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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동(필동로) 남쪽 구석에서 남산 북측순환로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남산 복측순환로로 접근하기 좋게 낮은 경사를 보이며 지그재그로 펼쳐져 있다.

2. 늦가을에 잠긴 남산 북측순환로(남산공원길)

남산 북측순환로는 남산북측순환로입구 정류장(01번 정차)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소파로까
지 이어지는 2차선 길이다. 남산 남측순환로와 함께 남산 자락을 도는 산악도로로 1980년대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했으나 차량 접근을 금하고 남산셔틀버스 등 일부 차량만 바퀴를 들이게 했다.
허나 그마저도 금하면서 1990년대부터는 뚜벅이들의 완전한 도보길로 살아가고 있다.

 

남산 숲에 푹 묻힌 북측순환로는 봄꽃(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여름 녹음, 늦가을 단풍, 겨울 설
경 등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달달한 숲길로 나들이, 산책 수요가 상당하며, 중간에 장충단공원,
필동, 남산골한옥마을, 이회영기념관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은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서쪽으로 2분 거리에 계단길이 하나 있다.

3. 통감관저터 표석

서울유스호스텔 북쪽이자 서울소방재난본부 동쪽에는 '일본군위안부기억의터'란 공간이 닦여져
있다. (남산골공원 서쪽임) 이곳에는 왜국 통감의 관저터가 있었는데,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인 데라우치와 총리대신 이완용 잡것들이 강제합병 조약을 조인했던 개 같은 현장이다.

(통감관저터 표석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 29일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세웠음)

4. 거꾸로 세운 동상 (일본군위안부기억의터)

이 돌덩어리는 원래 하야시 곤스케(1860~1939, 1900년에 주한 일본공사로 들어왔음)의 동상이
었다. 1905년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작자로 왜왕은 그 공으로 남작 작위
를 내리고 이곳에 동상까지 세워주면서 그의 공을 기렸다. (동상 이름은 '남작 하야시곤스케군상')

해방 이후. 동상은 단죄를 받아 보기 좋게 박살이 났으며,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부서진 동
상의 잔해를 모아 동상 아랫도리 부분을 일부 복원했는데, 그것을 거꾸로 세워두어 그날의 욕스러
움을 되새기고 한때 이곳에 당당하게 서 있었을 하야시곤스케를 제대로 엿먹이고 있다.

5. 일본군위안부기억의터 한복판에 자리한 세상의배꼽

낮은 흙담을 동그랗게 두르고 그 안에 많은 돌덩어리를 두어 세상의 배꼽으로 삼았는데, 마치 옛
날 건물 유적이나 제사 유적 같은 모습이다.

6. 세상의 배꼽 표석

7. 세상의 배꼽 내부

배꼽 한복판에 자리한 검은 피부의 동그란 돌덩어리에는 이런 중요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기
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일본이라 불리는 왜열도는 삼국시대부터 우리 영역의 일원이었다. 가야가 일찌감치 진출해 규슈
와 혼슈 등 많은 지역을 점거하여 그들의 분국(속국)을 세웠으며, 초대 왜왕도 대가야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다. (고령 대가야박물관과 거기서 일하는 작자들, 그리고 고령 지역 문화유산해설사들은
왜가 가야의 엄연한 속국이자 일부였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 기록이 없다나 뭐라나.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임나일본부설은 가짜라며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

나중에 백제가 왜열도를 장악해 오랫동안 꿀을 빨았으며, 663년 백제가 신라에 의해 최종 처리되
면서 왜는 비로소 우리에게서 독립을 하게 된다.

왜열도는 우리의 옛 해양영토의 하나로 그들이 19~20세기에 운이 좋게도 우리를 장악해 갖은 패
악질을 부렸으니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이제 그들의 조상 땅이자 오랜 본국이었던 우리의 그늘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하다.

8. 통감관저터 표석의 뒷통수

9. 예장동 은행나무 (서울시 보호수)

추정 나이는 약 480년(199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 23m, 나무둘레
6.37m에 이르는 크고 늙은 나무이다.

늦가을을 맞이하여 1년 가까이 숙성시킨 황금색 은행잎을 땅바닥에 우수수 털어내며 늦가을 감성
을 크게 돋구고 있는데, 북쪽 길 건너에도 430년 묵은 비슷한 크기의 보호수 은행나무가 있다.

10. 예장동 은행나무가 우수수 털어놓은 황금색 은행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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