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한양도성 광희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2,4,5호선) 동남쪽 광희동에 자리한 광희문은 한양도성 성문의 일원이다.
13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문의 이름인 '광희'는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는 좋은 뜻이다.
청계천과도 가깝고 남산에서 내려온 물을 배출하는 곳이라 오랫동안 수구문이라 했으며, 서소문
(소의문)과 함께 한양도성 내에서 죽은 이의 시신을 성밖으로 배출하는 문으로도 쓰여 시구문이
란 우울한 이름도 지니고 있다. 17세기에는 이 성문을 남소문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남소문은 남
산 국립극장 남쪽에 따로 있었다. (그곳에 남소문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문이 크게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도망왕으로 악명이 높은 인조는
이괄의난(1624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 시절에 이 문을 통해 멀리 줄행랑을 쳤다. 그것이
제왕이 광희문을 이용한 유일한 예이다. (조선 제왕은 주로 남대문과 동대문을 이용했음)
1711년 민진후가 광희문을 고쳐 쌓을 것을 건의하여 그해 2월 금위영에서 공사를 시작했는데,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처럼 중층(2층)으로 하지 않고 단층 문루로 짓기로 했다. 그
래서 1712년 4월 11일까지 홍예식 성문을 만들었다. 허나 문루는 목재가 충분하지 않아서 이때
만들지 않고 서대문(돈의문) 문루 재건에 우선 사용했다.
1719년 1월 25일 민진후가 '국초(國初)에 도성을 쌓은 뒤 문루를 모두 세웠다'라고 말했다. 그리
고 영조가 문루가 없는 도성 성문을 중건했는데, 그때 광희문은 없었다. 그런 것을 통해 1712년
이후에서 영조 재위 중반 사이에 광희문 공사가 마무리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1744년 문에
단청을 칠했다.
왜정 때는 관리 소홀로 문루 여장이 맥없이 무너졌으며, 왜정이 도로와 전차 노선을 닦으면서 문
북쪽 성곽이 잘려나갔다. 또한 걸인들이 광희문 주위를 배회하는 등 사회문제도 적지 않았다.
1928년 왜정의 고적보존회는 자금 부족으로 관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혜화문과 광희문 문루
를 철거했다. 다행히 성문과 육축은 부시지 않고 그냥 두었으며, 1966년 퇴계로 확장을 위해 부
시려고 했지만 유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동대문과 남대문처럼 도로 가운데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고 만다.
1975년 성문을 남쪽으로 12m 떨어진 곳으로 옮겼으며, 이때 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 200
평을 녹지화하였다. 그리고 광희문 현판은 김응현이 썼다.
2014년 2월 광희문이 속세에 개방되어 성문 통행이 가능해졌으며, 남쪽 성곽에 있던 집들을 모
두 밀어버리고 성곽을 복원하여 성곽길을 내었다.
광희문의 육축 높이는 6m, 폭은 8.7m이다. 문루 높이는 5.9m로 초익공계 우진각지붕을 지니고
있으며, 성문 홍예 천장에는 사신도에 따라 청룡과 황룡을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치했
다. 그리고 추녀마루에는 장식기와로 용두와 잡석 7개를 두었는데, 이는 한양도성의 다른 1층 문
루(창의문, 혜화문, 숙정문 등)들과 일치한다.


2.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광희문의 위엄
광희문 바로 북쪽은 퇴계로가 있어서 성곽이 끊겨있다. 남쪽은 120m 정도 성곽이 이어져 있는데, 그
마저도 광희동 주택가에 막힌 상태이다.

3. 세월을 예민하게 탄 광희문 남쪽 성곽

4. 광희문 천장에 화려하게 그려진 청룡과 황룡, 여의주의 위엄

5. 광희문의 뒷모습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왜국과 왜열도 지방 세력 사신들은 광희문을 통해 한양도성에 들어왔다. 이는 그것들이 광희문을 좋
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왜국과 왜열도 지방 세력을 한참 아래로 삼아 한양도성 소문
인 이 성문만 통행을 허가해준 것이다. (조선이 지극정성으로 받들던 명나라와 우리의 친척 민족인 만
주족 청나라 사신은 한양도성의 대표 관문인 남대문으로 들어왔음)
성문 관리는 종6품인 부장 2명과 수문장 10명이 했으며, 성문의 개폐 절차도 선전표신과 부험이 모두
필요한 정문과는 다르게 간문이었던 광희문은 개문표신만으로 열었다. 허나 문을 계속 열어두어야 하
는 날에는 광희문에도 선전표신이 갔다.

6. 광희문 남쪽 성곽
광희문 남쪽 성곽은 속세에 개방되어 있어 성곽길 도보가 가능하다. 물론 120m 정도로 짧아서 좀 아
쉽긴 하지만 말이다. 예전에는 성곽 안쪽에 가옥들이 가득 들어찼으나 광희문을 손질하면서 싹 밀어
버렸다.


7. 광희문 남쪽 성곽길과 그 너머로 펼쳐진 광희문과 동대문 쇼핑가


8. 광희문 남쪽 성곽이 맥없이 끊긴 곳 (광희동)
예전에는 달동네 스타일의 아주 좁은 골목이 있었고, 그 좌우로 집들이 가득했다. 허나 지금은 집들을
밀어내고 성곽을 복원했으며, 골목길을 넓히고 성곽이 끊긴 남쪽으로도 약간의 녹지대를 닦았다.

9. 광희문 남쪽 성곽의 바깥 모습

'서울 사진 답사기 > 서울 도심(북촌, 서촌, 인왕산, 중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산 북쪽 끝에 자리한 남산예장공원 (기억6전시관, 조선총독부 관사터, 남산위의 저 소나무) (0) | 2025.03.19 |
---|---|
남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400년 묵은 나무들, 예장동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서울시 보호수) (0) | 2025.03.18 |
문학의집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는 옛 중앙정보부장 공관 (문학의집 서울) (0) | 2025.03.18 |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오래된 성당, 명동성당(명동대성당) ② (0) | 2025.03.17 |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오래된 성당, 명동성당(명동대성당) ① (0) | 2025.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