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동그란 자태를 보이며 천하의 밤을 비추던 한가위(추석) 연휴에 나의 즐겨찾기
의 일원인 서촌(西村, 웃대)을 찾았다.
서촌은 북촌(北村)과 부암동(付岩洞), 성북동(城北洞), 호암산(虎巖山), 북한산(삼각산)
등에 고루고루 분산된 나의 마음을
적지 않게 흔들어 놓은 곳으로 무수히 발걸음을 했음
에도 돌아서면 또 가고 싶다.
이번 나들이는 서촌 투어의 단골 기점인 경복궁역(3호선)에서 시작했다. 오후 내내 서촌
의 많은 명소를 복습했으나 그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어 일부만 본글에 소개한
다.
♠
천하에서 제일 컸다는 백송(白松), 하지만 지금은 한낱 전설이 되어
밑도리만 겨우 남은 통의동(通義洞) 백송터
▲ 밑둥만 남아있는 통의동 백송의 흔적
(왼쪽과 주변에 보이는 하얀 것들은 어린 백송들)
서촌이란 동네에 뛰어들어 제일 먼저 찾은 것은 통의동 백송터이다. 이름 그대로 백송이 깃들
던 곳으로 그 나무가 죽자 백송 옆에 '터' 1글자를 붙여놓았다.
백송은 하얀 피부의 소나무로 백골송(白骨松)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그의 고향은 북경(北
京) 만수산(萬壽山)으로 북경은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고구려는 국
도(國都)를 평양이라 불렀으며, 그에 버금가는 도시(북평양 등)에도 '평양' 2자를 붙였다. 즉
오늘날 서울이란 이름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옛 조선과 고구려는 물론 발해도 북경 일대를 차
지했으며, 고려도 북경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북경을 비롯한 중원대륙에서 그 많던 백송은 옛날에 씨가 마른 상태이다. 다행히 이 땅에 백
송 일부가 남아있어 백송의 존재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데, 이들 나무는
조선 때 명/청나라
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이 여행 기념으로 가져와 심은 것들이다. (명나라 사신이
선물로 준
것도 있다고 함)
백송이 이처럼 희귀한 존재라 이 땅의 늙은 백송들은 모두 국가 천연기념물의 높은 지위를 누
리게
되었다. 통의동 백송 역시 그중 하나로 추정 나이는 약 600여 년, 높이 16m, 둘레
5m
규
모로
천하에서 가장 크고 가장 늙은 백송이었으며, 자태가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여
천연기념물 4호로 백송 중의 가장 앞선 번호를 지니고 있었다. 서울에는 통의동을 비롯해
내
자동(內資洞), 원효로(元曉路), 회현동(會賢洞), 재동(齋洞), 조계사(曹溪寺)
등
6그루의 천
연기념물 백송이 있었다.
이처럼 착했던 통의동 백송은 1990년 7월 태풍의 난데없는 공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폭우와
바람의 탓도 있겠지만 낙뢰가 가장 큰 원인으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나무가 중환자 신세
가 되자 지역 사람들과 서울시가 그를 살리려고 치료도 하고 굿까지
벌이는
등, 온갖
정성을
들였으나 결국 며칠 만에 숨줄을 놓고 말았다.
나는 다행히 그가 죽기 여러 달 전, 그의 생전에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초등학교 끝
무렵 시절로 하얗고 커다란 소나무에 꽤 신기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정말 엊그제 같
거늘 그는 그렇게 가버리고 초췌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세상을 뜬 이후에도 계속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93년 3월 24일 그 지위가
해제되었으며, 나무의 윗도리를 잘라내고 밑도리만 남겨 동네 기념물로 붙잡고 있다. 그의 퇴
장으로 천하에서 가장 크고 늙은 백송은 재동 백송이 거머쥐게 되었다. (키는 재동이 통의동
보다 1m 정도 큼)
허나 천연기념물 백송들이 다들 늙은 상태라 이미 많은 백송들이 쓰러졌다. 하여
서울에는 재
동과 조계사(수송동) 딱 2개만 남아있으며, 경기도에 2개(고양, 이천), 충남에 1개(예산)가
고작이다.
