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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석장리유적


'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성지, 공주 석장리유적 '
공주 석장리유적
▲  공주 석장리유적
 


차디찬 겨울의 한복판인 연말의 끝 무렵, 금강(錦江) 북쪽에 자리한 공주 석장리유적을
찾았다.
공주 석장리유적은 이 땅(잃어버린 땅은 제외)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유적으로 의
미가 깊은 곳인데, 그런 중요한 곳임에도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었다. 하여
간만에 공주(公州) 땅도 둘러보고 구석기유적의 성지(聖地)도 순례할 겸, 아침 일찍 공
주로 출동했다.

공주 땅으로 넘어가기 전에 천안(天安) 땅에 잠시 들려 천안박물관을 둘러보았는데, 이
때쯤 크게 눈이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날씨가 그렇게 춥지가 않아서 곧 비로 바뀌었고,
그 비는 공주까지 졸졸 따라와 나를 귀찮게 만든다. 다행히 빗방울은 점점 얇아져 석장
리에 이르러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종일 흐린 상태라 따뜻한 햇살은 누리지 못했다.


♠  공주 석장리(石壯里)유적(국가 사적) 입문

▲  활짝 열린 석장리유적(석장리박물관) 정문

공주종합터미널에서 금강수목원으로 가는 공주시내버스 580번을 타고 금강 북쪽에 닦여진 금
벽로를 10분 남짓 가니 석장리유적이 마중을 나온다. 이때쯤 겨울비가 그쳤는데 이날이 평일
이고 날씨까지 잔뜩 흐린 상태라 거의 강바람 소리가 전부일 정도로 적막하기 그지 없다.
(공주종합터미널에서 공주시내버스 570, 571, 573, 580번이 1일 10여 회 운행, 단 방학기간에
는 감회 운행)

석장리유적 정문에 이르니 정문 옆구리에 붙은 매표소가 나의 빈약한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
본다. 석장리유적과 박물관은 유료(有料)의 공간이라 돈을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어 입장료를
흔쾌히 치루고 구석기유적의 성지, 석장리유적으로 들어선다. (성인 입장료 3,000원, 청소년
과 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무료 개방)


▲  석장리유적 정문에서 바라본 금강과 강변 풍경

▲  구석기 사람들의 사냥 장면
구석기 사람 3명이 창과 돌로 매머드를 잡고 있다. 저들은 지금 인류가
먹을 수도 없는 매머드 고기로 근사하게 회식을 했을 것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구석기시대를 재현한 다양한 모형들이 들어선 박물관 뜨락이 나타난다. 뜨락
남쪽에는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강변에는 산책로가 닦여져 있는데, 강변까지 거의 석장
리유적으로 보면 된다. 수많은 구석기 유물과 구석기 역사를 내놓던 현장은 유적 보호를 위해
흙과 잔디, 수풀, 건물(석장리박물관, 야외 구석기생활전시장 등) 등으로 고스란히 덮어놓았
다.


▲  구석기시대 움집과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 모습
움집(막집)은 구석기 후기에 처음 등장하여 신석기 때 크게 유행했다.

▲  석기를 떼는 시커먼 피부의 석장리
슬기슬기사람 모형과 구석기 석기들

▲  석장리박물관


금강 북쪽에 위치한 석장리유적(석장리 선사유적)은 이 땅(한반도 외에 잃어버린 땅은 제외)
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유적이자 우리나라 학자들이 처음 조사한 구석기유적이다. 이 땅
에는 연천 전곡리(全谷里)유적과 단양 수양개유적, 청주 두루봉동굴 유적, 웅기 굴포리(屈浦
里)유적, 상원 검은모루동굴 등의 굵직한 구석기유적이 있으나 그들은 모두 석장리유적 이후
에 깨어났다. 그러니 석장리유적이 우리나라 구석기유적의 명실상부한 1번지가 된다.

