치한 것으로 여겨지나 지물만으로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석가삼존상 두르고 있는 신광
내부를 모두 금박으로 붙여 화면 중앙에서 광명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가3존상 좌우로 일정하게 분리된 네모의 틀 속에 다양하게 표현된 16나한은 산 또는 계곡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12존자(나가세나)와 제13존자(안가다)를 제외한 나한들은 모두 1~
2명의 동자 또는 공양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사각형 틀 속에 각기 따로 묘사된 나한들의 상황
묘사는 매우 뛰어나며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한들은 유사한 크기로 묘사되었고 그 색
감과 필선은 매우 수려하며 나한의 옷과 각종 지물에는 금니가 많이 쓰였다.

이 16나한도와 같은 화면분할식 구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 경기도 지역의 팔상도, 나
한도, 구품탱 등에 많이 사용된 구도로 나한들은 일정한 사각형 틀 속에 묘사되고 있어서 전
체적으로 정돈된 느낌을 준다. 또한 이 그림은 왕실 발원의 불화답게 금박과 금니 사용이 많
으며, 안정적인 필선과 형태, 조화로운 채색 등이 돋보인다.


▲  수국사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4호

190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극락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담고 있다.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監董)을 맡았다.

이 구품탱은 화면을 9개로 나누어 구품도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런 분할 구도법은 개운
사(開運寺) 팔상도, 흥천사(興天寺) 극락구품도, 고양시 흥국사(興國寺) 극락구품도, 낙산 청
룡사(靑龍寺) 팔상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구한말 서울, 경기도 지역 탱화에서 많이 나
타나는 구도법이다.
그림 중앙에는 아미타극락회(阿彌陀極樂會)가 묘사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구품 연못이 배열되
어 있다.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 천중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권속들은 모두 3단으로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는데 흥천사 극락
구품도, 고양시 흥국사 극락구품도 등 다른 구품도에는 인물만 가득한데 반해 이 구품도에는
화면 좌우에 수목을 배치하여 화면 구성이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이며, 아미타불의 신광과 화면
하단을 금박으로 처리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극락회 향우에는 보살의 극락정토참예도(極樂淨土參詣圖)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아미타불 회
상에 참여하고자 모여드는 보살의 무리와 동자상, 그리고 무악천인 등을 그린 것으로 전각과
연못에는 극락조(極樂鳥)와 연꽃 등이 있다. 그리고 극락회 향좌의 성중극락정토참예도(聖衆
極樂淨土參詣圖)에는 극락의 주악천인과 아미타불 회상에 참여하고자 찾아온 7인의 성문상 등
이 있으며, 그 배경으로 극락조와 노송, 구름 등의 자연물로 이루어진 전각과 연못이 있다.

극락회 바로 밑에 자리한 극락정토 장면은 16관(觀) 중 제6총관(總觀)에 해당되는 관으로 보
수(寶樹), 소나무, 대나무, 기암괴석, 중층 지붕의 전각이 그려져 있다. 전각 앞에는 활짝 핀
연꽃과 연잎으로 가득한 연못이 있고, 주변 곳곳에 코끼리, 금모사자 등이 보인다. 제6총관의
좌/우 하단의 3면에는 극락왕생의 왕생정토를 표현했다. 왕생장면은 극락정토를 상품(上品),
,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상/중/하로 나누어 아홉 장면으로 다루
었다.

하단 중앙의 제14관에 해당되는 상품은 화면의 반이 연못으로 이루어진 구도로 연못에는 관모
에 관복을 입은 왕생자, 동자형의 왕생자 등 4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있다. 왕생자 위
쪽에서는 부처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면서 왕생자들을 향해 광명(光明)을 비추고 있다. 왕생자
들이 있는 연못 위 정토(淨土)에는 다양한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등이 기린 4마리, 극락조 2
마리와 어우러져 있으며, 제6총관 향우(向右)에 위치한 장면은 제15관 중품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동자형의 사람 모습을 한 왕생자 4명을 아미타불이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어깨 위로 치켜들고 왼손은 무릎에 두며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데 그에게
서 뻗어 나온 빛이 연못 속 백련 위에 앉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들 배경에는 중층의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극락조, 금모사자, 괴석, 오색을 발하는 금탑
이 보인다. 하단의 중품(향우)에는 구름을 탄 2구의 보살입상이 연못 속의 속인형 왕생자 3구
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보살의 지물인 연꽃에서 광명이 나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학과 낙타 등이 정토에서 노닐고 있다.