다행히 늙은 백송의 씨를 채취해 재배에 성공하면서 통의동 백송터, 창경궁(昌慶宮),
재동 백
송 등 여러 곳에 어린 백송을 심어 옛 백송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 몸은 죽었지만 하얀 피부는 여전한 통의동 백송
▲ 작은 식물과 곤충들의 삶터가 된 백송
앙상하게 밑둥만 남아있지만 그 덩치가 나보다 몇 배 이상으로 크다. 밑둥이 저 정도니 그의
생전의 모습은 주변 건물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비록 갔지만 나팔꽃 등 많은 식물
과 곤충들이 그의 몸뚱이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어 죽어서도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베푼다.
초가을이라 한참 물이 오른 수풀은 그의 몸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여 태풍으로 쓰러진 아픔을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백송 남쪽에는 어린 백송들이 여럿 심어져 조촐하게 소나무숲을 이룬다. 이제는 훤칠한 모습
을 보이며 높이 자라나 옛 백송과 주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주변에 집들이 너무 가득
차서 그들의 삶터가 꽤 답답해 보인다. 자연을 배려하지 않은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공간이 좁아져 말라 죽거나 풀이 죽은 늙은 나무가 적지가 않은데, 이들 백송을 제대로 가꿀
의지가
있다면 공간을 좀 늘려야 될 것이다.
청와대분수대 서북쪽이자 청와대 서쪽 길 건너편에 천하 무궁화의 성지(聖地)인 무궁화동산이
있다. 지금은 무궁화(無窮花)의 향연이 펼쳐지는 열린 공간으로 자유롭게 두 발을 들일 수 있
지만
예전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던 금지된 곳이었다.
이곳에는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던 그 유명한 궁정동 안가(安家, 안전 가옥)가 있었다. 우리
귀에 아직도
생생한 1979년 10,26사태의 우울한 현장으로 그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박
정희 대통령은 삽교천방조제(揷橋川防潮堤) 준공식을 둘러보고 저녁에 이곳 안가에서 여흥을
즐기던 중,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경호실장 차지철과 함께 살
해되었다.
이후 청와대 구내로 금지된 곳으로 묶여있다가 1993년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앞길이 개방되
면서 안가 건물을 싹 밀어버리고 무궁화 등 꽃과 식물을 심어 공원으로 해방되었다. 권력층의
비밀 여흥 공간이 비로소 시민들의 공간으로 활짝 거듭난 것이다.
공원은 전체적으로 태극무늬를 띄게끔 무궁화를 잔뜩 심었으며, 공원 한복판에 궁정동을 상징
하는
'정(井)' 모양의 조그만 분수대를 닦았다. (궁정동은 궁궐 우물이 있던 동네임) 그리고
240m의 산책로를 닦고 무궁화 화단을 만들었으며, 야생화 7,700그루와 소나무 등 13종 1,500
여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공원 외곽에는 자연석으로 성곽 비슷하게 돌담을 닦아 현대사의 쓰
라린 아픔의 현장을 싹 덮었다.
이곳들 둘러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동네에서 쉽게 무궁화를 볼 수 있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내가 사는 동네도 그렇고, 다른 동네도 그렇고 무궁화를 속시원히 본 적이 별로
없다.
유명 꽃(개나리, 진달래, 연꽃, 산수유, 벚꽃, 국화 등)에 가려져 이 땅의 어엿한 국화
(國花)임에도
홀대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이 땅의 대표적인 오물(汚物)들인 친일파의 농간도
크다. (이 땅의 고위 위정자 중에 친일 패거리와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많은 것은 실로 개탄할
일임) 어쨌든 국가 차원에서 무궁화를 크게 장려하고 수종을 개량, 확대하여 천하 어디서든
볼 수 있도록 보급이 절실해 보인다.
▲ 무궁화 속을 거닐다. 무궁화동산 중심 산책로 (청와대분수대 방향)
▲ 1999년에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기념으로 심은 소나무
▲ 무궁화가 아낌없이 휘날리는
무궁화동산 서쪽 산책로
▲ 붉은 무궁화의 위엄
무궁화는 연분홍 피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붉은 피부도 있었다.
▲ 한참 물이 오른 연분홍 무궁화의 고운 자태
무궁화는 역시 연분홍 피부 꽃이 갑(甲)이다.