석장리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4년 5월이다. 연세대 객원학자로 있던 미국인 엘버트모어
(Albert Mohr)와 그의 부인 샘플(L.L Sample)이 부산(釜山) 동삼동 패총(조개더미유적)을 발
굴하고 금강을 찾아 홍수가 스쳐 지나간 석장리 강변을 살펴보다가 강둑 주변 무너진 층에서
10여 개에 뗀석기를 발견하니 그것이 석장리유적의 첫 세상 데뷔였다.
우리나라 선사시대에 관심이 많았던 앨버트모어 부부는 그 석기를 구석기시대 것으로 생각하
고 서울로 올라가 연세대 사학과 손보기(孫寶基, 1922~2010) 교수에게 이를 보고했다. 뗀석기
에 제대로 매료된 손보기는 5월 21일 그들을 이끌고 석장리를 찾아 쌓임층이 무너진 곳에서
석기를 여럿 찾았고 예삿 장소가 아님을 직감했다.
허나 그곳은 툭하면 홍수가 터지는 강변이라 방치하다가는 유적이 손상될 우려가 있다. 하여
정부에 서둘러 발굴허가를 요청했고, 허가를 받아 그해 11월 22일 연세대대학원 사학과를 이
끌고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 연세대박물관 발굴단에서 10회에 걸쳐 조사를 했으며, 1990년과 1992
년에는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서 11/12차 조사를, 2010년에 13차 조사를 벌였다.


▲  1964년 5월 석장리유적이 발견되다 (1964년과 2017년 석장리의 모습)

손보기 교수의 예감처럼 석장리유적은 예사로운 곳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선사유적과
달리 무려 50년 가까이 13번이나 조사를 받았으며 발굴을 위해 파놓은 구덩이에는 번호가 매
겨지고 유물이 발견되면 구덩이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했다. 이렇게 확인된 유적의 면
적은 54,595㎡로 제1지구와 제2지구로 구분되어 있다.
제1지구는 구석기 후기 집터층에서 2.8만년 전 문화층(文化層)이, 그 밑에서는 3,6만년 전의
문화층이 나왔으며, 제2지구에서는 절대연대가 밝혀진 것은 없으나 여러 층위(層位)에서 사람
들의 흔적이 나왔다. 또한 외날찍개와 양날찍개, 이른 주먹도끼, 발달된 주먹도끼, 격지긁개,
돌날석기, 새기개, 좀돌날 등 다양한 시대의 석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 결과 이곳 유적은 구석기 초기부터 후기까지 형성된 곳임이 밝혀졌으며, 맨 아래층의 외
날찍개 문화층은 암반층인 석비레층 위에 바로 쌓인 층으로 제2빙하기인 55~45만년 전 사이에
다져진 층이고, 2문화층은 제3빙하기인 35~32만년 전 사이, 3~4문화층은 21만년 전(제3빙하기
뒤쪽), 5문화층은 18만년 전 빙하기, 6문화층은 제3간빙기인 12만년 전으로 여겨진다.
구석기 중기의 성격을 지닌 자갈돌찍개 문화층은 따뜻한 기후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아래
쪽의 찰흙층에서 산화철(酸化鐵)이 굳어서 이루어진 뿌리테가 나왔다. 이 층에서는 아슐리안
식 주먹도끼, 돌려떼기 수법의 몸돌, 격지돌 등이 나와 6~7만년 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8~9문화층은 제4빙하기에 이루어진 5~6만년 전으로. 10~11문화층은 2~3만년 전으로 각
각 보고 있다. 또한 여기서 나온 꽃가루를 통해 이곳에 소나무, 전나무, 오리나무, 단풍나무,
백합, 목련 등 다양한 식물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고, 지금과 비슷한 온대성 기후였음을 알려
주고 있어 그 시절 자연환경을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  구석기시대 스타일로 석기를 만드는 구석기 사람