제6총관의 향좌(向左)에는 제16관 하품이 배치되어 있다. 연못 속에는 붉은 옷을 입은 2명의
왕생자와 옷을 입지 않은 3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상단 우측(
향좌)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 주위로 여러 수목과 전각, 극락조와 기암괴석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2층 전각의 지붕을
금니로 칠했다. 그 밑에 묘사된 다른 하품의 연못에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반
영한듯 왕생자의 모습은 담지 않았다. 이는 십이겁(十二劫)이 지나야 하품왕생자의 연꽃이 핀
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에는 수목과 괴석, 학, 사슴 등이 있다.

보암 긍법이 1905년에 봉원사(奉元寺) 구품도를 그렸는데 그것을 초본으로 삼아 제작한 것으
로 보이며, 채색은 금니와 함께 진채색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민화의 극채
색을 연상케 한다. 필치 또한 수려하며, 문양의 표현 등 그 표현력이 매우 치밀하다.


▲  수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5호

등장인물이 빼곡하여 눈과 정신을 쏙 피곤하게 하는 감로도는 1907년에 그려진 것으로 강재희
가 돈을 대고 강문환,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을 맡았으며, 편수 보암긍법, 편수 두흠, 금어
봉감, 계은봉법, 범화정운, 금운정기, 운호재오, 재원, 상은, 상오, 기정, 법연, 범천, 행언,
현상, 종민, 원상 등 많은 이들이 합심하여 그렸다.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해 봉안된 감로도는 가로 261cm, 세로 157.5cm에 달하는 화면의 하
단에는 아귀(餓鬼) 2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그 위로는 많은 음식과 공양물이 차려진 제
단과 칠여래(七如來)가 표현되어 있다. 가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하며 나
란히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과 아난/가섭존자, 왕후장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
先后), 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7여래 밑에 있는 제단 좌우로 높은 기둥을 세운 후 南無百億化身佛(남무백억화신불, 석가모니
), 南無淸淨法身佛(남무청정법신불, 비로자나), 南無圓滿報身佛(남무원만보신불, 노사나) 등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갖은 꽃과 공양물을 두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삼신번이 현
장감을 준다. 그런 제단 위에는 대황제폐하(고종), 황태자전하(순종), 영친왕전하, 의친왕전
하 등이 적힌 위패 모양의 불전패가 놓여 있다.

제단에 이르는 돌계단 밑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있
으며, 제단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승려들이 모여 앉아 독경하거나 큰 북과 바라를 두드리
며 의식을 치르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제단으로 가는 사람
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1쌍의 아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화염이 뿜어
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얼굴 표정 등에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을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
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묘기를 부리고 초랭
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를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세속의 다
양한 장면들이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
터의 모습을 재현한 듯 싶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 장면은 주로 장례나 영가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
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화면 우측으로는 뇌신을 표현
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가지며 무리
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을 벌하는 모
습, 전쟁 장면 등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남양주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봉은사 감로도(1892년) 등
서울, 경기 지역의 19~20세기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도
표현은 다소 복잡다난해 보이지만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또한 인물들의 형태
감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필치가 안정되고 다양한 색감에 의한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
인다.