▲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집터 표석
김상헌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절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힘겹게 항전했을 때, 항복을 반대
하며 청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청이 명을 공격하려고 원군을 요청하자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린 일로 1640년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는데,
그때 서울을 떠나면서
우울한 심정을 담아 다음의 유명한 시를 지었다.
무궁화동산 동북쪽인 창의문로 도보변에 크고 오래된 굴피나무가 있다. 이름 그대로 중원대륙
이 원산지인 굴피나무로 추정 나이는 약 460년(1981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415년)
, 높이 23m, 나무둘레 3.1m 규모이다.
* 무궁화동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7-3, 55-3 (자하문로26길 10, ☎ 02-731-
0670)
♠
경복고등학교에서 만난 조촐한 명소들
▲ 수풀 사이로 고개를 내민 운강대(雲江臺) 바위글씨
무궁화동산 후문에서
북쪽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경복고등학교가 있다. 북악산(백악산) 그늘
에 자리하여 경치도 좋은 이곳은 북촌(北村)의 중앙고등학교와 더불어 도심권의 명문 고등학
교로 명성이 높다. (옛날에는 경기도에서 이곳까지 통학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함)
경복고는
1921년 5월 2일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문을 연 100년 역사의 학교로 첫 입학생은
156명이었다. 그해 6월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으며, 1938년 4월 경복중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1943년에 수업연한을 4년으로 줄였으며, 왜인(倭人)들이 계속 교장을 해먹다가 1944년에 우리
나라 사람인 조재호가 교장이 되었다.
1946년 교육법 개정으로 6년제로 개편되었다가 1953년 3년제 경복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로 분
리되었으며, 1968년 경복중교는 폐지되고 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다. 사립이 아닌 공립(公立)
남자고등학교로 북쪽에 경기상업고등학교, 청운중학교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교내에
운강대 바위글씨와 겸재 정선 집터, 오래된 보호수 2그루 등의 조촐한 명소가 담겨져 있는데,
그중 운강대 바위글씨가 이곳의 대표 명소라 할만하다. 여기서 운강대는 경승지나 누대(樓臺)
이름이 아닌 운강 조원(雲江 趙瑗, 1544~1595)이 살던 곳임을 뜻한다.
조그만 바위에 살짝 깃든 '운강대' 3자는 조원의 손자인 조석형이 새겼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
으며 글씨가 작지만
선명하여 조선 후기나 20세기 초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조원의 임천조씨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인 조익(趙翼, 1474~1547)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자
손들이 대대로 거주했다. 조원은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로 언행이 충실하고 효성이 대단했으
며, 1564년 진사시(進士試)에 붙고, 157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575년에 정언(正言)이 되
었다.
당쟁이 쓸데없이 극심해지자 그 폐해를 상소하여 당파의 주동자를 싹 좌천시킬 것을 주장했으
며, 1576년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고, 1583년 삼척부사를 지내고 승지(承旨)가 되었다.
그가
남긴 서적으로는 독서강의(讀書講疑)가 있다.
그에게는 조희정, 조희철, 조희일, 조희진 등 '희'자 돌림의 아들 4형제가 있었는데, 그들 역
시 효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나라에서 그들의 효행을 기리고자 그들 동네에 정려문(旌閭門)과
쌍홍문(雙紅門)을 세웠는데. 그들로 인해 이곳 지명이
효자골(효자동)이 되었다. 아쉽게도 이
들 정려문과 쌍홍문은 세월의 거친 흐름에 모두 사라졌으며, 해공 신익희(申翼熙) 가옥 입구
골목가에 '쌍홍문터'를 알리는 표석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떠나간 쌍홍문의 존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
임천조씨 집안은 안동김씨 집안과 함께 17~18세기에 궁정동과 효자동(孝子洞), 청운동, 옥인
동, 신교동 등 웃대 지역에 형성된 '백악사단(白岳詞壇)'이란 문인 단체의 중심 역할을 하였
다. 백악사단은 조선 위정자와 양반, 선비들의 아주 고질적인 정신병인 명과 청에 대한 지극
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조선을 천하의 중심으로 보는 이른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내세우며 조선만의
문화를 추구하고 발전시켰다. 또한 경복고 자리에서 살았던 겸재 정선(謙
齋 鄭敾, 1676~1759)도 그 단체에서 활동하며 그 유명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시켰
다.