구석기 집터와 화덕자리 등 구석기시대 흔적 뿐만 아니라 중석기시대(中石器時代)와 신석기시
대, 청동기시대 유물도 풍부히 쏟아져 나왔다. 하여 구석기부터 옛 조선(고조선)이 천하를 지
배하던 청동기시대까지 긴 시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석장리유적이 나오기 전까지 이 땅의 선사시대는 저평가를 받고 있었다. 식민사관 쓰레기들의
영향도 있지만 구석기유적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은 7,000년 역사로
어거지로 못박혀 있었으나 석장리유적의 시원스런 등장으로 3만 년 이상으로 역사가 늘어났으
며, 이곳을 통해 이 땅에도 구석기 고고학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  석장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지금이야 석장리유적 앞으로 4차선 도로가 있어 접근성은 좋으나 1990년대까지 길이 영 좋지
못해 금강 남쪽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다. 석장리 사람들은 주로 나무 땔감을 팔거나 농사를
지었는데, 부업으로 석장리유적 발굴 조사에 참여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
고비를 후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조사에 참여했고, 조사에 참여한 10대들은 역사와 고고학
에 마음이 가면서 대학교 역사학과로 진학한 이들도 많았다. 또한 손보기는 구석기 유물의 용
어를 순우리말로 지었는데, 찍개, 주막도끼, 긁개 등이 그때 나온 용어이다. 이들 용어는 손
보기 교수와 제자들, 발굴팀, 석장리 사람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지어낸 것이라 그 의미가
크다. 어쨌든 석장리 유적은 이 땅의 선사시대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지만 석장리 사람들에게
도 많은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1990년 금강 북쪽으로 36번 국도(금벽로) 건설이 추진되자 석장리유적 보존 문제가 대두되었
다. 하여 공주군(현재 공주시)은 석장리유적 전시관을 세우기로 하고 문화재청과 협의해 9년
에 준비 끝에 1999년 12월 전시관 건축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2000년 12월 주차장 등의 부대
시설이 착공되었다.
2005년 전시관에서 박물관으로 업그레이드 하고자 전시관 설계와 구조를 변경했고, 2006년 2
월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어 2006년 9월 26일 이 땅 최초의 구석기 전문박물관인 석장리
박물관이 문을 열게 된다. 이후 2009년 5월 파른 손보기 기념관을 그 옆에 개관하여 지금에
이른다.

석장리박물관은 박물관의 중심인 전시관을 비롯해 파른 손보기기념관, 선사공원, 체험학습장,
처음 발굴이 시작된 곳, 세계구석기막집촌을 지니고 있으며, 어린이와 중고등학생, 가족 단위
에 맞는 교육 체험행사를 많이 벌이고 있다. 그리고 매년 5월 '공주 석장리 구석기축제'를 열
어 이곳이 천하 구석기 유적의 성지임을 크게 어필한다.
또한 석장리유적과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구석기시대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50년 가까이 진
행된 발굴 이야기, 발굴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까지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 점이 이곳의 특징이
자 매력이다.

* 석장리박물관(석장리유적)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동 98,118,137-3 (금벽로990,
  ☎ 041-840-8924)
* 석장리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옛날 석장리의 모습 (1960년대)
석장리박물관 자리에 있던 마을과 금강 건너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

▲  1960년대 석장리유적 발굴 현장 사진

이곳은 홍수에 취약하여 비가 많이 오면 석장리박물관 자리까지 물에 잠겼다. 하여 금강 범람
을 막고 유물층을 보호하고자 가마니에 모래를 넣어 둑을 쌓았다. 이곳에 켜켜히 숨겨진 구석
기 역사를 캐내는 것이 시작부터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  석장리 발굴 시작과 마을 사람들 (1960년)

▲  발굴 현장 단체사진
발굴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과 같이 찍은 것이다.


윗 사진은 유물층을 보호하고자 둑을 쌓은 이후에 찍은 마을 사람들의 단체 사진(1970년대)이
고, 아랫 사진은 1990년대 초에 찍은 것으로 저들 중에는 젊은 시절(1960~70년대)부터 발굴
조사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도 있다.


♠  석장리박물관 둘러보기

▲  석장리유적 발굴 관련 신문기사 (1970년 서울신문)

석장리박물관은 이곳과 여러 지역의 구석기 유물을 비롯해 구석기 생활 모형, 이곳에서 50년
가까이 이루어진 발굴 자료와 사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땅 최초에 구석기전문박물관이자
처음으로 구석기 유적 발굴이 이루어진 곳이라 구석기 유물보다는 발굴이야기가 비중이 좀 크
다.


