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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겨울 나들이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남해바다

▲  새섬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혼인지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  혼인지

 



 

묵은 해가 극한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대륙
,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간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 동안 미답처(未踏處)를 중심으로 정말 알뜰하게 돌아다
녔는데, 둘째 날 늦은 오후(17시)에 서귀포시내에 있는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주차장에
이르렀다.
천지연폭포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인연을 지었던 곳이라 애써 고개를 돌리며 새섬이 있
는 남쪽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은 새섬까지 소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나
약천사(藥泉寺, ☞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부터 하늘에 주름진 구름들이 꽉 들어차더만 새
섬방파제에 이르자 지독하게 검은 피부를 보이며 빗방울을 투하한다. 상황이 그러자 새섬
이고 나발이고 싹 내일로 내던지고 바로 시내로 나와 적당한 모텔을 잡아 일찍 휴식에 들
어갔다. (20시에 저녁을 먹으러 잠시 서귀포 시내로 나갔음)

거의 16시간 동안(10시간 정도 잤음) 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10시, 새섬을 잡으러 출동
했다. 모텔 1층 로비에는 감귤의 대표 산지인 서귀포(西歸浦)에 걸맞게 감귤이 든 바구니
가 있었는데, 투숙객들은 마음껏 집어먹으면 된다. 하여 나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딱 3
개만 집어서 밖으로 나왔다.
전날 저녁과 달리 광합성에 최적화된 아주 쾌청한 날씨로 관광객들로 벌써부터 정신이 없
는 천지연폭포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새연교와 새섬방파제, 서귀포유람선 선
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그들에 대한 시선을 접고 벼랑이 펼쳐진 서쪽 해안을 주목해
보자. 그곳에는 매머드(Mammoth)가 담배를 피던 시절, 옛 생물들의 흔적들이 가득 깃들여
져 있다.


▲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천지연폭포 입구
(사진 중앙에 있는 다리가 칠십리교)



 

♠  천지연폭포 남쪽 바닷가에 깃든 옛 생물들의 희미한 흔적들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西歸浦層 貝類化石産地)
- 천연기념물 195호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변

새섬방파제 서쪽에는 주름진 벼랑과 큼직한 바위들로 가득한 해변이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해안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이곳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서귀포층(西歸浦層)이 형성
된 벼랑으로 30여m 높이로 약 1km 정도 펼쳐져 있다. 절벽을 따라 약 40~60m 정도 두께를 보
이고 있으며, 그의 피부와 속살에는 조개 등 많은 화석들이 들어있다.

1928년 왜인(倭人) 학자인 하라구치(原口九萬)가 발견하여 지역 이름을 따 서귀포층이라 하였
는데, 처음에는 이곳 등 일부에만 그런 지층이 확인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지하수를 캐내고
자 제주도 곳곳을 들쑤시면서 잠자고 있던 서귀포층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제주도 형성 초기
에 무수히 일어났던 화산활동으로 나온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바다에 쌓인 퇴적암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도의 옛날 기후와 해수면 변동을 소상히 알려준다.

서귀포층은 물을 통과시키지 않는 특징이 있어 물이 거의 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층
주변은 물이 풍부하여 해안가 지층 틈새로 물이 쏟아져 나오니 이를 용천수(湧泉水)라고 부른
다. 제주도는 누수에 최적화된 현무암 피부의 땅이라 물이 넉넉치가 못한 편인데, 서귀포층은
그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대자연 형님의 소중한 선물이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
기 이전부터 용천수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안가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


▲  화석들이 고이 잠들어있는 서귀포층 바위들

이곳 벼랑과 바위에는 옛 생물의 화석이 무수히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매머드가 뛰어놀던 약
200~3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조개류가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달팽이, 전복, 우렁이 등
의 복족류와 굴족류, 완족류, 성게와 해삼, 불가사리 등의 극피동물, 산호화석, 고래와 물고
기 뼈, 상어 이빨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대 김봉균 교수에 의해 저서성유공충(底棲性有孔蟲, 호수나 바다의 바닥을 기어다니
는 유공충) 41속 73종과 부유성유공충<浮游性有孔蟲, 플랑크톤 생활을 하는 원생동물(原生動
物)> 8속 18종 등의 미화석(微化石,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미생물 화석)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나온 화석 대부분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이나 현재 서귀포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 것들도 여럿 있다. 특히 조개 화석 같은 경우 이곳보다 훨씬 남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서귀포층 초창기의 바다가 지금보다 따스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옛 생물의 화석이 풍부히 담긴 탓에 1968년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해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행정당국의 오랜 직무유기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
면서 마구잡이 화석 채취와 훼손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근래에 벼랑 쪽으로 출입금지
안내문이 세워졌으나 그뿐이며,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보호용 난간이나 철책을 두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새섬방파제 바로 서쪽에 눈에 띄게 있음에도 천지연폭포나 새섬, 유람선에 눈이 어두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니 새섬이나 천지연폭포를 보러왔다면 이곳도 꼭
둘러보기 바라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들을 눈으로만 살피기 바란다. (저들을 떼거나 만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람)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707 (남성중로 43)