▲ 읽기가 다소 고통스러운 효자유지(孝子遺址) 비석
운강대 바위글씨 옆에는 효자유지 비석이 있다. 효자골(효자동)의 유래를 머금은 작은 비석으
로 1956년 경복고 31회 졸업생들이 졸업 기념으로 세운 것인데. 문장이 세로로 되어있고 한자
가 적지 않아 안그래도 속세살이에 고통받는 두 눈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다. 하긴 그 시절
에는 가로보다 세로가 일상이었고, 한문을 적지 않게 썼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 겸재 정선 집터 표석 ①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은 바로 이곳 유란동 난곡(蘭谷)에서 태어나
52세까지
살았다. 정선의 집터 표석은 2008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최완수가
글을
쓰고 노천 조갑녀가 글씨를 썼다.
▲ 겸재 정선 집터 표석 ②
▲ 경복고 느티나무의 겨울 모습 - 서울시 보호수 1-2호 겸재 정선 집터 표석 옆에는 600년이나 숙성된 느티나무가 있다. (1981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65년) 높이 16.5m, 나무둘레 3.8m로 겸재 정선은
그의 시원한 그늘 맛을 오랫동안 누리고 살았다.
▲ 경복고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8호
경복고 정문 옆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넓게 그늘을 베풀고 있다. 추정 나이는 약 250년(1981
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15년), 높이 22m, 나무둘레 3.47m로 웃대
일원에서
활
동했던 백악사단 사람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은행나무 대부분은 사람들이 심은 것임)
▲ 경복고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학교가 북악산 그늘에 푹 묻혀있다.
▲ 학교에 샘터가?? 대은암(大隱岩)샘
경복고는 서울에 있는 학교 중 거의 유일하게 석조형(石槽形) 샘터를 가지고 있다. 이 샘터는
1996년 3월에 경복고 28회 졸업생인 이필규가 기증한 것으로 땅속 250m에서 물을 소환해 샘물
로 쓰고 있는데 샘터에 붙여진 대은암 3자는 인근 북악산 자락에 숨겨진 대은암계곡에서 따온
것이다. (대은암은 금지된 구역임)
샘터 주변에는 키 작은 5층석탑과 단순하게 생긴 석등(石燈)이 있는데, 석탑은 인근에서 가져
오거나 기증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음) 샘터는 2개의 거북상이 물을 졸
졸 뱉어내며 석조를 채우는 방식으로 내가 이곳을 2번(초겨울, 초가을)이나 찾았으나 가는 날
이 물 마른 날이라고 그때마다 수분은 없었다.
* 경복고등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89-9 (자하문로28가길 9 ☎
02-397-5301)
무궁화동산 정문에서 큰 길(효자로)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신교동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서
쪽으로 길을 건너 인왕산(仁王山)이 보이는 필운대로로 진입하면 국립서울농학교가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선희궁터이다.
농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개교 100주년 기념비와 짙게 무르익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나무
의 추정
나이는 280년(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25년), 높이 20.5m, 나무둘
레 2m로 사람들의 보살핌과 아무리 섭취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에 의지해 어엿하게
성장했다. 세월이란 빨리 자라게 하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뒤에는 늘 독이 되기 마련이다.
나무 앞에는 두 손을 모은 모습의 농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있는데, 농학교의 전신인 제
생원(濟生院) 맹아부(盲兒部)가 1913년 4월 1일에 서대문구 천연동(天然洞)에 세워진 것을 기
리고자 2013년에 세운 것이다.
▲ 서울농학교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5호 선희궁터 사우를 찾아 교내로 깊숙히 들어가면 선희궁터 사우 직전에 학교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커다란 은행나무가 나온다. 약 290년 묵은 나무로(198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260년) 높이 20m, 나무둘레 6.93m의
우람한 덩치를 지녔다.
▲ 선희궁터 사우(祠宇) - 서울 유형문화유산
선희궁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를 봉안한
왕실의 사묘(
私廟)이다. 여기서 사묘<사친묘(私親廟)>란 왕후의 반열에 들지 못하거나 추존되지 못한 제왕
의 어미나 친할머니를 위해 지은 사당을 말한다.