▲  1964년 6월에 작성된 석장리유적 발굴계획서
홍수에 취약한 곳이라 서둘러 발굴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  지금도 생생한 석장리유적 발굴일지 (1965년, 1966년)

▲  석장리유적에서 발견된 구석기 석기들
겉으로 보면 대자연이 아무렇게나 빚은 돌처럼 보이나 엄연히 구석기
사람들의 손을 탄 돌덩어리들이라고 한다.

▲  석장리유적에서 나온 찌르개

▲  석장리유적 발굴조사 영상자료

▲  석장리유적 발굴조사를 재현한
디오라마


▲  석장리발굴과 석장리마을의 인연

연세대 사학과와 박물관 교수, 학생들 외에도 석장리 사람들도 발굴 조사에 참여했다. 발굴할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수고비를 주고 마을 사람들의 손을 빌린 것이다.
석장리유적 발굴을 이끌었던 손보기 교수는 서로 간의 단합이 중요하다 여겨 발굴단과 주민과
의 친목을 위해 석장리유적 뒤편 금벽초교 운동장에서 자주 축구 시합을 가져 몸을 풀었으며,
식사도 함께 했다.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니 서로의 유대감은 깊어갔고, 마을 사람들이 발굴
도구를 새로 고안해서 가져오는 등 일 능률이 크게 올랐다. 또한 발굴 현장은 마을 아이들과
금벽초교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고, 발굴 조사에 참여한 학생들도 많아 역
사학과로 진학한 이들이 많았다.


▲  발굴조사 때 쓰인 나무꼬챙이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지층을 어려운 말로 고토양층(古土壤層)이라 하는데, 고토양층은 매우
단단하다. 지금이야 기술과 도구가 많이 발전하여 어려움은 없으나 석장리유적이 한참 조사를
받던 1960~70년대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다행히 석장리 사람들이 개발한 도구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으며, 나무꼬챙이도 마을 사람들이 만든 것의 하나로 겨울에 단단해진 땅을 긁어내
고자 꼬챙이와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음)


▲  석장리유적 발굴 현장에 쓰였던 니콘카메라

1960~1980년대 석장리유적에서 바쁘게 쓰였던 왜열도산 카메라이다. 발굴 현장은 유적 전체를
담는 전경 사진이 필수인데, 그때는 나무로 제작된 사다리에 올라가서 전경을 찍었다. 카메라
뒤에 있는 빛바랜 흑백 사진은 1970년대에 찍은 것으로 사다리에 올라가서 유적 사진을 담는
모습이다. 


▲  석장리유적과 유물 사진을 담았던 환등기(幻燈機)

석장리유적이 발견된 이후, 1967년 미국 앤아르보 국제학회에서 처음으로 석장리 유적에 대한
발표를 했다. 유럽 등 양이(洋夷)들은 구석기시대에 대한 학술논의가 활발했으나 우리나라는
석장리 유적이 처음이었는데, 사진은 사진대로, 자료는 자료대로 따로 환등기를 이용해 스크
린에 띄워 보여주었다. 하여 석장리 유적에서 나온 유물과 현장을 사진 슬라이드로 편집했다.


▲  석장리유적 발굴 결과를 담은 한국사연구
한국사연구회에서 석장리 발굴 결과를 담아 1968년 9월에 낸 서적이다.

▲  단양(丹陽) 금굴과 수양개에서 나온 석기와 원숭이뼈

지금 우리나라에서 동물원을 제외하면 원숭이는 살지 않으나 구석기시대에는 있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절찬리에 나오는 단양 금굴과 수양개는 남한강변에 있는 구석기 유적
으로 금굴은 강변에 큰 굴로 있으며, 수양개는 석장리유적처럼 정비되어 박물관을 갖추고 있
다.


▲  단양과 제천 점말동굴 등에서 나온 동물의 뼈 (곰, 코뿔소, 사자 등)

▲  제천 점말동굴 유적 전경과 1978년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
(자르개와 사용 흔적이 있는 뼈, 큰원숭이뼈)
점말동굴은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이 땅에서 처음 발견된 구석기 동굴 유적이다.