▲  큰 돌에 담긴 화석들
돌에 박힌 하얀 존재들이 모두 화석이다. 물고기 뼈와 조개 화석으로 저들은
죽어서 대자연의 조화를 받아 조촐하게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  옛 수중동물의 넋이 서린 서귀포층 바위
마치 회색빛 어항 속에서 올챙이나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거니는 것 같다.

▲  다양한 화석과 고된 세월의 주름선이 뒤섞인 서귀포층 바위들 ▼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안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저 멀리 그림의 떡처럼 자리한 범섬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다. 절벽으로 이루어
진 무인도로 고려 끝 무렵인 1374년 최영(崔瑩) 장군이 제주도에 잔류하며 저항을 하던 몽골(
원나라)의 목호(牧胡) 패거리를 최종 처리한 현장이기도 하다.


▲  제주도와 새섬을 잇는 새연교 (새섬방파제 쪽)

새섬을 가려면 무조건 새연교를 통해야 된다. 그는 2009년에 닦여진 다리로 새섬과 제주도를
끈끈하게 붙잡고 있는데, 다리 이름인 '새연'은 새섬을 잇는 연륙교의 줄임말로 알고 있었으
나 알고 보니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란 의미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뚜벅이 전용 다리로 서귀포항의 랜드마크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이 다리
가 닦임으로써 바다의 눈치 없이 마음껏 새섬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  새섬방파제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왼쪽), 서귀포층 벼랑

▲  새연교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서귀동) 시내



 

♠  서귀포항 앞바다에 상큼하게 떠있는 작은 섬, 새섬

▲  새섬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바짝 떠있는 작은 섬으로 천지연폭포에서 흘러내려온 연외천과 남
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이름이 새섬이다 보니 새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실상은 초가 지붕을 잇는 새(띠)가
많이 나와서 새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한자로는 초도(草島), 모도(毛島)라 불리며 섬
의 면적은 104,581㎡,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7m이다.

제주도의 심장인 한라산(漢拏山)이 폭발하면서 거기서 나온 암석이 떨어져 섬이 되었다는 전
설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사람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간조 때 새섬목을 건너거나 배를 이용해야 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
았으나 모두 철수하여 금지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새연교가 닦이면서 도시자연공원으로 천하에 개방되었으며, 천지연폭포와 서
귀포항을 수식하는 명소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은 되었으나 새벽 일출시
부터 22시까지만 개방한다. 그러니 21시까지는 입장해야 무난하게 서귀포항 야경(夜景)도 즐
기며 섬 1바퀴를 돌 수 있다. 또한 섬이다 보니 태풍이 오거나 해상 날씨가 영 좋지 않은 경
우에는 출입이 통제될 수 있다.


▲  새섬 산책로에서 바라본 새연교의 위엄 (바로 밑이 새섬방파제)

새연교를 건너면 섬을 1바퀴 도는 1.1km의 산책로가 나오는데, 어느 쪽으로 가던 다시 새연교
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천천히 둘러보면 최소 20~30분 정도 걸리며, 섬 북쪽은 연외천과 바다
가 만나는 서귀포항, 동쪽은 서귀포항 중심부, 서쪽과 남쪽은 푸른 바다라 주변 풍경도 아름
답다.

섬 전체는 난대림(暖帶林) 보호구역으로 나무가 울창하며, 새섬목, 담머리코지, 새섬뒤, 노픈
여, 안고상여, 섯자릿여, 자릿여, 모도리코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있다.

* 새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산3-2


▲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황우지, 서귀포 서부 해안

▲  해안을 따라 닦여진 새섬 산책로
이곳 산책로는 흙길과 자갈길, 나무데크길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평지라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주변 풍경이 고와서 체감 거리가 꽤 짧게 느껴진다.

▲  난대림과 소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새섬 산책로

▲  새섬에서 바라본 문섬

손에 잡힐 듯 진하게 아른거리는 문섬은 서귀포항에서 1.3km 떨어진 작은 무인도이다. 문섬이
란 이름은 옛날부터 유별나게 모기가 많아서 모기를 뜻하는 한자를 취해 그리된 것으로 녹도(
鹿島)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  새섬에서 바라본 서귀포항 방파제와 섶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존재가 파초일엽(芭蕉一葉) 자생지로 유명한 섶섬이다.