영빈이씨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로
1764
년에 인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영조는 영빈에게 의열(義烈)이란
시
호를 내리고, 1765년에 사당을 지어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正祖)는 선희궁으로 이름을 갈아 특별히 애지중지하였다.
1870년 영빈의 신주(神主)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에 원위치시켰으며,
1908년
순종의 칙령(勅令)으로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묘(祠廟)을 대거 정리하면서 육상궁으로 통폐합
시키고 선희궁은 사우를 제외하고 싹 철거되었다. 그 터에는 1913년에 세워진 제생원 맹아부
가 1931년에 둥지를 틀면서 지금의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를 이루게 되었다.
농학교 서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선희궁터 사우는 툇마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정면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로 둘렀으며 건물 안은 텅 비었다. 세월의 때가 아
낌없이 깃든 주춧돌 위에 가지런히 들어앉아 나름대로의 위엄과 기품을 드러내 보이지만 현역
에서도 오래전에 물러난 상태이고 후배인 학교 건물 속에 파묻혀있어 오히려 초라하게 다가온
다. (선희궁터 사우는 '선희궁터'란 이름으로 서울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됨)
그리고
신교동교차로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농학교 정문 쪽으로 가다 보면 길 오른쪽으로 콘크
리트 밑에 깔린 석축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들은 선희궁을 받쳐들던 빛바랜 초석들로 지금
은 그 위로 농학교 운동장이 닦여져 있다.
▲ 선희궁 뒷쪽 전망대 (서원소정터)
선희궁터 사우까지 들어왔다면 여기서 길을 돌리지 말고 사우 뒷산을 주목하기 바란다. 연못
옆을 보면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있는데, 그 손을 잡아 산길을 2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도심을 향해 자리한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으로 이춘제(李春躋)가 세심대(洗心臺)와 옥류동(玉流
洞) 자락 높은 곳에 지은 서원소정(西園小亭) 자리라고 한다. 서원소정은 네모난 초가 정자로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으나 겸재 정선이 서촌 일대 명승지를 그림에 담으면서
이곳 또한 '한양전경(漢陽全景)'이란 이름으로 그 모습을
남기게 되었다.
비록 초가 정자가 아닌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스타일의 전망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
고 있으나, 서촌과 종로를 중심으로 한 도심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낮은 높이치고는 조
망이 제법 좋다. 그래서 정선이 서원소정 주변을 그리면서 서울 시내가 거의
바라보이는 곳이
란 뜻에서 그림 이름을 '한양전경'이라 한 것 같다.
▲ 겸재 정선이 그린 '한양전경'
밑에 보이는 초가 정자가 바로 서원소정이다. 그 뒤로 서울 도심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
산줄기가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높은 봉우리가 인왕산 정상)
▲ 선희궁 뒷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촌(웃대) 일대와 서울 도심
♠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고 있는 필운동 홍건익(洪建翊) 가옥
- 서울 민속문화유산
▲ 후원에서 바라본 홍건익가옥
후원은 홍건익가옥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후원 옆에 환경운동연합
뜨락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있다.
서촌(웃대)의 서쪽 간선로인 필운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문득 떠오르는 존재가 있어서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 서쪽 입구에서 배화여자대학교 방향 골목길(필운대로1길)로 방향을 틀
었다. 그 길로 조금 가면 오른쪽(북쪽)에 고색창연한 기와집이 솟을대문을 내밀며 자리해 있
으니 그곳이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이자 몇 안되는 개방 한옥, 홍건익가옥이다.
이 한옥은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홍건익이 1936년에 지은 집이다. 이
곳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한옥이 있었는데, 역관(譯官) 출신의 개화사상가인 고영주(高永周
, 1839~?)와 한규설(韓圭卨)의 외손자인 심재홍(沈載弘)이 살았다. 그러다가 1934년 홍건익이
매입했으며, 기존 집을 부시고 지금의 집을 지었다.