▲  청주(청원) 두루봉동굴 유적 사진
이름도 낯이 익은 두루봉동굴은 손보기 교수가 발굴한 곳으로 꽤 중요한
유적임에도 발굴 이후 석회암 광산으로 계속 쓰이면서 크게
망가지고 말았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었음)

▲  구석기 후기 사람들의 생활 모습
구석기 사람들은 강변과 동굴에 살며 돌을 손질해 석기를 만들었고,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 열매를 채집해서 배를 채웠다. 구석기 후기에 이르러
그 시절로는 최첨단급인 움집(막집)을 지어 비바람을 피하면서
슬슬 신석기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  청주(청원) 두루봉둥굴 연구 자료와 그곳에서 나온
뼈 예술품(사슴 정강이뼈)

▲  단양 상시 바위그늘유적 사진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 사람의 뼈가 나왔다.

▲  주먹도끼를 들고 있는 손보기 교수와 석장리유적을 살펴보는
그의 흑백 사진

손보기 교수의 호는 '파른'이다. 여기서 파른은 파란색의 우리말로 그가 중학교에 다니던 왜
정 말기, 학교 앞에 붉은 등이 걸린 경찰서가 있었는데, 꽤나 불친절했던 그곳 왜인 순사에게
맞아 머리에 피가 났던 아픈 추억이 있다. 그 연유로 경찰서 앞을 늘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고
빨간색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 붉은색에 대조되는 파른을 호로 삼았다고 한다.


▲  손보기 교수의 유물
그가 석장리 발굴작업 때 사용했던 호미와 1967년에 발표한 역사학보 '층위를
이룬 석장리구석기문화', 1979년에 낸 석장리유적 관련 원고

▲  단양 금굴 유적
남한강변에 자리한 금굴 유적도 손보기 교수의 손을 거쳤다.

▲  석장리박물관 옥상 ▲
옥상에는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쉼터가 닦여져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느라
제대로 지친 나의 침침한 두 눈과 머리를 여기서 푹 식히며 잠시
일다경의 여유를 누린다.

▲  석장리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박물관 뜨락 (서쪽 방향)

▲  석장리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박물관 뜨락과 금강


♠  석장리유적 마무리

▲  체험학습장 인공터널

석장리박물관 동쪽에는 어린이를 위한 체험학습장이 닦여져 있다. 인공터널과 탐방로, 롤라이
딩, 체험관, 놀이터 등을 지니고 있으며, 인공티가 팍팍 풍기는 인공터널은 구석기유적이 동
굴(청주 두루봉동굴, 단양 금굴 등)에서 많이 발견된 것에 착안해서 마련한 듯 싶다. 그리고
놀이터에는 움집(막집) 3개가 닦여져 있는데, 이들은 석장리와 동해(東海) 노봉, 제천 창내에
서 발견된 구석기 움집터의 움집을 재현한 것이다.
구석기와 신석기 때는 저런 움집들이 최신식 주거 형태로 인기가 높았겠지만 지금은 구석기~
신석기 주거 체험으로 잠시만 발을 들이는 그야말로 여흥거리가 되었다. 솔직히 저런 집에서
하룻밤도 머물고 싶지 않다. (잠은 아랫목 뜨끈한 방에서 자야 제맛임)

▲  노봉1호 움집

▲  석장리1호 움집

▲  제천 창내 움집

▲  산양을 잡아 옮기는 구석기 사람


▲  여러 움집들이 재현된 야외 구석기 생활전시장
강변을 따라 넓게 닦여진 곳으로 다양한 모습의 움집과 체험학습관,
발굴 체험 현장 등을 지니고 있다.