▲  새섬 동쪽에 자리한 서귀포항 중심부
서귀포항은 새섬과 새섬방파제, 문섬, 서귀포항 방파제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항구의 입지로 아주 좋다.

▲  새섬 주변 바다의 요염한 속살

▲  새섬 북쪽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시내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

▲  새섬 북쪽 산책로

▲  새섬 서쪽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  제주도 시조의 혼인설화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영원한 성역
혼인지(婚姻池) - 제주도 지방기념물 17호


▲  혼인지(혼인터) 표석

새섬에 퐁당퐁당 빠져 거의 1시간을 머물다가 아쉽지만 그곳을 등지며 천지연폭포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시내버스 여러 대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고들 있었는데, 서귀포시내버
스 641번(천지연폭포↔서귀포시청2청사)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부릉부릉 심장 소리를 낸다.
하여 그것을 타고 시내인 동문로터리로 나왔다. 시내까지 거리는 가까우나 천지연폭포는 바다
와 맞닿은 낮은 곳에 있고 시내는 그보다 훨씬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지형적인 영향으로 버스
와 차량은 서귀포항과 서귀포초교로 다소 돌아간다.

동문로터리에서 다음 답사지인 혼인지를 가고자 제주도 간선 201번(제주버스터미널↔서귀포버
스터미널)을 잡아탔다. 혼인지까지는 40km 거리로 1시간 정도를 신나게 달려 혼인지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한적하기 그지 없는 혼인지입구에서 혼인지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혼인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제주올레길2코스(광치기해변↔온평포구, 15.2km)가 이 도로의 신세를 지며 혼인지로 가
는데, 표석에는 하얀 글씨로 '혼인지' 3자가 한문으로 쓰여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못을
뜻하는 '池'가 아닌 터를 뜻하는 '址'가 쓰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잠시 혼돈에 빠졌으나 분명 그 혼인지가 맞다. 제주도 시조들이 혼인을 했던 터라 표석
에 그렇게 쓴 것이며, 혼인지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혼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혼인지는 500평 정도의 자연산 못으로 갈대와 수초들이 못 외곽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평
지에 누운 평범한 모습의 못이나 이곳은 제주도의 시조라는 고을나(高乙那)와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 등 이른바 삼신인(三神人)이 장가를 가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여 그들의
탄생설화가 깃든 삼성혈(三姓穴)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제주도에서 넘쳐나는 현무암으로 낮게 담장을 둘러서 속세와 경계를 그었으며,
그 주변을 공원으로 산뜻하게 손질하여 산책로와 숲을 닦았다. 오래된 존재로는 혼인지와 삼
신인이 신방을 꾸렸다는 신방굴이 있으며, 근래에 지은 3공주 추원각과 추원비, 전통혼례관,
탐라생활사료관, 생태연못 등이 혼인지를 수식한다. 그리고 제주올레길2코스가 혼인지 설화를
흠모하며 그의 옆구리를 슬쩍 지나친다.


▲  혼인지 서쪽에 닦여진 탐방로(제주올레길2코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혼인지, 그곳에 서려있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는 대략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00여 년 전, 고을나와 부을나, 양을나가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이라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그들이 있기 전에는 제주도에 그 흔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동물 사냥과 어로로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다가 동쪽 바다에서 자주빛 진흙에 봉해진 오색찬란한 큰 목함(木函)이 떠내려온
것을 발견했다. 목함이 상륙한 곳은 혼인지와 가까운 온평리 연혼포(延婚浦, 갯고랑)라고 한
다.
호기심이 불끈 솟은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목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들어있었
고, 자주빛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使者)가 나타났다. 그리고 석함을 열었더니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정도의 아리따운 공주 3명과 송아지, 망아지, 오곡(五穀)의 씨앗이 있었다.


▲  늪지대 기운을 지닌 혼인지 (서쪽에서 본 모습)

이들을 데리고 온 사자는 3신인에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왔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공주 3명을 두었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서해 높은 산(한라산)에 3명의 신인이 나와 장차 나라를 세
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는 것을 듣고 저에게 명해 세 공주를 모셔왔으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요~~!'
말을 끝내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기쁨에 잠긴 3신인은 나이에 따라 공주 자매를 배필로 정해 바로 이곳 혼인지에서 혼인과 예
민한(?) 신방을 치루고 삼사석(三射石, 제주시 화북동)에서 활을 쏘아 거처할 곳을 정했다.
또한 공주가 가져온 소(송아지)와 말(망아지)을 기르고 오곡 씨앗을 뿌리니 이때부터 제주도
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이 혼인지에 서린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누렇게 뜬 갈대와 수초들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자연산 연못의
풍경을 거들어준다.