740.5㎡의 대지에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등 5동의 집을 낮은
구릉을 따라 자연
스럽게 배치했는데, 서울에 늙은 한옥이 즐비하나 후원에 무려 일각문(一角門)과 우물, 빙고(
氷庫)까지 갖춘 곳은 이곳이 유일하여 홍건익 일가의 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역시 세상
은
돈이 많고 봐야됨)
전통 한옥의 구성과 근대 개량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안채 대청마루 풍혈판에 새
겨진 팔괘 문양, 별채 화초벽에 태극 문양, 이화꽃 문양, 연꽃 문양 등의 장식용 문양도 곳곳
에 남아있다.
허나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그로 인한 관리소홀로 그 아름답던 집은 거의 폐가 수준으로 쇠
퇴했으며, 증축되거나 변형된 부분도 조금 있었다. 허나 전체적으로 건축 당시의 기본 구조
및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하여 서울시가 매입해 지방문화재로 삼으면서 더 이상 망가지
는 꼴은
면했다.
이후 복원공사를 벌여 2015년에 마무리가 되었으나 내부 손질로 2017년 7월에 임시 개방되었
으며, 그해 9월 정식으로 문을 열어 서촌(웃대)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너무 새집처
럼 변해버린 면도 있으나 인근에 있는 이상범(李象範) 가옥과 더불어 마음 놓고 두 발을 들일
수 있는 서촌(웃대)의 몇 안되는 옛 한옥이며 서촌 관광 안내
및 사랑방, 전시공간으로도 활
용되고 있어 점차 그 역할과 기능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 활짝 열린 홍건익가옥 솟을대문
대문 동남쪽에 빌라가 바짝 붙어있어 대문 앞 시야가 좀 답답해 보인다. 게다가
주택들에게 꽁꽁 감싸여 있어 담장은 전통식으로 재현하지 못했다.
안채는 방과 누마루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종종 특별전 같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
으며 내부 관람도 가능하다.
안채 동남쪽에는 행랑채가 있는데 이곳은 관리
사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그 옆에 작게 화장실
이 닦여져 있다.
◀ 안채 안쪽
▲ 불이 켜진 안채
▲ 새집처럼 손질된 안채 내부
▲ 사랑채
사랑채와 안채 내부에 진열된 가구와 서적들은 홍건익 일가나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가옥을 복원하면서 가져다둔 장식용으로 안채와 사랑채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구경하면 되며, 나의 꼬질꼬질한
발을 들이기가 너무 미안할 정도로 방과 마루가
산뜻하게 손질되어 있다.
▲ 쉼터와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는 사랑채 마루
이런 곳에서 낮잠 한숨 청하거나 곡차(穀茶) 1잔 들이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 무늬만 남은 우물
옛날에는 인왕산이 베푼 물로 넘쳐났겠지만 이
제는 그 명이 끊겨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그
러니 우물 뚜껑도 더 이상 열릴
일이 거의 없
다.
◀ 홍건익가옥의 특별함, 별채
사랑채 뒤쪽에 자리한 별채는 여기서 나름 별
장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별채까지 둔 한옥은
별로 없는 편으로 집주인은 여기서 속세살이에
지친 심신을 다독거리거나 독서 또는 곡차 1잔
의 여유를 누렸을 것이다.
▲ 후원으로 인도하는 기와문(일각문)
▲ 현대식으로 손질된 후원
가옥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조촐하게 후원이 닦여져 있다. 지금의 후원은 2015년
이후에 손질된 것이라 옛 모습을 거의 잃은 상태이며, 나무와 화초, 의자 등이 닦여져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에 올라서면 가옥 경내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오는데 집 주위로 키다리 빌라가 잔뜩 들어서
있어 은근히 좁아 보인다. 그래도 이 정도의 한옥을 건진 것이 어디랴.
◀ 후원 뒷쪽
문 (후문)
후원 동쪽에 기와문이 있는데 그 문을 나가면
바로 환경운동연합 뜨락이다. 그 뜨락을 통해
서촌의 주요 간선길인 필운대로와 연결된다.
이 문을 통해 가옥으로 들어서도 되며 대문이
나 후문으로 들어와 가옥을 둘러보고 반대편
문으로 나가는 것도 괜찮다.
* 홍건익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88-1 (필운대로1길
14-4, ☎ 02-735-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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