▲  크게 입을 벌린 움집

▲  금강변을 따라 펼쳐진 움집과 산책로


▲  겨울잠에 잠긴 구석기 발굴체험장

▲  석장리유적으로 가는 길 (1960년)
금강 남쪽에서 나룻배를 타야 석장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  금강과 석장리유적의 1960~1970년대 모습

▲  구석기시대를 단출하게 표현한 조형물
창을 잡은 구석기 사람, 햇님과 별자리가 표현된 동그란 존재, 그리고 맷돼지

▲  석장리유적 유물 발굴 과정(1960년대)
제일 먼저 겉흙을 걷어내고자 삽질을 하는데 위에서부터 지층 순서대로 1겹씩
흙을 걷는다. 그런 다음 그 밑의 쌓임층을 흙손으로 차례차례 걷어내면서
토양층의 성분을 조사하고 석기 등 숨겨진 유물을 찾는다.

▲  발굴현장을 방문한 사람들 (1960년대)
백낙준(白樂濬) 전 문교부장관 일행이 발굴현장을 방문하여
손보기 교수에게 발굴 상황을 듣고 있다.

▲  발굴현장에서 짐 나르기 (1960년대)

발굴을 마치고 서울로 가져갈 짐을 지게로 나르는 손보기 교수(윗 사진)와 발굴에 참여한 연
세대 양이(洋夷) 학자(아랫 사진)가 흙이 가득 담긴 흙짐을 나르는 모습이다. 석장리에 마땅
한 길이 없다 보니 지게 등으로 일일이 유물과 짐을 금강 너머까지 나른 것이다.


▲  발굴을 함께한 대원들 ① (1970년대)
발굴을 마치고 서울로 떠나기 전 발굴팀과 발굴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  발굴을 함께한 대원들 ② (1970년대)
발굴 현장에서 손보기 교수와 발굴 대원들이 토론하는 모습

▲  손보기 교수의 노력 (1970년대)
그는 한자어 일색인 구석기와 선사시대 용어를 순 우리말로 순화시키고자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과 연구했다. 그 결과 찍개, 주먹도끼 등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선사시대 용어들이 나왔다.

▲  석장리유적 첫 발굴지

석장리유적은 바로 이곳에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즉 이 땅의 첫 구석기유적 발굴 현장인 것이
다. 하여 그것을 기리고자 첫 발굴지를 알리는 깃발을 높이 세웠고, 1964년 첫 발굴 때 세운
안내문도 특별히 보존하고 있다. 다른 선사유적에서는 없는 특별한 존재들이 이곳 석장리유적
에 있는 것이다.


▲  석장리유적 첫 발굴지를 알리는 깃발
금강 강바람에 신나게 몸을 흔들며 이곳이 천하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 발굴지임을 천하에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  1964년 석장리유적 발굴 때 설치된 빛바랜 안내문

1964년 11월 연세대에서 세운 유적 발굴 안내문이다. 다른 유적들은 발굴조사가 끝나고 바로
뽑히기 마련이나 이곳은 구석기 유적을 처음 들춰냈던 역사적인 현장이라 그때 세운 안내문을
특별히 보존하고 있다. 빛바랜 하얀 피부에 집 모양으로 만들어진 단출한 안내문으로 시기와
장소를 아주 잘 만나서 지금까지 장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발굴 안내문이란 명성까지 지니고 있어 조만간 국가
등록문화유산의 지위를 얻지 않을까 싶다.


▲  첫 발굴지 옆에 세워진 움집과 구석기인을 위한 기념비

가시 같은 것이 무수히 솟은 견고한 돌기둥(왼쪽 기둥)이 '구석기인을 위한 기념비'이다. 고
승현이 2017년 4월에 세운 것으로 구석기의 의미를 붙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대미술의 문외
한인 나로서는 어딜 봐서 구석기 기념비인지 그저 생뚱맞다. 오히려 주변에 자리한 누런 피부
의 평범한 움집들이 구석기 기념 요소가 더 커 보인다.


▲  석장리유적 강변 산책로와 유유히 흐르는 금강(왼쪽)

지금은 평화로운 모습이나 여름과 가을 폭우의 희롱을 받으면 180도 안면을 바꾸어 주변을 물
바다로 쓸어버리는 위엄을 부린다. 구석기시대부터 3만 년 이상 머물렀던 사람들은 홍수의 계
속되는 핍박을 견디지 못해 청동기시대 이후 떠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이 떠난 자리를 금강이
꽁꽁 숨겨두었다.
이후 금강에 잠기고 풀리기를 반복하다가 1964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고, 모
래로 둑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이곳에 숨겨진 수만 년 분량의 선사시대 이야기를 캐낸 것이다.
이후 금강과 석장리유적 주변이 정비되면서 홍수의 위험에서 많이 벗어났고, 아무리 비가 많
이 와도 물에 거의 잠기지 않는다.