▲  수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6호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탱화로 주로 법당에 걸어 법당 수호 및 청정제의 역
할을 한다.
이 탱화는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
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 등이 감동을 맡았다.
화폭이 270cm에 이르는 큰 신중도로 그림 가운데에 위태천(韋太天)과 범천(梵天), 제석천(帝
釋天)을 두고 그 주위로 천부중과 호법신을 배치했는데, 얼굴이 둥글고 넓적한 위태천은 새
깃털을 꽂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두 손으로 삼차극(三叉戟)을 세워 들고 있으며 목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범천과 제석천은 화려한 보관과 천신의 복장으로 정면을 향해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데 위태천
과 함께 신광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그림의 중심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 주위로 주
악천인(奏樂天人)이 피리, 타박, 생황 등을 연주하고 있으며 해와 달이 묘사된 관을 쓰고 있
는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천자(月宮天子), 익선(翼扇)을 든 산신과 홀을 든 조왕신, 천동
, 천녀 등이 있다.

위태천 옆에는 좌우 3구씩 6구의 신장(神將)이 배치되어 있다. 뿔을 든 용왕과 칼과 창을 든
호법신이 있는데 특징적인 인물 표정이 신중탱 전체에 다양성을 주고 있다. 채색은 적색, 녹
색을 비롯하여 금색과 갈색, 짙은 청색 등이 같이 사용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차분하며 그
속에서 보여지는 금박과 여러 문양은 화폭에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필선은 철선묘를 기본
으로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데, 호법신의 수염까지 세밀히 묘사되었으며 윤곽선 주위로 선염
(渲染)을 가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등 황실 발원 불화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수국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7호

현왕도는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을 하는 현왕(보현왕여래)과 그 식구들을 그린 것이다.
1907년에 월초가 화주(化主), 강재희가 대시주가 되어 황제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안
한 것으로 보암긍법과 두흠, 금어 범화정운, 운호재오, 행언이 함께 그렸으며 가로 248.3cmX
세로 150.8cm 크기로 다른 현왕도와 달리 가로가 길어 현왕도 중에서 매우 큰 규모이다.

현왕을 중심으로 대륜성왕, 전륜성왕(轉輪聖王), 판관, 녹사, 천동 등이 그려져 있으며, 각기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한 채,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다. 붉은 관복을 갖춘 현왕은 오른쪽으
로 몸을 돌린 채 십자형 문양이 새겨진 천으로 덮힌 의자에 앉아있으며, 머리에는 경전을 접
어 올려 장식한 관을 쓰고 있고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현왕 앞에 놓인 책상에는 화엄경과 벼루, 붓, 연적 등이 놓여있으며. 현왕 주위로는 대륜성왕
과 전륜성왕 등 여러 명의 녹사와 판관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위쪽에 있는 동자는 부채, 당
번(幢幡), 산개(傘蓋) 등을 들고 있는데 현왕 앞에 있는 2명은 현왕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그중 1명은 두루마리를 받치고 있고 다른 1명은 두루마리를 받고 있다.

현왕을 중심에 두고 그 가족들을 좌우로 배치했고 가로폭이 넓은 화폭으로 구성되는 등, 안정
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금니 사용과 조화된 채색,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문양, 철선묘의 안정적
인 필치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의 하나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 보물 1580호


대웅전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고향(철원 심원사)을 잃었고 심지어 남의 절에서 푸대접
을 받으며 샛방살이를 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 한이 쌓여서 생긴 사리일까? 그의 뱃속에서는
많은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고려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귀한 것들
이 주류를 이룬다. 하여 그들은 아미타여래좌상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이들은 부피가 작은 진귀한 것들이라 신변보호를 위해 비공개로 묶여 있는데 이번에 모두 외
출을 나오면서 속세에 그 도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다시 수국사로 돌아가면 어지간해
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찾았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문서 중 유일하게 금속활자(金屬活字)로 인쇄된
경전이다.
1457년 세조가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고자 찍어낸 것으로 자신이 큰 글자의 자본을 직접 써서
주성한 정축자(丁丑字)로 경문을 찍었고 오가의 주해문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찍었다.
그리고 책 끝에는 세조의 발문(發文)과 한명회, 조석문(曺錫文), 임원준(任元濬) 등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인 밀교대장(密敎大藏) 권9 - 보물 1580호