삼신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성혈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이때가 4,300년 전이라고 하는
데, 우리 역사가 단군조선에서부터 4,300년 이상 묵었음을 강조하고 있어 그것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3신인이 4,300년 이상 되었다는 자료와 유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경에 한라산 대폭발로 제주도 사람과 동물들이 대부분 강제 죽음을 당했는데, 겨
우 일부가 살아남아 화산재와 용암으로 지옥이 된 제주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 3신인
이라 표현된 인물 3명이 사람들을 잘 이끌어 제주도 세력의 군주가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공주를 보냈다는 벽랑국에 대해서도 왜열도설과 동해(東海)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
으며, 왜열도는 공주와 오곡, 소, 말을 보낼만한 수준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여 동해안(경상
도나 영동지방, 함경도 등)에 있던 작은 나라나 세력으로 여겨진다. 그곳에서 바다 너머 멀리
떨어진 제주도 세력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라면 서로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탐라(耽羅)라 불리던 제주도 세력은 바닷길을 적극 이용해 4,000리의 영토를 지녔던 삼한(마
한, 진한, 변한)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멀리 중원대륙과 동남아 제국(諸國)들과도 교역
을 했었다.


▲  삼공주추원비(三公主追遠碑)
어딘지 모를 벽랑국에서 건너와 삼신인의 배필이 되어 제주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3공주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웠다.


벽랑국이 망하여 그 세력이 제주도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은 가축과 오곡 씨앗, 여
러 좋은 문물을 싣고 떠돌다가 제주도에 상륙했을 것이고, 제주도 세력은 그들을 받아들여 통
합 차원에서 혼인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농업과 목축 기술까지 챙기면서 제주도에 제대
로 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남긴 탁라가(乇羅歌)의 2번째 시
김종직이 제주도를 다녀가면서 탁라가 14수를 남겼는데, 그 2번째 시가
바로 혼인지 설화를 머금고 있다.

먼 옛날 신인이 세 곳에 도읍하셔
해돋는 물가에서 배필을 맞으셨다네
그 시절 삼성(삼신인)이 혼인했던 일은
전해내려오는 주진의 전설과 같네

▲  혼인지의 분위기를 한껏 경건하게 다듬어주는
소나무숲길 (신방굴 주변)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신방굴

혼인지에 왔다면 소나무숲에 있는 신방굴이란 자연산 굴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혼인지 연못
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산 존재로 3신인이 벽랑국 공주를 하나씩 품고 예민한(?)
첫날 밤을 보냈다는 곳이다.

굴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나 내부가 협소하고 어둡다. 그런 곳을 1쌍도 아니고 3쌍이 좁은
곳에서 예민한 일을 치룬다는 것이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동물도 아니고 일명 성
진국(性進國)으로 전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천박한 왜열도 원숭이들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 못 주변에 대충 집을 짓거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예민한 첫 밤을 보냈을 것이다. 혼인
지가 3신인과 3공주가 혼인을 했던 현장이라 연못 부근에 있는 이 굴까지 설화의 현장으로 넣
었던 것이다.


▲  속세를 향해 입을 벌린 신방굴
신방굴은 땅 바로 밑에 있는 굴이다. 저런 누추한 곳에서 정말 첫날 밤을
보냈을까? 그것도 제주도 세력가와 벽랑국 세력가의 딸이 말이다.

▲  신방굴 내부로 들어서다
굴 높이가 낮으므로 굴에 절대 피해가 없도록 몸을 푹 쑥이고 들어가야 된다.

▲  어두컴컴한 신방굴 내부

▲  신방굴에서 나오는 3신인과 3공주를
재현한 사진


▲  흑백사진에 담긴 1960년대 초 온평리(혼인지마을) 혼례 모습

▲  돌담 너머로 바라본 삼공주 추원사(追遠祠)
2009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벽랑국 3공주의 위패를 머금고 있다. 돌담 안쪽
오른쪽 건물이 추원사로 매년 6월 10일 후손들이 추원제를 지낸다.

▲  삼공주 추원사

▲  혼인지 남쪽에 세워진 정자

혼인지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 때문에 지역 사람들의 혼인 장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전
통혼례관을 두어 혼인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속세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명소이나
제주도에 신혼여행이나 부부여행으로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
다.

* 혼인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혼인지로 39-14, ☎ 064-710-6798)


▲  소나무와 동백꽃이 무성한 혼인지 산책로
동백이 도도한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었다 놓는다.

▲  혼인지를 마무리 짓다 (전통혼례관 주변 산책로)
혼인지 이후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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