▲  세계의 막집(움집)전시장

석장리유적 동쪽 끝에는 구석기시대 움집을 모아놓은 '세계의 막집전시장'이 있다. 석장리유
적이 천하 구석기유적의 1번지라 그에 걸맞게 다른 나라에서 발견된 움집들도 닦아놓은 것인
데, 공주 석장리와 제천 창내, 프랑스의 뺑스방과 떼라아마따, 독일의 괴네르스도르프, 우크
라이나의 메지리치 유적에서 발견된 막집이 재현되어 있다.


▲  우크라이나 메지리치(Meziritchi)

그 흔한 움집이 아닌 동물 뼈로 만든 단단하면서도 조금은 오싹해 보이는 집이다. 평야에 자
리한 메지리치는 약 2만년 전 유적으로 메머드의 상아와 아래턱, 위턱뼈로 집을 지었는데 이
런 집을 하나 마련하는데 최소 98마리의 메머드 뼈가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  독일 괴네르스도르프(Gonnersdort)
강변에서 발견된 것으로 13,000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지름 7m 크기로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주변을 가죽으로 둘렀다.

▲  프랑스 떼라 아마타(Terra Amate)
니스 바닷가에서 발견된 것으로 무려 30만년 정도 묵었다는 세계에서 가장 늙은
막집 유적이다. 나뭇가지로 집 형태를 다지고 큰 돌을 버팀돌로 삼아
바람을 막았다.

▲  프랑스 뺑스방(Pincevent)
프랑스 중부 세느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18,000년 정도 묵었다. 복합 주거형식의
막집으로 2~3채의 막집을 연결했으며, 프랑스 후기 구석기 문화주거지의
대표적인 예로 텐트 사이에 화덕이 있다.

▲  제천 창내 막집(왼쪽)과 공주 석장리 막집(오른쪽)

석장리 막집은 풀과 나무로 만든 것으로 약 30,000년 정도 묵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 주거유적으로 의미가 깊다. 그 옆에 있는 제천 창내 막집은 20,000년 정도 묵
은 원뿔형 막집으로 1983년 충주댐 수몰지구에 문화유적을 조사하다가 발견되었는데, 집터와
기둥 자리가 온전하게 나왔다. 허나 지금 창내 유적은 남한강 물속에 들어있어 접근할 수도
없다.


▲  뒤쪽에서 바라본 세계의 막집 전시장과 금강

세계의 막집 전시장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석장리유적 더듬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은 석
장리유적 정문에서 거의 250m 이상 거리로 왔던 길로 나가야 되나 싶어 주변을 살피니 동쪽으
로 나가는 문이 있다. 관람객들에게 개방된 공식 문은 아니나 입장료를 치루고 이곳에 들어왔
고 볼일도 다 봤으니 그곳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일몰까지 시간도 넉넉하고 공주로 다시 나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금강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
자전거길도 겸함)를 따라 세종시 방향인 동쪽으로 걸었다. 날도 오지게 흐린 평일이라 산책로
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강변의 나무와 온갖 식물들은 누렇게 뜬 모습으로 몸을
바짝 엎드리며 애타게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속세의 온갖 시름을 금강에 던지며 겨울에 푹 묻힌 강변길을 1.9km 정도를 걷다가 한국영상대
입구인 금암리(세종시 장군면 금암리)에 이르렀고, 금암리경로당 정류장에서 세종마을버스 61
번을 타고 세종시외터미널로 나왔다. (세종마을버스 61번은 1일 20여 회 운행)

이렇게 하여 연말에 벌인 공주 석장리유적 구석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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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6년 6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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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석장리 유적 충남 공주시 석장리동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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