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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시절에 쓰인 빛바랜 소총들

2. 6.25전쟁 칠곡의 55일 전쟁사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서 일제히 총반격을 개시했다. 9월 23
일 북한 괴수인 김일성이 북한군에게 총퇴각 명령을 내리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인천에 상륙하
여 서울 탈환 작전을 벌이고 있는 아군과 신속히 연결하고자 9월 24일 낙동강을 건너 맹렬히 북진
했다.

3. 금무봉 전투와 미군의 희생 (1950,8,9~8,10일)

8월9일 낙동강을 건넌 북한군 제3사단은 칠곡의 금무봉을 점령했다. 그것들이 미국 제1기병사단
의 퇴로를 차단하고 남진할 경우 임시수도였던 대구가 함락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
이었다. 하여 금무봉을 탈환하고자 미국 제7기병연대가 공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8월10일 공군의 폭격과 야포로 금무봉을 점령한 북한군을 크게 혼란에 빠트린 다음, 경전차소대와
보병부대로 밀어부쳐 금무봉을 하루만에 탈환했다. 허나 북한군의 매복기습과 포격으로 부사단장
과 참모장 등 다수의 장교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한편 그 시절 미 제7기병연대는 국군 지원병을 편입해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는 카투사(KATUSA)
의 시초가 되었다.

4. 6.25시절에 쓰였던 칼빈 소총과 수류탄, 철모

5. 328고지 전투 (1950,8,13~8,24일)

바위산인 328고지는 방어에는 불리하지만 낙동강을 가장 가까이서 굽어볼 수 있는 요충지이다.
만약 북한군이 이곳을 점령하면 왜관이 위험해질 수 있어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8월13일 자정 무렵, 북한군이 대규모 병력으로 328고지를 지키던 국군의 진지 코앞까지 쳐들어
왔다. 서로 뒤엉켜 총검으로 찌르고 격투를 벌이며 무려 11일 동안 싸웠는데, 국군->북한군->국군
순으로 고지의 주인이 무려 15번이나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국군이 고지 탈환에 성공했으나 여기서 죽은 피아간의 병력이 엄청나 그야말로 시산
혈해 그 자체였다.

6. 6.25때 쓰인 소총과 대검

7. 칠곡 다부동 전투 전투경과약도 (1950,8,18~8,30일)

칠곡 다부동 일대에 배치된 국군과 미군, 북한군의 병력과 전투경과에 대한 약도이다.

8. 다부동전투 고지를 탈환하라

1950년 8월, 칠곡 다부동은 전쟁 한가운데에 있었다. 만약 이곳 방어선이 붕괴되면 대구가 위험해
지고 울산과 마산(창원), 부산도 그 안전을 장담하기가 어렵게 된다.

북한군의 파상적인 공세에 국군의 방어선은 왜관~다부동~영천 신녕~포항 기계~포항을 잇는 선으
로 조정되면서 다부동 전투의 서막이 열렸다.

다부동은 서쪽으로 328고지와 수암산, 유학산 능선, 그리고 동쪽으로 가산과 팔공산의 험준한 지
형이 펼쳐져 있는데, 대구로 넘어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최후의 보루였기에 필사적으로 저항을 펼
쳤다. 그러다보니 다부동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가장 처절했으며, 6.25전쟁에서 제일 최대
의 격전이었다.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아군 약 11,000명(국군 7,600명, 나머지는 미군), 북한군은 약 30,000명에
이르렀으며, 병력 피해는 아군은 전사 3,500명, 부상 중상자 6,500명이고, 북한군은 전사 5,600명,
부상 중상자가 12,000명에 달했다.

9. 디오라마로 재현된 다부동 전투

10. 전차전의 흔적과 의의

칠곡 가산면 다부리와 금화리, 천평리 지역에서는 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
군, 미군과의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북한군 제13사단 전차연대가 대구 점령을 목표로 육중한 바퀴를 굴리고 있었는데, 천평리 신주막
의 좁은 골짜기에서 미군은 대전차지뢰와 대인지뢰를 설치해 북한군 전차의 접근을 차단하고 4천
여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북한군은 6.25 개전후 처음 벌어진 전차전에서 국군, 미군의 방어선을 돌
파하고자 계속해서 무모한 공격을 벌였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11. 볼링앨리 전투 (1950,8,18~8,23일)

다부동 북쪽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좁은 천평리 계곡에서 아군과 적군의 전차 20여 대가 서로 맞짱
을 벌이는 전차전이 벌어졌다.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은 국군 제11연대와 미 제27연대를 상대로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
행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은 M-26전차와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의 공격을 막았다. 아군과 적군
의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의 탄환은 5시간 동안이나 불꽃을 튀기며 밤하늘을 요란하게 수 놓았
는데, 당시 미군은 그 모습을 보고 '볼링공이 굴러가 핀을 쓰러트릴 때 모습과 같다'고 하여 그날 밤
의 전차전을 '볼링앨리(Bowling Alley)'전투라고 불렀다.

12. 6.25참전 국군의 제대증서와 제대증명서, 병무소집해제증, 경상북도 도민증, 간열소집수검증,
6.25사변 종군기장수여

13.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길이다

6.25 시절 경찰 15,000명은 국군과 유엔군에 배속되어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통제 관리, 후방 지
역 북한공비 소탕작전을 주로 맡았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기간에는 군,경 합동 작전을 실시해 전
방과 후방 안정화에 기여했고 전투 및 대공업무를 담당했다. (다부동 전투에서는 197명의 경찰이
전사했음)

14. 총 대신 지게를 지고 포화 속으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 인근 마을에서 노무자를 모집했는데, 보통 1개 대대에서 50~60명의 노무자
들이 일했다. 경사도 심
하고 정상까지 바위로 이루어져 오르기가 무척 빡센 유학산 837고지는 북
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주간에 보급품 운반이 매
우 어려웠는데,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노무자들이
적들의 총탄을 뚫고 보급품을 운반했다.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그들은 깊은 밤을 이용해 탄약과 보급품을 날랐는데,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다 보
니 적들에게 쉽게 발각되어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유엔군 지휘관들은

'유학산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들이 수행한 것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아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극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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