밀교대장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밀교대장', 그리고 1424년에 왜열도에 '밀교
대장경판'을 내렸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있으나 아쉽게도 관련 실물은 전하지 않았다. 그러
다가 바로 수국사 아미타불 뱃속에서 그 실체가 처음으로 발견되어 이 땅 유일의 밀교대장으
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다. 그 자체로도 가치가 엄청난 존재로 1389년에 간행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  일체여래 전신사리 보협진언(一切如來 全身舍利 寶篋眞言) - 보물 1580호

'기해년(己亥年, 1239년)'과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의 이름이 적힌 다라니이다. 최종준
은 철원최씨 집안인 최유청(崔惟淸)의 손자로 고종(高宗) 때 15년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
낸 사람인데, 1239년에 집안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상과 이 다라니를 조성했다.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진본 권36 - 보물 1580호
11세기에 판각된 사간본(寺刊本)으로 여겨진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집어넣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권수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그 외에는 잘 남아있다. 권수제는 경제(經題), 품제(品題)가 나눠져 있고
역자가 그 사이에 표시되어 모두 3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389년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개금한 내용과 시주자가 적혀있다.
<1389년 7월 22일에 개금을 시작, 각각 소요된 금과 니금의 양을 표시했음,
화주는 지식행(智識幸), 시주는 영성군부인(寧城郡夫人) 신씨>

▲  몽골에서 넘어온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 보물 1580호
14세기에 원나라(몽골) 보령사(普寧寺)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일명 보령장(普寧藏)이라
불린다. 권17, 18, 88, 144, 145, 146 등 총 6권6첩이 발견되었는데, 권 17표지에
'주지 계상(戒祥)'이란 묵서가 있어 수국사로 넘어오기 전에 계상이란 승려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절반 이상이 헝클어진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작성된 원문이다. 불상 개금에 니금 2돈이 소요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차 중수(1389년)와 달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나오지
않아 두 보살상은 사라지고 아미타불만 홀로 있었음을 알려준다.

▲  푸른 피부의 발원문(發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시주자인 신사지(愼思智)의 발원문이다. 부모와 자손들 모두
정토(淨土)에서 다시 태어나 불법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칠보(七寶)와
안양(安養)의 나라에서 즐겁게 보내기를 소망하고 있다.

▲  불설장수 멸죄호제동자 다라니경(佛說長壽 滅罪護諸童子 多羅尼經)
- 보물 1580호

이름이 무려 14자에 이르는 이 경전은 간단히 줄여서 '장수경'이라 부른다. 석가여래가 문수
보살에게 알려준 일체 중생의 멸죄장수의 법을 적은 것으로 이 경을 독송하면 아픈 아이를 낫
게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49일 이내에 이 경에 향을 사르고 공양하면 현세에서 장수하게 되
며 악도(惡道)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서적 끝에 '복위(伏爲) 황제폐하 ~~ 억재(億載)'란 내용이 있어 13세기 정도에 몽골(원)에서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며, 뒷표지에 '성인시납(性仁施納)'이란 내용이 있는데, 성인은 심원사
승려로 1562년 불상 중수 때 많은 불교 서적을 시납했다.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보물 1580호
1539년에 황주 심원사에서 펴낸 것으로 1541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다시 인출했는데
당시 불상 중수를 담당했던 심원사의 성인이 이런 사실을 기록했다.

▲  약사유리광여래 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 本願功德經) - 보물 1580호
1528년 강남 봉은사에서 펴낸 판목을 1541년에 화주 법심(法心)이 심원사에서 인쇄한
것이다. 1562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희섬(熙暹)이 지장경과 이 약사경을 시납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여러 조선 중기 직물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조선 중기 동경(銅鏡)과
빛깔이 고운 다양한 보자기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하얀 저고리(조선 중기) - 보물 1580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끝으로 수국사의 찬란한 보물 구경은 마무리가 되었다.
수국사를 품은 봉산(烽山, 207.8m)까지 본글에 싹 담고자 했으나 내용이 너무 장대해지므로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수국사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1월 2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